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를 하다보면 회개가 잘 안 될 때가 있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회개할 때에 가끔은 악한 영들에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회개를 하다보면 바깥쪽에 있는 영들이 떠나가서 안쪽에 있던 조금 쎈 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에는 꼬리를 내려야 하는가? 무서우니 회개를 그쳐야 하는가? 여기, 그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여기에 기록된 방법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반드시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2-04-15(금) 금요기도회

제목: [우상숭배죄회개(12)] 회개가 잘 안 되거나 회개했으나 문제가 더 꼬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벧전4:1~3)_2022-04-15(금)

https://youtu.be/nRqDHgPMRf4 [혹은 https://tv.naver.com/v/26320295 ]

 

1. 들어가며

  회개를 하다 보면 회개가 힘들어질 때가 있다. 언제까지 이러한 회개를 계속해야 하는건지, 또한 이렇게 회개하는 것이 과연 내 영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것을 매일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지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가 회개를 강조하지 않고 회개를 독려하지 않을 때에는 회개를 지속적으로 하기가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 기도할 때에 좋은 결과들이 나타나면 힘이 나서 더욱더 기도에 전념할 수 있지만 오히려 어려운 일과 부딪히게 된다면 기도할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를 포기할 수는 없다. 회개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개가 잘 안될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회개하고 있는 중에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오늘은 이러한 2가지 주제를 함께 다루고자 한다. 

 

2. 회개가 잘 안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를 해 본다고 하지만 회개가 잘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은 회개가 잘 안되거나 회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 답이 나올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회개를 해야 할 이유가 선명하지 않을 때에는 회개를 하다가 어느 날 중단하게 된다.

  둘째, 회개를 하고 있는데 얼마만큼 회개가 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악한 영들이 나갔는지를 모를 때에도 답답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여 회개를 중단할 수 있다.

  셋째, 회개를 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무작정 회개하다가 악한 영으로부터 공격이라도 받는 날에는 그만 두렵고 무서워서 회개를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때에는 회개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확실히 알고 회개하는 것이 좋다.

 

3. 우리가 회개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진정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회개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제대로 알게 되면 대부분은 회개를 끝까지 하게 될 것이며, 회개가 힘들더라도 회개를 지속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조상의 죄가 진정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회개를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회개기도문으로 회개할 때에 우리는 25가지의 죄를 회개하게 되는데, 그중에 4가지는 우상 숭배의 죄요, 나머지 19가지는 자범죄의 죄들이다. 그런데 앞의 4가지 우상 숭배의 죄들(조상 제사, 부처와 불교, 무당과 점쟁이, 미신과 잡신의 죄들)은 자기가 지은 죄들이라기보다는 조상들이 지은 죄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짓지도 아니한 우상 숭배의 죄를 왜 내가 회개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을 때에는 회개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둘째로, 회개를 했지만 조상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회개가 되었는지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해서 회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죄를 회개했을 때에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것이 보여지고, 또 얼마나 나갔는지를 체크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영성을 갖지 못한 채 있다. 그러므로 처음에 어떤 결과가 주어질 때에는 힘있게 기도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이내 회개를 그치게 된다. 그리고 셋째로, 회개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만 회개를 중단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의 공격이 무섭게 느껴지고 두려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다가 악한 영의 공격을 받으면 더 이상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4. 우리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조상들이 지은 죄를 우리 후손들이 회개해야 하는 것인가? 어떤 분은 말한다. 조상들의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하는 신구약의 선지자나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우상 숭배의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굳이 조상들의 죄까지 들추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핏 알고 있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에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조상들이 지었던 죄는 사실 십계명을 어긴 죄로부터 발생하기 시작하며 그것이 자신의 후손들 3~4대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저주로부터 벗어나려면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명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출20:4~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방인 교회 성도들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성도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그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우선 알 것은 십계명의 죄를 본인이 지키지 않을 때에는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그 죄값을 3~4대까지 묻겠다고 하시는 말이 그냥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쓴 편지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바, '율법의 행위'라고 말했던 것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 곧 정결법, 절기법, 제사법, 음식법, 할례법 등을 가리키고 있다. 즉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항목에 '십계명'이 들어가 있지는 않는 것이다. 십계명은 도덕법으로서 인간이라면 항상 지켜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십계명을 지키지 않았으면서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계21:8). 그러므로 성도들이 십계명법(도덕법)에 언급된 죄 곧 우상에게 절하고 섬길 때에는 그 죄값을 자손 3~4대까지 받는다는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섬길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을 영안을 열어서 보면, 각종 뱀들이 사람의 몸속에 치고 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칭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그 죄값이 여전히 후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안으로 보면,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조상들의 몸속에 들어가 있던 악한 영들의 약 1/3 정도가 그의 후손에게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상들이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요일1:9). 그러므로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3~4대까지 물리겠다는 법칙(출20:5)에 따라 그의 후손에게 들어가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상의 죄를 대신하여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 몸속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여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것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을 안 했다고 해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이러한 영들을 내보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일평생 이것들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어서 각종 어려움을 주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며, 우리로 하여금 병들게 하거나 물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버리고, 자녀의 앞길을 막아 버리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자백하여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것이 영적으로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를 믿고 있었지만 저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 제사의 죄를 회개하는 일은 구약시대에나 해야 할 일로 치부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

