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2)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과 사명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가?(행21:1~16)_2023-01-03(화)

https://youtu.be/sDO6bFyCA0A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44 ]

1. 사명자는 언제 사명이 주어지는가?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의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이다(갈1:15).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낸 자들 중에는 특별히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다. 적어도 30대 정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라는 것이었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하도록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고 알려 주었다(행9:15). 그랬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으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설 때에, 주 예수께서 그에게 홀연히 나타나셔서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 땅에는 사명자가 있다. 사명자에게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 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그 길을 걷게 하시기 때문이다. 

 

2.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 이후에 어디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갔는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한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바울은 밀레도에서 고스로 다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륙하게 된다. '두로'라는 도시는 수리아의 아래쪽에 위치한 세계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그래서 배에 짐을 싣고 내려야 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시간 동안 약 일주일을 그곳에서 보낸다. 그리고 돌레마이를 지나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바울은 거기에서 예루살렘교회의 초기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복음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간 후 거기서 다시 얼마 동안 지내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3.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가?

  그런데 바울은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예언을 듣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두로에서는 어떤 제자들이 바울에게 영을 통하여 말하기를, 예루살렘 안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였다. 아마도 바울의 신변에 어떤 위험한 일어날 것임을 환상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 80Km 떨어진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은 예언이 아니라 어떤 선지자를 만난다. 그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선지자로서, 과거 30년 전에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에 와서 천하가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던 바로 그 선지자였다(행11:28). 그의 이름은 '아가보'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정말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 그때는 A.D.46년경이었다. 그런데 다시 30년이 지나 그 아가보 선지자가 가이샤라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들과 발들을 묶었다. 그러고는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는 말과 더불어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예언이었다(행21:11).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았던 것을 실제로 재현함으로,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바울의 결박과 체포 그리고 환난이 앞으로 확실히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4. 두로와 가이사랴의 예언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어떤 것이 잘못된 예언인가?

  바울은 두로에서도 믿음의 형제들을 만났다. 특히 환상을 보고 말할 줄 아는 은사를 받은 형제들을 거기에서 만났다. 그때 그들 형제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과연 옳은 예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옳은 예언이었는지를 우리는 바울이 가이샤라에 도착했을 때 아가보 선지자가 했던 예언을 통해 비교해 보자. 아가보는 바울에게 어떻게 예언했는가?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그대로 직역해 보겠다. "성령께서 이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인들이 이와 같이 이 띠가 있는 바 그 남자를 결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방인들의 손들 안으로 넘겨줄 것입니다(행21:11)" 그렇다. 아가보 선지자는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로의 형제들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 바울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미숙한 예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예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잘못된 예언을 한 것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예언을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미숙하다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가보 선지자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던 바른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5.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받은 후 자신의 사명과 그것을 어떻게 연결했는가?

  그때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포기하고 말았는가? 아니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그에게 한 예언은 성령께서 주신 예언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맞다. 그들이 받았던 것도 역시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예언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러한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줄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의 길을 그대로 걸어갔던 것이다. 예언이란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어느 부분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해 주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말했던 고별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걸어갈 길이 사명으로 미리 주어진 채 있는 것이다. 고로 그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환난이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그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이 사명을 가로막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예언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있으므로 그날을 마음으로 잘 준비할 수가 있을 것이다. 

 

2023년 01월 03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54) 주님의 사역자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르다(행13:1~3)_2022-10-11(수) https://youtu.be/46CLbGZom0c [혹은 https://tv.naver.com/v/30214254 ]

 

1. 안디옥 교회에는 어떤 직분자들이 있었는가?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는 어떤 직분을 가진 자들이 있었는가?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안디옥 교회에서는 여러 종류의 직분자들이 있었다. 우선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는 직분자들이 있었으며(행13:1), 복음전하는 자 곧 '선교사'가 있었고 그리고 또한 '사도'가 있었다. 먼저, 선지자들과 교사들로서는 '바나바'와 니게로라고 칭해지는 '시므온' 그리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 그리고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엘'과 '사울'이 있었다. 그리고 복음전하는 자 곧 선교사로서는 '바나바'가 있었고, 사도로서는 '사울'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훗날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4가지 직분을 주셨는데, 그것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인 '교사'가 있다고 했던 것이다(엡4:11).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세운 직분자로서 '사도', '선지자', 교사'가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고전12:28).

