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살아있다고 하나 이름뿐인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어떤 잣대로 확인할 수 있는가? 여기 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방법이다. 그것은 2가지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나도 이러한 잣대로 늘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태하거나 안일한 삶으로 치달아 구원의 노정에서 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괜찮하고 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이것은 영적 전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점검하고 무장하지 않는 한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쳐들어오는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탄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기 위해 오늘도 힘써야 한다. 그것은 평생을 힘써서 해야 할 일이지 한 두 번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라도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는지 한 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도 알아보자. 그리고 도전해보자. 어떤 진리라도 그냥 얻어지는 영적 진리는 결코 없는 것이니까...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나온다. 이 일곱 개의 교회는 A.D.95~96년 당시 소아시아에 실재하였던 교회들 가운데 주님께서 소개하고 계시는 대표적인 교회들이다. 그 중에서도 다섯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 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앞선 두아디라교회는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중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해주고 있는 사데교회를 향해 우리 주님께서는 무슨 평가를 하고 계신가?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매우 가련한 평가를 하셨다. 왜냐하면 사데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 죽은 교회였다고 평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종교개혁시대의 교회가 죽은 교회로 변모해버린 것일까? 그리고 교회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을 가리키며, 어떻게 해야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사데교회 이후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러한 사데교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자.

 

2. 사데교회는 왜 두아디라교회와 함께 교회 앞의 지역의 이름이 복수인가?

  사데교회는 바로 이전에 등장하는 두아디라교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사데교회 이후에 등장하는 빌라델비아교회 및 라오디게아교회와는 또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소아시아 일곱교회들 가운데 특이한 이름부터 살펴보자.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가운데, 이름이 복수인 교회가 있다. 그것도 딱 두 개만 있다. 그것은 두아디라교회와 사데교회 뿐이다. 다시 말해, 다른 5개의 교회들은 다 그 이름이 단수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두 교회만은 복수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두아디라교회는 "두아디라들 안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데교회는 "사데들 안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말은 당시 소아시아의 두아디라 라는 도성이 2개 이상 있었고, 사데라는 도시가 2개 이상 있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주께서는 사도요한에게 도시의 이름을 복수형태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이 두 개 교회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다. 두아디라교회는 주지하시다시피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2개의 교회는 둘 공히 이 교회의 책임맡은 자 곧 말씀전파자인 주의 종들에게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먼저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교회에 용납하여 이 교회을 인도하는 주의 종이 이미 타락해 있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음행같은 것은 죄가 아니라는 가르침에 미혹되어 그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주의 종이 타락해 있는 교회가 바로 두아디라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니 우상숭배의 죄로 이 주의 종의 메시지를 듣고 따라가고 있는 자는 불못에 떨어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계21:8). 그리고 사데교회는 말로는 살아있다는 알려져있지만 실은 주의 종이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교회도 주의 종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교회였던 것이다. 그렇다. 이 두 개 교회의 지명들이 복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교회가 이미 주의 종들이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 있는 상태에 있었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이들 지도자들을 따라갈 수는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주의 종의 가르침을 따라가서는 같이 멸망할 수 있어, 교회에는 소속되어 있으나, 다른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개의 교회이나 공동체가 둘이 있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름 앞에 등장하는 지역명칭이 복수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3.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사데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있지만 실은 죽어있는 교회를 지칭한다. 여기서 죽어 있다고 하는 대상은 평신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이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의 종을 가리킨다. 그리고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목회자 자신도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는 성도들도 또한 같이 죽어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래도 이 교회 안에는 숫자적으로는 많지 않아도 진실한 평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데교회 안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흰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었다(계3:4). 그들은 늘 더럽혀진 자기의 옷을 예수의 피로 빨아서 희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일1:7). 그러므로 사데들 안에 있는 교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 부류는 흰 옷을 입은 무리들로서,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또 한 부류는 죽어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주의 종을 따라 평신도들도 영적인 측면에서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 있었다. 앞의 부류를 확대적용하면 빌라델비아교회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고, 뒤의 부류를 확대적용하면 라오디게아교회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데교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교회요, 확대판인 것이다. 그것은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소개에서 그러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의 경우는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전부다 계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따왔다(지금 읽어보라). 하지만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계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에서 따온 것이 없다. 새로운 표현들이다. 예수님의 모습과 자기선언에서 나오는 표현은 이미 에베소에서 사데교회 가운데 다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추가된 교회들인데,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사데교회의 확대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교회는 사데들에 속한 한 공동체로서 그래도 흰 옷을 입고 있는 무리들을 가리키며,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주의 종을 비롯하여 그러한 주의 종을 따라가고 있는 죽어있는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4. 라오디게아교회는 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 있었는가?

