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누구나 다 왕 노릇할 수 있는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을 창조의 시작이신 이라고 말씀하셨다(계3:14). 우리가 합당한 조건을 갖춘 자가 된다면 얼마든지 보좌를 창조하실 수 있는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천국에서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자가 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보좌 자리란 대체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할 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가? 여기, 그것의 5가지 열쇠들이 있다.

 

2022-03-2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천국복음(31) 천국에서 받을 상(3-4) 천국에서 보좌자리를 차지하는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2)(계3:14~2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ufOIGpX_MA [혹은 https://tv.naver.com/v/25945474 ] 

 

1. 들어가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쩌면 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순례객과 같은 것이다. 바로 천국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복 받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이자 그때에 주님께로부터 칭찬과 상을 얻는 자일 것이다(딤후4:7~8,18). 그렇다면 천국에서 성도들이 얻게 되는 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것은 총 3가지다. '천국 집'과 '면류관'과 '보좌 자리'가 그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천국 집'은 우리가 주님께 기도 생활 잘하고 예배만 잘 드려도 좋은 집의 재료를 확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 집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영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지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두 번째로 '면류관'도 상으로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을 받으려면 그만큼 주님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자들에게는 머리에 관이 쓰여지게 되는데, 그 모양이 월계관이나 왕관 혹은 티아라관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 면류관에 박힌 보석들도 다 그 종류와 크기와 모양과 색깔이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 천국에서 가장 귀한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셋째로 '보좌 자리'다. 그럼 보좌 자리란 어떤 상을 가리키며,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누가 과연 그러한 보좌 자리에 앉게 되는가? 오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2가지 말씀과 더불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3가지 조건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이 저 천국에 준비된 그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보좌 자리'는 어떤 상을 가리키며, '보좌에 앉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천국에 가면 성도들이 예배하는 시간이 있다. 다만 천국에서 드리는 예배는 헌금 시간이 없고, 설교 시간이 없을 뿐이다. 거기에서도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천국 성도들은 3층 건물 정도로 보이는 커다란 스타디움에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면 24반차 중에서 하나의 반차가 올라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때에 성도들 중에 보좌에 앉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좌석은 다 지정석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보좌 자리에 앉지 못한 채 서 있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린다. 왜 그러는 것일까? 그것은 보좌 자리라는 것이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아주 귀한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좌 자리란 천국에서 누리는 최고 수준의 상으로서, 천국에서 성도들이 갖는 지위와 신분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는 성도들 중에 일부가 144,000석 중에서 자신에게 마련된 보좌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그럼 천국에서 보좌 자리에 앉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천국에서 다스리며 통치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심판하며 분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스리는 자들도 사실은 2가지 계층이 있다. 하나는 왕으로 통치하는 자가 있고, 또 하나는 주인으로 다스리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왕으로 통치하는 자들은 그들이 다스릴 고을들이 있으며, 백성들이 있다. 그리고 주인으로 다스리는 자는 자기 집에 일하는 종들이 있다. 그들은 시녀(여자 일꾼)와 경호원(남자 일꾼)이다. 참고로 왕으로 통치하는 자들은 144,000석의 70줄의 좌석 가운데 1번 줄에서 6번 줄에 앉아 있으며, 주인으로 다스리는 자는 70줄 가운데 7번 줄에서 70줄 까지에 앉아 있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세상의 경우처럼 비참한 신분이라는 것은 아니다. 기쁨으로 와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들도 그를 목양하는 것이지 그들을 철장으로 치는 것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천국에서의 신분이 천국에서 크게 둘로 나눠지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와 섬기는 자로 나눠진다. 그럼 나는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어떤 신분의 그룹에 속하게 되는 것일까?

 

3. 천국에서 보좌 자리는 누가 차지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보좌 자리는 대체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허투루 사람들을 아무나 그 자리에 앉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한 대로 보상해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2).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천국에서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보상의 수준은 제일 약한 수준으로는 '천국 집'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중간 정도의 수준으로는 '면류관'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으로는 '보좌 자리'로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보좌 자리에 앉는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이기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기는 자'라는 말은 크게 3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숱한 역경들에 대해서 '극복하는 것'을 가리키며, 둘째로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는 '승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는 남보다 '우세하는' 자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이기는 자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당시 사도 요한이 쓴 일곱 교회의 편지 속에 들어 있다. 특별히 일곱 교회 중에서도 보좌에 앉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개의 교회 곧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과 라오디게아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 있다. 

