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9) 왜 사도 바울은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는가?(행16:16~19)_2022-11-16(수)

https://youtu.be/kAEuxx7xkMs  [혹은 https://tv.naver.com/v/30826703 ]

 

1.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기도하러 가다가 만난 여종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만난 여종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퓌돈 영을 가지고 있는 어린 여종'이었다. 여기서 '퓌돈'이라는 말은 '퓌돈 신' 혹은 '점치는 영'을 가리킨다. 그렇다. 이 젊은 여자는 점치는 영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고용된 사람이었다. 즉 어떤 주인들에게 고용되어 점을 쳐주어서 자기의 주인들에게 이익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녀의 외침은 어떤 것이었나?

  그런데 그녀는 바울 일행을 뒤따라가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런 그들은 구원의 길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행16:17). 그녀가 외치는 소리만을 점검한다면 그녀는 정확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날을 외치고 다녔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귀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말이나 거짓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귀신들도 사실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녀의 외침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버렸다. 그러자 즉시 그녀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었다. 

 

3. 바울은 왜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했는가?

  바울이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그녀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적어도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녀가 계속 말하고 다니는 것을 그냥 놔두면 그녀와 바울은 한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취급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실 그녀에게 들어 있는 영은 귀신이요, 바울에게 들어 있는 영은 성령이기 때문에 둘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그냥 놔둔다면 사람들은 같은 영에 속한 자들이라고 취급할 수 있다. 그러면 복음 전파에 많은 방해가 될 것이다. 둘째, 그녀 속에 있는 영(귀신)보다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영(성령)이 훨씬 더 쎄다는 것을 분명히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 속에 있는 영은 귀신으로서 피조물이며, 바울 속에 있는 영은 성령으로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귀신에 매여 있어서 귀신에게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 그녀를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놓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난 후 그녀는 빌립보교회의 성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4. 성도 속에서 역사하는 영이 귀신의 영인지 성령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날에 교회 안에서도 무엇을 보았다 혹은 무엇을 들었다고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다. 심지어 교회에서 직분(이를테면 '권사')을 가진 분이 예언을 해 준다고 하는데 잘 맞춘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몰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성도들 가운데 무엇을 보거나 들었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예언을 해 준다고 할 때, 그것이 귀신이 역사하는 것인지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 만약 자기가 영안이 열린 사람이라면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영이 어떤 종류의 영인지를 영안으로 보아서 금방 판단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간 분별하기 힘들다. 그때에는 2가지 방법을 써 보라. 첫째, "권사님, 혹시 천사가 보입니까?"라고 질문해 보라. 만약 그 권사님이 천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분을 멀리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성도가 영 분별의 은사를 지녔다면 천사도 보고 귀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천사는 볼 수 없고, 귀신만 보인다면 귀신이 역사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라. 이런 분들은 보통 양신(성령과 악령)이 동시에 역사하고 있다. 둘째, "권사님의 조상들 중에서 1~4대 안에 무당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라. 만약 무당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을 멀리해야 한다. 양신이 역사하고 있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특히 회개를 모르는 사역자라면 더 더 위험하다. 

 

5.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귀신을 잘 쫓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계급이 매우 높았기에, 단번에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으며, 또한 귀신도 그녀에게서 즉시 떠나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 귀신을 잘 쫓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영권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영권이 높아야, 어떤 귀신이라도 복종하고 떠나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의 영적인 계급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적 계급이 낮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세계는 일종의 조폭 세계와 비슷하여, 철저히 계급 조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계급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기도하되, 회개하는 기도를 많이 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귀신이 자신의 몸에 많이 남아 있어서 귀신들끼리 서로 알고 장난쳐 버린다. 그러므로 귀신을 잘 내쫓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둘째, 기도하되 귀신을 쫓을 수 있는 은사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능력 행함'의 은사와 '영 분별'의 은사를 구하라. 여기서 '능력 행함'의 은사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이면서 또한 귀신을 내쫓는 은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귀신을 잘 쫓아내려면 '능력 행함'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만약 더 구체적으로 구하려면, 귀신을 내쫓는 은사, 귀신을 짓밟는 은사, 귀신을 태워버리는 은사, 귀신을 잘라버리는 은사, 귀신을 느끼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사역자가 되어 사역하려면 여기에다가 '영 분별'의 은사를 구하는 것이 좋다. '영 분별'이란 그 영이 선한 영인지 악한 영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은사를 가리킨다. 셋째, 회개를 하고 은사를 구했으면 직접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 귀신을 쫓아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영적 계급보다 더 높은 계급을 가진 귀신은 명령해도 잘 안 나갈 것이다. 때로는 그놈들이 나에게 덤벼들 수도 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명령해야 한다. 그러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도 나의 영적 계급을 높여 주신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높은 계급을 가진 자는 없다. 다 '소위'라는 계급부터 시작하여 소령이 되고 소장이 되고 대장이 되는 것이다. 해 보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2022년 11월 16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26) [아가서강해(16)]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해 잃어버린 주님,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아5:2~16)_2021-10-11(월)

