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02) 주님의 때가 가까운 종말 시대에 있을 6가지 징조는 무엇인가?(마24:4~14)_2021-08-20(금)

https://youtu.be/H46fGsKwOoc [혹은 https://tv.naver.com/v/21971099  ]

 

1. 예수께서 종말의 징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완성)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는지를 물었을 때에 총 6가지 징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미혹(마24:4~5) 및 천국 복음 전파(마24:14) 둘째, 전쟁들(마24:6~7a) 셋째, 기근들과 지진들(마24:7b) 그리고 쓰나미(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눅21:25) 넷째, 전염병(눅21:11) 다섯째, 성도들이 받는 핍박과 순교(마24:9~10) 여섯째, 해와 달과 별들의 이상(마24:29)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2.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는 어떻게 분류해야 하나요?

  예수께서 언급하신 종말의 징조들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다 정말 마지막 시기에 있을 징조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징조에도 3단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재난(해산의 고통)의 시작으로서의 징조들이 있다고 했습니다(마24:5~8). 그것들에는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과 전쟁, 기근과 지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있을 것입니다. 즉 이러한 일들은 그 규모와 크기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있을 것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끝날이 가까울 때의 징조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에는, 환난으로서 핍박과 순교, 실족함과 미워함, 거짓 선지자의 미혹, 불법(무법) 증가, 사랑이 식어짐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천국 복음이 전파됨(마24:9~14)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주님의 재림 일보 직전에 있을 징조들에는 대환난(마24:15~22), 거짓 재림 예수의 출현(마24:23,26),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마24:24), 마지막 전쟁(아마겟돈 전쟁)(마24:27~28),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떨어지며, 하늘의 능력들(귀신들)이 흔들림 등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종말과 재림의 때에 있을 징조들은 시기상 어떻게 구분해야 하나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과 재림의 때에 있을 징조들을 시기별로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 이후 곧바로 임하게 될 징조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징조에는 장차 진짜로 있을 징조에 대한 하나의 샘플로서 미리 작동하는 징조들입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성전)에 서는 일입니다. 이것은 헬라 시대에 나타났던 예표로서,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간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것의 실체는 A.D.70년 디도 장군 때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장군이 지성소에 침입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단회적인 사건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나하면 계속해서 2가지 종류의 다른 징조들에 대해서도 더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그것에는 둘째, 반복적으로 일어날 징조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징조들에는 전쟁과 기근, 복음 전파와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 등이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이것은 정말 주님 재림 직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일어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는 아마겟돈 전쟁, 마지막 시기에 있을 적그리스도로 인한 핍박과 순교(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60일, 42달, 3년 반의 기간과 일치함) 등이 있습니다. 

 

4. 요한계시록에는 종말의 징조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나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종말의 징조들에 관하여 총 7가지 인(印)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4 더하기 3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들에는 4마리의 말과 말 탄 기사들(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있고, 순교자들의 호소, 해과 달과 별들의 이상, 일곱 나팔로 구성된 일곱 번째 인(印)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오늘 저녁에 다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5. 마태복음 24장에 나와있는 종말과 재림의 징조는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나요?

