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구원받을 길이 없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이후 이미 멸망이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긍흉히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내셨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도 멸망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 예수님을 믿고도 구원받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을 제대로 읽는다면 그는 바른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20-11-29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5) 사람이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2부예배](히3:12~14)
https://youtu.be/iiuPuimC5fM  [혹은  https://tv.naver.com/v/16945335  ]


 

1. 들어가며

  사람이 구원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중의 핵심은 역시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는데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천국과 지옥을 다녀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수믿고도 지옥에 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한다. 대체 무슨 일로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이 구원받는 조건은 대체 무엇이며, 사람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으나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는지, 그리고 한 번 얻은 구원은 정말 안전하고 영원한 것인지까지 전반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2. 칭의가 곧 구원인가?

  어떤 분은 사람이 칭의를 얻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은 자라도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칭의란 무엇을 가리키며 또한 그것은 어떻게 얻는 것인가? "칭의"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나는 비록 추하고 더럽지만 예수께서 입혀주신 의의 옷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해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더러운 죄인이라도 얼마든지 칭의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칭의를 얻은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 것일까? 대체로 그렇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바른 구원관이 아니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은 것은 다만 구원의 첫 출발을 가리키는 것이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구원의 종착역에 도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의 여정에서 "칭의"는 구원의 시작점에 있는 것이지 결코 구원의 종착점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눅18:13~14).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칭의를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알고 있다. 물론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다(롬5:1). 그렇지만 칭의를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자되는 예수께서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하여, 사람이 칭의를 받는 것은 회개함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18:13~14).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서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만을 읽은 사람들은 회개가 칭의의 반대쪽에 있는 요소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칭의가 회개를 통해 얻는다고 되어 있다(눅18:13~14). 예수께서는 그때 이 비유를 들어서 누가 의롭다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는지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하게 회개했던 자라고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칭의는 구원의 노정에서 첫 출발점일 뿐이다. 그것은 종착역이 아니다. 그리고 칭의는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회개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개하지도 않은 채 죄로 인해 계속해서 더럽혀져 있는 신부를 신랑은 그날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더이상 하나님께서는 죄값을 묻지 아니하실까?

  또한 어떤 분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더 이상 우리에게 묻지 않고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믿고 회개할 때에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에 해당하는 것일 뿐, 믿기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해준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할지라도 또다시 죄를 지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그 죄를 회개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진노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엡5:5:~6). 뿐만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도 이긴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반대로 믿는 자라 할지라도 비겁한 자들과 음행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한 자들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시 때문이다(계21:7~8).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을 주님이 묻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음행하는 자는 결국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심판의 기준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의 열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한다면 회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말하기를,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어찌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약2:14,17). 

  또한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 데에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 개인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에 그를 불러내셨고 또한 그를 구원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구원받게 된 데에는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이유가 없고 오직 그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안배만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를 생각해보았는가! 어떤 사람이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친다면, 그가 심판의 법정에서 왜 나를 처음부터 버리기로 결정하셨는지를 묻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답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예정되었다고 믿는 이들은 자신의 구원은 절대 취소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님의 예정에 따른 구원이므로 자신의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며, 자신의 구원은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이 주장은 옳다고 보는가? 성경66권을 보라. 성경 어디에도 구원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영원히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은 있는가를 말이다. 한 구절도 없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신 예정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예정 뿐이다. 예수믿고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항상 두렵고 떨림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계속해서 이뤄가라고 권면하였으며(빌2:12), 남에게 복음을 전파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떨어질까 염려된다고 말했던 것이다(고전9:27)

 

4. "구원"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구원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성경에서는 구원이라는 용어가 상당히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병에서 나은 것을 일컬어서 구원받았다고도 하며(막5:34), 바다에 빠진 사람이 건짐을 받은 것도 구원이라고 말하고(마14:30,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떠나나가 정신이 온전해진 것도 구원이라고 하고(눅8:36), 한 민족이 타 민족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해방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행7:34).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말하려는 구원은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구원이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진로하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말하려고 한다(딤후4:18, 벧전1:9).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이야말로 구원의 최고봉이요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5.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롬10:9). 예수님이 누구시며 우리 인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어야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국에 입성하는 구원은 단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인가? 어떤 분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믿을 때를 생각해보라. 사람이 처음으로 믿게 될 때에 단지 예수님을 믿기만 한 것인가? 아니었다. 처음 믿을 때에는 자신이 이전의 삶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살아서는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자인 것을 시인하면서 믿는 것이다. 즉 지난 날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고로 구원받는 믿음은 기본적으로 회개가 동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4;17, 막1:15). 그러므로 구원받으려면 믿어도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행2:38)"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즉 자신이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것과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던 죄인이었음을 시인하면서 그 길에서 돌이켜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되심을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6. 맨 처음에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럼, 우리가 처음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지난 날에 지었던 모든 죄들에 대한 용서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다(눅15:11~24). 이 탕자의 비유는 사람이 회개할 때 과거의 죄가 어떻게 용서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아들(젊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하더니,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면서 물쓰듯 돈을 날려버린다. 그런데 그 해에 큰 흉년이들어서 돼지라도 치게 되는데, 배가 고파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를 결정하게 된다. 그때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기에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서 자신을 받아주실까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는 가서 아버지를 만나뵙고서 이렇게 말하려고 결정한다. 첫째,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둘째,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자신을 받아주시려면 자신을 품군(일꾼)으로 하나로 받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번째를 미쳐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는 용서해주고 말았다. 아버지는 결코 지난 시간동안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탕진했는지를 낱낱이 고백하라고 추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었다. 우선 아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는 가장 좋은 옷으로 입혀주었고, 손에 가락지도 끼워주었으며, 발에 신발을 신겨주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날, 진실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지었던 죄를 고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과거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과거의 지은 죄를 다 낱낱이 고백하지 않아도 자신의 가던 길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향해 왔기에 하나님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7. 왜 예수믿은 자라도 과거 조상들 지은 죄들과 자신이 지은 죄를 낱낱이 자백해야만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은 과거의 지은 죄를 낱낱이 자백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죄용서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이미 죄를 다 용서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과거에 지었던 죄들로 인한 결과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죄들을 낱낱이 고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들로 인하여 우리의 몸과 내 자녀들 속에 귀신들이 침투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주받은 영들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인해 우리 안에는 여전히 저주가 남아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게 된 자라도 귀신을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놈들은 그냥 순순히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나가는 것이다. 그놈들이 나가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아는가? 그놈들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 모든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어리석음들도 같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형통과 부요와 건강과 지혜의 복이 내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모든 죄들을 자백하고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을 대신 자백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가 지은 죄들도 용서받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과 손자들 그리고 3~4대까지 받아야 할 벌이 있는데, 그 벌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백하므로 이놈들을 우리 몸에서 제거하면 우리는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8. 예수믿은 다음에 지은 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믿고 난 다음에 지은 죄들은 가만히 있어도 믿고 있기만 하면 그 죄가 자동적으로 용서되는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예수믿을 때에 우리는 주님께로 돌이켰다. 그때에는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들을 한꺼번에 용서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죄들로 인하여 내게 침투해 들어온 귀신들이 한꺼번에 다 빠져나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늘에 있는 행위책에서 우리의 죄들이 용서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른 길로 가려고 했으니, 그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죄는 낱낱이 고백해야 한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죄를 잘 지을 수가 없다. 죄를 지으려면 나 자신이 동의를 해주어야 하는데, 성령께서 죄를 참소함으로 죄를 짓기가 여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된 옛습관들이 남아 있어서 때로는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우리는 즉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죄를 책망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믿어서 회개한 자는 치명적인 죄들을 짓지 못하게 된다. 특히 행동으로 죄를 짓지 못한다. 살인을 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하던 행동들이었지,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그러한 과감한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께서 막으시기 때문이다. 