https://youtu.be/8bdlLCTossw  [혹은 https://tv.naver.com/v/22937975 ]

 

1. 솔로몬과 결혼했던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신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아가서 3:6~11의 말씀이 결혼식의 풍경을 묘사해 주고 있다면, 4:1~5:1의 말씀은 피로연 때 신랑이 자기 아내를 자랑하는 말이자(4:1~7), 결혼 당일 날 신부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탄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아4:8~5:1). 왜냐하면 이 시기만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나의 신부'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서 5:2의 말씀은 결혼식 때가 조금 지난 싯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부터는 '신부'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랑은 그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했다(아5:2). 그런데 그때에 신랑은 밤 늦게가 되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러므로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자 신랑은 문을 열어 달라고 노크한다. 하지만 신부는 신랑을 외면한다. 핑계는 이러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힐 수 있을까?(아5:3)" 그런데 이러한 신부의 반응은 신랑이 집에 늦게 들어온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을까?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신랑이 밤늦게까지 이슬을 맞으며 늦게 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건 신부가 싫어서 늦게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부는 그때 즉각적으로 신랑에게 문을 열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신부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손을 내밀었던 신랑은 그만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왜 신랑은 그 자리에서 급히 떠나야 했는가? 신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랑의 부르심에 신부는 즉각 응답해야 함을 말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신랑은 왜 또 갑자기 신부 곁을 떠나야 했는가?

  밤늦게 이슬과 함께 돌아온 신랑은 그만 또다시 신부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그 이유를 두고, 신랑이 삐져서 떠나 버렸다고 주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신랑이 삐져서 신부 곁을 떠나 버린 것일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에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문 성경대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전후 문맥 상황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 사회 문화적인 관습까지도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성경에 나오는 비슷한 사례도 찾아보아야 한다. 때로는 어떤 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조명하심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신랑이 왜 새벽녘에 다시 그녀의 곁을 떠나야 했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주석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이후 되어진 일들을 보면, 그때 신랑은 그녀가 미워서 떠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녀가 남편을 찾아내었을 때에 솔로몬은 자기의 동산에 있었고 그곳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꺾여진 백합화를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렇다. 신랑이 밤늦도록 늦게 들어온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치는 양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 문제를 처리하다가 오다보니 그만 집에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하고 있을 때에, 또 양떼 혹은 백합화에 급박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급히 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백합화로 묘사되고 있는 신부들에게 중차대한 일이 발생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아침에 신부가 신랑을 보았을 때에는 그가 자기 동산에서 이미 꺾여진 채 있는 백합화(신부)를 주워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지상에 있는 신부 중에 누가 그만 순교하는 상황이 아니었겠나 생각이 든다. 

 

3.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린 신부가 자신의 신랑을 찾기 위해 첫 번째로 한 일은 무엇인가?

  갑자기 떠나가야 했던 신랑, 그러자 신부는 대충 숄을 걸쳐 입고 문밖을 나선다. 신랑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큰 소리로 신랑을 부른다. 그런데 불러도 응답이 없다(아5:6). 자신의 부주의로 인하여 신랑을 놓쳐 버렸다고 생각한 신부는 더욱 애절하게 신랑을 부른다.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신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혼자서 그것도 아무런 무장도 없이 그 늦은 밤에 성안을 두루 돌아다닌다. 신랑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그녀는 성안에서 순찰하는 자들에게 얻어맞기도 했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숄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녀는 신랑을 찾겠다는 오직 일념으로 성안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다가 그녀가 생각한 것은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탁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그녀가 끈질기게 기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녀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예비 신혼집에 있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예비신랑을 보지 못했던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만나기 위해 성안을 찾아헤맨다. 그때 그녀가 성안의 순찰자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한다. 자기가 찾는 대상이 누군기를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신랑이 그녀에게 불쑥 나타난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그녀는 초신자의 상황이었기에, 주님도 금방 응답하신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솔로몬은 이미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의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교양생활 하듯이 기도해서는 아니 된다. 간절히 찾고 부르짖어야 한다(렘29:12~13). 그것이 이미 신자가 된 자들의 기도의 형태인 것이다. 