  마태복음 24장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셨던 것들 곧 첫째, 성전파괴의 시기, 둘째, 종말(세상 끝)의 징조들, 셋째, 재림의 징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전파괴의 시기'에 관한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후에 일어날 일로서 가까운 미래의 단회적인 사건을 가리키며, '종말의 징조들'은 주님 오실 때까지 반복적으로 계속될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재림의 징조들'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끝자락에 있을 일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재림의 징조들'에는 '아마겟돈 전쟁', '마지막 시기의 두 증인의 활동', '마지막 시기에 일어날 짐승에 의한 핍박과 순교' 등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찬찬히 살펴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재앙과 비교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정리하면, '일곱 인들'은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종말의 징조'와 일치하는 것이며, '일곱 나팔 재앙'은 정말 마지막 시기에 일어날 '단회적인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 인들 가운데 두번째 인은 붉은 말과 말 탄 자에 대한 환상인데, 이때 붉은 말을 탄 자가 "큰 칼"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큰 칼"은 마지막 시기에 있을 '아마겟돈 전쟁'을 일컫기 때문입니다. 고로 '일곱 인'과 '종말의 징조', '일곱 나팔'과 마지막 시기에 있을 '단회적인 사건'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시간관계상 오늘 저녁 시간(금요기도회)에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21년 08월 20일(금)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어떤 교회를 귀히 보시고 그 교회를 쓰시는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사마리아에 임한 재앙이 물러나게 된 것은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또한 네 명의 나병환자의 귀중한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근의 재앙을 떠나게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풀지 못하면 우리에게 임한 기근의 재앙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개인과 교회를 쓰시지 않는 것이다. 2021-07-18(주일) 주일낮예배[창립기념감사주일설교] 제목: 주님이 찾고 있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줄 교회와 성도(왕하7:1~10)[창립기념감사주일설교]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NWnvsRv-sw [혹은 https://tv.naver.com/v/21418806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신 목적은 무엇인가? 전공하는 신학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를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를 만드는 일인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최종목표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천국에 들어가서도 거기서 왕노릇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더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과 회개"다. 믿음으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딛지만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만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간 한 편 강도의 경우를 보라. 그렇다. 회개없이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한 편 강도를 보라. 그는 행한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도 필요하고 회개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는 어떠한 회개가 있는가? 사실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회개(회심)의 방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회개의 방면도 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우리를 저주로부터 탈출하게 도와주는 회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어떤 것이 과연 진정한 회개이며,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그리고 회개 후에 나에게 축복이 주어지면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2. 왜 사마리아에 굶주림의 재앙이 찾아왔는가?

  왜 사마리아에 굶주림이 찾아왔던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람나라의 벤하닷2세가 쳐들어왔고 그들이 사마리아 성을 에워쌓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이 외부와 차단되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먹을 식량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굶주림의 기근이 찾아온 것은 그들의 선조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출20:5). 왜냐하면 그의 부친 아합왕과 그의 어머니 이세벨이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북이스라엘을 바알신앙의 우상의 나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잡아다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사한 이세벨 때문에 죄없는 나봇이 포도밭에서 돌에 맞아서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죄값은 비참했다. 점차 식량이 떨어지니 식료품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부정한 짐승인 나귀가 음식으로 팔렸는데 나귀의 머리 하나가 은80세겔이 나갔다. 이는 노동자가 1년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할 돈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둘기의 똥처럼 생긴 콩의 1/4갑이 무려 은5세겔에 팔리고 있었다. 노동자의 4일치의 품삯이 은1세겔이었으니, 20일동안 일해서 벌어야 할 돈으로 겨우 콩 1/4조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는가? 왕이 들으니 그때 성 안에서 두 여인이 싸우는 소리를 들렸다. 두 여인이 합의하여 그날에 한 여인의 아들을 서로 삶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다른 여인의 아들을 삶아먹기로 했는데, 그 여인이 그만 자기자식을 숨겨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차마 들을 수 없는 참혹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세 번 있었다. B.C.854년에 이때에 한 번 있었고, 남유다가 멸망할 때에 또 한 번 있었으며(B.C.586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멸당당할 때(A.D.68~70)에도 그랬다. 

 

3. 왜 사마리아 성에 임한 굶주림이 하루 아침에 끝날 수 있었는가?