 

9.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중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왜 일어날 수 없으며 일어나서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 어떻게 해서 내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하지 않아도 자신의 구원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잘못된 교리가 그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제대로 아는 자는 함부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아들이 달랑 죽은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딤전3:16).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려고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받으시고 대신 버림받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피는 하나님의 피라고 말할 수 있다(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피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은 피를 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으시려고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나같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그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된 자들은 결코 성령의 의지를 꺾으면서 죄를 범할 수 없다. 그리고 둘째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는 것은 자신의 범죄가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는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려고 예정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 성경66권 어디를 살펴보아도 그러한 말씀은 없다. 다만 번역을 잘못하여서 발생한 오역을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바램을 기정사실화하여 주장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일차적인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멸망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자신의 범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교리)를 신봉해서다. 그러다가 결국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은 자백하지 아니하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알라(요일1:9). 그 죄는 회개하지 않는한 여전히 남아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은 결국 최소되고 말 것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다. 

 

10. 나오며

  사실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으로서 우리 죄를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고 하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고, 예수를 믿은 성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만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지금도 귀신들이 호시탐탐 우리의 영혼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은 다음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린다는 것을 아는 자는 결코 성령을 거역하여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없다. 범죄는 우리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 성령께서 우리가 죄를 지으려면 책망하여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중에는 자기가 죄를 짓는다 해도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는다는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치르신 값진 희생을 잘 모르기에 또 죄를 짓는 것이요, 죄를 지어도 그 죄가 자신의 구원을 흔들어놓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종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값진 희생도 모르고, 회개없이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믿으려고 한다.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무서운 일이다. 그리고 한 번 두 번 죄를 지어도 자신이 삶에 별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에게 죄짓는 일은 대수롭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한 번 구원받았으면 구원은 최소되지 아니한다는 가르침을 꼭 붙잡는다. 그리고 우리가 더러워도 예수님께서 의의 옷을 입혀주시면 우리가 칭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이 설령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살아간다. 그러다가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 나는 과연 구원받을 사람으로서 지금 합당한 자인지를 점검할 때가 되었다. 사실 구원은 이미 믿을 때에 시작된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죽을 때에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때 가서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회개하자. 그리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배워 그분의 값진 희생을 값싸게 만들지 말자. 그리고 거듭날 때 들어온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자.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자. 그리고 혹 넘어졌을지라도 즉시 회개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지 말자.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29일(주일)

정병진목사

 

 

가짜성령운동, 가짜성령사역을 우리는 어떻게 분별해낼 수 있는가? 그것은 2가지다. 성령과 그리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럼, 성령은 누구신가? 그리고 그분이 행하시는 본질적인 사역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잘 모르면 귀신이 행하는 것을 성령사역으로 따라갈 수 있다. 여기에 진짜 성령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의 사역이 진짜인지를 구분하는 기준들이 있다. 정말 영적인 눈이 새롭게 열려지기를 바란다.

