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왜 마리아는 만세에 복있는 여인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을까?(눅1:26~3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N_Z3beobTY [혹은 https://tv.naver.com/v/31902851 ]

1. 들어가며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에 마리아를 칭송한다. 그녀가 메시야를 낳았는데,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마리아는 고귀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날에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까지 칭송한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낳으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성경에서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라고 했다는 말씀은 접할 수 있지만, 그녀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말씀을 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눅1:42,48). 그렇다면 그녀가 복있는 여인이라고 불리우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녀가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왜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 우리도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천주교에서 성탄절을 귀히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주교에서는 성탄절을 매우 귀히 여긴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예수님과 동일하게 매우 귀히 여긴다는 데에 있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마리아가 기도 중재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도가 직접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기도드리는 것보다는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고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께 부탁하면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부탁한 것이므로 그 기도가 잘 응답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럴싸한 이론이지만 천국에서 마리아는 결코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도 거기에서는 평범한 피조물로서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둘째, 마리아가 공동 구속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를 구속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구속도 역시 마리아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역시 구속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피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녀도 죄를 가진 죄인이기 때문에 그녀의 피는 인류의 구속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셋째,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으셨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어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인가? 

 

3. 마리아는 과연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천주교에서는 일찌감치 마리아를 귀히 여겨 하나님의 어머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431년 에베소 회의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때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교의를 발표하였다. 

  “성육신하신 말씀이 진실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과 거룩한 동정녀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육체로 낳으셨기 때문에,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431년, 에베소 회의)

  그런데 이 회의는 카톨릭에서만 인정하는 회의다. 개신교에서 함께 인정하는 회의가 그로부터 약 20년 뒤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칼케돈 회의'다. 그런데 이 회의 때에도 역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공식화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따라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탄생되었고,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따라 ‘하나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탄생되었다”(451년, 칼케돈 회의)

  그런데 마리아가 낳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은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다고 하는 것을 두고, 어떤 측면에서는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나하면 만약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계속 말하고 고백하다 보면,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았으니 첫째, 마리아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분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신)이시니, 그녀도 역시 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더욱이 셋째, 하나님을 낳았으니 하나님을 창조한 이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그녀를 신격화시켜, 지금까지 그녀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늘의 황후'라고 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서는 마리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에서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막3:3, 눅8:19, 요2:1, 행1:4).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말한 적이 없다. 고로 우리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나오기 때문이다. 

 

4. 가브리엘 천사장은 왜 마리아를 찾아왔는가?

  세례 요한이 잉태된 지 여섯째 달이 되었을 때, 가브리엘 천사장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마리아를 찾아간다. 왜냐하면 인류를 구속할 메시야를 잉태할 여인이 땅에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브리엘 천사장이 그녀에게 말했다. "은혜를 받은 채 있는 자여, 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눅1:28). 이 말은 그녀가 아직 임신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그녀에게 은혜가 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지금 그녀가 이미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눅1:27). 마리아도 유다 지파 사람으로서, 다윗의 아들 나단으로 이어지는 후손일 뿐만 아니라, 요셉도 유다 지파 사람으로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후손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정혼은 틀림없이 다윗의 씨로 오실 메시야를 낳은 조건을 갖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그녀는 은혜를 받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지난주의 말씀처럼, 마리아의 아버지 헬리는 딸들만 셋을 낳았고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가문의 멸절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마침 같은 동네에 요셉이라는 총각이 유다 지파 사람이었기에 요셉과 자신의 딸을 약혼하게 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헬리 집안이 없어지지 않을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장을 이제 약 15~18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마리아에게 파송한 것은 그녀가 요셉과 약혼한 상태에 있어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낳을 수 있는 최적의 사람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는 지금 동정녀 곧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처녀로 있었기에,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를 낳을 여자의 조건 곧 처녀로서의 합당한 조건을 또한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사7:14). 그러므로 가브리엘 천사장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5. 마리아는 자신의 태에 하나님의 아들이 임신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나타난 주의 천사는 그녀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었다. 그것은 곧 그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장차 위대한 자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욱이 그 아이는 그의 조상 다윗의 후손으로서 장차 왕위를 이어받아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 위에 영원히 왕 노릇하며, 그의 왕국은 무궁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을 말한다. 자신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데, 어떻게 남자의 씨가 없이 자신의 태에 아이를 임신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가브리엘 천사장은 마리아로 하여금 처녀 잉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비장의 한 카드를 꺼낸다. 그것은 마리아가 잘 알고 있는 그녀의 이모 곧 엘리샤벳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태중에 가지고 있는데,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엘리샤벳의 상태는 이미 마리아도 잘 알고 있듯이, 본래 임신을 못한다고 알려진 이모였다. 그리고 그녀는 나이가 많았고 늙어서 아이를 임신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어떤 불가능한 것도 다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리아도 곧장 믿음이 생겼다. 자신의 이모가 임신을 했다면 자신도 얼마든지 임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로 그러한 믿음이다. 그러자 마리아는 천사에게 말한다. "주님의 여종이니, 당신이 지금 나에게 들려주신 그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눅1:38). 그러자 즉시 마리아의 태중에 예수님이 임신이 된다. 