  어떤 이는 말한다. 사마리아 성에 기근이 끝나게 된 것은 "이제 하루가 지나면 고운 밀가루 한 스아가 한 세겔로 팔리게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에 팔리게 될 것(왕하7:1)"이라고 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 뿐이지 자신이 직접 지어내어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야 옳다. "왜 하나님께서 기근의 재앙을 풀어주셨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임한 기근의 재앙을 왜 풀어주신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확 마음을 바꾸시면 되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무 이유도 없는데 그냥 마음을 바꾸시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곧바로 마귀의 참소가 있을 것이다. 마치 욥처럼 말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행하신다면 이 우주에 있는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또 어떤 이는 말한다. 그때 성문 어귀에 있던 네 명의 나병환자가 이판사판의 상황에서 적에게 항복하기 위하여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자국소리와 그들이 가진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거대한 군대의 소리로 바꾸어주셨고, 전차 바퀴 소리와 말 소리로 바꾸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꾸신 것은 맞다. 그러니까 그 소리를 듣고 아람 군대가 그 밤중에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때 아람 군인들은 너무나 급한 나머지, 자기들이 쳐놓은 장막도 그대로 놔두고, 매놓았던 말과 나귀도 그대로 놔두고, 아사작전을 펼치려고 가져다놓은 군량미도 그대로 놔두고, 심지어 어느 전쟁 통에 빼앗았는지 모르지만 금과 은도 그대로 놔두고 그리고 자신들이 입던 옷까지 전부 그대로 놔둔 채 몸만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 그것이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 성에 임한 굶주림의 기근이 하루 아침에 끝날 수가 있었던 것인가? 요약하면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만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여호람 왕의 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백성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고통당하고 있을 때 홀로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하고 있었다. 여호람 왕은 아합 왕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진 자였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곁에 좋은 모사로서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사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아람 나라 왕의 모든 작전회의를 다 여호람 왕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왕하6:12). 그러므로 그에게 엘리사 선지자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섬겼다(왕하6:21). 그러니 그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왕하6:30),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에게도 말하기를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내가 여호와께 무엇을 더 바라리요?(왕하6:33)" 하면서 엘리사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재앙을 물러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네 명의 문둥병자가 그 시간에 긍휼을 구하기 위해 아람 진영으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마음은 바뀌었다. 여호람 왕의 회개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아람 군대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 순서가 되었다. 하지만 아람 나라를 하나님께서 까닭없이 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람 군대를 쫓아보내 버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네 명의 문둥병자가 그 역할을 대신 해 준 것이다. 그들이 아람 진영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와 쇠붙이 소리를 크게 하여, 아람 군대로 하여금 놀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람 군인들은 북이스라엘 왕이 헷 족속의 왕들과 애굽의 왕들을 용병으로 기용하여 쳐들어오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을 친 것이다. 

 

4. 하나님께서 네 명의 나병환자를 굶주신 사마리아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로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네 명의 나병환자를 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네 명의 나병환자가 아람 나라로 걸어들어갔기에 그것을 쓰신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의 내면에는 과거 북이스라엘 왕이 과거 아람 군대를 포로로 잡았지만 도리어 떡과 물을 먹여 보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왕하6:22~23).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한 마음 때문이다. 자기들이 체험한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쓰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람 진영에서 자기들만 혜택을 누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들은 그 밤에 아람 진영으로 갔었다. 그러자 아람 군대들은 모든 것을 놔둔 채 도망쳤다. 그러니 네 명의 나병환자는 장막에 들어가 허겁지겁 먹고 마셨다. 그리고 배가 불러서 보니 의복도 보였고, 은금패물도 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장막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가져다가 감추었다. 하지만 그중의 한 명이 말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않도다. 오늘은 이렇게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인데 이 소식을 성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밝은 아침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왕하7:9)" 그래서 그들은 밤중에 사마리아 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성의 문지기에게 고했다. "여보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전하겠소. 지금 아람 진영이 텅텅 비어있소. 그리고 그들이 급히 도망치느라 모든 것을 놔두고 갔으니 어서 가서 그 물품들을 취하라고 왕에게 말해주시오" 결국 문지기는 왕궁 담당자에게 전달하였고 그 소식에 왕의 귓가에도 들어갔다. 그러자 처음에 왕은 의심하였다. 저들의 작전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탐꾼을 보내고 보고를 받은 왕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 다음날 백성들이 왕의 말을 듣고 적진으로 들어갔고 적진에 쌓아둔 수많은 군량미를 취하여 가져올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날 저녁 성문어귀에게 거래되는 밀가루와 보리값이 거의 평상수준을 회복하게 되었다. 

 

5.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렇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그것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당시에 누군가가 나서서 아람 군대를 물리쳐야 했야. 그런데 그때 그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선택을 하나님이 들어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네 명의 나병환자가 믿음이 있어서 그들을 쓰신 것이 아니라,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룰 사람들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쓰임받은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어떤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 거기에 그 뜻을 이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복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좋은 소식을 나누기를 기뻐하는 사람을 쓰신다. 그들이 그때 아람 나라의 진영에 있는 음식들과 물품들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아람 군대와 싸우러 간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항복하여 혹시 살려주면 살아보려고 그리 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만이 누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들도 그곳을 얻기 위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기쁜 소식을 사마리아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도 전해주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꺼이 그 밤 중에서 다시 사마리아 성을 찾아나선 것이다.