2020-11-2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4) 성령님은 누구시며 그분의 본질적인 사역은 무엇인가?(계5:6)
https://youtu.be/VrMJPgmGpU8 [혹은 https://tv.naver.com/v/16833610 ]


 

1. 들어가며

  성령님은 누구신가? 보통은 성령님을 생각할 때 은사나 예언 그리고 치유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님의 본질적인 사역은 아니다. 그것은 선물사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금 더 성령에 대해 안다고 하시는 분들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라든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세번째 위격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맞다. 하지만 여기에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성령을 세 신들 중의 하나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본질적인 목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성령이 누구시며, 그분이 행하시는 본질적인 사역을 잘 모른다면, 우리는 신사도나 빈야드운동과 같은 유사 혹은 가짜성령운동에 속아넘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가운데 성령사역이라고는 하나 성령이 아닌 가짜를 분별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존재에 관한 실체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분이 행하시는 본질적인 사역과 보조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점검해보려고 한다. 아무쪼록 성령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잘 하므로, 성령의 인도를 잘 받아 예수님을 잘 믿고 죄를 회개하여 천국에까지 이르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 "성령" 사역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방언이나 예언같은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거나, 병이 들어 병을 치료해보기 위해 갖가지 은사 사역하는데를 쫓아다니셨던 분들에게 "성령!"이라는 단어를 들려주었을 때, 떠오르는 말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보통 "기름부음, 임파테이션"이나 혹은 "뒤로 넘어지는 것, 머리나 손과 몸을 흔들어대는 것,  몸 어딘가가 막 뜨거워지는 것, 손에 금가루가 나타나거나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것, 입신하는 것,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사역의 상당 부분은 가짜요, 귀신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것을 그렇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누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절대 변할 수 없는 것 곧 성경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있을 때에는 우선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성령께서 오신 본질적인 목적에서 어긋나 있거나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이 확률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성령을 빙자하여 귀신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증인이라는 곳을 가보라. 그곳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활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누구시며, 그분이 행하시는 본질적인 사역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가짜를 분별할 수 있으며, 올바른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수 있다. 

 

3.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세번째 위격을 가진 하나님인가? 그렇다. 그런데 이 다음이 문제다. 성자는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가 아니며, 성부는 성자가 아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편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바로 그 성령을 알아야 한다. 사실 성령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며, 요한계시록 22장에서도 계속해서 나온다. 성령은 창1:2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그리고 계22:17에서는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하고 있다. 성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천지창조사역에 동참하셨던 성령에 대한 호칭이 사사기에 가면 처음으로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린다(삿3:9).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마10:20). 그리고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에서는, 성령은 이제 "아들의 영"(갈4:6)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롬8:9)이라고도 한다. 그럼 삼위일체의 교리에 따르면 분명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성령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되어서 성령이 "아버지의 영"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영"이 될 수 있는가? 또 성령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되는가? 도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성령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 성경66권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정리된 성령에 대한 정의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진리에 가까운 정의를 들라고 한다면, 그것은 계5:6의 말씀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 따르면, 성령은 "어린양의 일곱눈들"이자,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영들"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이 누군지를 그 실체를 접근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첫째, 계5:6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성령에 대한 첫번째 정의는 성령은 어린양과 관계된 영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어린양의 일곱눈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이란 이 세상을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는 전능하신 이의 전지성을 가리킨다. 사실 계2:23에 보더라도, 예수께서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이"라고 나온다. 그분이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감찰하기 위해 이 땅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요15:26).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지만 실은 어린양되신 예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영이시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 영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곧바로 보내주시겠다고 했는데 보혜사가 오셨으니, 성령은 예수님 자신이었던 것이다.

  둘째, 계5:6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성령에 대한 두번째 정의는 성령은 하나님과 관계된 영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라고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어린양의 일곱눈들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일곱영들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오순절 이후에 동시존재가 가능한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 바로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셋째, 계5:6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성령에 대한 세 번째 정의가 놀랍다. 왜냐하면 성령이 "일곱'이라는 숫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성령을 일컬어, "어린양의 열두 눈들" 혹은 "하나님의 열두 눈들"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한사코 성령을 "어린양의 일곱눈들", "하나님의 일곱영들"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7이라는 숫자는 12에 비해 이 땅에 관련된 숫자이며, 그것은 이 땅에서 완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12이라는 숫자는 하늘(천국)과 관련된 숫자이며, 하늘에서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것들은 거의가 다 12이라는 숫자를 담고 있다. 24장로들은 구약의 12지파들과 신약의 12사도들을 합친 것이다. 144,000명은 12 곱하기 12인 144에다가, 많은 수를 의미하는 1,000을 곱한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것들 중에 유독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금촛대가 7이라는 숫자를 담고 있고 그 일곱금촛대에 하나님의 일곱영들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7이라는 숫자는 하늘의 숫자와 어울리는 숫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는 유독 성령과 관계된 것이 12이 아니라 7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이 땅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완전한 영"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만약 성령께서 이 땅과 관련한 영이 아니었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어린양의 12영들" 내지는 "하나님의 12영들"이라고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처음부터 이 땅에 파송을 받아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었기에 그분은 당신 자신이 높히 여김받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를 찾아보더라고 성령 하나님께 절을 했다든지 예배를 드렸다든지, 기도를 드렸다는 곳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보좌도 하나님의 보좌요 어린양의 보좌라고 언급되지만, 성령의 보좌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4. 성령을 왜 경륜적인 영이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성령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실수하는 것은 성령이 경륜적인 영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 데에 있지 않은가 싶다. 성령이 경륜적인 영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성령이 누군지에 대하여 눈에 선히 들어온다. 그럼, 성령이 경륜적인 영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께서 시대마다 역사하는 방식과 역할이 다르는 것이다. 