 

6. 마리아가 복있는 여인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마리아는 엘리샤벳의 임신을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산골인 헤브론에 있는 제사장의 마을로 향한다. 사가랴와 엘리샤벳은 아론의 자손이자 제사장의 가문의 사람들로서 유대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거리가 110Km이상 되는 것이므로, 적어도 거기까지 가는데 한 달 정도는 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임신한 상태에서 약 한 달이 지난 후에 엘리샤벳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가 엘리샤벳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자마자, 마리아는 자신의 이모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말이었다. 

눅1:42~45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그렇다. 마리아가 이제는 복있는 여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중에 메시야를 잉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샤벳은 마리아를 가리켜 자신의 조카라고 말하지 않고, '내 주님이 될 분의 모친'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 곧 장차 세례 요한이 될 그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는데, 이는 30년 뒤면 자신이 소개할 메시야가 온 것을 알고는 기뻐서 뛰놀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복있는 여인이 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녀가 메시야를 잉태해서인가? 아니면 그녀에게 전달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그녀가 믿어서인가? 우리가 만약 이것을 정확히 하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천주교의 잘못된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메시야를 낳은 위대한 여인으로서 그녀를 우리도 추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했던 엘리샤벳은 왜 마리아가 복있는 여인이라고 말했는지를 보라. 그것은 눅1:45에 나온다. 이것을 헬라어에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주님에게서(주님으로부터) 그녀에게 발언되어진 채 있는 것들의 성취(완성)가 [장차]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5). 그렇다. 마리아, 그녀가 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메시야를 잉태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신 그 말씀을 들은 후에 그 말씀이 그대로 자신에게 일어나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복되다고 한 것이다. 

 

7. 마리아가 진짜 만세에 복있는 여인이라고 불리게 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가 감격에 겨워 노래를 한다. 그것이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니 훗날 우리들은 이 노래를 '마리아의 찬가'라고 부른다. 그때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다. 

눅1:46~47[헬라어 직역] 그러자 마리아가 말했다. "내 혼이 주를 크게 찬양합니다. 47 그리고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로 인하여 기뻐합니다. 48 왜냐하면 그분이 그분의 여종의 비천함(낮춤)을 돌아보셨기(방문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왜냐하면 이제로부터 모든 세대들이 [장차] 나를 복있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마리아가 모든 세대들이 자신을 복있는 여인이라고 부르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또한 그 말씀이 자신에게 이뤄지기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비천한 상태 곧 자신의 아버지의 가문이 멸절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통해 하실 일을 전달받았는데 그것을 믿었기에 자신은 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라 칭함을 받게 된 것은 그녀가 위대한 아들 곧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낳아서가 아니었다. 그녀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말씀대로 이뤄지도록 자신의 태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8. 예수께서는 자신을 잉태하고 길러 준 마리아에게 특별한 영광을 돌렸는가?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께서 공생애 시절에 있었던 그분의 어머니와 그리고 그분의 동생들과의 조우를 접하게 된다. 그때였다. 한 여인이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길러주었던 마리아를 높이는 말을 했다. 이렇게 말이다. 