 

7.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인가?

  이제 동탄명성교회는 2가지 사실을 실천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삶에 어려움이 닥치고 고통이 찾아오고 힘든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에 있었는지를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는 회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아서라였다(출20:5). 그런데 우리 교회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안 되었다. 하지만 우리 동탄명성교회는 이전에도 7년동안 오직 "회개"를 외쳐왔다. 왜냐하면 오직 회개만이 구원의 최종관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6월부터는, 회개가 우리자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최종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저주마저도 끝내는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날마다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하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조금 지났다. 성도들의 경우는 약 9~10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회개소식을 듣고 실천한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건강은 나아지기 시작했고 재정은 회복되고 있으며 자녀의 문제마저도 풀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삶의 모든 저주의 문제가 회개를 통하여 풀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열심이 사는 것도 중요하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의 저주를 끊어버리는 일이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손대는 모든 일마다 잘 되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이 가문의 저주를 끊어냈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를 끊어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후손들에게 형통함의 축복이 뒤따라온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 교회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을 꼭 붙잡았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의 문제는 성실함으로 그리고 충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주를 끝내야 가능한 일이다. 요셉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있어서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저주를 끝냈기 때문에 그가 손대는 모든 일에 형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17세부터 30세까지 엄청난 어려움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형들의 시기질투로 인해 노예로 팔려야 했고, 애굽에서는 자기 주인의 처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흔들리지 않고 순결과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살았던 것은 그가 17세에 꾸었던 계시적인 꿈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고 그의 사명이었다. 그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기집안 모든 식구들을 굶주림에 건질 수 있었고, 애굽의 고센 땅을 이스라엘 민족의 거주지로 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그가 꿈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한 사명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동탄명성교회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 곧 세례요한의 사명, 즉 이 땅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을 붙들고 있다. 이 기쁜 소식을 내 교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 전파하는 것이 사명인 것이다. 

 

8.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쓰실 수가 있다. 그렇다고해서 아무나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어떤 재앙을 거두실 수가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냥 재앙을 거둬가시지는 아니하신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서 그리고 충성되이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 일이 다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저주 가운데에 놓여있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는 자기에게 임한 저주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한 마디로 회개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지은 죄와 내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낱낱이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한 번의 회개만으로 자신과 조상이 지었던 과거의 죄가 한거뻔에 씻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과거에 귀신들이 우리 몸에 들어올 때 각각의 죄 때문에 합법적으로 우리 몸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한 번 회개했다고 그것들이 한꺼번에 다 나가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해야 할 분량은 아주 많다. 적에도 몇  개월에서 많으면 10년까지도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상들이 지은 죄가 많으면 더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을 끝내지 아니하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저주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람 왕에게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무도 보아주거나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골방에서 홀로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병환자의 경우를 마음에 새기고 싶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를 원할 때 그곳에 나병환자들이 있었던 것을 말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바로 그곳에 내가 있어야 나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경험한 기쁜 소식을 자기만 누릴 것이 아니라 전해주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먼저 아름다운 소식을 받게 된 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7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


 

구약시대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99세 때였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때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일까? 그리고 그때 한 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은 무엇이었는가? 오늘은 창세기 19장에만 등장하는 한 분 하나님의 음성을 살펴보자.

2021-05-09(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창세기강해(92) 인류를 위한 한 분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창18:16~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ck8hvt8tqE  [혹은  https://tv.naver.com/v/20145866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일까? 우리가 창세기 12장만 읽어보면 그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조금밖에 모를 수 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의 이름 안에서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는 정도 감정도 알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세기 18장에 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목적이 보다더 더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나온다. 그만큼 그 많은 수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업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사실 창세기 12장의 기록만으로는 그가 형통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지 아브라함이 자기의 자식을 낳고 기름진 땅에서 잘 살게 되는 형통의 축복만을 누리게 하려 그를 불러내신 것이 아니었다. 그를 불러내신 데에는 더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저 거대한 인류를 향한 숭고한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말씀을 들려주지 아니하신다. 상황에 맞게금,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영적 성장의 분량에 맞춰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 계시되었으며 왜 계시되었는가?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으로 쓰임받도록 되어 있었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에 힘써야 하는가?