 

2. 안디옥 교회에서는 누가 선지자이며 누가 교사였는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안디옥 교회에 있는 5명의 지도자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그 교회의 '선지자들'이며 '교사들'이라고 말했다. 이들 5명은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이다. 그렇다면 이들 중에 누가 선지자들이며, 교사들인가? 그런데 누가는 특별히 직분을 구별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이 교회에서 2종류의 직분자들이 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조금 구별이 될 만한 단서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테(te)'라는 접속사다. 이 접속사는 '그리고', '또한'이라는 뜻인데, 보통 둘 다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 목록 가운데 '테'라는 접속사가 2번 나온다. 먼저는 바나바와 시므온 이름 사이에 들어 있고, 마나엘과 사울 사이에도 역시 들어 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13:1의 말씀을 원문에서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안디옥 안에 교회가 있는 것을 따라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어왔다. 바나바와 니게르라고 불리고 있는 시므온 둘 다가,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1/4통치자 헤롯과 함께 양육받은 마나엔과 사울 둘 다가 [있어왔다]". 그러므로 선지자들로서 바나바와 시므온이 있었고, 교사로서는 마나엘과 사울이 있었다고 구분할 수가 있다. 중간에 들어있는 루기오는 아마도 선지자 쪽에 속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누가는 이 직분을 딱 잘라 구별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바나바는 선지자에 해당하는 것 같고, 바울은 교사에 해당하는 것 같다. 

 

3. 주를 섬겨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는 어떤 식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하라고 했을까?

  그런데 어느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그들을 이미 부른 채 있는 바, 그 일 안으로(그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나에게 [단번에] 구별하라.” 그렇다면 이때 성령께서는 어떤 식으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교회 안에 선지자들이 있었으므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 중에 한 명이 성령의 음성을 전달한 것 같다. 왜냐하면 교회의 직분자로서 선지자의 직책을 가졌다고 한다면 최소한 그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므온이나 루기오 중에 어떤 한 명의 선지자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예언을 하지 않았나 싶다. 

 

4. 교회에 주어진 다양한 은사와 직분은 무슨 의미일까?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직분은 교회의 필요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안배하시는 일이다. 모든 직분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미 천국에서 이 땅에 영혼을 보내실 때에 결정하여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창조된 것도 아닐 뿐더러, 이미 어떤 사명을 가진 채 이 땅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사실 천국의 낙원에서 창조되어 성장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내어진 자들 중에는 좀 더 영의 나이가 성숙한 상태에서 사명을 받고 이 땅에 보내어진 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갖게 되는 교회의 직분은 자신의 사명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것을 잘 감당했을 때에는 하늘에서 받을 상급이 그만큼 크다고 하겠다. 안디옥 교회에도 다양한 교회의 직분이 있었다.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선교사), 교사가 이 직분들이다. 이러한 직분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평신도는 어떤 일을 맡은 자들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금식하고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하고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행13:2~3). 그렇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보니, 어떤 것을 맡았든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맡은 자가 진정 구해야 할 것은 역시 '충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바나바와 바울은 어떤 직분의 사람들이었는가?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평신도 중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관계를 잘 맺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일곱 집사들이 떠난 후 사도들은 안디옥에 교회가 개척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곧장 바나바를 그곳에 파송하였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 부임한 바나바는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줄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길리기아의 다소 성에 머무르고 있던 사울을 교회로 데려왔다. 그리고 함께 목회했다. 그래서 큰 무리를 양육할 수가 있었다(행11:26). 그중에서 가르치는 일은 교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사울 담당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지시를 내리시었다(행13:2).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 안수를 받고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나바가 일종의 담임목사였고 사울이 협동목사 격이었는데, 선교지에 갔을 때에는 그것이 역전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복음전파와 가르침과 치유의 은사는 사울이 더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울은 처음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지만 바나바는 '선지자'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여행에서 주된 역할을 한 사람은 역시 사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 2차전도여행을 떠나려 할 즈음에는 사울이 주된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둘은 각각 사명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땅의 주의 몸된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사용하신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순종할 뿐이다. 하지만 충성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충성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2022년 10월 11일(수)