눅11:27~28 이 말씀[들]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그분에게] 이르되, 당신을 밴(짊어지셨던) 태(배)와 [그리고] 당신을 먹인 젖[가슴들]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그분 자신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과 그리고 지키[고 있]는 자[들]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자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 여인에게 반응하셨는가? 자신을 배었던 태와 자신에게 젖을 먹였던 마리아가 복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자가 복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게 특별한 영광을 돌리지 않았었다. 자신을 10달 동안 뱃속에 지니고 다녔던 자궁과 당신이 아기로 있었을 때 젖을 물려주었던 젖가슴을 복 있다고 곧 마리아 그녀가 복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복있는 여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이 그대로 자신에게 이뤄지도록 허용한 것 때문에 그녀가 복있는 여인이 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9. 나오며

  많은 사람들은 마리아를 부러워한다. 그녀는 참으로 좋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잉태하여 자신의 뱃속에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젖으로 그분을 먹였기 때문에 그녀가 복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샤벳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 엘리샤벳이나 예수께서 마리아가 복있는 여인이라고 한 것은 결코 그것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복된 여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녀가 이 땅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목적을 그대로 이뤘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예수님을 자신의 태중에 잉태하는 것이었고 그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 진정 복된 자가 누구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녀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낳아서 그래서 교회가 그녀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한다고 해서 복된 것이 아니라, 그녀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난 것이고 또한 자신이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지금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인 것이다. 마리아를 부러워하지 말라. 내가 지금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그 말씀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녀가 잉태한 것은 사실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녀에게 주신 말씀을 잉태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얼마든지 말씀을 잉태할 수 있다. 2023년도에는 이제 우리와 우리 교회에게 주신 놀라운 말씀을 우리도 자신의 마음 속에 잉태하여, 그것을 출산하는 사람이 됨으로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어 보자. 

 

 

2022년 12월 25일(주일)

정병진목사

 

다윗이 쓴 시편 65편은 어떤 노래인가? 그는 왜 시온에서 찬송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는가? 그리고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 그리고 주님 부르실 때에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왜 천국에서 복된 자라고 언급하였는가? 시온산과 그리고 주의 성전과 주의 궁전은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가? 내가 천국에서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광과 신분의 비밀이 놀랍게도 시편 65:1~4의 네 마디의 말씀 안에 다 들어있다.

 

2022-06-2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주님의 뜰에서 살게 될 하늘에서 복 있는 자(시65:1~4)_2022-06-26(주일)

https://youtu.be/3Am7Mhu5huY  [혹은 https://tv.naver.com/v/27599540 ]

 

1. 들어가며

  시편은 어떤 책인가? 그것은 자신의 살면서 경험했던 간증을 기도나 시 그리고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그저 단순한 시가책이 아니다. 어떤 것은 자신이 체험한 깊은 영적인 것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도 더러 있다. 그러므로 시편을 시편답게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시편은 메시야 예언을 많이 담고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그는 적어도 시편 25개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수록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부활 후 제자에게 구약성경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고 하셨다. 그리고 시편은 만약 본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영적인 비밀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아울러 심지어 천국에 있는 생명책과 눈물병까지도 기록해놓고 있다. 특히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기록해 놓았는데, 회개 없이는 결코 사람의 죄가 용서될 수 없음과 아울러 의인과 악인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한 후에 이 시편을 읽고 또 묵상하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65편은 대체 어떤 내용이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이 시편이 말씀하고 있는 장소로서 '시온'과 그리고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이라는 대체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가? 그리고 시편 기자는 하늘에서 어떤 사람이 복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2. 시편 65편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에게 시편 65편은 주로 2개 구절이 설교 본문으로 자주 등장한다. 첫째는 2절 말씀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65:2)" 그러므로 2절 말씀은 주로 기도회 때 애용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육체이든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전하려 할 때 이 본문을 사용한다. 그리고 둘째는 4절 말씀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이 말씀은 주로 헌신예배 때에 사용되는 말씀으로서, 설교자들은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이 오늘날 '교회'라는 의미라면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신다는 본문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적용은 가능한가? 그렇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이 말씀에 대한 적용의 하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진정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이 들으신다는 것이며, 주의 몸된 교회에서 봉사해서 복을 받으라는 말씀인가? 그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쓴 시편기자가 진정 무엇을 말하려고 이 본문을 썼는지를 찾아가고자 한다. 참고로, 시편 65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1~5절까지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고, 6~8절은 '창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9~13절에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곧 '시혜자이신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시편65편 기자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 시편을 쓴 것인가?

  이제는 우리가 시편 65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이 시편은 누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썼는지를 먼저 살펴 보자. 시편들 가운데에는 그 시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 가운데 썼다는 기록들을 가지고 있는 시편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시편 51편 같은 경우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에 그에게 왔을 때'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어, 이 시편이 어떤 상황과 배경하에 썼는지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시편 65편은 그 배경을 알가 쉽지 않다. 표제어에 설명이 붙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노래는 표제어에는,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서 성가대의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시편은 다윗이 쓴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다윗시대에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같은 어떤 지휘자를 따라 불렀던 노래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편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 보면(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지만) 다윗이 어떤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 쓴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편은 다윗이 자신의 말년의 어떤 시점에 구원자요 창조주와 시혜자이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4. 시편65편의 1~4절의 말씀은 다윗의 어떤 영적 체험을 기록한 것인가?