 

2.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브라함은 그의 나기 75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가나안땅으로 이동하였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여전히 후사가 없었다. 재산이나 노비 그리고 우양은 그에게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가장 걱정되는 문제는 바로 자녀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조카롯을 양자삼으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절당하니까 그 다음에는 그의 집에서 길리고 자란 종 곧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를 삼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종도 아니라고 하셨다. 앞으로 그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그의 씨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자식의 기미지 보이지 않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였던 사래의 제안에 따라, 사래의 몸종이었던 애굽여인 하갈을 취하였다. 그래서 정말 그의 씨를 얻었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13년간 하나님은 그의 곁을 떠나가셨다. 그리고 13년째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상관없이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을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의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아브라함은 그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 즉 자기와 그의 아들이었던 이스마엘 그리고 집에 난 종이나 사온 종이나 할 것없이, 전부 데 데려다가 할례를 시행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일 직후 하님께서 사람의 모양을 하고 두 명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신 것이다(창19:1~33)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분은 창세기 12장부터 17장까지 아브라함에 나타나셨던(물론 음성의 나타나셨을 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아니다) 여호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호와를 "3인칭"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18:14,19). "여호와 그에게 어찌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창18:14, 직역)"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여호와 그가 아브라함에게 말했던 일 안으로 아브라함이 들어가도록 하겠다(창18:19 직역)"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분은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3. 왜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직접 나타나신 것인가?

  갈대아우르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비교적 초창기에 당신자신을 "여호와"라고 알려주셨다(창12:7). 그런데 그 여호와께서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할례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리고 그후에 다시 나타나셨는데 이번에는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나"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분과의 아브라함 간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분은 만세전부터 홀로 계셨던 한 분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아브라함 앞에 그때 나타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처럼 왜 여호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왜 직접 사람으로 나타나시서 말씀을 하신 것인가? 그것은 첫째, 장차 한 해 뒤에 한 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오게 되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시려 함이었다(창18:10,14). 이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언약 때에 들려주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창17:19,21). 그리고 둘째,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크게 강대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창18:18),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주신 말씀을 다시 들려주신 것에 해당한다(창12:2~3). 그럼 왜 한 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전에 여호와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시는가? 그것은 그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셋째로, 한 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왜 불러내었는지 그 이유를 처음으로 말씀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데에는 자기만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복을 주시려고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여호와의 길을 아브라함이 자기자식과 그의 후손들에게 명령하여 잘 가르치게 하기 위해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내용 안으로 아브라함이 실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창18:19). 그렇다면 이제까지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복이 무엇이엇는가?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정 주시고자 하는 복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로부터 그가 진짜 복을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로,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한 부르짖음을 확인하러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다(창18:20~21). 이것을 알려주신 이유는 아직 소돔성에 조카 롯이 살고 있으니 그 조카 롯을 구출해달라고 기도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 같다. 어찌 되었든 한 분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이상과 같은 4가지 것을 알려주셨다. 

 

4. 하나님은 언제 사람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는가?

  그렇다면 한 분 하나님께서는 이전부터 직접 사람으로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것이니 왜 이번에야 비로소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고 있는가? 그것은 첫째로,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제는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 24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를 인도하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신의 나이 99세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를 깨우쳐주시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못하실 것이 없는 분임을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짜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동안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할례를 행한 것이었다. 하나나님께서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신 그날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 곧 자기와 이스마엘과 집에 있는 모든 남자 종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시행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고로 우리의 믿음이 좋다고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고, 회개를 행할 때 우리에게만 알려주시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한 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들어있었는가?