  첫째, 우선 성령의 명칭부터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자. 사사기 시대가 되기까지 성령의 명칭은 오직 한 가지로서 "하나님의 영"이이었다. 하지만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이후부터, 성령은 이제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자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지상에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성령을 "아버지의 영"(마10:20)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치고 부활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시자, 초대교회는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도 불렀고(행16:7), "아들의 영"(갈4:6), "그리스도의 영(롬8:9)"이라고도 불렀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했다가, 신약시대에는 예수라고 계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륜을 거꾸로 뒤집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 아들이 출현하기 전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세시대 이전에 "여호와의 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경륜적인 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A.D.95~96년에 불렀던 성령의 명칭은 "어린양의 일곱눈들"이자, "하나님의 일곱영들"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성령이 역사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자. 구약시대에 성령이 역사하는 방식은 오순절성령강림 전후로 그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구약시대에 성령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서 창조의 일을 수행하셨다(창1:2). 그리고는 사람에게 역사하기 시작했다. 그때만해도 성령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 위에 내려오셔서 그에게 특정한 은사를 주셨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맡겨진 직임을 잘 수행하게 하셨다. 예를 들어, 성막을 지을 무렵에는 성령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머리 위에 내려오셔서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은사로 주셨다(출36:31). 그리고 기드온에게는 사사(판관)로서 "지도력"의 은사를 주셨다. 그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사로 믿고 따랐다(삿6:34). 그리고 삼손에게는 나귀턱뼈로 블레셋사람 일천명을 죽일 수 있는 "강한 힘"을 주셨다(삿14:6). 그리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왕이었던 사울 위에 성령이 내려오니, 그는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삼상10:10). 그리고 선지자 다니엘에게 성령이 내려오니, 그에게는 "지혜와 분별력"의 일반은사가 부어졌고, 이어서 "환상과 꿈"을 꾸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같이 주어졌다(단1:17). 그리고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이 내려오니 그들이 예언할 수 있었다. 그래도 구약시대에 성령께서 임재하는 방식은 전부 다 위에 머무르는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았더라도 범죄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에는 성령도 그 사람을 떠나가셨고 그러면 은사도 사라졌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사울왕의 경우다(삼상16:14).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갔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았던 다윗은 자신이 범죄한 후,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눈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당신의 성령을 내게서 취하지 마소서(시51:11).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은 그 역사하시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첫째로, 그분은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요14:17). 그리고 둘째로, 사람의 영과 하나가 됨으로 사람이 죽기까지 성령께서는 그를 떠나가지도 않으셨다(요14:16). 셋째로, 구약시대처럼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오시어 그 사람 속 안으로 들어가셨다(요14:16). 넷째, 구약시대에는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만 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이 지정한 사람만 받을 수 있었지만, 오순절 이후에는 누구든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사는 더욱 다양해졌고 풍성해졌다. 

 

5. 성령이 오셔서 하셨던 본질적인 사역과 보조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이제 오늘 우리가 꼭 들어야 할 핵심적인 말씀에 왔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 땅에 보내어진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이 땅에 보내어진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을 은사사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말로서, 받는다면 좋겠지만 안 받아도 되는 것을 가리킨다. 고로 은사사역은 일종의 선택사항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시면 반드시 하시는 일이 있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에 대한 소개는 예수께서 떠나가실 무렵,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직접 일러주신 말씀 속에 들어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16장까지의 말씀에 나와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본질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는 성령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하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요15:26,14:26). 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야 했는지 그리고 왜 죽으셔야 했는지를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려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자존하신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는 분은 사실 얼마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8:24,28,58을 보면, 거기에 그것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말 성경이나 영어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예수께서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을 번역할 당시만해도 아직 그것을 잘 모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성경을 보면 그것이 나온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을 아는 이는 그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둘째, 성령께서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요16:7~8). 이것은 성령이 이 땅에 오신 본질적인 사역의 두번째 방면이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하신다고 했다.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을 성령께서 책망하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람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호와증인은 예수님을 미가엘천사장이라고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교정해주고 수정해주시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려주시려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믿으면 의롭지 못한 자라도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마귀는 십자가에서 그의 권세가 박살났다는 것을 성령께서 폭로해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이 예수님에게 졌으니 예수 이름의 권세 아래 있음을 성령께서 폭로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역시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귀신을 제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가심으로 하시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외부에서 행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시대처럼 은사(선물들)을 나눠주시는 일이다. 그것을 주시는 목적은 성경을 통틀어보면 딱 2가지다. 하나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고전12:7,11). 또 하나는 복음전파를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행1:8). 그래야 능력과 권세로 무장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사들은 어디까지나 선물에 해당한다. 선물은 받으면 좋겠지만 안 반아도 되는 것이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을 모르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믿지 못해서, 죄사함도 받을 수 없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는 다르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사역은 성령의 보조적인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성령의 인도를 제대로 받고 은사도 제대로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령은 이 땅에 보내어져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 자신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동시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오심으로 사람은 거듭태어나기도 하고, 인치심과 보증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분이 주신 은사를 받아서 교회를 섬길 수 있고 복음전파를 용이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제대로 알고 그분이 주시는 은사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짜 곧 귀신에게 속지 않고 성령을 알고, 가짜 곧 귀신이 주는 은사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2가지 원칙이 있고, 팁이 3가지가 있다.

  먼저, 2가지 원칙부터 살펴보자. 어떤 곳에서 성령운동을 한다고 하면 우선 2가지를 지켜보라. 하나는 과연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가르쳐주는지를 보라. 만약 예수님이 누군지를 가르쳐주지 않고 성령받게 하고 있다면 개인이나 단체는 가짜성령운동임을 알라. 둘째, 회개를 충분히 시키지 않고 성령의 은사를 받으라고 한다면 그것도 가짜인 줄 알라. 회개없이 은사를 받으려 하다가 대부분 귀신이 주는 은사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3가지 팁이 있다. 첫째, 성령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구약으로 치자면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우쳐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신약은 1,000독 정도 하라. 그러면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다 깨우쳐주실 것이다. 둘째,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만을 드러내시는 분이므로, 나는 일평생 진리만을 믿고 따라가리라고 각오하라. 그 길을 가는 것이 외롭고 힘들고 핍박받는 일이 생길지라도 겁내지 말고 그 길을 걸어가라. 심판대 앞에 가면 오직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말이다. 셋째, 그분은 인격적이시므로, 그분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잘 쓰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즉시 순종하기를 힘쓰라. 순종하는 것을 뒤로 미루지 말라. 성령의 음성에 즉각즉각 응답하고 순종하라. 그러면 성령의 인도를 잘 받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요한계시록을 보면, 2~3장에 일곱교회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패턴을 보면 한결같이 동일하다. 처음에는 예수께서 당신이 누군지를 그 교회의 상황과 관련지어 말씀하신다. 그리고 칭찬할 것이 있으면 칭찬하신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를 책망하신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촛대를 옮겨버릴 것이고,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릴 것이고, 침상에 던져버릴 것이고, 환난에 두며, 자식을 죽여버리고, 토해내 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 패턴을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라. 이게 무슨 말인가? 이는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시는 본질적인 사역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성령사역의 핵심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래야 귀신의 주는 은사를 받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귀신에게 속지 않고 진짜 성령이 주시는 것들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나오지만, "아들(성자)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가? 오늘 이 설교를 처음 듣는 사람은 아마 큰 충격에 빠질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을 따라가야 한다. 성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어떤 기준을 삼으면 어디선가 그리고 언젠가 펑크가 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은 대체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이신가?