  그렇다면 시편 65편 1~4절의 말씀은 다윗의 체험한 어떤 장면을 기록한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는 자 곧 그분의 성전에 사는 자가 복있는 자라는 것과 주의 뜰과 주의 집과 주의 성전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주님 가까이 나아가며 그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표현을 보고, 혹시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제사장들이 복 있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 짚은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제사장이 아닌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는 유다지파 사람으로서 왕이 되었기에,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자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지금 땅에 있는 지상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다윗시대에는 지상에 성전이 없었다. 다만 펄럭이는 휘장 가운데 법궤를 안치하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그가 1절에서 '시온에서 찬송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을 보자. 이것은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하는 상황이 아니라 어떤 잔치와 같은 상황에서 자기의 순서가 되어 찬송하기를 기다리는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는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주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주의 거룩한 궁전'이라고 쓰여있음을 본다. 여기서 '궁전(헤칼)'이라는 말은 주의 집과 주의 뜰이 바로 제사드리는 곳이 아니라 왕이 거주하는 처소로서 궁전이나 궁궐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시편 65편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제사드리는 공간이 아니라 성도가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왕의 처소 곧 왕의 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다윗은 대체 주의 궁전에서 무엇을 체험한 다음에 이 시편을 쓴 것인가?

 

5. 다윗은 과연 누가 복 있는 자가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이 시편에서 누가 복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그것을 딱 2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장차 시온에서 주님께 찬양을 부르게 될 자들이 복 있는 자라고 했다(1절).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서원이 당신에게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1절, 히브리어 직역)" 그는 자신이 서원하여 기도했던 어떤 것이 이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일을 찬양하기 위해 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다윗은 지상에 있는 성전에서 서원제에 감사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가 생전에 왕으로 있을 때에 시온산에는 아직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시온'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다. 여기서 '시온'이라는 단어는 시온산을 가리키는 말로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때에 가나안의 여부스 거민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왕궁으로 삼은 산이 바로 시온산이었다(삼하5:7). 그런데 자신은 생전에 시온산에 성전을 짓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언급한 시온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하늘의 시온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땅에 있는 시온산도 처음에는 다윗이 빼앗은 예루살렘 동남쪽의 작은 공간만을 가리켰으나, 나중에는 예루살렘의 동쪽의 대부분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도시를 대신하는 용어로 확대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안에 시온산이 있으며, 시온산 안에 다윗의 궁전(궁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장차 성도가 들어갈 천국이 시온산과 예루살렘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즉 현재 천국은 거대한 정방형의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성 한 가운데에 '시온산'이 있고, 시온산의 한 중앙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나님의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 중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천국에 시온산이 있다는 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히12:22), 사도 요한도 천국에 올라가서 시온산에 144,000명의 성도들이 서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광경을 기록해 놓았다(계14:1). 고로 시편 65편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에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광경을 그대로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고로 이 시편은 하늘의 시온산에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찬양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시온산 안에 있는 주의 궁전의 주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4절). 이때 다윗은 누가 천국에서 복있는 자인지를 좀 더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것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시온산 그리고 시온산에서도 주님의 처소, 주님의 처소 중에서도 주님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거주하다'는 히브리어 동사를 보면, 그 의미가 일시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혹은 계속적으로 거주한다는 의미 곧 '정착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예배드릴 때만 한 번 주의 뜰 안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아예 거기에서 거주하여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누가 복 있는 자인지는 자명하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주의 궁전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주의 궁전의 뜰은 어떻게 생겼으며, 누가 과연 그 뜰 안에 거주하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히브리 어원문을 보면, '뜰'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기재되어 있다. 즉 주의 뜰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인 것이다. 

 

6. 하늘에서 주의 궁전과 주의 뜰은 어떻게 생겼는가?