  그날 한 분 하나님께서 그날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전에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증하는 것이 하나있고 또 하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뤄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그를 통해서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의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을 가르쳐서 다음세대에 계속해서 전달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브라함만 달랑 하나님께 복을 받고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서 장차 약속의 씨를 낳아야한다는 것과, 약속의 씨가 와서 온 인류가를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 중에 약속을 씨를 잘 낳게 있도록 철저히 신앙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직계후손도 복을 받을 수 있지만, 땅의 모든 이방민족까지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다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이 많아지고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것만을 알아서는 안 되었다. 즉 아브라함이 받는 복이 자신의 개인과 가문의 축복으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 그 방법까지도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자기자식과 후손들에게 그것을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실로 아브라함에게도 장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한 번 듣고 배운 것은 잘 알아듣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해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택한 이유라고도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한 번 들으면 그것을 후손들에게 잘 전달해줄 수 있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이 일러주신 방법을 따라 출애굽2세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첫째,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둘째, 그것을 그들의 자녀에게 부지런히(반복하여, 거듭 말하여) 가르치라. 셋째,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에도, 그리고 누웠을 때나 일어날 때에도 그것을 말하게 해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의 말씀을 보이는 곳에 매달아 놓거나 붙여서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라(신6:6~9)." 그렇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이 한 번 듣고 잊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가문의 대표만이 잘 알고 있으면 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 가운데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는 그로 하여금 모든 인류로 하여금 구원받도록 하는데 선두주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그를 불러내신 것이다. 

 

7. 나오며

  하나님께서 어떤 시작을 하실 때에는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안배하시어 그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어느날 그 사람을 불러내신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된 사람은 자기 혼자만 복받고 끝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그중에 아브라함이 들어있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약속의 씨를 낳아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얻게 하기 위한 시조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였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그가 쓰임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려고 하실 때에는 준비가 되어있을 때에 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수를 하더라도 절망한 필요가 없다. 실수를 통해서 배우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수하더라도 실수를 통해 배워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라.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다거나, 실수를 통해서라도 배우려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더이상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다. 그는 실수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러자 어느날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에게 찾아오셨다. 그가 실수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알아치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분 하나님께서는 직접 사람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인류를 향한 원대한 뜻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당신이 아들로 오실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 일을 끝까지 잘 완수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도 자신이 무슨 일을 감당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귀한 존재로 만들어 쓰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배워고 또 익혀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계시되기 시작할 때에는 나만이 아니라 나의 자식들과 후손들과 이웃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라고 하신 것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줄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0년 05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초기교회는 핍박으로 시작되어 순교의 피를 흘리는 역사였다. 그때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그런데 이제 순교자의 숫자를 마감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싸인이 발견되고 있다. 순교자의 숫자가 차면 주님이 재림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는 핍박과 순교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가 되면 전혀 복음을 전파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자기신앙이나 지키는데서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 재림시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지금의 시기는 종말의 예언들 가운데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가?

2020-02-02(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기독교핍박의 시대는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가?(마10:16~23)
https://youtu.be/4dlEpG3mAn0


1. 들어가며

  기독교핍박의 시대는 얼마나 남았는가? 아니면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인가? 사실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때는 초대교회 때가 더욱 심했다. 그때에 기독교인들은 밤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 때문에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사교(사악한 종교)로 알려지게 됨에 따라 이상한 종교단체로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A.D.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는 갖은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A.D.90~96년경에는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의 핍박으로 인하여 원형경기장에서 화형을 당하거나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핍박의 시대는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싯점은 어느 정도 되는 싯점인가? 주께서 오실 날을 기준으로 지금의 싯점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지금의 이 시대에 우리가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종말의 신호(징조)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마24장을 읽어보면, 말세의 징조들에 관하여 예수께서 언급하신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자연계에 대한 징조"가 있고 "사람에 대한 징조"가 있다. 자연계의 징조에는 "전쟁과 지진,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 등이 있으며(마24:6~7, 눅21:11), 사람에 대한 징조로서는 "거짓선지자과 거짓그리스도의 출현"이 있다(마24:10,24).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할 것이라고 했다(마24:23~24).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마24:9). 그런데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수입해 들어온 세대주의자들은 말세의 가장 큰 징조를 이러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예루살렘에 "제3의 성전"이 건축되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예루살렘 성에 관한 70이레"의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살후2:4에 따라 적그리스도가 그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제3의 성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말세의 징조로서 과연 제3의 성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어떤 것을 언급했을까?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궁금증을 오늘 풀어보자.