  둘째, 조상 제사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조상들이 지은 죄가 후손들에게 악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0~23). 그런데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유대인과 함께 하며 공생애를 사셨을 때에는 이러한 말씀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제자들 중에는 귀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죽고 부활하셔서 60년이 지난 후 예수께서는 이방인 교회들에게 써 보내라고 하셨던 말씀 중에는 조상들이 지은 죄가 후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직접 말씀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때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계2:20~23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그렇다. 이세벨이 주님의 종들에게 음행을 해도 괜찮다고 가르쳤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고 미혹했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의 종들도 역시 거짓 선지자인 그녀의 말을 듣고 그만 자기의 교회에 가서 황제 숭배를 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길드 상업 조직의 신들을 숭배하고 그들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지어 말하는 그녀의 죄를 책망하셨다. 그래서 그녀를 질병의 침상에 던지셨다. 그런데도 그녀는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의 우상 숭배 조장의 일로 인하여 그녀의 자식을 살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어찌 어미의 죄 때문에 자식이 죽어 나가야 하는가? 이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우리가 말한다고 한들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말씀보다는 우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는 전부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 만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언급하신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는 모두가 다 이방인의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대대자자손손 우상 숭배를 해 온 족속들이다. 그들의 조상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만약 이방인이 계속된 우상 숭배의 죄를 그치지 않는다면, 혹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질병으로 고통받게 될 것이며, 자신의 자녀가 죽어 나갈 수 있다고 주님이 경고하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조상들의 죄값을 후손이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어도, 부활하신 후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대한민국 성도는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고로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조상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받을 수 있는 폐해를 우리가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것이며, 우리의 후손들이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상들이 지었으나 끝내 회개하지 않았던 우상숭배의 죄들과 그리고 지금 짓고 있는 우상 숭배의 죄들을 대신하여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합법적으로 내보내야 한다. 이것을 다 내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제거할 때에 비로소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받게 되는 죄값을 우리가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5.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회개를 할 때에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그러한 방법이나 횟수를 알려 주는 성경 말씀은 사실 찾기 어렵다. 다만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를 사함(용서)받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의가 다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있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계속해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것도 내가 저주에서 벗어나고 후손들에게 저주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주님은 깨끗한 그릇을 쓰시기 때문이다(딤후2:20~21). 그렇다면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정확한 방법이 정해지지는 않았어도 회개를 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회개한다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첫째, [회개기도문]으로(없으신 동탄명성교회에 문의할 것) 120~160번까지는 매일 한 번씩 회개하기를 바란다. 

  둘째, 240~320번까지는 첫째로, 회개기도문을 읽은 후에 생각나는 죄를 같이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둘째로, 생각나는 죄를 회개했다면 그후에는 반드시 ‘십자가 세우기’를 하기를 바란다. 십자가 세우기 하는 방법은 여기에 있는 다른 영상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때 십자가 세우기를 할 때에 회개해야 할 영들은 얼마나 될까? 고르고 골라 보니 적어도 96개는 기본이다. 96개의 악한 영들 [96가지의 우상 숭배의 파생 영들]에 대해서 십자가 세우기를 하라(별첨으로 붙여 놓았음). 
  셋째, 회개하다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반드시 사역자의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특히 첫째로, 물질의 문제, 질병의 문제, 자녀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것이지만 악한 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회개하다가 둘째로, 악한 영들에 의해 회개 기도를 방해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럴 때에는 사역자에게 물어보고 회개하라.  
  넷째, 회개하다가 악한 영들이 드러날 때에는 악한 영들을 내보낼 수 있는 보조 방법을 사용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첫째로 금식하는 것이다. 금식 기도가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데 상당히 유효하기 때문이다(마17:21). 둘째로, 이방신들에게 돈과 제물을 많이 바친 경우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먼저 회개의 예물을 바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잘 나가지 않던 영들도 금세 떠나가기 때문이다. 
  다섯째, [우상숭배 회개기도문](동탄명성교회에 문의할 것)을 사용하여, 1대부터 시조대까지, 친가와 외가와 시가의 죄를 각 대마다 낱낱이 회개하기를 바란다. 이제부터는 조상들의 죄를 샅샅이 훓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회개로 인해 드러난 새로운 악한 영들이 떠나가기 때문이다. 
  여섯째, 자기의 조상들의 '세대' 1~4대와 그 윗대의 '가문'의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가문의 죄들이 많이 있을 때에는 그것들이 계속해서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주 이씨, 안동 김씨, 청송 심씨, 동래 정씨, 달성 서씨, 청주 한씨, 연안 이씨, 남양 홍씨, 파평 윤씨, 안동 권씨 집안은 폭력과 살인의 죄를 더 많이 회개해야 한다. 이러한 가문의 죄들은 하늘 공중에 세대와 가문의 영들이 되어 뭉쳐 있어서 우리의 기도를 차단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이것의 영향하에서 벗어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까지 잘 도달하게 하려면 세대와 가문의 죄를 또한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들이 떠나가야 우리의 기도가 그 영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잘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도 우리에게 잘 전달되기 때문이다. 
  일곱째, 이제 마지막으로 지역과 국가의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지역과 국가에는 그 지역과 국가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영들이 있는데, 이러한 영들을 회개할 때 하늘로 향하는 기도의 통로가 더 잘 열리기 때문이다. 