2020-11-1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인가?(계22: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TFUdSo1T74  [혹은 https://tv.naver.com/v/16723114  ]

 

 

1. 들어가며

  바른 종교개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의 신앙부터 제대로 되어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과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이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을 표출한 분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교리대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제는 가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분이든, 믿음의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교리든, 우리의 믿음은 성경말씀에 근거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것은 결국 사탄마귀의 기만의 포섭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우리의 신앙의 대상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겠는데, 그중에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보통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혹은 "아들 하나님(성자 하나님)"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이 가진 한계는 대체 무엇이며,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다면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이 누군지(person)를 믿는 것이며, 그분이 무슨 일(work)을 하셨는지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그분이 인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분이 인류의 모든 죄들을 속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정작 죄가 없었기에 3일만에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40일동안 자신의 부활을 보여주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맞다. 하나도 틀리지 않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분에 대해 어떤 분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마16:16). 그리고 이것도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기로 약속된 메시야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분은 마리아의 아들 뿐만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인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결국 그분을 "아들 하나님"으로 믿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66권을 다 들춰보더라도, 거기에 "아들 하나님(성자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누군가 만들어낸 교리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고 만들어내었겠지만 성경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적용하면 안 된다. 이것을 가지고 신앙여부를 판단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 중에 "삼위일체"라는 용어나 "성자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이단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데 장애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3.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분들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실수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알되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분들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실수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것만 알고 지내는는 것이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아들(성자) 하나님이시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시다. 넷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예수님의 피이지 하나님의 피는 아니다. 다섯째, 천국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여섯째,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중에서 두번째이신 아들 하나님이시다. 일곱째, 예수님은 세 분 하나님 중에서 한 분이시다. 여덟째, 성부 하나님은 천국에서 가만히 있고 아들 하나님이 오셔서 희생당하셨다. 아홉째,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성부와 같다. 이 모든 내용들은 사실 틀린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 알아서는 예수님을 절반 밖에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닌 예수님의 모습이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단세력에게 쉽게 농락당할 수 있다. 이것을 모르면 귀신들을 대항할 때 주춤거리게 된다. 이것을 모르면 사실 영생을 찾아가기가 어렵다. 왜 그런가? 

 

4. 서사라목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했는가?

  최근 들어서 기독교계에서 뜨는 분이 한 분이 있다. 그분은 LA 주님의사랑교회 담임목사인 서사라목사다. 이분은 사실 2014년도에 대한민국이 전쟁난다고 홍혜선전도사와 함께 말했던 분이다. 하지만 나중은 그것은 경고를 전달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벌써 6년이 지난 지금 이분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은 분이 되어있다. 특히 그분이 말한 간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분에게 특이한 점은 박소리목사처럼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직접 물어보고 답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보고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말하는 천국의 모습은 성경과 상당히 다르며, 그분이 만나서 들었다는 이야기들 중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다.

  그래도 우리는 서사라목사가 예수님이 누군지에 관하여 말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수준을 뛰어넘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작년에 "요한계시록의 핵심"이라는 책을 펴냈다. 거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며, 요한계시록 1:8에 말씀하고 있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가 예수님이라고 했다. 이것은 사실 "주 하나님"에 대한 소개인데, 이것을 예수님에게 직접 적용하고 있다. 과연 이분이 말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사실일까? 그녀는 2015년 4월 27일에, 천년왕국 후에 펼쳐진 백보좌 심판에 관해 주님께 묻는다. "백보좌에 앉아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해주었다고 한다. "내로라". "주님, 그러면 성부 하나님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또다시 "내가 그로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각각 따로 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이다. 과연 이분의 진술은 사실인가 아니면 거짓일까?

 

5.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다. 좀 더 안다는 분은 그분을 "성자 하나님(아들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아들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 내지는 "아버지 하나님"은 나온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나오지만, "아들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 것일까?

  사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자는 베드로였다(마16:16). 그러나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람이 공간의 제약없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인가? 제자들도 처음에는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지만 보고도 믿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도마도 현현하신 주님을 보고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요20:28). 그분이 단지 하나님의 아들 정도가 아니라 그분은 원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제 그분이 육체를 입고 계실 때의 신앙고백(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분이 부활승천하신 후의 신앙고백(도마의 신앙고백)으로 2개가 된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 아들이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상태로 계시는 것이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누군가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려면, 그는 다음과 같이 4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째, 자존성. 둘째, 전지전능성. 셋째, 무소부재성. 넷째, 영원불변성이 그것이다. 이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그는 신(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셨는가? 우리는 놀랍게도 그분이 이 땅에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셨음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가 있다. 

