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49) 이방인 선교에 가장 적합한 두 인물은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가?(행11:19~26)_2022-09-30(금)

https://youtu.be/5WQ6dOgocLI  [혹은 https://tv.naver.com/v/29634766 ]

 

1.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누구였는가?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였다. 그런데 그 이유가 놀랍기만 하다. 베드로가 이방인었던 고넬료를 접촉하여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잘못된 일을 행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의 소식을 듣고 베드로를 비난했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선교 보고를 들은 후에 그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안디옥에서 일어난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친히 사람을 보내줄 수준으로까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곧바로 그들을 돌보아주고 지도해줄 지도자로서 바나바를 그들에게 파송했기 때문이다. 

 

2. 안디옥에서 어떻게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흩어진 헬라파 유대인(디아스포라 성도들)으로서 믿는 자들이 북쪽과 서쪽을 향해 나가면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베니게(페니키아)와 안디옥(안티오크)까지 복음을 전해주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의 섬이었던 구브로(키프로스)까지 복음을 전해주었다. 그렇지만 이 때만 해도 디아스포라 성도들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몇 몇 성도들이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헬라인(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께서 매우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의 손(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이방인이었던 안디옥의 사람들도 주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 안디옥 소식을 들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누구를 그곳에 파송했는가?

  그러자 안디옥의 복음전파 소식을 듣게 된 예루살렘 교회는 즉시 바나바를 파송한다. 참으로 잘 한 일이다. 그런데 그때 왜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에게 사도를 파송하지 않고 바나바를 파송한 것일까? 사실 바나바는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게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열려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곳도 역시 이방 지역인 구브로였기 때문에, 그는 이방인들과 접촉이 비교적 쉬운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믿음과 성령도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오게 될 때에 자신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다(행4:3~637).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을 잘 중재할 줄 아는 은사가 있던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니, 사울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서 예루살렘에 왔을 때에 아무도 그를 만나주거나 환영해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때 바나바가 맨 먼저 바울을 만나 그가 어떻게 주를 만났고, 주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들었으며, 예수님을 만난 후 다메섹에서 어떻게 주님을 증거했는지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형제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사실을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였던 베드로(사도들의 대표)와 야고보(평신도의 대표)에게 전달함으로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다(행9:26~27). 그리하여 베드로와 바울의 첫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처럼 바나바는 사람을 잘 볼 줄도 알면서 또한 사람을 잘 권면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처음에 바나바를 알아보고는, 그의 이름이 원래는 '요셉'이었으나 그들이 그의 이름을 바나바('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로 통했다. 고로, 이방인 지역이었던 안디옥으로 가서 이제 갓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도와주기에 바나바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안디옥에 파송하기로 한 것이다.  

 

4. 안디옥 교회에 큰 무리가 합류하자 바나바가 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이제 바나바가 안디옥에 파송됨에 따라 안디옥에서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나바는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일전에 자신이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에게 소개해주었던 새로운 회심자 사울을 찾으러 길리기아의 다소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니, 이때 바나바는 다소를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사울(바울)을 찾았다고 나와 있다(행9:25). 그만큼 바나바에게는 사울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은사는 사람을 잘 관리하는 것이라면, 바울은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하여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안디옥 교회가 튼튼하게 성장하려면 사울의 도움이 그에게는 절실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경에 능통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은 직접 주 예수님을 뵙고 자신의 사명까지도 들었던 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사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주님이 직접 선택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다소에 가서 드디어 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교회에 돌아온다. 그리고 둘은 1년간 서로 협력하면서 복음 사역을 펼치게 된다. 

 

5. 예루살렘 교회와 바나바의 결정은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안디옥에 사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왜냐하면 이제 갓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나 어떻게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초신자들을 다독거리면서 돌보아야 줄 부모와 같은 양육자로서 바나바처럼 적합한 이물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대상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교제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그들에게는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일을 감당하기에 바나바처럼 적합한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몰려오는 수많은 신자들을 바나바가 혼자서 감당하기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는데 자기의 능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약 7~8년전에 만났던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사역자로 데리고 오려고 결정하였다. 이것 역시 신의 한 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특별히 작정하고 보낸 사명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고 또한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역자로 쓰실 때에 그냥 아무나 함부로 사용하시겠는가? 그리고 더욱이 사울은 바나바가 그를 부를 때까지 무려 10여년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사울은 아라비아에서 약 3년을 보내었으며, 예루살렘 방문 후에는 자신의 고향 다소로 돌아가 약 7~8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울은 자신이 이방인 복음전파의 사역자로서 쓰임을 받기까지, 적어도 10년간을 준비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박학다식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온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교만함을 다 내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의 복음증거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합류로 인하여 놀라운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도 아니며 유대교를 믿는 자들도 아닌 새로운 분파였기 땝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최초로 안디옥에서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2022년 09월 3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3) 사울은 훗날 자신의 영적인 무지를 어떻게 고백하였나?(행8:1~3)_2022-08-18(목)

https://youtu.be/ME5nqv_Jn8Q  [혹은 https://tv.naver.com/v/28646544 ]