  그러므로 사데교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확대적용하면 그것이 곧 라오디게아교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떻게 되어서 죽어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을까? 요약해보면,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살아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죽어있는 교회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차겁지도 않고 뜨거워지지도 않는다. 이미 신앙이 화석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있다.

  첫째,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그들은 외적인 자신의 모습만을 바라보고서 자신의 내면도 그렇게 되어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다. 그들은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했고,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실재는 영 딴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사금산업으로 인하여 부자가 되어 있기에 자신들은 축복받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모를 팔아서 부요한 자가 되었기에 자신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부르기아안약을 팔아서 남의 눈도 고치고 자신의 눈도 고쳐서 돈을 많이 벌어놓았고 자신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기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우리 주께서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의 평가를 내리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평가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네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

  둘째, 이들은 믿음과 선행과 영적 진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댓가라도 지불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전혀 지불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계3:18). 그래서 그들은 한 마디로 죽어가고 있었다. 세상의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서 얻어냈지만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댓가지불하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도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듣기를 게을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진단해주는 말씀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들은 현재에 그냥 만족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로 살고 있고, 또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더욱이 주의 종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고, 자신도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둘 다 망하는 길이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은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리가 없으며, 그들에게 참된 복을 주실 리가 없다. 사실 우리에게 거져주시는 이신칭의의 은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라는 댓가가 지불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마25장의 열처녀의 비유를 보라. 신랑이 올 때에 미련한 처녀에게서 기름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거져 얻을 수 있는 기름이 그들에게 있었는가? 가서 사와야 했다. 늦게 댓가를 지불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지금 댓가를 지불하라. 지금 더욱 더 기도하라. 지금 더욱 더 진리의 말씀을 들으라. 지금 더욱 더 책망을 받으라. 지금 더욱 더 회개하라. 지금 더욱 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

 

5. 라오디게아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라오디아교회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로, 가능한한 빨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자각하고 깨어나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진리의 누룩같은 말씀들로 부풀려 있는 자신이 심각하게 영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날마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사데교회 안에 있었지만 이기는 자들로 남아있던 작은 무리들처럼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행실의 겉옷을 빨아 희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날에 이르러 이미 기록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계3:5).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은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수고와 노력 그리고 영적으로 자신을 무장하기 위한 애씀과 인내, 이런 것들이 없이 거져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날 죽는다면 순전히 주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날 죽지 않는다. 앞으로 수십년을 더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사탄마귀가 그 사람을 천구가도록 그냥 놔두겠는가? 결코 아니다.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여 넘어뜨린다는데, 어찌 믿음 하나로 시작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넘어뜨리려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상황이 두아디라나 사데교회의 상황이라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의 종도 이미 타락했거나 죽어있는 상태에 있으니 같이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천성적으로 쉽고 편한 길을 택하려고 한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쓰며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선택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무장하여 사탄의 온갖 교묘한 속임수와 유혹을 이겨내어 천국에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늘 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과 구원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댓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미 믿음으로 얻은 일차적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늘 기억해야 한다. 기적과 같은 절대적인 은혜로 애굽에서 탈출해나왔지만 교회생활을 대변하는 광야에서 애굽의 우상숭배의 습관과 불평불만하던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가나안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다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천국에 못들어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8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교회의 흥망성쇠는 어떻게 결정되는가?(계3:14~19)_2018-07-20(금)
https://youtu.be/SbxLg0ZTgRQ