정병진목사

다윗은 30살에 왕위에 올라 70살에 그의 인생을 마감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매우 귀하게 보셨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자신의 호칭에 붙여 사용하셨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계22:16). 대체 예수께서는 다윗이 어떤 부분이 맘에 들었길래 그를 이토록 사랑하신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다윗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의 말씀을 통하여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볼까 한다. 그가 삶은 한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2022-02-2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하강해플러스(40)[최종회] 다윗의 유언을 통해 살펴보는 그의 위대한 일생(대상28:9~1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wol0ovZ0MQ [혹은 https://tv.naver.com/v/25310318 ]

 

1. 들어가며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어 70세까지 살았으며, 그는 나이 많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대상29:28). 그런데 다윗은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과 그리고 자신의 아들 솔로몬 그리고 온 회중을 향하여 고별 연설을 한다(대상28:1~29:25). 그때 다윗은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짧지만 아주 굵게 마지막으로 네 마디의 유언을 한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때 솔로몬에게 어떤 유언을 남긴 것일까? 그가 남긴 유언에는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가? 그리고 그가 남긴 유언의 말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고 무엇을 배울 수가 있는가? 그래서 오늘은 사무엘하 강해 마지막 시간으로서, 다윗의 유언을 통해서 그의 일생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았던 수많은 기록들과 그가 우리들을 위해 남기고 간 흔적은 우리의 가슴 속에 길이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2.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다윗은 사울왕(B.C.1090~1010)이 통치한 지 10년 뒤인 B.C.1040년에 이새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난다(삼상16:10~11). 그런데 그가 족보에 기록되기는 이새의 일곱 번째 아들로 기록된다. 아마도 형들 중에 누가 일찍 죽은 듯하다(대상2:13~15). 사울왕과 비교해 보았을 때 다윗(B.C.1040~970)은 약 50년의 나이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사울왕의 맏아들이었던 요나단과도 다윗은 상당한 나이 차이가 있어 보인다. 사울왕이 요나단을 30살 이후에 낳았다손 치더라도 요나단과 다윗은 적어도 15~20년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양떼를 치는 목동으로 자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삼상16:12). 이때 그의 나이는 15살 정도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의 심부름을 위해 전쟁터로 나갔다가 블레셋의 싸움을 돋우는 자 골리앗과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군사들 중에는 골리앗의 조롱을 듣고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다윗이 직접 나가서 그와 싸우게 되는데, 자신의 손에 칼과 창이 없었음에도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그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잘라 죽이므로 일약 대스타가 된다. 이에 사울은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는다. 곧이어 다윗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쟁하러 갈 때마다 승리하여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다윗을 환영하는 여인들의 소리는 사울왕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성령이 떠난 상태에 있었기에 악령이 그를 붙잡아 버린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를 꾀한다. 그러자 그때부터 다윗의 도피 생활이 시작된다. 이때 다윗의 나이는 20세 정도였는데, 사울왕의 나이도 벌써 70세가 되었다. 다윗은 라마나욧을 필두로 하여 약 10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게 되는데, 10년 뒤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죽는다. 그러자 다윗은 자기를 따르던 600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된다. 그리고 다시 7년 6개월이 지나서는 전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된다. 그는 곧바로 왕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여부스 거민에게서 빼앗은 시온산성을 재건한다. 그리고 주변의 이방 민족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나간다. 맨 처음에는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기 시작하여, 아람의 소국들, 모압, 암몬, 에돔, 아말렉 등을 정복해 가는데 약 10년이 걸린다. 그리하여 다윗에게도 점차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는 간음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 장군을 제거한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악한 것이어서 비록 다윗이 회개를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 형벌을 내리신다. 그 결과 그의 집안에서 칼이 떠나지 않게 하셨으니, 첫 번째는 셋째 아들 압살롬이 첫째 아들 암몬을 죽인 일이었고, 두 번째는 그 일로 인해 외가로 도망쳤던 압살롬이 다시 돌아와 반역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반란은 곧 진압되고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하게 된다. 그때 다윗의 나이는 61세경이었다. 그리고 이어졌던 세바의 반란까지 평정한 다윗은 그의 나이 65세가 되었을 때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간다. 그리고 70세가 되자 다윗은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의 과업을 맡기고는 평안히 눈을 감는다.