 

4.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보좌 자리는 누가 차지할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누가 천국에서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2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인데, 어떤 것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주님은 구체적으로 2가지로 말씀해 주셨다.

  첫째는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계2:24~25). 당시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여선지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당시 두아디라 안에 있는 여러 교회의 주의 종들을 꾀여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역 조합이라는 조직에 들어가서 그들이 섬기는 수호신이나 우상을 숭배하고, 신전 창기들과 음행을 행하고, 그리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한 일은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성도들 중에 일부는 그녀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엄연히 잘못된 우상 숭배 행위요 음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고, 교회 밖에서는 사회적인 홀대를 받았으며,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들은 그녀의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들이 바로 이기는 성도 곧 역경을 극복하는 성도인 것이다. 이들이 바로 천국에서 왕 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사역을 끝까지 성실히 준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2:26~28). 그렇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천국 백성을 산출해 내고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하셨다(마4:23, 9:35). 이는 천국이 실상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때에 왕 노릇을 하는 자가 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여 천국 복음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전파하는 자이다. 구원받는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다(계2:26). 그렇게 되면 이들은 천국에서 섬기는 성도들을 목양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철장 권세를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5.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보좌 자리는 누가 차지할 수 있는가?

  이어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으로 누가 보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를 3가지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포함하여 다섯 가지 말씀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자가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 왕 노릇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보좌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나머지 3가지 조건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하셨다(계3:19). 여기서 열심을 내라는 말은 뜨겁거나 차겁거나 하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어느 때부턴가 뜨뜻미지근하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럼 그들의 신앙은 식어버렸으며, 죄에 대해서는 유야무야된 것인가?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적인 부요함 때문이었다. 그러자 주님은 세상적인 부요함 때문에 식어버린 그들의 신앙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시기를 촉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오늘날 육적인 일들에 만족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들에 열심을 품고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할 때에는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회개할 때에는 회개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이다. 천국 말씀 잔치가 열리면, 열심을 내어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하나님에 대해서는 히에라볼리의 온천수처럼 뜨거워져야 하겠고, 죄에 대해서는 골로새의 냉천수처럼 차겁게 거절해야 한다. 

  둘째, 세상적인 일이나 죄짓는 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라고 하셨다(계3:19).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어느새부턴가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그들은 부자로 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계3:17). 먼저 그들은 금융 사업을 통하여 집집마다 많은 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양모 사업을 통하여 검은색의 코트들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브루기아 안약 사업으로 인하여 육의 시력이 다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인 상태는 가련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으며, 영적으로 볼 때에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며,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의 눈들은 심히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계3:17).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처방전을 내리셨다. 주님으로부터 3가지를 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계3:18). 먼저는 불로 정련된 채 있는 금을 사라고 하셨다. 그들의 집에 있는 금은 불순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금이란 곧 주님이 이 교회에 자신을 소개할 때 했던 말씀처럼, 거짓말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사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아멘(참, 진리)이신 이,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신 이(계3;1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돈만 모으는 일로부터 회개하여 진리의 말씀을 얻는 것으로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처방전은 주님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흑양모 코트는 영적인 수치를 가리는데 아무런 효과를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신들이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서 돌이켜 이제 회개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단장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의 처방전은 주님으로부터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천국에서 진정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눈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함으로 고장난 눈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려면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던 일을 멈춰야 한다. 그것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셋째, 신랑되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고 다시 오실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3:20).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의 마음 문 밖에 서서 그들의 문을 두드릴 것인데 그때에 문을 열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 그것은 2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영적인 무감각에 빠져 있는 신부들을 깨우기 위해 주님이 오실 때에 그분을 맞아들임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아가서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나의 사랑, 나의 누이, 나의 어여쁜 자, 나의 완전한 자야" 라고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신랑되신 주님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하지만 문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둘째로, 주인이 오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 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눅12:36~37).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과연 주님께서 지금 재림하신다고 하실 때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언급한 다섯 가지 사항을 잘 준수하고 있는 사람인가? 첫째로, 세상적인 부와 쾌락을 추구해도 상관없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과연 거절한 채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분만을 따라갈 수 있는가? 둘째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하셨던 사역처럼 천국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셋째로,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가? 넷째로, 죄에 대해서는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있는가? 그래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다섯째로, 예수님과 친밀해지고 있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우리가 OK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천국에서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과 구속은 사실 믿음과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상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대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는 오늘 소극적인 일들 곧 거짓된 가르침과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인 일로서 영적인 일과 천국 복음 전파에,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재림 준비에 과연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아무쪼록 이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나침반이 되어서 우리 모든 성도들을 천국에서 보좌에 앉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2022년 03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영적 세계에서는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다 가진 자 같으나 주님 보시기에는 하나도 가지지 않은 자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건강을 가졌는가 아니면 지식을 가졌는가? 권력을 가졌는가 아니면 물질을 가졌는가?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서만 얻을 수가 있다. 자, 지금 나는 어떠한 영적 상태에 있는지 라오디게아를 통해서 주님이 내리신 처방전을 보라! 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2020-10-0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6)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 요한계시록 3:14~22 )
https://youtu.be/3TJSKMsYYfU [혹은 https://tv.naver.com/v/16065941 ]