1.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자신을 어떤 존재로서 소개하셨나요? 그리고 왜 그렇게 소개하셨던가요?(계3:14)


2. 예수께서는 자신을 "아멘이신 분"이자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는 진실로 참 말씀만을 증거하신 분이시며, 신실하고 거짓이 없는 분인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원문:시작)이신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라오디게아교회의 주의 종에게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라오디게아교회는 오직 책망만을 들었던 교회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교회의 주의 종이 지금 주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과는 반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주의 종은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신실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거으르고 나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그에게서 새로운 그 어떤 말씀(메시지)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었는 교회이자 주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주님께서 그 종을 입에서 토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만큼 주의 종은 뜨뜻미지근한 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가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이 교회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골4:13~16)


3.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쓸 당시였던 A.D.95~96년경 라오디게아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전인 A.D.60~65년경에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도바울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라는 여인의 집에 있었고 거기에는 신실한 형제들도 같이 있었습니다(골4:13~16).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 교회에 따로 편지(아직 발견되지 아니함)를 보낸 만큼 그 교회는 아끼고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A.D.95~96년경에 라오디게아교회는 영적으로 볼 때 빈사상태에 있었습니다. 추측컨데 사도바울의 전도를 받아 세워진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도바울의 온전한 가르침과 순종으로 복을 받아, 물질적으로 혹은 세상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지도자(?)가 바뀌자 이 교회는 게을러졌습니다. 그리고 주의 종도 진실된 책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주일에 신선한 메시지도 사라지고 진부한 메시지가 선포될 뿐이었습니다. 성도들을 깨우지 못하는 뜨뜻미지근한 설교가 줄을 이어갔고, 성도들은 영적으로 거의 죽어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가 이렇게 된 책임은 어디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나요?


4. 교회가 뜨뜻미지근해지고 게을러지고 영적인 것에 전혀 열심을 내지 않는 이유는 십중팔구는 목회자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때문에 교인들이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고 있었습니다(마23:15).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바로 서 있지 아니하면, 성도들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책망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바른 길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물질적인 복을 받고 있으니 자신은 복받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매우 가난하고 벌거벗은 채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교회를 책임지는 주의 종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까?


5. 사도바울은 올바른 주의 종이라면 다음과 같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고난들의 부족한 것들)을 오늘도 계속해서 채우고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골1:24). 둘째, 그 이유는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고도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골1:28). 셋째, 어느 정도까지냐면, 성도의 영혼을 위해 자신이 심판대 앞에서 계산할 자처럼 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히13:17). 넷째, 언제까지냐면,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제대로 된 일꾼이 되게 하기까지 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딤후2:15). 그렇습니다. 교회를 책임져야 할 주의 종들을 어떤 자들입니까? 바로 이러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온전케하는 데에 힘쓰고 있는 주의 종들을 위해 성도들은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까요?


주의 종들을 위해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역은 목회자를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 그리고 에베소교회에게 3가지 중보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첫째, 말씀의 문을 열어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잘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골4:3). 둘째, 주의 말씀이 퍼져나가(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며, 부당하고 악한 자들로부터 구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살후3:1~2). 이들은 틀림없이 유대인들일 것입니다(살전2:15~16). 셋째, 말씀을 주사 자신의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엡6:19).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것은 주의 종들의 입술을 통해서 주의 거룩한 말씀 곧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쏟아져나오도록 그리고 그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를 영접하면 선지자가 받을 상급을 바듯이 주의 종들을 대접하면 주의 종들이 받을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18년 7월 20일(금)
정병진목사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왜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책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군지를 소개할 때에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이"라고 소개하셔야 했을까? 사실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왔다.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의 마음 문 밖에 오랫동안 서 있으셨다. 밤서리를 맞은 채 몇날 며칠을 거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오로지 돈에 눈이 멀어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한 눈 먼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 우리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통해서 마지막 시기에 놓여있는 교회상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와 평신들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 어떻게 할 때에 과연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1. 들어가며