 

3. 다윗은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어떤 유언을 남겼는가?

  다윗은 자신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데, 먼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유언한다. 그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정말 중요한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도 당부의 말을 전한다. 그렇다면 그때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겼던 유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의 유언은 역대상 28:9~10에 기록되어 있다. 우선 그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대상28:9-10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너는 그분을]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들]을 감찰하사 모든 [생각들의]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분]를 찾으면 [그분이 너를]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분]를 버리면 그[분]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10 그런즉 [보라!] 이제 너는 삼갈지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전(성소)의 건물(전)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너는] 힘써(강해져라) [그리고 너는] 행할지니라 하니라 
 

4. 다윗이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을 통하여 우리는 다윗의 일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가?

  다윗은 자신의 10번째 아들 솔로몬에게 딱 네 마디의 말을 남기고 임종을 한다(대상28:9~10).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은 모두가 참 의미심장한 말들이다.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통하여 그가 70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눈여겨 볼 수 있어야 한다. 

  첫째, 다윗은 솔로몬에게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라"고 하였다(대상28:9). 이는 그가 인생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다윗은 자신이 처음 출발이 어떠했는지를 죽는 그 순간까지 잊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이새의 둘째 부인의 소생으로서 이새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대상2:16~17, 삼하17:25, 삼하23:1). 그래서 어릴 때에는 막내로서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는 못했다. 그는 막내였음에도 힘든 일 곧 양떼를 치는 일을 맡아서 해야 했다. 한 마디로 그는 목동의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대로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게 하셨다(삼하7:8).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았다(대상29:11~12).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너의 모든 미래는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고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둘째, 다윗은 솔로몬에게 "너는 그분을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고 하였다(대상28:9). 이는 다윗이 그의 평생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랬다. 다윗은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고 왕국의 도성을 예루살렘으로 천도했을 때 곧바로 시행한 일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계하였을 때에 그는 오롯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를 30년 동안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그가 61세가 되었을 때에 자신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예루살렘에 진격할 때, 다윗은 충분히 아들의 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계하는 것으로 알고 기꺼이 왕직을 다 내려놓고 도망을 간 것이다. 그에게는 왕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버림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윗은 진정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으며, 하나님을 최고로 경외하고 살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 너도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다.

  셋째, 다윗은 솔로몬에게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고 하였다(대상28:9). 이는 다윗이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을 속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가 지은 죄들을 숨기지 않고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이다. 그것도 충성된 자신의 부하 장수의 부인을 빼앗아서 간음을 행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아를 죽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죄는 단지 간음죄와 살인죄라고 하겠지만 그는 실은 권력 남용죄요 탐욕죄를 지은 것이다. 사실 누가 그에게 권세를 주었는가?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죄를 숨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어찌 그것이 숨겨질 수 있겠는가? 열 달이 되도록 다윗이 회개하려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단 선지자를 파송한다. 그리고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정확히 집어서 말해 준다. 그런데 그때 다윗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아는가? 우리는 다윗의 위대함을 여기에서 바로 느끼게 된다. 그때 다윗은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참회를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이번에는 자기가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단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었노라고 잡아떼지도 않았다(시32:5). 더욱이 변명하지도 않았다(시51:13). 다윗은 즉시 그 죄를 인정하였고 하나님 앞에 시인하고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삼하12:13). 다윗은 그 일은 분명하게 범죄 행위였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몇 날 며칠 동안 그는 '눈물로 참회'를 한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회개의 비밀을 깨닫고 실천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값비싼 소를 바쳤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통회 자복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구약시대였지만 다윗은 이미 회개와 용서받는 비밀을 알았던 것이다. 이는 그가 진정한 회개만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또한 다윗은 일평생을 참회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값을 오롯이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장자 암논의 죽음과 셋째 아들 압살롬의 죽음이야말로 자신을 대신하여 죽어간 사건이라고 판단하였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나머지 30년의 기간 동안 징계를 받기는 받았지만 한 번도 징계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진실로 회개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넷째, 다윗은 솔로몬에게 "그런즉 이제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고 하였다(대상28:10).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다스리는 신정국가를 세우는 것, 이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선왕인 사울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이 땅의 왕이기는 하지만, 하늘에 계시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자기의 왕이라는 것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전에 주변 민족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또한 20여 년간 전쟁을 하면서 얻은 전리품을 차곡차곡 모아 곳간에 두었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 건축 재료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사명을 신정국가를 세우는 일로 끝마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잘 건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죽음 직전까지 성전 건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해 주었다. 그러한 준비에는 성전 설계도를 준비하는 일, 각종 건축 재료들과 건축 기술자와 노동자를 확보하는 일, 성전 건축 부지를 확보하는 일 등의 전반적인 건축 준비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솔로몬에게 "너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났지만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모른 채 지금 걷고 있는 사람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잘 알고 걸어가는 사람은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왕이지만 사울왕과 다윗왕은 이렇게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나오며