 

6. 회개할 때 어려움이 찾아오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종종 회개할 때에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아서 더 어려움이 증폭되는 일도 가끔씩 발생하게 된다. 정상적으로 회개하고 있더라도 그러한 경우가 가끔식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하면서 악한 영들이 바깥쪽에서부터 하나씩 떨어져서 분리되어 밖으로 나가는데, 그러다 보니 안쪽에 있는 영들이 어느 날에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쪽에 있는 영들이 강한 영일 때에는 직접 그 영이 들고 일어나서 회개하는 자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를 생각하여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고 그것을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할 때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방금 이야기했지만 첫째로, 회개하면서 조금 강한 영이 드러날 때에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영은 자신이 붙잡고 있는 몸의 어떤 부분을 직접적으로 친다. 그때 그것들이 우리의 장부를 치기도 하고, 우리의 머리를 치기도 한다. 너무나 큰 영이 심장을 붙잡고 있을 때에는 심장에 큰 충격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자신의 몸에서 어떤 반응이 나타나면 반드시 목회자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둘째로, 회개를 하고는 있지만 회개기도문에 나오는 죄를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짓고 있을 때도 역시 악한 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회개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동일한 죄를 반복적으로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동일한 죄를 계속 짓고 있으면서 입술로 회개하고 있으면 악한 영들이 우리의 죄를 빌미로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때에는 회개했던 죄목으로 다시는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죄를 혹시 지었다면 즉시 해가 지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회개를 하는 본인의 믿음이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귀신이 나가지 않는 이유가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러한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귀신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보다 귀신의 능력을 더 신뢰하게 되면 귀신이 우리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요한일서 5:18에 따르면, 그놈들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할 것이라고 주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 속에 계신 이가 귀신보다 크다. 귀신들은 피조물이며, 우리 주님은 그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영들이 인간보다는 조금 더 강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돈독히 가져야 한다. 내게서 예수님을 빼앗지 못하는 한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놈들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놈들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우리를 더 힘들게 할 것인지 적당선에서 할 것인지를 정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놈들은 단호히 맞서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귀신들의 계급이 나보다 더 클 경우 내가 공격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때에는 높은 계급을 가진 목회자나 축사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7. 나오며

  사실 회개를 해 보지만, 참된 회개는 진정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 때에라야 비로소 회개의 능력과 깊이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가 있다. 비로소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 때에 악한 영들이 작용하는 정도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때에는 자신이 지었던 우상 숭배의 죄들과 자범죄들을 같이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 우리들은 이제 내 아버지와 어머니,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 조상들이 지은 죄들도 함께 자백하며 회개해야 한다. 사실 우리들 속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 아버지에게 역사했던 영이 아니라, 한 다리 건너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역사했던 영들이 대부분 나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악한 영들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 악한 영들이 주는 저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럴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복을 비로소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회개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한두 번쯤은 기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상시적으로 더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사실 오늘날 70~80%의 문제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영들에 의해 내가 눌림으로 일어난 결과라고 보아도 그건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려면 자신이 지은 죄는 당연히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모와 고조부모의 죄까지도 반드시 낱낱이 회개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했던 것은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다 보면 내가 아무리 어릴 적에 지었던 죄라고 할지라도 그 죄는 다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다. 아니면 환상으로라도 보게 하신다. 우리가 본 죄, 그리고 우리가 체험한 죄와 더불어, 우리는 이제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등 4대 조상까지의 죄를 철저히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야 저주도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영안도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도 볼 수 있고, 지옥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귀신도 볼 수 있고 선한 천사들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악한 영들을 보는 대로 밖으로 떠나 내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회개를 하다보면 회개가 잘 안 될 때가 있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회개할 때에 가끔은 악한 영들에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회개를 하다보면 바깥쪽에 있는 영들이 떠나가서 안쪽에 있던 조금 쎈 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에는 꼬리를 내려야 하는가? 무서우니 회개를 그쳐야 하는가? 여기, 그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여기에 기록된 방법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반드시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2-04-15(금) 금요기도회 제목: [우상숭배죄회개(12)] 회개가 잘 안 되거나 회개했으나 문제가 더 꼬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벧전4:1~3)_2022-04-15(금) https://youtu.be/nRqDHgPMRf4 [혹은 https://tv.naver.com/v/26320295 ] 1. 들어가며 회개를 하다보면 회개가 힘들어질 때가 있다. 언제까지 이러한 회개를 계속해야 하는건지, 또한 이렇게 회개하는 것이 과연 내 영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것을 매일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지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가 회개를 강조하지 않고 회개를 독려하지 않을 때에는 회개를 지속적으로 하기가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기도할 때에 좋은 결과들이 나타나면 힘이 나서 더욱더 기도에 전념할 수 있지만 오히려 어려운 일과 부딪히게 된다면 기도할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를 포기할 수는 없다. 회개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개가 잘 안 될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회개하고 있는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오늘은 이러한 2가지 주제를 함께 다루고자 한다.  2. 회개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 3. 우리가 회개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진정 무엇인가? ... 4. 우리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 5.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 6. 회개할 때 어려움이 찾아오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 7. 나오며 사실 회개를 해보지만, 참된 회개는 진정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 때에라야 비로소 회개의 능력과 깊이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가 있다. 비로소 조상들의 죄를 회개할 때에 악한 영들이 작용하는 정도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때에는 자신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들과 자범죄들을 같이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 우리들은 이제 내 아버지와 어머니,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 조상들이 지은 죄들도 함께 자백하여 회개해야 한다. 사실 우리들 속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 아버지에게 역사했던 영이 아니라, 한 다리 건너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역사했던 영들이 대부분 나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악한 영들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 악한 영들이 주는 저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복을 비로소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회개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한 두 번쯤은 기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상시적으로 더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사실 오늘날 70~80%의 문제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영들에 의해 내가 눌림으로 일어난 결과라도 보아도 그건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려면 자신이 지은 죄는 당연히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무와 고조부모의 죄까지도 반드시 낱낱이 회개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했던 것은 보다 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다 보면 내가 아무리 어릴 적에 지었던 죄라고 할지라도 그 죄는 다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신다. 아니면 환상으로라도 보게 하신다. 우리가 본 죄, 그리고 우리가 체험한 죄와 더불어, 우리는 이제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등 4대조상까지의 죄를 철저히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살 길이 열라게 된다. 그래야 저주도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영안도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도 볼 수 있고, 지옥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귀신도 볼 수 있고 선한 천사들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악한 영들을 본 대로 밖으로 떠나 내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글 전체보기] https://dongtanms.kr/94037 [96가지의 우상숭배의 파생 영들 다운로드] (1)1번 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3013/037/094/af691e848edc3da12737f3d97df0127a.jpg (2)2번 https://dongtanms.kr/files/attach/images/13013/037/094/9b8ce4c9d535a13eb7579a3f51436393.jpg