  첫째. 그분은 육신을 갖고 있을 때에도 자신은 이 땅에 오기 전에 자존하는 하나님이셨다고 언급하셨다(요8:24,28,58). 그러나 우리말 성경이나 영어성경으로서는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없다. 이것을 번역하는 사람들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해도 헬라어에 능숙하지 못한 자는 예수께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둘째, 그분은 육신 안에 있을 때에도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셨다. 예수께서 비록 육체를 갖고 계셨지만 그분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못 하실 일이 없으셨다. 그렇다. 그분은 사람의 과거를 아셨고 미래를 아셨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고백했다(요1:49).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도 "네가 오늘밤 닭울기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고 예고하셨는데 진짜 그대로 되었다. 그분은 미래의 일도 아셨던 것이다. 또한 그분은 모든 것에도 능하셨다. 말씀 한 마디로 폭풍을 잔잔케 하셨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게하셨다. 또한 나면서 소경된 자와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예수님 이외에 지금까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도 무덤에서 걸어나오게 하셨다. 그렇다. 그분은 육체에 계실 때에도 전지전능하신 분이셨던 것이다. 셋째, 그분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셨다. 그렇지만 육체에 계실 때에 무소부재성은 조금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위험에 처하자 주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 가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분의 영은 매우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든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후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28:20). 그분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그분은 영원하시고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이 없으신 분히다. 그분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일정하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히13:8).

 

7.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사실 2가지는 무엇인가?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잘 모르는 사실이 사실 2가지가 있다. 하나는 희미하게 알고 있는 것이며, 또 하나는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희미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이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는 성부가 보내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다(요일4:14).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만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임마누엘 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라고도 소개하기 때문이다(마1:23). 다시 말해, 원래 한 분이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도 오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사9:6, 딤전3:16).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으로 들어왔고,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를 향하여 간다"고 하셨다(요8:42,16:28). 그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기 전에도 이미 선재하고 계셨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다고도 말씀하셨다(요8:24,28,58).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내서 온 것도 맞는 말이지만,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온 것도 맞다는 뜻이다. 그래야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진술이 계속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결코 예수님에게 "아들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고 있고, 아들 하나님도 있어서 하나님이 두 분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만 사용할 뿐, 아들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계3:21). 대부분은 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만 알고 있다(막16:19). 이 말은 그분이 천국에 가서도 아들로서의 사역을 계속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지금도 천국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자로서 사역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보좌에도 동시에 앉아계신다(계3:21, 22:1,3).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주 하나님이시요(계1:8), 보좌에 앉으신 이(계21:5~6)라고 소개한다. 그분은 원래 한 분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8. 예수님은 자기자신은 누구라고 소개하셨는가?

  우리는 오직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 자기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말을 요한계시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라는 것이다(계22:13). 이것은 사실 충격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알파와 오메가"는 주 하나님의 자기선언이기 때문이요, "시작과 끝"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자기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은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선언이었기 때문이다(사41:4,44:6,48:12).

  사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 누군지를 자세히 알려주는 책은 요한계시록 뿐이다. 예수께서는 사도요한이 쓴 계시록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소개하신다. 그러한 것은 특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기선언에 나온다. 첫째, 계1:8에 의하면, 주 하나님께서 자기자신을 소개할 때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다. 둘째, 계1:17에서는, 인자같은 이(부활승천하신 예수님)가 당신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셨다(계1:17). 셋째, 계21:6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다"고 하셨다. 그리고 넷째, 계22:13에 따르면, 이제 예수께서 직접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바로 이 4번의 선언(7개의 선언문)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주 하나님 곧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 분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때에 한 분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라고 소개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나 예수님이나 다 한 분 하나님의 또다른 표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내지는 "아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구약으로 치자면 당신은 여호와와 같은 존재요, 나는 원래 "알파와 오메가이며, 시작과 마침"이이자, 보좌에 앉으신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일러주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신 분이시다. 구약시대만해도 그분은 자신을 홀로 한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분이 아들을 이땅에 보내셨다. 그런데 홀로 한 분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이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존재하셨다.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셨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다른 표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보냄을 받았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 혹은 아들이셨으며,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고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는 순간,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로 동시에 존재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이 천상에 오르신 이후, 한 분이신 하나님은 두 분으로 존재하실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수행할 직책이 남아있으셔서,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보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아들의 피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행20:28). 그러나 하나님의 피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피를 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는가? 그분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만 알아서는 아니 되며, "아들 하나님"으로 알아서는 아니 되는가? 그것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알아서는 육체를 입기 전의 그분의 신분과 육체를 벗은 후의 그분의 신분 곧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요, 그분을 "아들 하나님"으로서 알아서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알게 되면, 하나님을 두 분으로 잘못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 곧 한 분이신 주 하나님이시다(사9:6). 그분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과 마침"이시다(계22:13). 그리고 그분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하신 분이시다(계1:8). 그분은 우리 인류의 속죄를 위해 아들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지 원래는 한 분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계실 분이시다. 우리를 위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 주 하나님 곧 예수님께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리자!!!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계1:17~18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인자같은 이)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2020년 11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종교개혁은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의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내가 어디선가 듣고 배웠던 하나님인가? 다들 자기 생각으로는 성경에서 배운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메시지를 듣고 나면 그것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말은 성경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삼위일체라는 말은 인간이 회의를 통해 만들어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왜 만들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분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인가? 이것을 읽는 자는 놀라운 영적인 진보를 이를 것이며, 이단을 똑바로 구분하게 될 것이다.