 

 

 

1. 들어가며

  병원을 찾아간 환자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사가 진단을 잘못 내린 처방전 때문에 병은 낫지 않고 더 고생만 하는 것이다. 특히 수술을 해서 배를 갈랐는데 오진 때문에 다시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의사는 정확한 진단이 생명이다. 이것은 영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영혼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는데도 그 진단을 믿고 살고 있다면 그의 영혼의 문제는 더욱 더 악화될 것이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교회 곧 과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이사아 일곱교회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도 흡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과연 나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진단을 받아보고, 주님의 올바른 처방전에 따라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메시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실 요한계시록의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은 설교를 차지하는 본문이 있다면 오늘 본문일 것이다. "뜨뜻미지근한 교회"요, "물질이 주인된 교회"라는 주제로 많은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 더 알려진 본문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계3:20의 말씀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그림에서 특별한 것은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문은 밖으로만 열리는 문이기에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 수 없는 문이다. 그런데 문밖에서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 믿는 사람들에게 영접기도를 할 때에 이 말씀을 들려주면서 영접기도를 하곤 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이는 처음 예수믿는 자들을 위한 말씀은 아니며,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데도 어느샌가 자기도 모르고 예수님을 밖에 내놓고 자 곧 자기가 추구하는 것들로서 물질이나 명예와 인기 등이 주인되어 살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잘못된 정보는 무엇인가?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 가운데 잘못 알려진 정보가 최소 2가지 있다. 하나는 잘못된 예화 사용이요 또 하나는 이 교회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먼저, 이 교회가 뜨뜻미지근한 것은 이 도시에 흘러들어오고 있는 두 곳의 식수가 뜨뜻미지근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예화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이 도시에 오면서 뜨뜻미지근하게 되고고,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골로새의 차가운 냉수가 이 도시에 오면서 데워져서 뜨뜻미지근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팩트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의 식수는 이 도시로부터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니즐리"에서 직경 90cm되는 돌관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의미는 맞으나 예화가 좀 와전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이 교회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보통은 이 교회에는 황제숭배나 수호신숭배와 같은 우상숭배 강요가 없었으며, 그래서 고난과 핍박도 없었고 평온한 교회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 교회는 우상숭배와 황제숭배가 아주 만연된 교회였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도 그것이 우상숭배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가증한 행위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그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조금 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4.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은 무엇인가?

  그래서 주님께서 내리신 최종적인 결론은 이 교회를 입에서 토해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16절). 더이상 이 교회를 품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 교회를 버릴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예수님은 문바깥에 서 게셨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것은 3가지였다. 