 

1. 청년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는가?

  청년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은 한 마디로 그의 영적인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훗날 과거 자신의 영적 무지를 시인하고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영적인 무지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고 회당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비방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이다(행8:3, 9:1~2, 22:4~5, 26:11). 

 

2. 그는 훗날 자신이 유대교에 있었던 때를 어떻게 고백했는가?

  그가 변화되어 첫 번째로 선교여행을 다녀와서 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그가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갈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파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동년배)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들]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며, 율법을 무시하는 그들은 분명 잘못된 자라들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니 하나님이 계시고 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조상들의 전통들에 대해서도 매우 큰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무시하고 정결법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들 곧 율법을 무시하고 전통을 무시하는 예수 믿는 이들을 처단하여 반드시 본 때를 보여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선교여행을 하면서 맨 처음에 세웠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게 자신의 과거의 고백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이다. 

 

3. 사도 바울이 몰랐던 첫 번째 영적인 무지는 무엇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훗날 자신이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잘못 행했던 것을 고백하였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중점적으로 나온다. 

  먼저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못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가기 위해 주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을 깨달은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 앞으로 나아가 그분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잘못된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430년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갈3:15~17). 고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범법함으로 중보자인 천사의 손을 빌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갈3:19). 다시 말해, 율법은 종인 천사를 통해 주어졌으니 율법은 종의 법이며, 믿음의 법은 아브라함의 씨인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니, 아들의 법인 것이다. 고로 율법을 지키면 종이 되는 것이고, 믿으면 아들이 되는 것이다. 셋째, 율법은 임시로 주어진 법이기 때문에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이다(갈3: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법을 주셨지만 믿음은 사라지고 육체적인 할례를 중요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죄를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넷째, 율법은 정죄하는 법이지 살게 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갈3:21). 하나님은 율법을 생명의 법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섯째로,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죄인으로 만드는 법이며, 믿음의 법은 예수님을 믿음을 용서받게 살게 하는 법이다(갈3:26). 여섯째,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지 장성한 자를 계속 율법 안에 가둬놓기 위해 주신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갈3:24). 고로 믿음이 온 후에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율법은 종노릇하게 하는 법으로서 정한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이다(갈4:1~3). 일곱째, 율법은 자체 의로운 것일지라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갈4:9). 율법은 종의 법이라 사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서워서 지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셔서는 상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믿음의 법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상이 뒤따라 온다는 것이다. 결국에 여덟째, 율법은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모형에 해당할 뿐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골2:17). 그렇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임시로 주어진 임시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임시법인 율법을 그만 실체인 줄 알고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 아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인 것을 깨달았으면 약속의 씨인 예수님을 붙잡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4. 율법이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율법이 '모형'이요 '그림자'라는 것은 율법은 실체이신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예표요 상징들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모세가 기록했던 모세 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은 다 예수님인 누군지를 알려주는 모형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말씀' 및 '빛'과 '생명'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은 둘째 아담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표상이며,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인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이나 성막법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실 예수님에 대한 모혐이요, 민수기 21장의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뱀은 자신은 죄가 없지만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시어 장차 십자가 위에 매달려 죽으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에 나오는 속죄일 제사의 아사셀 양은 우리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죽으실 예수님이신 것이다. 

 

5. 사도 바울이 몰랐던 두 번째 영적인 무지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사도 바울이 몰랐던 두 번째 영적인 무지는 그로 하여금 교회를 잔혹하게 핍박하고 파괴하였던 결정적인 이유였는데 그것은 그가 한 분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철저히 율법교육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또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신론으로 가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능욕하는 일이며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신으로 믿는 교회를 가만 놔 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냥 놔 두었다가는 유대교가 다신론화 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그가 바리새인 교육을 통해 구약성경을 달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박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눈은 여전히 구약과 유대교 안에 감겨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분이라는 것을 숫자적인 하나로 생각했기에 하나님은 결코 둘로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장차 아들로 갈 것이라고 말씀을 주셨다(창18:10,14).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것임을 분명하게 예언을 하였다(사9:6). 그리고 그가 와서 고난받고 죽으실 것도 예언되어 있다(사53장, 시22편). 그러나 그의 눈은 감겨 있었기에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롬9:5). 그러자 그는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신약성경의 절반의 기록들이다. 