  라오디게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A.D.95년경 소아시아에 실재했던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서, 예수께서 지상에 있는 일곱교회 중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유형의 교회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부자교회이건만 영적으로는 뜨뜻미지근한 교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교회다. 그래서인지 이 교회는 부활승천하신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들었다. 그렇다면 왜 이 교회는 뜨뜻미지근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 이 교회의 사자였던 메시지 전달자(목회자)는 어떻게 되어서 뜨뜻미지근한 신앙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니 주님을 밖에 세워두고 오랫동안 있었던 것일까? 사실 겉으로 보기에 이 교회는 문제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첫째, 교리적인 부패와 타락이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이 교회 안에는 에베소와 버가모교회에 침투한 니골라당의 가르침이나 버가모교회에 있었던 발람의 가르침 혹은 두아디라교회에서 보여준 이세벨여선지자의 가르침과 같은 잘못된 교리들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유대인들이나 로마정부로부터의 핍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교회는 너무 부자교회로서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 왜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가 돈이 많아지만 문제가 되는 것일까? 따라서 오늘은 물질적으로 부자교회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이며, 어떻게 처방해야 구원에 이르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라오디게아 도시와 라오디게아 교회

 

1)라오디게아 도시

  라오디게아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등장하는 도시들 가운데 가장 부요한 도시였다. 왜냐하면 첫째, 이 도시에는 고리대금업이 발달하여 금융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 도시는 의과대학이 있었고 의술이 발달하였는데, 안과와 이비인후과가 이 도시의 전문치료기관이었다. 특히 부르기아 안약은 전 세계로 팔려나가고 있는 상품이었다. 셋째, 이 도시는 흑양모로 직조한 고가의 겉옷을 제작생산판매하고 있어서 많은 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A.D.60년에는 유래없는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도시를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 산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을 뿐더러, 병도 잘 치료받을 수 있는 참으로 부러움을 살만한 도시였다.

 

2)라오디게아 교회

  이 도시에 언제 교회가 세워졌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교회의 지도자가 상당한 부자였던 것만큼은 사실이다(계3:17).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칭찬 한 마디 없다. 오직 책망만 가득하다. 왜 이 도시의에 세워진 교회는 이렇게 책망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교회가 되어버린 것일까? 대체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 그리고 과연 이 교회는 촛대가 옮겨지지 아니할 수 있을까? 오늘은 이 시대의 마지막시기에 존재할 교회의 모형으로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소개된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우선, 이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주님께서는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 말씀을 하시고 있는 교회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기를 소개해오셨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예수께서 어떤 분으로 소개되어 있는지를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 교회에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것은 3가지 표현이 사용되었다. 첫째로는 아멘이신 분, 둘째로는 신실하고 참되신 분, 셋재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이 교회에게 자신을 먼저 "아멘이시요 신실하고 참되신 분"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이 교회를 책망하시기 위함이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와 정반대적 상황에 있는 교회도 있었다.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자. 이때 예수께서 자신을 말씀하실 때에는 그 교회를 어떻게 하면 칭찬하고 위로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서머나교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계2:8). 그분이 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죽음을 주관하시는 이이기 때문에 고난에 직면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놀라지 말라고 이러헥 자신을 소개하신 것이다. 그리고 빌라델비아교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계3:7). 이는 빌라델비아교회가 거룩한 교회였고, 참된 교회였으며, 구원의 문을 닫고 여는 권세를 사용하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그 반대상황이다.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소개하는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하기 위해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멘이요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신 분"이라는 말은 라오디게아교회가 책망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예수님의 자기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라오디게아교회는 "아멘"을 잘 안 하고 있다는 뜻을 의미하며, 신실하지도 않고 참되지도 않아서 증인된 삶을 전혀 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이"로 소개하고 있는 예수는 라오디게아교회를 진단하기를, 그 교회는 고쳐서 사용함으로 새롭게 될 수 있는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필요할 만큼 부패되고 타락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것을 피력하기 위해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교회의 지도자가 일찌감치 예수님을 방치한 채 문밖에 서 계시도록 오래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계3:20).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그때도 그분은 계속해서 라오디게아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에게 노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노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책망을 받을만한 교회이겠는가?