 

4. 내게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될까?

  오늘날 우리들도 역시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누군가가 나의 문제를 놓고 중보기도해 준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자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중보 기도의 효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보기도는 아무나 해서 응답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때 남편을 찾지 못했던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기도부탁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그들도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으로 온 자들이다. 하지만 실제 신방 한 번 꾸려본 적이 없는 신부들이 그들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딸들은 솔로몬이 자기의 동산에 가 있을지라도 그 장소를 절대 찾아낼 수가 없다. 그들은 그렇나 장소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할 때에는 나 자신보다 더 영성이 약한 자들에게 부탁하는 일은 삼가할 일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에서는 보다 더 높은 계급의 신부가 보다 더 낮은 신부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했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측면에서 신랑을 찾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5. 잃어버린 신랑을 찾기 위해 신부에게 필요한 2가지 사항은 무엇인가?

  신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잃어버린 신랑을 찾을 수 있는 2가지 방법을 비로소 터득하게 된다. 첫째, 그것은 잃어버린 신랑을 찾으려면 신부는 최소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깊이 뉘우치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아5:8).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녀는 자기의 신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했었다. 이는 그녀가 깊이 뉘우치고 반성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랑을 찾지 못한 것 때문에 병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회개하기 전에 그녀는 성안에서 어떤 일을 당해야 했는가? 그녀는 성안에서 순찰하는 자들과 성벽을 지키는 파숫꾼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이들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활동하여 괴롭히는 악한 영들과 같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하고 신랑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원수의 영토에도 자신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잃어버린 신랑을 찾으려면 신랑이 누군지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했는가? 그녀는 무려 10가지나 되는 것으로 자기의 신랑을 자랑을 하고 선포를 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자랑했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명의 사람들들 중에 뛰어나답니다(으뜸이랍니다)(아4:10)". 이것은 그녀가 맨 처음에 솔로몬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 그를 고벨화 송이로 비유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적갈색의 고벨화는 흰색 바탕에 곧 자신은 죄가 없어 순결한 분이시지만, 바깥 쪽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세마포를 입으신 분을 지칭하는 것처럼, 신랑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랑이 어떤 존재인지 그때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난관 가운데서도 신랑의 모습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자랑하되, 10가지로 나눠서 자랑한다. 그런데 그녀의 이러한 간증은 수많은 악한 영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2021년 10월 11일(월)

정병진목사

 

성경에 보면 하늘의 종류가 세 개나 된다. 그중에 보이지 않은 하늘로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셋째하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셋째하늘이 열려질 때가 있다.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가? 또한 하늘의 문이 열려지게 되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래서 오늘은 하늘의 문을 관한 두 사람의 접근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늘의 문을 열 수 있으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021-01-1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두 개의 하늘(신)의 문(창11:1~9)
https://youtu.be/zkAkdKh1gZ4  [혹은  https://tv.naver.com/v/17847423 ]

 

 

1. 들어가며

  성경에는 두 개의 "하늘(신)의 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는 창세기 11장에 나오고 또 하나는 창세기 28장에 나온다. 창세기 11장의 주인공은 니므롯이고, 창세기 28장의 주인공은 야곱이다. 우리는 오늘 하늘(신)의 문을 마주 대하는 두 인물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두 사람을 통하여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하늘(신)의 문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는지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상당히 영화로서 제작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두 하늘(신)의 문에 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무얼 바라시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2. 하늘의 문은 열려진 채 있는 문인가 닫혀 있는 문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하늘의 문" 혹은 "신의 문"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 구약에서는 바벨탑사건(창11장)과 벧엘에서의 야곱의 꿈의 사건(창28장)이 대표적인 것이고, 신약에서는 스데반집사의 환상(행7장)과 사도요한의 환상(계4~5장)을 들 수 있다. 바벨탑사건과 벧엘의 사닥다리꿈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은 신약에 나오는 하늘의 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본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의 문"에 관한 기사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성경만으로는 스데반이 본 그 때의 하늘은 그때 열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미 열려진 채 있는 것이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선개역성경에 나온 말씀과 헬라어원문을 서로 비교해보도록 하자. 