 

2022년 04월 15일(금)

정병진목사

 

 

우리에게 금식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성경전체를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식을 명한 적이 있었는가? 이스라엘민족은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는 날(B.C.586년 5월 7일)을 기념하여 5월에는 전국민이 금식을 하였다. 하지만 18년이 지난 어느날 스가랴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때까지의 금식은 보여주기식의 형식적인 금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떤 금식을 해야 하는가? 어떤 금식을 참된 금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된 금식을 하는 자에게 어떤 복이 기다리고 있는가?

2020-02-05(수) 수요기도회
제목: 스가랴강해(08) 벧엘인들이 질문한 금식에 대하여 스가랴가 답변한 하나님의 뜻(슥7:1~8:23)
https://youtu.be/RX91d2fBp-U


1. 들어가며

   B.C.518년 9월 4일, 대제사장과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에 의해서 제2의 성전건축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스가랴선지자는 벧엘인이 보낸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그것은 예루살렘성전이 파괴(B.C.586년 5월 7일)된 이후 그때까지 지켜온 금식을 계속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때 스가랴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찾아온 그들에게 답변을 준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 7~8장의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벧엘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통해, 개인이나 민족은 어떤 경우에 버림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채워지는 복을 받게 되는지 그리고 참된 금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이 3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스가랴서의 7~8장의 위치는?

  스가랴서는 총14장으로 구성된 예언서이자 묵시서다. 스가랴서는 크게 1~8장까지 전반부와 9~14장까지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전반부(1~8장)은 다시 "스가랴가 본 8가지 환상(슥1~6장)"과 "금식에 관한 질문과 답변(7~8장)"으로 나뉘어질 수 있고, 후반부(9~14장)은 다시는 "메시야의 공생애에 대한 예언"(9~13장)과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예언"(14장)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볼 부분은 전반부의 뒷부분으로서 "금식에 관한 질문과 답변(7~8장)"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바사국 다리오왕 제4년(B.C.518년) 9월 4일에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들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에는 어떤 벧엘인이 보낸 사람들이 금식을 언제 그쳐야 하는지 질문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3. 왜 이스라엘 민족은 해마다 5월이 되면 금식하게 되었나?

  B.C.518년 9월. 그러니까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에 의해 다시 시작된 성전재건공사가 이제 2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떤 벧엘사람이 두 사람을 보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한 뒤에, 약 70년동안 성전파괴일에 맞춰 오월 달에 울며 금식을 해왔는데, 이제 성전이 다시 지어지는 있는 상황에서 금식을 지속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말씀셨다. 그것은 지난 7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5월과 7월에 금식을 해 왔는데, 그 금식이 어찌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었느냐며 책망하신다. 그것은 그 금식이 자기의 종교적인 체면치레를 위한 것이었을 뿐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금식기간에 애통하면서 금식했으나 실은 먹고 마시는 데에 더 치중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5월 금식일과 7월 금식일에 그들은 왜 금식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금식하였는가?

  첫째, 남유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5월과 7월에 금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아까도 살펴보았지만 남유다백성들이 5월에 금식하는 이유는 과거 5월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유다의 마지막 20대왕이었던 시드기야왕 11년(B.C.586년) 5월 7일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완전히 불이 타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유다백성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매년 그날에 금식을 시행해온 것이다. 그리고 7월에는 절기상 속죄일(7월 10일)이 있어서 모세시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7월이 되면 금식을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성전이 파괴된 이후, 7월 어느날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받은 그달리야마저 암살당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7월에도 역시 금식을 해왔었다.

  둘째,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방식으로 금식했을까? 일주일동안 물 한 방울 먹지 않고 금식했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을 써서 금식한 것일까? 그것은 본문의 말씀에 따라 해석해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처럼 낮에는 금식하나 밤이 되면 실컷 먹는 금식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금식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기의 체면치례를 위한 금식이었고, 오히려 그때에 더 잘 먹는 금식을 해온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금식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특히 금식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형식적인 금식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화나게 한다고 하였다.