 

 

2022년 08월 18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2) 사울 그는 왜 교회를 잔혹하게 멸절시키려 했을까?(행8:1~3)_2022-08-17(수) https://youtu.be/OftJ8WDWWA0 [혹은 https://tv.naver.com/v/28646960 ]

 

1.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했던 것일까?

  사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울은 잔인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그가 비록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아주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하나님의 경륜이 대체 무엇이며 그때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는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첫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영적 무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감히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믿어온 자신에게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하는 그의 성격과도 맞물려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진 혈기와 분노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요 빗나간 열심이었던 것이다. 처음 스데반을 죽일 때에 그의 마음도 약간은 꺼림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 사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담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다. 왜 그럼,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우상숭배자들이나 신성모독자들은 모조리 죽이라고 하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에부터 모든 경륜은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살리려 오셨고 죄인을 용서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부터는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되었다(마5:43).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후 믿는 이들이 자신과 사상적으로 혹은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핍박한다거나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의 경륜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도 빗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여버리면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3.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출세를 위한 최고의 기회가 그렇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이었다(빌3:5~6). 그래도 그의 지파는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켰던 베냐민 지파였고,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율법공부와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율법의 엄한 교훈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은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산헤드린공회원이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헤드린공회가 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여 그 일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출세에 최적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문제 대상 1호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눈엣 가시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4.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세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셋째로, 그가 사탄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울은 완전히 사탄에 붙들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이도록 미웠다. 왜냐하면 사탄은 파괴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요10:10). 사실 그때 사탄은 철저히 사울을 이용한 것이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울은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는데,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그로 하여금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일을 한다면 산헤드린공회원이 해야지, 청년 사울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산헤드린의 하수인처럼 예수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예수님을 비방하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했다(행26:11).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탄에 의해 그의 눈이 완전히 감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원문에는 비늘들)이 벗겨진 사실을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늘은 그냥 비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어찌 비늘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비늘은 뱀의 비늘이었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 단어는 물고기나 뱀의 비늘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로서 용과같은 큰 뱀의 비늘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의 눈은 완전히 뱀으로 충혈되어 있었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5. 오늘날에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이미 구약경륜에서 신약경륜으로 들어왔다. 구약경륜은 율법시대이니만큼 무엇이 죄인지를 알려주는 시대였기에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약경륜은 복음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우상숭배자라 할지라도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정죄나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해야 한다. 특히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핍박하거나 죽이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단사냥꾼 같은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교계에서 매장을 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살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경륜에 속한 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로마카톨릭은 자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가두었으며, 수 만 가지의 도구로 고문하고 죽인 숫자가 무려 6,000~8,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참으로 그들은 신약경륜 안에 들어온 자들인가? 진정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핍박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죽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는 자의 바른 삶이기 때문이다. 

 

2022년 08월 1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70)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호전적 기질의 베냐민과 그의 후손들(창49:27)_2021-08-05(목) 

https://youtu.be/tj43j4-CAO0  [혹은  https://tv.naver.com/v/21714599 ]

 

 

 

 

1. 베냐민은 누구며, 그의 부친 야곱으로부터 어떤 유언적인 예언을 들었나요?

  베냐민은 야곱이 낳은 12번째의 막내 아들입니다. 베냐민의 어머니는 라헬인데,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 후에 죽게 됩니다. 그녀가 죽어가면서 지어준 이름은 "베노니"였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의 이름을 바꿔 불렀습니다. "벤 야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막내가 강한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새롭게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베냐민은 막내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난폭하고 호전적인 기질을 다분히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죽기 전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준 환상에 따라, 베냐민과 그의 후손의 장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창49:27)" 그렇습니다. 야곱은 정확히 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냐민의 후손들은 매우 난폭한 용맹성을 가진 사람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2. 사사시대에 베냐민 지파가 저지른 망령된 일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사사기 20~21장을 읽어보면, 베냐민 지파가 저지른 망령된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던 기브아에서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자기 집에 도착 후 그 여인을 12동강이를 내어 이스라엘의 전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벌 떼처럼 일어난 11지파의 대표자들이 이 일을 의논한 후에 베냐민 지파를 만나 그 불량배를 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11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에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1지파의 40만명이 베냐민 지파의 2만6천명에게 두 번씩이나 패한 것입니다. 그러자 11개 지파는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에게 법궤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뜻을 묻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넘겨준다는 약속을 받고 다시 전쟁하여 결국 베냐민 지파 사람 2만 5천명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이스라엘의 11지파가 후회를 합니다. 갑자기 이스라엘의 한 개의 지파가 없어지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600명의 용사들을 위해 간신히 길르앗 야베스의 처녀 400명과 실로에 절기를 지키러 온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게 합니다. 