  첫째, 말세의 징조로서 제3의 성전 건축은 합당한 것인가? 말세의 징조로서 예루살렘에 제3의 성전이 건축되어야 하는가? 세대주의자들은 이것을 말세의 가장 큰 징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단9:24~27)을 제3의 물질적인 성전건축과 연결지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은 종말에 관한 예언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백성과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운명을 말씀하신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은 69이레가 지나고 한 이레가 되면 메시야가 와서 그 마지막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그칠 것(히브리어 원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70이레의 예언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골고다 언덕에서 최종적인 속죄제사를 드리심으로 인류의 속죄제사가 완성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구약시대에 예표로 드려졌던 제사와 예물이 그쳐지고 진짜 사람제물이 드려짐으로 속죄제사가 끝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은 다르다. 그들은 다니엘의 70이레 중에서 69이레까지는 계속해서 순차적으로 예언이 성취될 것이지만 마지막 한 이레(7년)은 미래의 어느 시기에 완성될 것이라는 희안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해석하라는 말씀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의적인 한 이레(7년)은 먼 미래의 일로 해석한다. 그러니, 그들은 종말의 시기에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하려면  또 하나의 물질적인 성전이 있어야 하기에 제3의 물질적인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살후2:4에 나오는 "성전"은 물질적인 성전이 가리키는 단어 "히에론"이 쓰인 아니라, 영적인 성전을 가리키는 "나오스"라는 단어가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영적인 성전인 '교회'를 상징함)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대적하는 자는 교회 가운데서 신적인 숭배를 받으려 하는 존재로서, 중세로 치자면 교황같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세의 징조로서 제3의 성전의 건축의 가설은 합당하지 않다.

  둘째, 사도요한은 말세의 징조로서 무엇을 언급했으며, 세상 끝날까지는 어떤 일이 계속 진행되는 것일까?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징조로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똑같이 해와 달과 별들의 이상(여섯째 인)이 있을 것을 언급했다(마24:29~31, 계6:12~17).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순교자들의 호소(다섯째 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계6:9~11). 이로서, 말세직전에는 짐승들의 핍박에 의한 환난과 순교가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계6:8).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에 또다시 핍박과 순교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것을 지금처럼 계속 진행될 것이다. 지진도 일어나고, 화산도 폭발하고, 전쟁도 일어나며, 기근과 전염병도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천국복음도 계속 전파될 것이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4:14). 그러니까지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남자들이 밭에 나가서 일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둠을 당할 것이며, 여자들은 한 집안에서 멧돌을 돌리다가 한 여자는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자는 남겨둠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회개해야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첫째인을 떼었을 때에 흰 말이 튀어나와 면류관을 받기까지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계6:2). 그리고 두 증인들이 나와서 모세처럼 십계명의 준수를 외치고 세례요한처럼 회개를 외칠 것이다(계11:3~7).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까지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2020.02.02)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의 창궐은 말세에 있을 징조들 중에서 자연적인 징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끝날의 징조는 아닌 것이다.

 

3. 말세에 있을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렇다면, 말세에 있을 그리스도인들에 핍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것은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짐승에 의한 핍박이다(계13:1~10). 이것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첫째짐승(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짐승)에 의한 핍박을 가리킨다. 이 첫째짐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후 불법죄로 무저갱에 갇혀있는 사탄마귀가 대신 자신의 부하들을 올려보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제2인자로서 활동하는 천사(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임)가 있으니 그가 인간 제국의 황제(왕)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구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오순절이후에는 교회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구바벨론제국의 니므롯이 시초이며,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왕도 여기에 해당하고, 헬라제국의 알렉산더대왕도 마찬가지이며, 로마제국의 네로황제나 도미시안황제, 트라얀황제 등도 여기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는 중국의 최고지도자나 북한의 최고지도자도 이러한 부류에 해당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첫째짐승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사람으로서, 하나님(예수님)을 믿는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둘째는 거짓선지자에 의한 핍박이다(계13:11~18). 이것은 땅에서 올라오는 둘째짐승으로서, 하나님(예수님)을 믿는 자들 가운데 성도들을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그것을 듣지 아니하면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을 사도요한은 "어린 양같이 두 뿔을 가졌으나 용처럼 말하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계13:11). 그들이 "거짓선지자"라고 불리는 것(계16:13, 19:20)은 이들도 역시 음부에서 올라온 사탄의 세번째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지도자를 속에 이 천사가 들어가서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서는 중세시대의 로마카톨릭의 교황 중에 많으며, 지금의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종들을 핍박하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있다. 이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 할지라도 범죄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가르치지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며,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축소하거나 가르치지 않으며,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라도 그것을 끝까지 지켜내야 구원받는다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이다. 