  천국에서 하나님의 처소는 새 예루살렘 성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볼 때에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시온산을 가리키며, 더 좁게는 시온산 안에 한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주님이 계시는 천국의 뜰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나누어져 있을까? 그것의 예표는 바로 '성막'이자 '성전'과 같다. 왜냐하면 3절 말씀에 보니 그곳이 죄를 사함받는 장소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성경에 나온 바에 따르면, 주의 궁전의 모습은 주님이 모세에게 이 땅에 성막을 지으라고 함으로서 그 모습이 점차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막은 그 뜰을 한 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안뜰'이라는 뜰이다.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 최초로 성전이 지어지는데, 이때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설계도를 받아서 지은 성전으로서 이 성전에는 뜰이 2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안뜰'과 '바깥뜰'이다. 그런데 이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 지어졌는데, 두번째로 지어진 성전은 뜰이 무려 4개가 되었다. 성소가 없는 바깥뜰에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이라는 뜰이 있었고, 성소가 있는 안뜰에는 '이스라엘(남자)의 뜰'과 '제사장의 뜰'이라는 뜰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뜰의 구분이 천국에 가면 자신의 신분에 따른 거주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막에도 나오고, 에스겔성전 환상에서도 나온다. 도표로 정리하면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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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누가 주의 성전의 뜰에서 살게 되는가?

  그렇다면 누가 성전의 뜰에서 살게 될까? 성전의 뜰을 넓게 본다면 새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가리킬 수 있지만, 작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 주변만을 가리킬 수 있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살 장소는 이미 구획으로 정해져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구획을 넘어서 다른 곳으로 갈지라도 그곳에 집을 짓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행한대로 갚아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주의 뜰에 정착하여 살게 되는가? 누가 더 주님 더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4절 말씀에 그 조건이 2가지로 나온다. 

  첫째, 우선적으로 그곳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아서 이 땅에 보내어진 자들이 살게 된다(시65:4). 시65:4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시65:4[직역] 당신이 택하시고 있고, 가까이 오게 하시고 있어서, 당신의 뜰들 안에 [장차] 거주하게(정착하게) 될 사람은 복된 자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집 곧 당신의 거룩한 궁전(왕궁)에 좋은 것으로 [장차] 만족할 것입니다. 

  그렇다. 주의 뜰들(안뜰과 바깥뜰 혹은 4가지 뜰들) 안에 들어가서 정착하며 살게 될 자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는 주님이 택하신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께서 영혼을 이 땅에 보내기 전에 천국의 낙원에 있는 영혼을 불러다가 사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낸 자들이다. 이 땅에는 그러한 자들이 시대마다 있었다. 본문을 보니, '택하신다'는 동사의 시제나 '가까이 오게 하신다'는 동사의 시제나 둘 다 '미완료'구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때도 그렇게 하셨지만 아직도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그럼, 구약시대에는 누가 택함을 받아 성전에서 봉사했는가? 그것은 단연코 제사장들이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만이 주의 뜰 안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출19:22). 그중에서 대제사장은 성전의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제사장은 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낸 사명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자신이 제사장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이 제자가 되고 싶다고 제자가 된 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 주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불러서 당신의 제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롬9:20~21)

  둘째, 주님께서 가까이 오라 하실 때에 그렇게 주님께로 나아가서 쓰임받는 자가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초청을 받을 때에 그 초청에 응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주님 나라에서 일하라고 초청받을 때에 그대로 응하면 된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타락할 때에 하나님께서 제사장은 아니지만 '나실인(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구별하여 주님께 드리는 사람)'을 써서 그로 하여금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구약의 삼손이나 사무엘은 나실인이었으며, 세례요한과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나실인이었다. 유다지파 사람이었던 예수께서도 원래는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율법의 나실인 규정을 따라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나실인으로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딱 2가지다. 첫째는 주께 기도하여 자신을 서원제로 드리는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다(1~2절). 즉 서원하여 자신을 주께 드리기로 결정한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다윗도 역시 유다지파 사람으로서 제사장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사장이 죽고 거의 없어지자, 다윗도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신을 주께 드리기로 서원한 바 대로 주님께서 그에게 이뤄주셨으니, 이제 주님께 드릴 찬송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1절). 둘째는 제사장이 아닌 세속에 속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한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가 있다(3절). 죄악된 말과 죄악된 행동을 하는 죄인일지라도 속죄를 통해 죄용서를 받은 자라면 그도 하나님께서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8.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어도 좀 더 주님의 지성소 가까이에 들어가서 그곳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로 나와 있다. 하나는 그가 만일 주님으로부터 택함받아 이 땅에 보내어진 자라면 그는 주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종으로 부름받은 자라면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거기에 잘 나와 있다. 만약 하늘에서부터 이 땅에 사명을 받아서 내려온 자라 할지라도 그가 만약 악하고 게을러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는 새 예루살렘 성밖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절대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은 주님이 주시지만 그것을 행하느냐 마느냐는 본인의 결정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실인처럼 서원기도로 통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자는 날마다 자신을 회개하여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믿고 회개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나실인처럼 드리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다. 그러면 그는 먼저 더러운 자신을 더욱 더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결국 죽어서 거룩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누가 더러운 자신을 깨끗하지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을 주께 드리면, 그는 결국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시편 24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산(시온산)에 오를 자가 과연 누구이며, 그의 거룩한 곳(지성소)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24:3). 이어 그는 손(행동)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시24:4). 그렇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를 통해 깨끗한 그릇이 되기만 하면 더욱더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주님의 지성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하고 거기에서 정착하며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9. 나오며