행7:55-56[개역]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7:55~56[헬라어직역]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면서 그가 하늘 안으로 주목한 후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들로부터 서 계신 채 있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보라 열려진 채 있는 하늘과 하나님의 우편들로부터 서 계신 채 있는 사람의 아들(인자)를 보고 있다.

  그렇다. A.D.33년경 그날 스데반이 본 것은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이었던 것이다(완료 수동태 구문). 그때 하늘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때 하늘은 이미 열려진 채 있었던 것이다. 왜 스데반이 하늘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을 볼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오순절 이후 성령이 오시고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실 때부터 하늘의 문은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을 스데반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A.D.95년경 밧모섬에 유배된 채 있던 사도요한에게도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그때 사도요한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열려진 것이 아니라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들 안으로 사도요한의 영이 올라간 것이었다(계4:1).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만 해도 하늘은 닫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는 하늘의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인가?

 

3. 첫번째 하늘(신)의 문은 무엇을 가리키며, 그때는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첫번째 하늘(신)의 문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 11장이 나온다. 그런 그때 그들은 "하늘(신)의 문"을 열지 못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주제에 인간이 감히 자기를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신의 문에 도전을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주도자는 사실 니므롯이었다. 니므롯은 함의 손자다(창10:6~9). 그는 함의 장자인 구스의 아들로서, 함의 장손자였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최초의 강한 자였다고 소개한다. 그는 여호와를 반대하여 인본주의를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대적자로서, 당시 속담에 이르기를, "여호와를 대적하는 니므롯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인간 사냥꾼이 되어 사람들을 지휘조정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꼬드겼다. 그 사건이 바로 시날 평지에서 일어난 "바벨탑'사건이었다. 사실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의 아들들이었던 셈과 함과 야벳은 각기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떨어져서 살게 된다. 그런데 셈의 자손과 함의 자손이 시날평지에서 같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던 셈의 자손이그만 사람의 아들들이었던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성경 외에 야살의 책에 의하면, 니므롯이 데라를 그의 군대의 통치자로 세웠고, 그가 그를 위엄있게 하고 그를 그의 모든 통치자들 위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데라의 셋째아들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니므롯은 셈의 자손과 함의 자손을 일으켜서 이렇게 말했다. "자 벽돌과 역청을 사용해 성읍과 탑을 지어보자."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성을 쌓고 탑을 쌓으려고 한 것인가? 그것은 3가지 목적 때문이었다(창11:4). 첫째,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은 인간의 교만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감히 인간인 주제에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하늘까지 탑을 쌓을 수 있겠는가? 애시당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시작했다. 고대근동의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이때 만든 바벨밥의 크기는 무려 그 둘레가 3일길 거리였다고 한다. 얼마나 크게 탑을 쌓았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둘째,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다.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바벨탑을 쌓을 때에 벽돌 하나하나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넣었다고도 한다. 세상의 명성을 위해서 그들은 탑을 쌓았던 것이다. 자신이 죽어도 그 이름만은 후대에 남겨놓겠다는 속셈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그토록 원한다. 자신의 명성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이름만 높여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시90:4-6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시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셋째, 한데 뭉쳐서 흩어짐을 면하려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아담과 하와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령하셨다. 하지만 노아홍수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창9:1). 그런데 한데 뭉쳐서 고작 한다는 것이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높은 탑을 건축하고 감히 인간인 주제에 하늘의 문까지 탑을 쌓아보겠다는 시도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하는 그 시날성읍과 바벨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셨다. 그리고는 천사들과 함께(야살의 책에 의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앞에 선 70명의 천사들)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셨다. 그렇지만 어제까지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기억이 나지 아니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게 됨으로 인하여 자연히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흩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탑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혼잡(혼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근동의 자료에 의하면, 그 탑 이름은 "카딘기르키"라고 불렀고 전해진다. 그 뜻은 "신의 문" 혹은 "하늘의 문"이라는 것이다. 신들의 문에 도달해보겠다는 인간의 교만함을 함유하고 있는 이름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인간이 신의 문을 침범하기 위한 도전은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4. 두번째 하늘(신)의 문은 언제 나타났으며,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런데 두번째 하늘의 문에 관한 기록이 창세기 28장에 나온다. 이는 부모의 기도로 인하여 하늘의 문이 열린 사건을 말한다. 결국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놀라운 체험은 그의 부모의 기도에 의해 하늘에 문이 열리게 된 것이었고, 그 열린 문을 통해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금방 그것을 배웠다. 언제라도 닫혀진 하늘의 문은 우리가 기도하면 즉시 열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야곱이 엄마곁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거의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형 에서의 자유분뱡함에 비하면, 엄마의 치마폭에서 놀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와 짝자꿍하여 장자의 축복까지 빼앗아버렸기에, 형 에서의 분노를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엄마는 하루 아침에 두 명의 아들을 잃을 수 없다고 하고는, 자신의 오빠(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의 집에 자기의 아들 야곱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잠시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무려 20년이나 되었고, 야곱이 다시 돌아올 때에는 어머니 리브가는 이미 죽고 없었다.