  첫째, 불로 연단된 금을 주님에게서 사라고 하셨다(18a절). 그래서 자신을 부요하게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회를 영적으로 진단해보면 매우 가난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가진단은 달랐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교회 성도들은 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이 도시에 있는 3가지 특징 때문이다. 그 첫번째 특징은 이 도시가 동서양의 무역로에 위치해 있어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융업이 발달하였고 그러다보니 은행의 금고에 금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금 부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부자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지만 믿음이 큰 서머나교회가 부요하다고 선언하셨다(계2:8~9).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다보니, 자기들의 부자로 살게 된 것마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어떻게 되어서 부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이들도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상업조직에서 수호신들을 경배하고 있었고, 제사에 바쳐진 음식을 같이 나눠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정금같은 신앙을 다시 소유해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그들이 우상 앞에 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단지 "도시문화"라고 생각했고, "친교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순결하고 순수한 믿음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은 주 예수님 이외에 신이 없다고 하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 신도 있고 우리 신도 있는데, 다 자기 신을 잘 섬기면 되는거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믿음을 가진 자에게 우상은 없는 것과 같기에 그것에 절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잘못된 우상숭배의 교뢰가 교회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금같은 정련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자로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떨어져서 결국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께서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도록 흰 옷을 사라고 명령하셨다(18b절).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겉옷조차 입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옷들을 잘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도시의 2번째 특징인 "모직 직물" 산업 때문이었다. 라오디게아가 위치한 메안더강 상류인 리쿠스 계곡에는 풀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양떼가 많았다. 그것도 검은 양떼가 많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흑양모산업이 발달하였고 그것으로 고가의 옷을 만들어 팔아서 수입을 올리고 있었으니, 당시 소아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부티나는 옷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걸치고 있었던 사람이 이 도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그랬다. 그러므로 자기 딴에는 자기들이 옷을 잘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드에서 가서 수호신을 경배할 때 예수님의 옷을 벗어놓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랬다. 영적으로 음란한 짓을 하기 위해 그들은 주님의 옷을 벗어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회개하여 검은 털옷을 벗고 예수님만이 구세주인 것을 믿어 흰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순결한 믿음을 얻으려면, 그들의 신앙의 열정을 타올라야 한다고 권면하셨고, 그들의 회개는 냉철하게 하여 단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계속해서] 열심을 내라. 그리고 [단호하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3:19).

  셋째, 이제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멀어버린 눈에 바를 수 있도록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다(18c절). 이것은 이 도시의 세번째 특징과 관련이 있다. 이 도시는 의료기술이 매우 뛰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안과 의료기술이 뛰어났다. 왜냐하면 당시 이 도시에 "멘 카루"라는 신전이 있었고, 의료학교(오늘날로 치자면 단과대학과 같은 것이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치료의 신을 숭배하는 학교로서, 당시에 이 학교에 유명한 대학교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드향료를 가지고 "안연고"를 만들었고, 히에라볼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부르기아 가루 안약"을 만들었으며, 기름을 섞어 "안약"을 제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라오디게아 성도는 눈의 건강에 대해서만큼은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안약을 주님으로부터 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영적인 것을 도무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았던 바울도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하나님에게 원수처럼 행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부자로 살고 있었고 부족함 없었으니, 자기들은 영적으로부터 부요한 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눈이 멀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말씀을 들어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이기는 자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영혼에 대한 진단다운 진단을 받고 정련된 믿음을 갖기 위해서 열심을 내면서 회개하여 다시 흰 옷을 입는 자들은 어떤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2가지 축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는 현재적인 축복이요, 또 하나는 미래적인 축복이 그것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다시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0절). 왜냐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주인으로 맞아들인 자들은 다시 주님과 교제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적은 축복으고서, 주님께서는 장차 주님이 오실 때에는, 이기는 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21절).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이기고 승리하여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처럼, 이제는 그들이 이기는 자들이 된다면 주님의 보좌에 그들을 앉혀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요, "통치의 보좌"이기 때문이요, 주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위임하시고 또한 왕노릇할 것을 위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실행하셨으니, 지금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들을 위하여 심판과 통치의 보좌 24개를 더 만들어 하나님의 보좌 좌우 뒤편에 배치해놓으시고 계신다(마19:28, 계4:4, 딤후2:11~12). 그렇다. 뜨뜻미지근한 신앙에서 벗어나 순전한 믿음과 회개의 흰 옷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러한 축복이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6. 나오며