  다윗은 그때에 이미 본 것이다. 다윗은 장차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어느 위치에서 예배를 드리며, 또한 어떤 처소에서 영원히 거주하며 살게 되는지를  본 것이다. 다윗이 시편 65:4에 언급한 "주의 뜰들"은 바로 성도들의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의 뜰을 넓은 의미로 본다면, 그곳은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좁은 의미로 본다면, 주님의 보좌 가까이 위치한 지성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우리가 어떤 장소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그리고 어디에서 거주하게 될른지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택정함을 받아 천국을 전파하도록 이 땅에 보내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서원기도를 통해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정해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미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자신의 직분에 충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밖으로 내어쫓겨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천국복음을 듣고 주님의 사역으로 초청을 받은 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적당히 살다가 간신히 턱걸리로 천국에 들어가 성벽 주변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이 땅에서 주님께 서원하였던 것을 잘 이뤄드려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살 것인지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한 것이 없는데 그가 보좌 가까이에 가서 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 자신이 행한대로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더 보좌에 더 가까이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것은 누가 더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고로 이것 역시도 회개가 관건인 것이다. 날마다 회개하자. 그래서 주님께 깨끗한 나실인으로 주님께 자신을 드려 영원히 영광스러운 신분을 준비하여 천국에 들어가자. 

 

2022년 06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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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가 복있는 자인가? 이미 천국에 들어간 다윗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어떤 자가 복있는 자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 사람 가운데 메시야의 명칭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유일한 인물, 다윗은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천국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생명책과 행위책도 거기에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이지만 어떤 자가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입성하게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윗이 제시하고 있는 복있는 자는 대체 어떤 자일까? 그 2가지 중요한 기준을 살펴보자.

 

1. 들어가며

  구약의 시편은 복있는 자가 누군인지를 말함으로 시작한다. 시편 1편은 사실 그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저자가 누구라고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은 총150개의 단편시로서 그것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에 해당하는데, 그중에서 저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101개 뿐이다. 나머지 49개의 시편은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시편1편과 시편150편은 저자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시편을 최종적으로 편집했던 자가 의도적으로 시편의 처음과 끝을 그렇게 배열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시편1편은 시편을 시작하는 서시로서 그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요, 시편150편은 마지막 송영으로서 그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편에서는 누가 과연 복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을까? 특별히 시편150편 중에서 73편을 써서 시편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다윗은 과연 어떤 자가 복있는 자라고 증언하고 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구약시대의 사람들 특히 다윗이 말하고 있는 복있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2. 시편이 말하고 있는 복있는 자는 누구인가?

  먼저, 시편1편이 언급하고 있는 복있는 자가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시편1편에서는 복있는 자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그렇다. 복있는 자는 2가지 조건을 갖춘 자이다. 하나는 소극적인 조건으로 3가지를 행하지 않는 자이며(시1:1), 또 하나는 적극적인 조건으로 한 가지를 행하는 자이다(시1:2). 그런데 이 세상 사람치고 이 조건을 완전히 갖춘 사람이 과연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그렇다. 아무리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행실을 따라서 행하려 하지 않으려 해도, 죄된 본성을 다 이겨낼 사람은 없다. 뿐만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운데로 실천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1:1~2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세상에서 복있는 자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복있는 자에 대해서 언급한다. 사실 다윗도 실로 엄청난 범죄를 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복있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가 쓴 시편 73편을 쭉 읽어보면, 적어도 6군데에서 복있는 자가 누군지를 언급하고 있다.