  어찌되었든 야곱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창32:10), 또 한 손에는 다치면 바르기 위한 기름 한 병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창28:18). 그리고 밤이 되었을 때에, 야곱은 돌로 베개를 삼고 잠을 잤다. 그런데 꿈에 하늘에서부터 드리워진 사닥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위아래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사람이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바치고 기도응답을 가지고 오던 천사들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무엇인가를 수행하러 내려가고 내려오는 천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닥다리 꼭대기를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 계셨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야곱에게 그의 부모와 조부모에게 약속하셨던 것으로서, 땅과 자손의 축복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가 다시 벧엘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며 그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창28:15). 그런데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야곱이 받은 여호와의 말씀은 훗날 그에게 그대로 전부 실현되었다. 즉 외삼춘 라반이 야반도주하던 야곱을 죽이려고 쫓아왔을 때에 꿈에 야곱을 죽이지 못하도록 라반을 꾸짖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는 자신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는 기별을 받았으나, 야곱도 하나님께 밤새도록 씨름하듯 기도함으로 하루 아침에 달라진 에서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얍복강의 기도로 인하여, 에서는 이제 딴 사람이 되어 야곱과 야곱의 가족과 가축을 보호해주는 보호자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열린 문을 통해 영적 세계의 통치가 물질 세계에 임하니, 아무도 야곱을 헤치거나 상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그를 둘러 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잠을 자던 돌베개 위에, 자신이 가지고 온 기름을 붓고는 "두렵도다. 이곳이여, 왜냐하면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요, 이 자리는 하늘들의 문이기 때문이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서원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그 땅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으니 그날이후 그 땅 이름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의 "벧엘"로 바뀌게 된다. 야곱의 부모의 기도를 통해 닫혀 있던 문이 열려졌고, 또한 그 문을 통하여 하늘의 통치가 그말 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삼촌 라반에게는 야곱이 있을 때, 갑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이 손대는 모든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시고 그와 동행하시며 그를 떠나지 아니한다고 하셨기 대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두 명의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을 봉사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6년을 일했지만 품삯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하나의 제안을 한다. 유전학적으로 절대 잘 태어나지 않을 양과 염소가 나타면 자신의 품삯으로 달라고 것이었다. 얼씨구하 하고 외삼촌은 허락했지만 왠 걸, 실하고 튼튼한 것은 다 야곱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유전법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임재가 그에게 있으니 세상의 유전법칙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렇다.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야곱은 큰 축복을 받았다. 지팡이 하나 들고 얍복강을 건너왔지만,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두 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인 네 명에, 자식 12명이나 얻을 수 있었다. 자손번성과 가산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야곱은 이 땅에서 하늘의 영적 세계의 능력들을 맛보았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비록 꿈이었지만 사닥다리환상을 보았고, 서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영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약속을 받았는데, 그 약속은 그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행되어졌다. 곧 자신의 부친 이삭의 기도를 통해 벧엘의 체험을 했던 야곱은 혼자서 형 에서의 문제를 처리해야만 했을 때, 그는 얍복강가의 나루에 남아서 밤새도록 철야기도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만이 진정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저마다 한계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능력밖의 일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셋째하늘에 전능자가 계신다.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은 그분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오순절 이후 성령을 모신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3:16).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지금도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다. 찬찬히 살펴보면 바로 그런 자들이 성경책에 기록된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우리도 믿음과 기도를 통해 하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은 그러한 명당자리가 따로 있는 줄 알았으나, 신약에 들어와서 그것은 기도하는 믿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결국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 공간이 되며 동시에 열쇠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전3:16). 그렇다면 지금 나는 니므롯처럼 하늘의 문을 침범하려고 시도하는 인본주의적인 인물인가 그렇지 아니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오게 하는 신본주의 인물인가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다 후자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1년 01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26) 회개할 자범죄는 무엇인가?(07)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민14:26~38)_2020-12-21(월) 