  주님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자신을 "아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다(14a절). 이는 예수께서 "아멘" 곧 "진실하시고 참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동안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허상을 진짜인 줄 알고 좇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육적으로 부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적인 부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이며, 죽어서는 죄값에 따라 불못에 들어가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무나 오래동안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온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소개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시면서 말이다. 말세에 과연 우리는 어떤 교회를 찾아가야 하는가? 첫째는 불순물이 하나도 들어가지 아니한 순전한 말씀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둘째, 회개를 외침으로 흰 옷을 입게 해주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셋째, 영적 분별력을 길러주고 키워주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만약 그런 교회가 내 교회가 아니라면 그러한 교회가 되어지도록 날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않으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그 교회를 밖으로 토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10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5)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36)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슨 죄를 지었을까?(계3:14~17)_2020-10-02(금)

https://youtu.be/oLRWmz7UHSI  [혹은  https://tv.naver.com/v/16041193 ]

 

 

1.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교회였나요?

  라디오디게아 교회는 A.D.95년경 소아시아에 실재하고 있었던 교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요한계시록 2~3장에만 나오는 일곱교회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더 많은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히에라볼리교회, 골로새 교회 등등 말이죠.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교회들 중에서도 단 일곱 개의 교회만을 샘플로 지정하여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일곱번째의 교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특징은 뜨뜻미지근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차갑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했기 때문입니다(계3:14~15).

 

2. 라오디게아 교회가 뜨뜻미지근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라오디게아교회가 뜨뜻미지근했다는 것은 그 교회가 신앙에 열심을 내지도 않았으며 죄에 대해서는 냉철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교회가 지리적으로 볼 때에, 두 개의 도시들 중간에 위치해 있던 것과도 매우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가 위치한 라오디게아 도시는 뜨거운 온천수로 유명했던 히에라볼리 도시와 차가운 물로 유명했던 골로새 도시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곳에서의 물이 라오디게아로 흘러내려오게 되면, 뜨거운 물도 미지근해졌으며, 차가운 물도 역시 미지근했졌기 때문입니다. 

 

3. 이 교회가 뜨겁지도 않았도 차갑지도 않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이 교회가 뜨겁지 않았다는 것은 이 교회가 불순물이 하나도 섞여있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데 결코 열심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교회가 차갑지도 않았다는 것은 이 교회가 자신의 죄를 냉철하게 분석하여 회개하는 데에도 열심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교회의 신앙은 불순물로 이미 오염된 채 있었으며, 죄를 책망하는 지도자도 없었고 또한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탄식하는 성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4. 이 교회는 어떤 착각을 하고 있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계3:17a)" 그럼 이 교회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계3:17a).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잘 해왔기에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자기들에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셨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진단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구나. 왜냐하면 네가 가난하고 눈이 멀어있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있기 때문이다(계3:17b)"라고 진단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어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해 자기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볼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교회는 자신의 구주이신 주님께서 이 교회 안에 죄정해 있는지 혹은 밖에 서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5. 이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입에서 토하여 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3:16b). 이 교회는 교회로서 더이상 쓸모가 없을 뿐더러, 그 상태로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한 사람도 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 사데 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은 교회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데 교회에는 흰 옷을 입고 걸어다니는 몇 명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아디라교회는 이미 집단적으로 모두가 타락해 있으니, 교회의 지도자도 타락해 있었고 평신도도 타락해 있었기에, 그들 누구도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진단하지 못한 채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이미 오래 전에 이교신(수호신,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는 "문화행위"라는 명목으로 용인해 왔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친교행위"라는 목적으로 제물을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누구도 지적하거나 책망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천국가는 바른 믿음은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준 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은 순수한 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죄라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다시 회개를 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 교회는 자가진단능력을 상실한 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들이는 데에만 눈이 멀어있었기 때문입니다(계3:17a).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자였고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우상숭배를 열심히 행했으며, 우상의 제물도 이미 친교의 목적으로 먹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이 교회의 치유책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20년 10월 02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다 똑같은 주의 종들인데  왜 에바브라는 로마까지  찾아가서 바울을 만나야 했을까?(골1:13~20)_2020-01-13(월)

https://youtu.be/DyW-xigMk7c

 

1. 바울이 쓴 편지들 가운데 바울이 개척하지 않는 곳에 보낸 편지가 있나요?