 

3. 시편 150편 가운데 다윗의 시편의 위치는?

  시편의 시들을 읽어보면 모세의 시(90편)도 있고, 남유다의 포로귀환을 암시하는 시편(126편)도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편은 다윗만의 작품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시편을 최종적으로 편집해서 밖으로 내놓은 이는 누굴까? 그는 아마도 바벨론포로귀환 때의 인물인 듯 싶다. 그는 포로귀환을 진두지휘했던 에스라가 아니겠는가 추정된다. 그래서 시편150편이 우리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들 중에서도 다윗이 편집한 것은 시편72편까지인 것을 알 수 있다(시72:20). 시편을 권수로 계산해 보면, 총5권 중에서 제2권(42~72편)까지다. 그후로도 다윗이 쓴 시가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다윗이 쓴 시는 시편1~72편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윗은 여기에서 누가 과연 복있는 자라고 했을까?

 

4. 다윗은 누가 복있는 자라고 말했을까?

  다윗이 쓴 시편 73편의 작품 중에서 어떤 자가 복있는 자인지를 다윗은 총 6가지로 말했다(시32:1~2, 34:8, 30:4, 41;1, 65:4, 144:15). 그것들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2가지다. 왜냐하면 신약의 예수님의 말씀의 관점으로 볼 때에 어떤 자가 복있는 자인지가 다윗이 말하고 있는 2가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말하는 복있는 자는 이렇다. 첫째, 죄를 범한 자라 할지라도 죄 용서를 받은 자가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시32:1~2). 그리고 둘째, 이 세상 사람이지만 천국에서 살게 될 자가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시65:4).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이러한 영적인 것들을 알고 있었을까? 다윗은 어떻게 되어서 진정 복있는 자는 죄사함을 받는 자와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고 했을까?

 

5. 다윗이 보고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다윗이 이러한 시편을 쓰기까지 우리는 다윗에 대해 조금은 공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인정한 신앙인들 중에서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으며(행13:22), 예수님께서 자신의 호칭에 인간의 이름으로는 유일하게 그 이름을 사용한 인물이기 때문이다(계22;16). 또한 그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 본 자였다(시11:4,18:6). 또한 그는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생명책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시69:28), 행위책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시40:7).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음성도 직접 들어본 자다(시40:6). 그는 하나님이 영광중에 계시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좌에 앉아서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시122:5, 6:11~12, 9:7).

 

6. 다윗이 알고 있는 첫번째 복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런데 다윗이 한 가지 더 알고 있었던 놀라운 영적인 사실은 하나님이 진정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풍성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시103:8). 하지만 그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범죄하고 난 후에 그가 통회자복할 때에 자신의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범죄하면 그 범죄에 해당하는 속죄제물을 드리면 자기 죄를 용서받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다윗은 그때 회개함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즉 아무리 범죄에 해당하는 속죄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회개없이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시51:16~19).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7:12)" 그러므로 비록 사람이 범죄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심판하지 않으시고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시103:9~12). 그러므로 다윗이 맨 처음 언급한 복있는 자는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자인 것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그렇다. 누가 과연 복있는 자인가? 다윗은 첫번째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자인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7. 다윗이 알고 있는 두번째 복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누가 또 복있는 자일까? 다윗은 두번째로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시65:4). 그는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나,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3~4)"고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주의 뜰"이나 "주의 집"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윗은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아니었기에, 성전 안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집 곧 천국에 들어가는 사는 자가 복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 있는 소원이 늘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27:4)" 그렇다. 그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 다윗은 이것 외에도 다른 4가지를 더 말했다(시34:8, 40:4, 41:1, 144:15). 하지만 이 4가지는 죄사함의 축복과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복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 나오며

  사랑하는 자여, 당신은 2가지 축복을 받았는가? 첫째, 당신은 죄사함의 축복을 받았는가? 그것은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믿음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윗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아파하면서 통회자복하며 회개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시51:16~19, 요일1:9).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고해서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자는 미래의 죄까지도 이미 용서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언급은 없다. 우리는 오직 다윗의 경험했던 첫번째 복있는 자 곧 회개를 통해서 용서함받는 영적인 원리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둘째, 당신은 천국에 들어가 살 자로서 준비되고 있는가? 그것은 오직 믿음과 회개로 되는 것이다(막1:15).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 살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직접 통회자복하며 회개할 때 죄용서를 받아 천국에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즉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며 거기서 진정 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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