 

4. 과거 북이스라엘(B.C.722년)과 남유다 백성(B.C.586)이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이후 이때까지 약 70년간 남유다백성들이 행하던 금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금식이라고 평가하셨다. 그러면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주신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슥7:9~10). 그들은 진실한 재판을 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풀지도 않았으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했으며, 서로를 해하려고 마음에 무엇인가를 도모했었기 때문이다.

  둘째,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매우 싫어했으며, 고집세게 등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리면서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틀어막았기 때문이다(슥7:11~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불렀으나 그들이 했던 그대로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았던 것처럼, 바벨론에 의한 멸망 때부터 현재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도 똑같이 행했었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여러 지역에 흩으셨고, 남유다는 저 멀리 있는 신바벨론 성의 여러 지역에 흩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땅을 황폐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5.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버림당할 수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백성이었지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슥7:11~12). 그들은 이미 기록된 율법말씀을 듣기를 거부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리기로 결정하셨다.

  오늘날에 들어와서 예수믿는 사람들도 버림당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잘못 행하면 그들에게 징계는 내릴망정 결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는 아니하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만 하셨는가 아니면 버리셨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다. 북이스라엘은 아예 흔적이 없이 사라지게 하셨으며, 남유다는 70년동안 바벨론땅에 버리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믿고 성령받아 구원받은 자라도 그가 계속해서 범죄한 채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계3:5). 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성도들을 끊을 수 없을른지 몰라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놓아버리면 우리는 당연히 버림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너무 늦으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성전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인가?

  왜 포로에게 귀환한 남유다백성들을 성전재건에 힘을 기울여야 했는가? 그것은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한 모든 일은 결국 재앙과 저주만이 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도 그 품삯을 받을 수가 없었고, 짐승도 마찬가지였으며, 원수들이 득실거려 왕 안에서 출입도 평안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를 믿지 못해 대적하는 상황이 계속될 뿐이었다(슥8:10). 이와같은 어려움을 학개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너희가 많이 뿌릴 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여,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뚫린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6)". 그들이 많은 것을 발했지만 도리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자기집으로 가져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어서 없애버리셨던 것이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하게 놔 둔 채 자기의 집을 짓기에 빨랐기 때문이라고 했다(학1:9). 그러니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땅과 산들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기근이 들 수밖에 없었다(학1:11).

  그러나 성전재건에 착수한지 2년이 지날 무렵, 하나님께서는 성전재건에 힘쓰는 남유다백성들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셨다. 첫째는 예루살렘에 평강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슥8:12). 더이상 전쟁이나 기근이나 전염병이 사라지는 것이다. 둘째,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이 소출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슥8:12). 농작물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힐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처럼 사람 뿐만 아니라 자연만물도 함께 복을 받는다. 셋째, 예루살렘성은 진리의 성읍이 될 것이고, 시온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일컫게 될 것이라고 했다(슥8:3). 그리고 넷째, 평화가 찾아왔으니 전쟁도 없고 질병이 없어져 사람들은 늙은이들은 장수하게 될 것이며, 젊은 이들이 자녀들을 많이 낳아 거리가 아이들로 북적일 것이라고 했다(슥8:4~5). 그렇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야 할 것이다.

 

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금식은 어떤 것인가?

  이제 하나님께서는 왜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수고를 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는지를 설명하신 뒤에,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금식의 절기들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슥8:18). 금식이란 음식을 먹지 않아 육체에 고행을 가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데에 그 목적과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며칠을 금식했네, 나는 지금도 금식하고 있네 하면서 자신의 금식을 경건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자들은 먼저 자신의 상태를 뒤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은 진정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자신의 삶은 그렇지 않은데 육체의 금식만을 실행하고는 자신은 금식을 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참된 금식은 진실한 재판을 행하고, 서로에게 인애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억누르지 않고, 서로 해하여로 악한 것을 마음에 도무하지 않는 것이다(슥7:9~10). 또한 이웃과 더불어 진리(진실)을 말하며(슥8:16),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이다(슥8:1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금식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축복을 더 주신다. 그것은 바로 주변이 많은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음을 알고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몰려온다는 것이다(슥8:20~23). 그렇다. 앞뒤가 다른 삶을 살아서는 우리의 주변과 이웃을 주님께로 이끌 수가 없다. 내 자식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데 어찌 남을 주님께로 이끌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된다. 형식주의나 요식행위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모든 것은 결국 저주와 재앙만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8. 나오며

  하나님은 어떤 경건한 행동을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가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신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금식에 빠져 있는 자를 결코 경건하다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실천적인 삶으로 우리의 경건을 나타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말은 번지르르 잘 하면서 실제 행동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결국 죽은 믿음으로 마지막에 가서는 주님으로부터 버림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오순절 이후에는 혹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어서 성령께서 슬퍼하실 뿐 떠나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더러운 행실과 회개하지 않은 완고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이가 대체 얼마나 될까? 우리는 경건한 행위가 자기 안에 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음성을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재앙과 저주도 어느날에는 복과 은혜로 바꾸어주실 것이다. 아니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인가 아니면 내 이익과 만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자인가? 이제부터라도 이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여서 변화된 삶을 위해 달려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0년 2월 5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참된 금식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일까? 금식의 내면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사야 58장에서는 그것이 속죄와 긍휼이라고 말한다. 왜 금식에 속죄와 긍휼이 필요한 것일까? 이와 더불어 긍휼을 베푸는 자와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일까? 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주일에 물건을 사고팔지 않았던 것일까? 안식일과 주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1. 들어가며