 

3. 그 어떤 다른 지파보다도 호전적인 용맹성과 기질을 가졌던 베냐민 지파는 어떻게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을까요?

  무모한 싸움인데 자신들의 용맹성 하나를 가지고 밀어 붙였다가 그만 씨가 없어질 뻔한 지파, 그 지파가 바로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 훗날 3가지 엄청난 일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에는 나라를 건져내었으며, 둘째는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간 후 바사(페르시아)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자기의 민족을 살릴 때가 있었고, 셋째는 예수님의 시대 직후에는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서 나왔습니다. 

 

4. 베냐민지파 사람 사울 왕과 모르드개가 행한 일은 무엇인가요?

  용맹성과 더불어 전쟁에 능했던 베냐민 지파 사람들, 그렇지만 기브아의 윤간사건으로 인하여 그 지파가 씨가 마를 뻔 한 일이 중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연약해진 베냐민 지파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이 나오게 되었으며, 민족을 구한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자기 민족을 넘어 이방인까지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과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와 사도 바울입니다. 첫번째 인물은 기스의 아들 사울(재위, B.C.1050~1010)입니다. 그는 씨가 마를 뻔 하였던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더욱이 기브아 사건의 중심지였던 바로 그 지역인 기브아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삼상9:21)"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2개 부족 공동체로 있었던 이스라엘 나라를 주변 이방민족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왕으로 선택받은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나라를 구한 사람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인물은 '모르드개'였습니다. 그는 B.C.563년경 바사(페르시아)제국에 살던 유다 민족의 하나였습니다. 그때 모르드개의 민족 즉 유다인들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 의해 전멸당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자기 민족을 건져내었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삼촌의 딸인 에스더를 당시 바사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게 하였고, 민족이 전멸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에는 에스더 왕비에게 고하여 민족을 구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베냐민 지파의 모르드개와 하만과의 전쟁은 2차전을 치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차전은 사울왕이 아말렉왕 아각과 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아각왕을 살려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유다의 후손과 아각왕의 후손들이 서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2차전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용감했던 모르드개와 더불어 "죽으면 죽을 것"이라는 각오로 왕을 알현하였던 에스더 왕비에 의해 하만의 궤계는 드러나게 되었고 아각자손들은 전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포로로 잡혀가 살던 소수민족인 유다 민족을 살려낸 인물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람 모르드개였던 것입니다. 

 

5. 신약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대체 누구며, 그가 행한 일과 야곱의 유언과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신약의 위대한 두 사도를 들라고 하면 단연코 그들은 '베드로'와 '바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어린 양의 12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게 된 또 다른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면 그는 바로 "사도 바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3:5)". 그도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롬11:1).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아주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저지르고 마는 아주 잔인하고 냉혈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충복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1:13-14)"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베냐민 지파의 기질이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과거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간증할 때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행26:10-11)"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물어뜯는 이리의 기질이 고스란히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오로지 그는 그때부터 오로지 복음과 예수님만을 붙잡고 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예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물어뜯는 이리처럼 달라붙어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서여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힘을 다했습니다. 아니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모든 이방인들도 다 베냐민 지파 사람인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전달받게 되었고 구원받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적인 유언에서 저주를 받은 야곱의 세 아들들(시므온, 레위, 베냐민) 가운데,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던 레위지파와 베냐민 지파만이 유다지파를 제외하고는 예수님 당시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두 지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저주는 얼마든지 끝내고 축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의 예표가 레위와 베냐민입니다. 우리도 이제부터라도 아브라함처럼 저주를 끝내어 내 후손들은 한량없이 축복을 받고 손대는 모든 일에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회개하는 일에 더욱 더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1년 08월 05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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