 

4.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박해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박해는 사실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특히 2018년 1월 이후 중국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종교활동을 규제 제한하고 있으며,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 교회지도자들을 억압하거나가 가두고 있으며, 중국정부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교회는 가차없이 퍠쇄조치를 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사실 종교단체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다 정부의 승인하에 허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으려면 교회는 중국정부를 지지하고 그 가르침을 전파하며 전면적으로 복종하고 공산당의 지도자를 따라야 승인해준다. 그리고 승인한 교회(삼자교회)라고 CCTV를 설치하여 매순간을 감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는 모든 교회는 지금 중국에서 불법종교로 간주되어 억압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중국정부가 기독교에 대해서 가하고 있는 조치로는 첫째, 십자가 철거. 둘째, 교회폐쇄. 셋째, 지도자 감금. 넷째, 선교사 추방이다. 그중에서 네번째로 선교사추방에 있어서 지금 대한민국의 선교사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2018년 이후 선교사들을 조사하여 중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는 선교사의 명단을 파악하고 하나씩 그 증거들을 들이대며 추방하고 있고, 또한 한 번 찍힌 선교사들에게는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현재 중국정부가 종교정책에 있어서 가장 신경쓰고 있는 것은 2가지이다. 하나는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외국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음세대들에게 기독교신앙을 전수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삼자교회나 가정교회에 아이들을 참석시켰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부모를 처벌하고 있으며, 학교에서는 기독교가 사악한 종교라고 매도하는 과목들을 종합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아이들에게는 집에서 부모님이 기도하거나 성경을 보면 학교에 보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친척 중에서 누구든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신고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특히 18세이하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교회를 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온라인에서는 아직까지 성경판매도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정부가 왜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기독교인들만이 공산당보다 예수님에게 더 충성심을 바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핍박과 고난도 달게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미움과 시기질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왜 콘스탄틴 대제처럼 할 수 없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중국내에 기독교신앙을 갖는 것을 허용하면서 중국기독교인들이 더 중국정부를 위해 더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할텐데, 왜 기독교를 핍박하여 눌러 공산당에게 충성을 바치게 하려 하는지,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중국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을텐데, 왜 근시안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5. 주님이 오시는 그 순간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러면 중국정부나 현재의 북한처럼 기독교인들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복음전파를 금지하고 자식들에게 신앙전파를 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더이상 복음전파를 하지 말고 내 신앙이나 지키고 살아가야 하는가요? 아니다.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시면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먼저는 세상이 이미 악한 자인 사탄마귀 아래에 있으니,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마10:16). 전파할 복음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복음이어야 하겠지만, 그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간교하기로 유명한 사탄마귀의 모습을 참고하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박해하면 저곳으로 피하라는 것이다(마10:23). 그렇다고 우리더러 간교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미 붙들려 핍박을 받을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할 수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서, 세상의 임금이나 총독들이나 공회 앞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하셨다(마10:17~18, 28, 22). 그들이 때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을 감옥에 가둘 것이며 때로는 채찍질도 할 것이다(마10:18). 하지만 그때에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염려하지 말고 그시에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 말하라고 하셨다(마10:19~20). 때가 되면 가족도 나를 버리고 신고할 것인데, 가족에게까지 미움을 받더라도 결코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말라고 하셨다(마10:32~33). 때가 되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요,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인류의 종말을 향한 시계는 지금도 째깍째깍 지나가고 있습니다. 곧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다. 복음전파(흰 말=첫째 인)와 더불어 전쟁(붉은 말=둘째 인)과 기근(검은 말=셋째 인)과 전염병(청황색말=넷째 인)이 계속해서 지구를 휩쓸어갈 것이다. 그리고 짐승들에 의한 핍박으로 인해 순교자도 나올 것(다섯째 인)이다. 그러면 해와 달과 별들의 이상이 있을 것이고(여섯째 인) 주님이 공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일곱째 인).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날까지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흰 말은 계속해서 달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2월 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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