  금식이란 대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금식의 정신(코어)이란 어떤 것인가? 오늘날에는 금식기도로 많이 알려져 있는 금식의 방법은 어떤 경우에 필요한 방법인가? 그리고 금식기도의 축복은 또한 어떤 것인가? 더불어 금식에 대한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오늘 공부하게 될 이사야서 58장에서 금식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과 축복이 나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금식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해보면서, 금식에 대해 알아보고 금식을 승화발전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함께 찾도록 해보자. 그리고 금식이라는 주제 이외에, 긍휼을 베푸는 것과 안식일준수의 축복에 대해서도 함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이사야 58장의 위치와 주제와 내용

  잘 알고있다시피 이사야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눈다. 제1부(1~35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예언을 다루고 있고, 제2부(36~39장)에서는 히스기야왕 에 일어난 3가지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3부(40~6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 다루는데, 제3부는 다시 3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40~48)에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포로귀환예언을 다루고 있고, 중반부(49~57장)에서는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야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58~66장)에서는 신앙회복을 통한 이스라엘의 복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다루고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주에 이어서 이사야 제3부의 후반부의 서두부분인 이사야 58장을 다루고자 한다. 이사야 58장은 금식과 긍휼과 안식일실천를 통한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3.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이란 어떤 것인가?

  먼저, 금식부분(사58:1~9a)을 정리해보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이 행하고 있는 금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강하게 책망하신다. 그들이 밖으로는 금식을 행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실제로 내면적으로는 금식의 정신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58:1~5).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기뻐하는 금식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인지를 언급해주시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금식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사58:6~7). 그리고 참된 금식을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말씀하신다(사58:8~9a).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이란 어떤 것일까?(사58:6~7)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4자지 영역에서 일어나는 자유와 해방인데, 모두가 다 사회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금식의 주된 목적이 되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사58:6). 다시 말해, 우리가 금식할 때에는 억압(압제)당하는 자들을 놓아주기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 금식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환경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금식이 참된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와 활동으로 그러한 결과가 주어질 것을 천명하셨다. 그렇다. 참된 금식이란 사람을 영적인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희년의 선포자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여 영접하여 자기자신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눅4:18~19). 그렇다. 영적인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약시대에는 금식의 방법도 어느정도 통용되는 것이었으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금식보다는 희년을 선포자로 오신 예수님을 자기자신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에 들어와서 주님께서는 세례와 성만찬을 제외한 모든 의식들을 다 폐지시켜 버리셨다. 금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금식을 권장하신 일이 없다. 다만 금식을 허용해주시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지금 당장 펼쳐서 읽어보라.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금식을 명령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없다. 단 한 건 없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큰 일을 두고 금식하는 것에 대해서는 허용해 주셨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스더 왕비때의 전 유대인의 3일금식기도다(에4:16).

 

4. 금식의 시작과 의의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최초의 금식은 언제 했으며 금식의 의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절기상 7월 10일에 있는 속죄일에 있었다(레16:19,23:26~32). 그리고 속죄일규정에 따르면, 그날에는 스스로 자기를 괴롭게하라는 규정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으로 자체해석한 것이다. 사실 구약의 율법의 규정 가운데 금식하라는 직접적인 규정은 없다. 속죄일제삿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들을 속량받기 위해 모인 만큼 그날은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가지고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러한 행위를 인정해주셨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1년에 하루 7월 10일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전 백성들이 금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은 기도의 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긍휼을 바라는 사람들의 겸손한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금식을 간절한 기도의 방편으로 허용해주셨고(시35:13,스8:23,느1:5, 느9:1), 회개의 한 일환으로 인정해주셨으며(욜2:12, 욘3:5, 스8:21), 맨나중에는 경건의 한 생활방식으로까지 허용해주셨다(사6:16~18, 눅18:12)., 그래서 눅18장에 나오는 세레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기도하였던 것이다(눅18:12).

  그리고 이사야 58장을 통해서, 구약시대에는 금식이라는 것이 사탄의 억압을 풀어주는 데에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인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사58:6). 그리고 금식의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을 행할 때에 긍휼을 실천함이 보다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남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라(사58:7). 

 

5. 참된 금식의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참된 금식의 축복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참된 금식의 축복을 4가지로 말씀해주셨다(사58:8~9). 첫째는 자신의 빛이 새벽같이 빛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둘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질병의 치유가 급속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는 자신의 공의가 앞에서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뒤에서 호위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부르거나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겠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정리해본다면, 금식의 축복이란 어둠이 떠나가고, 병에서 빨리 치료되며, 하나님의 보호가 있고, 확실한 기도응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금식은 이처럼 많은 효능을 안고 있다.

 

6.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인가?