  우리는 오늘까지 총 83번(사무엘상 43강, 사무엘하 40강)의 시간을 통하여 다윗의 일대기를 들여다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처음 출발은 참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오롯이 그 전 과정을 잘 소화해 내었다. 그때 다윗왕은 사울왕이 왕으로 지냈던 20년의 기간을 미리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가 걸어가야 할 길도 또한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 안고 일어섬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며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인위적으로 모든 것을 행할 것은 아니다. 단지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만큼은 예외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다윗은 회개의 진실과 그 비밀이 열려지게 된다. 이러한 다윗의 범죄는 구약시대일지라도, 진정 회개를 알고 실천한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윗 초기에 일어난 3년간의 기근을 통하여, 그는 죄와 형벌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년의 인구 조사를 통하여 그가 얼마나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3년 기근과 인구조사 사건은 사실 그 자체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은혜의 섭리 안에 들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들은 다윗이 장차 지을 성전의 노동자를 거뜬히 준비케 해 주었고, 성전 건축 부지를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사역 초기에 치른 주변 민족과의 전쟁에서 매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성전 건축 재료를 준비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다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고백이요 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일대기를 지켜보면서 그의 위대한 이름 석 자 앞에서 자신의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2022년 02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아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 나라에 누군가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대체 그 길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그러한 길이 있다는 것에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는가? 그런데 지금 이 길은 누가 걷고 있는 중이며, 여기에 나는 어떻게 동참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부르심과 택하심에 그 비밀이 들어있다. 오,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 그것은 무엇인가? 2021-12-26(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우리가 주 예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려면?(벧후1:10~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nsMbgnracGg [혹은 https://tv.naver.com/v/24313002 ]

 

1. 들어가며

  오늘은 송년주일이다. 일년을 마감하는 주일이다. 일 년 열두 달 사실 중요하지 아니한 주일은 하나도 없지만 송년주일은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송년주일의 때가 되면 지난 일 년을 돌아보고 또 한 해를 준비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일에 반성과 결산이 없다면 발전은 어렵고 더딜 것이다. 세상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재정을 결산하고 인적 자원을 결산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일도 이러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일은 더더욱 그렇제 않겠는가? 그러므로 올 해 우리의 신앙도 잘 결산해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마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당신의 종들을 불러모아 반드시 결산하는 모습을 일러주셨다(마25:19). 그렇다면 과연 그날 우리의 신앙은 어떤 기준과 잣대로 평가받게 될 것인가? 무엇이 과연 우리의 신앙을 결산하는 기준이 되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 가운데 그 심판의 기준의 하나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들려준 신앙결산의 기준에 따라 올 한 해를 잘 결산하고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사도 베드로가 신앙의 결산의 기준과 잣대로서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 말씀에 보니,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신앙을 결산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이 기준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 기준대로 살기만 한다면 우리도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준대로 살기만 하면 우리들도 주 예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 하면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 주의 나라 곧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오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벧후1:10-11[직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더욱[더] [단호하게] 힘써(열심을 내라).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확실하게) [계속해서] [자기자신을 위하여] [행]하라(실행하고 있기 위하여) [왜냐하면] 너희가 이것을 [실]행한즉(실행하고 있다면) 언제든지(어느때든지) [너희가]실족하지(비틀거리지,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리라(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1 [왜냐하면]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안으로) 들어감(입장함)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급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성도가 자신을 향한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열심을 품고 확실히 실행한다면 그는 이 땅에서 걸려 넘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에게 넉넉히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심판받을 때에 우리가 넉넉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제시되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충성하라는 것이다. 