https://youtu.be/u7Rc-mYd2UQ  [혹은 https://tv.naver.com/v/17371310  ]

 

1.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란 어떤 것인가요?

  원망이나 불평불만의 죄란 무엇인가를 두고서 못마땅하게 여김으로 탓을 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의 특징은 어떠한가요?

  원망의 죄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불평불만은 하면 할수록 더 눈덩이처럼 더 불어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쉽게 말해, 원망도 하다보면 더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 속에 원망과 불평불만의 생각이 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더욱더 원망과 불평불만은 꼬리에 꼬리를 달고서 더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원망의 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나와서 지었던 4가지 죄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광야에서 죽게 만들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 무서운 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때 그들이 지은 죄는 우상숭배의 죄, 간음의 죄, 시험하는 죄, 원망의 죄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은 했다고 할지라도 원망불평하는 바람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불만의 죄라 할지라도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불편한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는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인가요?

  원망이나 불평불만은 사실 자신이 의지하는 대상이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았다고 판단할 때에 드러내는 악한 마음의 표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를 짓는 대상은 대부분 부모나, 윗사람이나 하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때로는 그것이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는 결국 사람보다는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을 이러한 괴로운 처지에 빠뜨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현재의 어려움보다는 하나님께서 장차 복주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당장 내 앞에 주어진 어려움만을 보고서 불평불만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는 그 기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불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4.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원망의 죄는 언제 어떻게 일어났나요?

  성경에서 최초로 불평불만하는 사건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리고 시작은 출애굽한 직후 홍해 앞에서였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애굽에서 부리나케 탈출해왔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 자기들을 다시 홍해쪽으로 되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되돌아갔는데, 가보니 홍해바다의 막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쫓아온 애굽군대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민족이 최초로 하나님께 한 일은 원망의 말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출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대를 하고 애굽을 탈출해 나왔는데, 정작 와서 보았더니 자기들 생각에는 애굽만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광야같은 곳이었고, 그래도 믿고 따라가보았는데 막다른 골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에게 불신의 마음을 품고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굽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버리심으로, 이스라엘민족을 도망자의 신분에서 자유민이 되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민족은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장 죽게 생긴 현상만을 보고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가 되었는지 불평불만을 쏟아놓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일을 필두로, 광야에서 최소 10번이상을 원망의 말을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실 물이 없다는 것(출15:24)과 먹을 음식이 없다(출16:3)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반석을 쪼개어 물도 주시기도 하셨고,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을 것이 걱정없게 해주셨씁니다. 그래도 그들은 애굽음식이 더 낫다고 하면서 만나를 박한 식물을 싫어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한 뒤 약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가나안을 정탐했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은 뒤로부터는 그분의 원망의 분량을 더욱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5. 원망과 불평을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나요?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이 불평불만을 표출했어도 그대로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기적의 방법으로 문제들을 해결해주셨고, 또한 그들의 필요 곧 그들이 마실 물과 먹을 양식까지도 다 채워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가나안땅에 대해서 서슴없이 악평을 하자,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그들을 지켜보지 않으셨습니다. 이전까지는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나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셨지만,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불만의 마음을 더 드러내자 주님은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또 다시 가나안땅에 자기들을 데려다가 칼에 죽게하려고 하느냐면서 하나님께 항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입에서 말한대로 주께서 시행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민14:28-30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발설하는 모든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투정을 어린아이처럼 들어주시고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는데도 더욱더 불평불만에 더 집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을 했던 바대로 그대로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민14:28). 그러므로 정말 그들의 소원처럼 출애굽1세대들은 다 광야에서 죽게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기까지 3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감사의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자족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하나님의 베풀어준 은총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보은하리라는 마음의 자세는 원망과 불평을 잠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에 큰 힘이 되기 때문니다. 

 

2020년 12월 21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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