  예, 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는 대개 교회에게 보낸 편지와 개인에게 보낸 편지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교회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 단지 2개의 편지만큼은 바울이 직접 개척하지 않은 교회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그 두 개의 편지는 "로마서"와 "골로새서"입니다.

 

2. 골로새교회는 누가 개척했으며, 골로새서를 쓸 당시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나요?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입니다(골1:7~8). 에바브라는 바울이 제3차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 있어서 두란노서원에서 3년간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때가 가서 공부한 사람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행19:10). 그런데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만 개척한 것이 아니라 라오디게아교회와 히에라볼리교회도 개척한 놀라운 인물입니다(골4:13). 그리고 에바브라는 그 교회의 다음사역자로서 '아킵보'를 지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라는 A.D.62~63년 골로새서 쓰여지고 있을 당시 바울이 갇혀있는 로마의 감옥에 와 있었습니다.

 

3. 골로새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도 아니며, 자신이 "아킵보"라는 교회지도자를 세운 것도 아닌데, 바울은 어떻게 되어서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고 있고 아킵보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게 신기한 일입니다. 잘못하면 타교회에 대한 월권행위가 될 수 있고, 그 교회가 바울이 쓴 편지를 거부할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떤 지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로 부르심을 입은 주의 종이 있음과 동시에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을 향하여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는 주의 종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의 디모데나, 골로새교회의 에바브라 그리고 빌립보교회를 세운 에바브라디도 또한  골로새교회의 아킵보와 같은 경우는 하나의 지교회에 담임하는 목회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들에게까지 편지를 써 보내었습니다. 그가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른 주의 종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개의 지교회의 담임목회자로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 새로 세우도록 부름받은 목회자였으며,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세운 교회나 목회자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우지도 않은 교회와 교역자에게까지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는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던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4. 과연 어떤 주의 종이 모든 교회와 다른 주의 종들을 행해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사도바울과 같은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나 사도베드로 그리고 사도요한과 같은 인물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속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떤 교회이든지 그들이 부여받은 권위를 가지고 책망을 하고 권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 어디에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그들의 부르심이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겠지만, 그들이 쓴 서신들을 통해서 그가 왜 그러한 쓰임받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가 이단의 세력이나 이단적인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일서를 보면, 사도요한은 영지주의 이단의 위험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들에 대해 꼭 집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의 경우를 보면,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을 더 고상하게 추구하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골자들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과연 어떤 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어떤 것이 귀신의 역사인가? 어떻게 해야 결국 사람이 구원바다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가? 종말의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존재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한 분인가 삼위일체하나님인가?" 등등에 조직신학적 지식에 관하여 명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 다른 교회와 주의 종들을 향해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는 것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셋째, 그들은 교회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행하고 있는 것을 책망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세계 모든 교회와 지도자를 지도할 수 있는 특별한 주의 종들인 것입니다.

 

5. 왜 아시아의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였던 에바브라는 굳이 감옥에 갇혀있는 로마의 바울을 만나러 간 것인가요?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였던 에바브라가 로마의 바울을 만나러 간 것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에게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성경지식과 지혜만으로는 그러한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는 골로새교회나 라오디게아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잘못된 이단적인 가르침 때문에 당시 교회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에게 조언을 구하러 그가 로마에 간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즉시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아마도 골로새교회와 같은 이유 때문에 편지가 보내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들 중에는 사도바울처럼 이단을 분별해내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주의 종이 특별히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역시 그러한 주의 종들이 더러 있으며, 그러한 사역자들이 전세계 성도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고, 잘못된 기존교리를 지적할 수 있고,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는 신학자들을 향해 과감히 책망의 말을 던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의 종과 교회가 이 시대에 참으로 귀합니다.

 

2020년 01월 13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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