 

4.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너무 역겨워 토해버려야 할 만큼이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차겁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고 뜨뜻미지근한 신앙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듣는다고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너무 감격하고 뜨거워 주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모습도 전혀 없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 교회의 신앙의 미지근한 상태는 꼭 인근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식수의 온도와 같았다. 하나는 히에라볼리에서 내려오는 것인데, 출발할 때에는 온천수였지만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때에는 미지근해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식수는 골로새에서 올라오는 찬 물이었다. 그 찬물로 오는 과정에서 더워져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향해 히에라볼리나 골로새의 물처럼 뜨겁든지 차거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라오디게아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의 영적 상태였다. 그들은 정말 까마득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계3:17).

계3:17 [너는] [나는] 부자다. 그래서 부요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너는] 네가 곤고하다는 것과 그리고 가난하다는 것과 그리고 눈멀었다는 것과 그리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이미] 알아온 채 있지 않다(모른다).

  그렇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메시지전달자는 자신이 부자요 ,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고리대금업과 흑양모산업과 부르기아안약의 판대로 인하여 부자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적인 실상은 전혀 달랐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육체적인 판단과는 정반대로 그 교회를 진단하셨다. 그 교회는 스스로를 부자요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 교회는 영적으로 매우 비참한 상태에 있었고, 영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이 교회의 지도자와 교회의 성도들은 부르기아 안약과 같은 놀라운 의술 때문에 눈이 잘 보이고, 귀는 잘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만큼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 그들을 영적인 상태로 볼 때에는 그들의 전부가 다 눈병에 걸려 있는 상태이고,  귀가 멀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5. 주님께서 내리신 처방전은 무엇이었을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3가지 처방전을 내렸다. 첫째 처방전으로는, 그들의 육적인 상태에 있어서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셨고, 흰 겉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셨으며,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하셨다(계3:18). 왜냐하면 이 교회를 육적으로 볼 때에는 보이는 금덩이를 많이 가지고 있고 흑양모로  짠 비싼 겉옷을 입고 있었으며, 부르기아 안약을 발라 건강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의 진단은 정반대였다. 그래서 불로 연단된 금 곧 정금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리고 흑양모로 짠 겉옷을 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흰 양털로 만든 겉옷을 입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기야 안약을 사다 발라서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치료의 말씀을 먹어 먼 눈이 볼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다. 둘째 처방전으로는, 계속해서 열심을 내라는 것이었고 단번에 회개하라는 것이었다(계3:19). 그랬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열심히 식어버린 교회다. 말씀을 듣는 일에도 멀어지고 있으며, 기도하는 일은 더더욱 동참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주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교회가 더욱더 열심을 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잘못된 것들은 단호하게 회개하여 뜯어고치고 잘라내 버리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 교회의 지도자나 성도들은 회개만이 살 길로 제시되고 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은 100% 지옥행이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가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시고 있다.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배려를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 셋째 처방전으로는 주님을 마음 안으로 모여들이어 그분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라나는 것이었다(계3:20). 라오디게아교회에 편지를 보낼 당시, 이 교회의 주의 종도 주님을 마음 밖에 서 계시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오래된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셨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6. 라오디게아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다시 시작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축복을 약속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었던 겇럼, 주님께 충성하는 자에게는 자기의 보좌에 함께 앉게해 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가 될 수 없다. 그 어떤 이기는 성도도 아버지의 보좌에는 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유다. 누구든지 이기는 자가 된다면 그도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을 할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계20:1~10, 22:5). 그러므로 귀를 가진 자라면 성령께서 각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계:3:22)

 