  이제는 크게 2번째로 금식의 정신과 같이 억압받는 자나 약한 자들에 대해 긍휼을 베푸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사58:9b~12). 하나님께서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4가지 축복을 약속해주셨다. 첫째는 흑암 가운데서 빛이 일어나게 하실 것.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메마른 곳에서 만족하는 영혼이 되게 하실 것. 셋째는 뼈를 견고하게 하실 것. 넷째는 황폐하고 무너지고 파괴된 곳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것. 그렇다. 이렇듯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금식의 축복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금식을 행하는 것이나 긍휼을 베푸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긍휼함을 구하기 전에 먼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긍휼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7.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안식일의 의의와 더불어 그날에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그날을 잘 준수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에 대해 알아보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이 아니라 처음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위한 안식의 날로 세워졌다(창2:1~3). 물론 그것은 사람에게도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마찬가지다(출20:11). 그렇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날임과 동시에 우리 인간을 위한 날이다. 특히 인간의 영혼을 위한 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주일 중에서 나머지 엿째동안에는 힘써 일해야 한다. 그날들은 육체를 위한 날들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 중에서 하루인 안식일 만큼은 자신의 영혼을 위한 날로 지켜야 한다(출20:8~11).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그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사실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오심으로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준수는 이미 원칙적으로 종료되었다(호2:11, 마11:28, 골2:16~17). 하지만 도덕법으로서 안식일 준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날은 영혼을 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그날은 믿는 이들의 영혼을 위한 도덕법인 것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지 말라고 명하셨을까? 사실 출20장에 나오는 안식일준수계명에는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날엔 일을 하지 말라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출20:10).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B.C.700년경 히스기야왕 때에는 안식일에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4가지로 정하고 실천하고 있었다(사58:13). 첫째는 자기자신을 위해 오락을 행하지 말 것. 둘째는 자신의 길로 행하지 말 것. 셋째는 자신의 오락을 찾지 말 것. 넷째는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 것.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금하였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레17:21, 느10:31~33, 13:15~19). 한편 그날에 해야 할 것도 있었다. 그것은 그날을 즐거운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그날을 존귀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다(사58:13).

  그렇다면,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복을 주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3가지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사58:14). 그것으로 첫째는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땅의 높은 곳으로 올려주실 것. 셋째는 그를 야곱의 기업으로 양육하실 것. 그렇다. 안식일준수는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날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영적인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기업까지도 선물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주일로 계승발전된 안식일준수의 명령을 헛되이 듣지 말라. 주일을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8. 나오며

  이상으로 우리는 이사야 58장에서, 참된 금식과 축복에 대해서(사58:1~9a), 긍휼을 베푸는 것과 그 축복에 대해서(사58:9b~12)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식일준수와 그 축복에 대해서(사58:13~14) 살펴보았다. 역시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며 복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만 그 말씀을 받은 우리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사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며,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뿐이다. 또한 주일성수는 우리 믿는 이들의 영혼에게 복주시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라. 다만 우리가 그날을 의식법적으로 준수해서 문제가 될 뿐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의 근본의도를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여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아멘.

 

 

여러분은 금식을 해 보았는가? 금식은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한 가지 물어보겠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당신의 백성들에게 금식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었을까? 거꾸로, 하나님께서 금식을 하지 말라고 명하신 경우가 있었는가? 우리의 모든 판단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행할 때 정확하고 안전하다. 이제 금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을 이제 천천히 들여다보자.

 

1. 들어가며

  이사야선지자, 그는 B.C.740~680년에 남유다에서 활동한 궁중선지자로서 기록선지자에 해당한다. 성경에는 자신의 예언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선지자도 꽤나 있다. 하지만 이사야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을 기록물로 남긴 선지자 중의 대표자다. 특히 그의 예언(총66장)은 남유다의 죄에 대한 책망과 아울러 메시야를 통한 구원과 회복이 적나나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그가 남긴 66장의 예언은 성경 66권처럼 잘 정돈되거 있고 배열되어 있다. 먼저, 이사야의 예언서를 구분해보도록 하자. 이사야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1~35장) 주로 심판예언을 다루고 있고, 2부(36~39장)는 성취예언을 다루고 있으며, 3부(40~66장)은 회복예언을 다루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이사야 58장은 제3부(40~66장) 중에서 후반부(58~66장)의 개시부분으로서, 신앙회복을 통한 선민의 복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중에서 사58:1~9a에서는 금식에 관한 교훈이 나오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와 그러한 금식의 축복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아울러 금식전반에 관한 성경의 말씀들을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과 더불어 금식의 기원과 시작, 금식의 구약의 실례들, 금식의 의미와 발전을 다루며,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오늘날 금식의 활용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금식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남유다백성들이 행하고 있는 경건의 모양과 내용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책망하라고 명령하신다. 그중에서도 경건의 최고라 알려진 '금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적나나하게 들추어내어 책망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통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

  금식이란 무엇일까? 금식이란 음식을 끊어 자신의 육체를 괴롭게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아뢸 때에 취하는 기도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사실 금식은 기도라기 보다는 경건생활의 한 형태에 속한다. 물론 그것이 기도와 함께 어울어서 나타나므로 보통 사람들은 금식은 곧 기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금식은 죽기를 각오한 장렬한 기도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금식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하나님께서는 과연 당신의 백성들에게 금식하라고 시킨 적이 있는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라고 정확히 글자그대로 시킨 적은 없으시다. 다만 모세시대에 들어와서 율법 중에서 절기준수를 명령하실 때에, 금식에 관한 유사한 말씀을 주시긴 하셨다. 그것은 매년 7월 10일 지키는 속죄일에 자기를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레23:27,29).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해석하면서, 그 문구를 금식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일년에 한 번 지내는 속죄일제사 때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그 날 자기를 금식하면서 스스로 괴롭게 했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일 년에 한 차례 드리는 속죄일제사 때에 금식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잘못하면 제사드리러 들어어간 대제사장이 죽어서 나올 수도 있는 속죄일제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속죄를 위해 드리는 속죄일제사에 어찌 엄숙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날 백성들은 전부다 금식했던 것이다.