 

3. 부르심과 사명 그리고 택하심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의 경우 자신을 향한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성도들기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일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오늘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사항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이제 구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면, 그는 반드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부르심(소명)'이란 의미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어떤 특별한 직무를 맡기려고 그를 불러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에게 맡겨진 임무(직무)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그가 달려갈 길 곧 '사명(소명)'이라고 부른다(행20:24, 딤후4:7). 이처럼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특별한 직무을 맡겨 세운 자들이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역을 맡기려고 특정한 사람을 택하시며 어느날 그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자는 반드시 자기가 무엇 때문에 부름을 받았고 또한 보냄을 받았는지를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자신이 어떤 부름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는 일반 사명이란 무엇이며, 어떤 특정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별 사명이란 무엇인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공통된 부르심을 가진 자들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막16:15). 우리가 복음을 들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도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곧  자기가족에서부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친구와 이웃들에게 그리고 자기의 민족과 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는 다른 민족과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특별한 사명을  주시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던 자였다. 왜냐하면 그도 일반 사명을 가진 자이지만, 그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의 나이가 34살 정도되었을 때였다. 그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오직 여호와만 하나님이 유일한 절대자라고 믿고, 사람이었던 예수님은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대낮에 그에게 나타난 것이다. 죽어서 이미 없어진 줄 알았던 그분이 살아서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에게 지시를 하였다. 이제 더이상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을 핍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할 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 도성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아나니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신을 향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하도록 주님이 택한 그릇이라는 것이다(행9:15). 그렇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할례를 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가 있있었으니 그는 '베드로'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로서 '바울'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명은 보통 어떤 개인이 받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어떤 공동체나 민족이 받는 경우도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구약시대에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개인 사명자였다. 그러나 모세나 다윗같은 자는 개인적인 사명자이기도 하지만 그 사명은 그가 속해 있는 민족 공동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신약시대로 치자면, 빌립집사의 경우는 혼자 개인적으로 사명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바울은 개인이 받은 사명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교회과 선교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와 그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붙혀준 바울선교단의 일행은 바울로 인하여 함께 부름을 받은 사명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민족 중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민족의 사명도 있는데, 그것은 메시야를 이 땅에 산출하라는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그토록 못된 짓을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그루터기를 남겨두셨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 마지막 시대에 대한민국도 아마 그러한 사명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5. 하나님의 부르심은 보통 어떻게 나타나게 되고 이루어지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보통 어떻게 사람을 불러 그를 들어쓰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지만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지정해서 주신 사명도 있다. 이러한 사명을 가진 자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어느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된다. 그러한 사람 중에는 하늘에서부터 그가 영혼으로 있을 때에 이미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아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들도 있으며, 이 땅에 태어난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여 그를 불러 쓰시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성경 사무엘서를 읽어본다면, 전자의 해당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바로 '다윗'이라는 사람이며,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는 '사울왕'이라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역을 위해 어떤 특정한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특정한 직임을 맡기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를 어떻게 불러내시는가?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부르시는 경우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노아나 아브라함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경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서 직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경우는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경우다. 베드로는 육신을 갖고 계셨던 예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신 예이고, 바울은 부활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 직접 오셔서 불러서 그에게 직임을 맡긴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르심은 극히 드문 사례의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대에 하나나 둘이 있을까 말까 하는 경우다. 둘째, 천사를 시켜 불러내르시고 그에게 직임을 맡기는 경우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의 경우이고, 신약시대에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모세에게는 여호와의 천사(가브리엘로 추정됨)가 나타나서 그를 불러내어 사명을 주셨고, 사가랴나 마리아의 경우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사명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셋째, 꿈과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그에게 직임을 맡기기도 하신다. 넷째, 영적으로 깨끗하고 경건한 사역자들 곧 방언통역 사역자나 예언 사역자를 통해서 일을 맡기기도 하신다. 오늘날 목회자가 되신 분들은 어느날 부흥성회 때에 기도를 받았는데 예언이 나와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주의 종이 되었다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특별 사명자는 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찌감치 그러한 소명을 받아서 알게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아는 경우도 종종 있다. 