7. 나오며

  그렇다. 사람은 혹시 잘못 행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문제는 자기가 어떤 문제에 빠져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라오디게아교회의 지도자는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어떤 영적 상태에 빠져 있었을른지 상상해보라.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지도자 및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다시 너희들과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이는 내가 사실 너희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너희들은 내게 마음을 열고 나를 영접한 일이 없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왜냐하면 너희들 안에는 오로지 금과 흑양모겉옷과 부르기아 안약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랬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이가 그들의 마음 밖에서 오랫동안 서 계셨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다시 그들 안으로 들어가려고 귿르의 마음의 눈을 노크하신다. 왜냐하면 아직 시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교회의 지도자와 평신도들은 자기들은 매주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십일조를 바치고 있으니,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큰 일이다. 이 시대의 교회지도자가 이런 상태에 빠져 있을까봐 말이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그렇게 판단하고 그냥 지내고 있을까봐... "오 주여! 이 시대의 교회와 주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회개할 기회를 주소서!"

 

 

 

 

 

아담의 범죄할 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파괴되기는 했어도 어느정도 남아있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어느정도 작동되며, 특히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에 어느정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어거스틴과 루터는 자유의지는 남아있지 않으며, 남아있다면 노예의지만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계3:20에서 문밖에서 서서 기다리시며 노크하시는 주님은 잘못된 행동인가? 오늘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남아있으며 그 의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을까 아니면 파괴되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기독교 초기 신학자였던 어거스틴(A.D.354~430)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A.D.1483~1546)는 "인간에게 만약 자유의지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종속되어있는 노예의지일 뿐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자기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의지는 없다"고 말하였다. 정말 인간은 더이상 자유의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서 선을 전혀 행할 수도 없고, 구원을 얻기 위한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을까? 오늘 우리는 지난주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교회와는 달리 정반대에 속한 한 교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가 문밖에 서있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까지 자유의지는 어느정도까지 필요하며,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과연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맨 마지막에 위치해있는 "라오디게아"교회다. 이 교회는 분명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면서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신 예수님께 속한 교회 가운데 하나다(계1:11,20,2:1).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이 교회를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하시고 있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인가? 이 교회는 뜨뜻미지근하여 주님께서 토해내버릴 만큼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교회였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구원얻을 영혼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다. 교회구성원 전체가 영적인 일에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분명 주님의 노크소리를 들었지만 예수님을 그때까지 계속해서 냉대해온 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셨다. 그 교회를 쳐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교회를 붙잡고 있었다. 왜 그러시고 있었을까? 차라리 그 교회를 생명책에서 지워버려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주님은 이 교회를 끝내 버리지 않고 계시다. 그날도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 밖에서 그들이 문열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3. 라오디게아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렇다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교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물질적으로 부자였던 교회여서 무슨 일에 있어서 어려움이 전혀 없는 넉넉한 교회였다. 둘째, 주변의 다른 교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도 없던 교회였다. 다시말해, 니골라당과 같은 이단의 공격도 그 교회에게는 없었다. 이세벨과 같은 거짓선지자가 주의 종으로 사역하고 있지도 않았다. 돈이 많은 동네에 위치한 교회여서인지, 로마황제를 숭배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황제우상숭배거부로 인하여 당할 고통들도 전혀 없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살지 않아 유일신을 신봉하는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항목이다. 셋째, 라오다게아교회는 영적으로 무력한 교회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어떤 영적인 필요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성장시키는 그 어떠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은 그들의 영혼과 장차 받을 하늘의 기업을 위하여 그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별로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진단은 이렇다. "너희가 '나는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너희들은 영적으로 볼 때 거지다." 그들은 영적으로 볼 때, 참으로 비참했고 가련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매우 가난했으며, 눈이 멀어있었고,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다(계3:15~17).

 

4. 주님께서는 왜 라오디게아교회를 쳐내버리지 아니하셨을까?