 

3. 금식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것의 활용방안은 몇 가지였나?

  그렇다면, 속죄일 제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은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서 자신의 죄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겸손히 요청하는 것이 바로 금식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악들을 그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용서를 부탁하는 것이 금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금식을 절대절명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방법으로도 허용하셨다. 예를 들어보자. 바사왕 아하수에로의 왕비였던 유대인 에스더가 자기 민족이 죽게 생기자,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3일금식을 부탁한다(에4:16). 왕께 나아간지 이미 30일이 지났기에 혹시라도 잘못되면 죽임당하는 관례에 따라 죽지 않고 왕께 유대인의 문제를 아뢸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결국 유다인들은 3일동안 금식하면서, 에스더 왕비가 자신의 민족을 구원할 수 있도록 아하수에로왕을 설득할 수 있도록 금식으로 동참한다. 결국 이 금식으로 인해 아하수에로왕은 왕비의 청을 들어주었고, 악한 하만 일당은 전부 도륙당하고 만다.  그렇다. 금식은 원래는 속죄를 비는 방법으로 시작되었지만, 절대절명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는 일에도 쓰인 것이다. 그렇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를 보임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소원을 응답받는 경건의 모양의 한 형태이자,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절히 아뢰는 방식으로 쓰인 것이다.

 

4. 이사야선지자 당시에는 금식이 어떻게 와전되어 있었는가?

  그런데 이사야선지자 당시 남유다는 어떻게 금식을 사용하고 있었을까? 남유다의 제13대왕이었던 히스기야의 말기이자 제14대왕인 므낫세왕과의 공동통치무렵에 있어서, 남유다인들은 많이 타락해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볼 때에 그들은 매우 경건해보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었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들은 금식을 아주 중요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심으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남유다인들을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겉으로는 금식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쾌락을 즐기며, 종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하여 돈을 벌고 있었으며,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논쟁하며 다투며 힘을 이용해 악한 주먹으로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58: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놀라운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굵은 베울을 입고서 머리에 재를 뿌려가며, 머리를 숙인 채 금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58: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들의 금식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기 위한 금식에 불과하며, 그것을 이용하여 금식을 못하고 있는 자들을 억누르기 위한 거짓 경건이라고 말이다. 그랬다. 그래서 그들의 금식은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 그들의 금식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노여움과 책망만 사고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말씀하신 금식은 어떤 것이었나?

  이러한 모습은 신약시대에 들어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금식도 비슷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금식에 관해 말씀하셨는데(마6:16~18), 그때도 사58장에서 하나님께서 남유다백성들의 잘못된 금식을 책망하신 것처럼, 외식으로 물들어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금식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금식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위선이다.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겸손한 자세로 시작된 금식이 어느샌가 자신의 경건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금식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금식을 금하지는 않았다. 그것 자체로도 상이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식을 이용하여 자신은 금식하고 있는 경건한 사람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 엄히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려면, 초췌한 모습을 하지 말고 차라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다(마6:17). 그리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금식하라고 하셨다(마6:18).

 

6. 오늘날의 경건의 방식으로 우리는 어떤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한편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금식은 어떤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살펴보자.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금식을 이용한 경건생활은 그리 추천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전파나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는 금식하여 힘없는 몸의 상태를 가지기보다는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거나 교회봉사에 힘쓰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제는 금식같은 어떤 형식적인 의식을 통해서 경건생활을 유지하려하거나 남들 앞에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경건형식을 사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 3개의 경건파가 있었다. 하나는 바리새파였고 또 하나는 사두개파였으며, 마지막으로 엣세네파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구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학파들이다. 이러한 경건학파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신구약중간시기에 나타난 유대종교지도자 조직으로서, 모두가 다 자신의 경건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중에서도 율법조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 다시는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하자는 각오로 시작된 바리새파들은 율법조항 하나하나를 문구 그대로 지켜 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경건훈련으로 사용했던 방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기도'와 '금식'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점차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곳에서 기도하거나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또한 금식을 자주하여 얼굴을 흉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 되었다. 그렇지만 엣세네파는 좀 달랐다. 그들은 '금식'과 '세례'를 통해서 경건훈련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중의 대표자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이다. 어느날이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말했다. "우리 엣세네파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9:14)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경건훈련으로 금식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금식은 어떤 상황이 오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경건의 모양은 기도나 금식이나 세례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가르침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인 금식같은 경건방식 안에 넣어두어서는 오히려 옛경건방식에 해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새 시대가 도래했으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금식은 사실 원칙적으로 볼 때 율법조항이 아니다. 일종의 해석이다. 금식은 사실 하나님의 속죄를 바라는 자들의 겸손한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금식을 통해서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로서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께서 필요없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금식이라는 경건생활이 복음을 그대로 담아 펼치기에는 부족한 것임을 말씀하셨다(마9:17).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라면 금식을 이용하여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도 아니 되며, 남을 정죄하는 데에 사용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마6:16~18).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거나 절대절명의 기도에 사용하려 한다면, 그것을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간절한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만이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오직 금식과 같은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자기가 경건해지려 하거나 간절한 기도의 방편이 그것 뿐임을 고수하는 우는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인으로 삼고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함으로 옛사람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새사람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건한 척 보이는 어떤 외식에 물들기보다는 실제적으로 자기가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실제적인 경건생활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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