 

6. 특별 사명자가 아닌 일반 평신도의 경우는 어떻게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 세운 사명자가 아닌 일반 성도들의 경우는 어떠한 사명이 있는 것인가? 사실 사명자가 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고 소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요동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사람을 어떤 그릇으로 쓸 것인지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자신의 뜻을 따라 결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딤후2:20~21).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반문할 수는 없는 것이다(롬9:20~21). 성경을 다시 한 번 보라. 과연 하나님께서 쓰셨던 인물들 중에서 자신이 그러한 사역자가가 되겠다고 선언해서 된 자가 있는지를 말이다. 성경의 기록은 전부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사람을 불러내어 그를 들어쓴 것들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보라. 자기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제자가 된 경우가 있는가? 없다. 예수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불러서 쓰신 것들 뿐이다. 사도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특별한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운 사명자를 협력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구약시대로 치자면, 이는 마치 아론이나 훌이 모세를 도와서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과 같다. 신약의 경우라면 바울을 도와서 바나바, 실라, 디모데, 브리스가와 아굴라, 아볼로 등이 쓰임받은 것과 같은 이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 것이요, 의인으로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는 것과 같다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0:41~42).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를 돕게 된다면 그 사역자가 받을 상을 그도 함께 받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계의 법칙 중에 하나다. 그러므로 적어도 하나님께서 불러 세운 사역자를 돕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엄청난 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중들에 상당수가 '충성'의 면류관이나 '섬김'의 면류관 더 나아가서는 '겸손'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7.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아 사명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있다. 그러한 일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한 자를 알아볼 수가 있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불러내어 사용하는 사역자들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특징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명자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징으로는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는 자신이 어떤 사역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러한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여러가지 경로로 그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한 사명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하여 열정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명자는 어떠한 어려운 난관에도 굴하지 않으며, 받은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 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개인의 야망과는 다른 것이다. 야망이란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주인 되어서 추진하는 열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야망과 소명은 다른 것이다. 셋째, 이러한 사명자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아무도 그를 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초자연적으로 그를 지키시키고 보호해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늘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붙혀주시고 재정까지도 붙혀주시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이 땅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주님이 불러서 세운 자들이다. 여기서 '둘'은 증인의 숫자로서 두 명인 것이지 딱 두 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마치기까지 어떤 사람도 그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계11:5). 고로 만약 그 사명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그의 사명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기 때문이다. 

 

8.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2가지 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주어지는 사명을 완수하는 자에게는 어떤 복이 주어지게 되는가?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다음과 같은 2가지 복을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첫째는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결코 실족하지 않으며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벧후1:10). 그러한 사명자는 내적이든 외부적인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거나 다른 길로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반드시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주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러한 사명자와 공동체에게 넉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벧후1:11). 오 그렇다. 믿음을 지키고 회개를 해도 천국에 들어가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이러한 종류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가기가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우리 인간의 들이 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제부터라도 개인이나 공동체에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러한 자들에게는 새 예루살렘 성에 입장하는 것이 넉넉하게 준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베드로와 바울에 의하여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또 다른 교회를 낳고 또 낳았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어떤 특정한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불러내시고 그들을 들어 사용하신다. 누구를 들어쓰시는가 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그분이 바로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특정한 사람이나 공동체를 불러서 그에게 과업을 맡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중에 작지만 동탄명성교회와 회개와천국복음연구소도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기관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지적인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늘 이 두 기관을 들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기관이나 혹은 개인사역자는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중에 어느 한 구석을 이 두 기관이 지금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보면, 정확한 것은 앞으로도 이 두 기관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 뿐이다. 구약시대 사울왕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직무에 성실하지 않았다. 그것을 오히려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버림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임을 맡은 사명자나 단체라 할지라도 혹 잘못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누군가를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다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뿐이다. 고로 사명도 일종의 '은혜'인 것이다(갈1:15). 그분의 은혜, 자격없는 자라도 들어쓰시는 그분의 은혜, 가난한 자를 들어쓰시어 부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그분의 은혜. 만약 이러한 은혜를 받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끝까지 충성한다면 그들이 하는 사역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 사역에 동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나라에 입장하되 넉넉하게 입장하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2021년 12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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