  그렇다면 주님께서도 이 교회를 정리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지를 잘라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촛대를 그냥 옮겨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꼭 붙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왜 그 교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대랼 3가지 정도다. 첫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를 떠난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씀을 듣는 예배의 자리에 그들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 구성원 하나하나가 아직은 죽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들이 회개하고 충성할 기회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이 회개하여 변화되기만 하면, 그들도 하나님나라를 위해 놀라운 일들을 행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이 비록 뜨뜻미지한 신앙을 지녔지만 그들의 신앙의 불은 아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잠재적인 능력이 언젠가 그리스도의 손에 올려놓아지기만 하면 그들도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5. 라오디게아교회를 위한 2가지 처방전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2가지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한 가지 행동을 하고 계셨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문한 처방책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첫째,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이었다(계3:19). 그 일을 위해서 댓가를 지불하라는 것이었다(계3:18). 둘째, 돌이켜 잘못된 것을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열심을 내라"는 것은 현재 명령형이고, "회개하라"는 것은 과거 명령형이다. 현재 명령형은 지속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므로, "계속해서 열심을 내라"는 뜻이며, 과거 명령형은 시급함을 동반하는 형태이므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예수님은 한 가지 행동을 하고 계셨는데, 그것은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지만 그들의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서서"라는 동사를 보니, 직설법 완료 능동태구문이다. 그리고 '두드리노니"라는 동사는 직설법 현대 능동태구문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문밖에까지 와서 서 있었던 것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날도 주님은 그들의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 주님께서 언제부터 거기에 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거기 오셔서 밤을 지새우셨는지, 추운 겨울에도 찾아왔었는지, 무더운 여름에도 찾아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고 그날도 서 계셨다는 것이다.

jesus-knocking-on-the-door-cecilia-brendel.jpg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느정도 남아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인간이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찾아오셔서 노크하신다고 할지라도, 문을 열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이 자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한 것이다. 만약 인간이 완전히 타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주님은 문밖에서 서 기다리시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허용과 수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6. 인간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길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계3:19에 나오는 주님의 처방전에 따르면, 2가지가 요청된다. 첫째, "계속해서 쉬지 말고 열심을 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즉시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그것을 실천하되 계속해서 도전해보고 또 도전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뭔가를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체질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지고 또 넘어질 것이다.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단번에 확실히 돌이켜 회개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그것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영적인 경건함을 위해 나아가야 할 자신을 위해 방해되는 것이 놓여있다면 즉시 쳐내버리시기를 바란다. 그것이 혹 말씀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너희들 스스로 그 일을 하기가 어려우면 내게 도움을 청하라. 나는 항상 너희들 마음 문 밖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단다." 그렇다. 나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행동에 옮기기가 정 어려우면 주님께서 문을 열어드리고 그분이 내 삶 속에 들어오시도록 허용하라. 그러면 전능자이신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이다.

 

7. 우리 주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성도들을 향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셨다. 그분은 "나는 아멘이요, 충성된 참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다"고 하셨다(계3:14).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첫째, 주님은 자신을 "아멘"이라고 하셨다. 즉 "나도 그렇게 됨을 믿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그렇게 되도록 해주시겠다는 뜻이다. 둘째, 주님은 자신을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은 거짓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신 말씀은 반드시 실행하시겠다는 뜻이다. 셋째,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이는 이전까지 그들이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 채 영적인 거지처럼 살아왔으나, 이제부터라도 결단하기만 한다면 새 창조의 놀라운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분이 지금 우리의 마음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은 능력이 적어서 밖에서 기다리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동의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들어와 일하시도록 결단을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이다.

 

8. 나오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유의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첫째는 영적인 일에 더욱 더 열심을 내는 데 사용하기를 바란다. 내 영혼과 천국을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라. 둘째,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잘라버리는데 자유의지를 사용하기 바란다. 어떤 것이 영적인 일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즉시 그것을 잘라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전능자를 자신의 인생길에 모셔들이라. 그분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초청하라.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하라. 그러면 그분이 일하실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새 창조의 역사를 쓰실 것이다. 건투를 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