2020-11-08(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바른 종교개혁(02) 한 분 하나님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인가(요17:3)
https://youtu.be/anP803cUDIo  [혹은 https://tv.naver.com/v/16612099  ]

 

 

1. 들어가며

  지난 주일은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래서 참된 종교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한 바 있다. 그렇다면 가장 바람직한 종교개혁의 방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말은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교리와 신학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과연 교회에서 외치는 메시지 가운데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을 얼마나 될까? 이것을 조사해보았더니, 큰 주제만 해도 적어도 10가지 이상, 그리고 작은 주제만 해도 10가지 이상이나 된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하나씩 하나씩 주제별로 성경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오늘은 주제별로 다루는 메시지들 중에서 첫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은 과연 한 분 하나님인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인가를 다뤄보고자 한다. 새로운 영적인 눈이 열려 교단신학이나 교리에서 벗어나 성경의 진리로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되기를 바란다. 

 

2. 오늘날 교회에서 회복되어야 할 진리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회복되어야 할 진리는 대체 얼마나 될까? 사실 이것을 주제별로 구분해 보니, 교회론을 제외하고는 사실 전 분야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큰 주제별로 나눠보았더니 적어도 10가지 이상은 되었다. 그리고 작은 소주제들도 10가지 이상 되었다.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겠지만 그것을 우선 제목으로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론에서는 "한 분 하나님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인가?"를 다룰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론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인가?"를 다룰 것이다. 그리고 셋째, 성령론에서는 "성령의 제3의 하나님인가 예수님의 또다른 표현인가?"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넷째로, 구원론에 관한 말씀 3가지 정도의 주제들이 있다. 첫째는 구원의 필수요소는 믿음인가 아니면 믿음과 회개인가? 둘째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셋째는 구원에 관한 개인2중예정론은 과연 진짜인가?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크게 다섯째로, 다소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는 종말론이 있다. 첫째는 천국은 상태인가 장소인가? 둘째는 베리칩이 짐승의 표 곧 666인가? 셋째는 천년왕국은 정말 지상에서 펼쳐질 것인가? 넷째는 주님은 환난전에 오시는가 환난후에 오시는가? 여섯째, 이제는 여러가지 소주제별로 나눠보았다. 첫째는 사탄과 천사의 타락 및 쫓겨남의 시기는 언제였는가? 둘째는 인간의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무지의 원인은 무엇인가? 셋째는 안식일 규정 등 율법은 지금도 지켜야 하는가? 넷째는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도 하나님이 받으실까? 다섯째는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여섯째는 성도의 부활과 휴거의 시기는 언제인가? 일곱째는 신사도와 빈야드운동은 성령운동인가 가짜성령운동인가? 여덟째는 십일조는 지금 이 시대에서 드려야 하는가? 아홉째는 기도응답은 어떻게 오는가? 열째는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열한째는 귀신은 어떻게 해야 쫓아낼 수 있는가? 등등이 있다.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신론에 관한 부분으로 "하나님은 과연 한 분 하나님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3.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2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에는 적어도 2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아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내 삶과 문제를 아뢰어 그분이 내 삶 속에 개입하여서 역사하시는 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둘째, 듣고 배워서 아는 방법도 있다. 설교를 들어보고 성경을 읽고 공부해서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체험해서 아는 방법은 참으로 기가 막히고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나, 귀신들이 장난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탄마귀와 귀신들이 하나님으로 둔갑하여 기적과 환상을 보여줌으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높은 산에 불러내어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던 마귀가 여전히 성도들을 가짜로 미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으로 주님을 알려고 하는 자들은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던 1,000명 이상의 간증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적과 환상은 사탄이 보여줄 수는 있어도, 성경책은 사탄이라도 변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된다. 하지만 성경만 공부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늘 남의 이야기만 듣고 배우는 것일 뿐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성도들이 듣고 배운 것은 과연 성경말씀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동안 성도들이 교회나 유튜브 같은 방송매체에서 들었던 설교나 또는 교회에서 행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할 때에 배운 것들이 과연 다 성경말씀이었을까?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우선 염두해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질문했을 때, 좀 배웠다고 하는 분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군지를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듣고 배웠던 말씀을 성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교리와 교단신학이나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캐나다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신앙고백은 1,561년 네덜란드에서 나온 "벨직신앙고백"이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본질은 하나이지만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 그런데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이와같이 성령도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의는 과연 성경적인가? 결론은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지만 각 위가 구별되시는 분이신데, 벨직신앙고백에 나온대로 정의하다보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님으로서는 같을 뿐 서로 다른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벨직신앙고백의 삼위일체.jpg

  

5.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그분은 창조의 하나님이요 구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맞는 이야기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것이요, 그분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의다. 이런 정의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다만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내용은 하나님의 사역과 속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본질이 어떠한가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로 말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느것 맞다고 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본다면, 둘 다 맞는 표현이다. 다만 두번째 정의는 성경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기 때문에 이것을 적용할 때에는 조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6. 하나님은 한 분인가 아니면 세 분인가?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그것은 당연히 한 분이시다고 누구나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했는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셨으며,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둘째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그렇게 소개하셨으며, 신약의 믿음의 선배들도 그렇게 말했다. 

  먼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이 누군지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살펴보자. 사46:9에 의하면,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43:10~11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데, 그럼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여호와가 예수님이시다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저 위대한 신학자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곧 예수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지, 예수님을 두번째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든지, 아니면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아들도 하나님인데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럼,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고백했을까?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신4:35),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유다의 히스기야왕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지으셨나이다(왕상19:5)"라고 말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자신도 그리고 구약의 믿음의 선지자들도 다 하나같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들어와서 교부들의 신앙과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학자들에게 물어보면,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들 말한다. 만약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단이 된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묻겠다. "구약의 어떤 성도가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알고 믿었는가?"라고 말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이 한 분임을 믿었고 오실 메시야를 믿고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정의할 때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맞는 정의라고 할 수 있지만, 구약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어떠한 하나님을 믿었고 또한 소개했던 것인가? 먼저,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소개할 때에는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다(요17:3). 그리고 사도바울이나 야고보장로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서술하였다. 즉 사도바울도 역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라고 했으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갈3:20)" 그리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4:6)"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장로도 "하나님은 한 분이다(약2:19)"고 고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이다. 

 

7. 그리스도로 오셨던 예수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는가?

  그런데 어느날 이스라엘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50가지 이상 약속된 메시야가 나타난 것이다. 그분을 살펴보니,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다. 바람과 파도를 말로 잔잔케 하셨고, 죽은지 4일된 자도 살려내셨으며,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난 자들도 온전케 하셨다. 그리고 본인이 죽었는데 스스로 3일만에 되살아나셨고 제자들에게 12번 이상을 나타내 보이셨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들도 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만일 내가 그(나는~이다)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가 죄 가운데 죽으리라(요8:24)" "너희는 율법에서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등등은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부활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분이 무소부재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마가다락방에서 당신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늘로 가시면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 대신에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이 대신 제자들과 함께 하게 할 것이며, 또한 그분이 오시면 "그분은 내가 누군지를 알게 할 것이다"고 하셨고, 그분이 오시면 "내가 했던 말들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고도 하셨다. 그러자 결국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님도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 250?~336)가 주후 319년,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는 골1:15에 나오는 말씀 곧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첫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니 계신 적이 있었으며, 그분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아니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이 문제를 놓고 니케아종교회의(A.D.325년)가 열렸고 그를 이단으로 파문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신조가 니케아신앙고백(A.D.325년)인데, 이 신조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라고 정의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콘스탄티노플 회의(A.D.381년)를 통하여 성령님도 하나님이다고 정의하게 된다. 그리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신앙이 정립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아리우스를 파문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신앙고백을 만들어 냄으로 인하여 발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만들어낸 신앙고백서(A.D.420~450)에 이런 말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이 신앙을 완전무결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 선언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이 선언 때문에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아니하면 그때부터는 그런 자는 이단으로 정죄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영원한 멸망에 처하는 일처럼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구약의 어떤 성도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고 믿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경륜적으로 아들로도 나타나시고 다시 성령으로 오신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을 소급 적용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하면 그를 마치 이단인 것처럼 여기고 정죄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8.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하는 고백을 생략한 채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강조하면 어떤 오류가 빠질 수 있는가?

  이단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잘 설명하려고 해서 만들어낸 신앙고백(신조) 때문에 훗날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가? 놀랍게도 그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을 아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첫째,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성육신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이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만을 정통이라고 생각하다보니, 구약시대에 하나님도 이미 삼위일체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또한 활동하고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벨직신앙고백서(1561년)에 보면, 구약시대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활동하셨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창조사역 때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우리가]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소유격 인칭대명사 "우리"가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상의하는듯 보이는 "우리"라는 의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상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던 천사들과 상의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증거는 구약성경에서 여러군데 계속해서 나온다. 그래서 전총신대 구약학교수였던 김정우박사는 창1:26에 나오는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함께 한 천상회의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자신의 논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인터넷을 검색해보라). 만약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회의를 하여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말씀들을 파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그렇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나 인간을 지으실 때 홀로,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불리던 한 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협의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 그분은 어떻게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구약성경을 통틀어 살펴보면, 첫째로 그분은 당신의 지혜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잠3:19). 그리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시33: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그분이 말씀을 통하여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두고, 신약시대에 사도요한은 만물이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으니 그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언급하게 된 것이다(요1:3). 고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확립된 삼위일체 하나님(해석)을 정통으로 알고 그것이 아니면 이단이라는 도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잔뜩 부풀게 했을 뿐이다. 

  둘째,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고 예수께서는 그분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거나 혹은 서 계시다고 정의함으로서, 마치 한 분 하나님을 두 분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승천이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요 실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다른 보좌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맡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마귀를 이기시고 승리하셔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이다. 왜냐하면 "오른편"은 성경에서 힘과 권세와 승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분이 천국에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어떤 일을 수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대제사장으로서, 혹은 중보자로서 사역하고 계심을 뜻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죽어갈 때에도 예수께서는 보좌 우편에 서셨다. 그분은 그때에 중보자로서, 스데반을 격려하고 그가 순교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주셨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라. 예수께서는 부활승천 후에 아버지의 보좌 곧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3;21).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 하나님의 보좌는 이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단수)"가 되었다(계22:1,3).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 천국에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그분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그분은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계22:13)". 그런데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보면, 여호와께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그러므로 저 위대한 신학자 칼빈도 여호와가 곧 예수님이라고 그의 책에서 밝힌 바 있다. 이 땅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일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셋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천국에서 그분은 한 분이신 것이다. 

  셋째,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 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것을 두고(마3:16),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위격은 다른 세 분이시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삼신론적인 생각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위격이 셋이라는 표현을 여기에 적용하면 누구나 "하나님은 셋 같은데 그래도 한 분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로구나"하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간단하게 정리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동시에 셋으로 나타나셨다고 말이다.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동시에 나타날 수가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매주일 오전11시에 모든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 동시에 나타나실 수가 있으신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동시에 존재하고 나타사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 동시존재를 생각하면 한 분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텐데, 삼위일체로 설명하다보면, 하나님은 셋인데 굳이 한 분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니까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한 분이지만 삼위일체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실 때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지만, 사도들이 나가서 세례를 줄 때에는 전부 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주었다.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성도 3천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세례주었고(행2:38), 사마리아에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며(행8:16),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행10:48).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도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행19:5). 그렇다. 그들은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의 또다른 체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았고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9.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지만 삼위일체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다는 말은 성경의 진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는 말은 만들어낸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적용할 때에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홀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세 가지 위격으로 나타나셔서 일을 하셨다. 하지만 여전히 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정통교리로 알려져 있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는 말로 앞세우고 한 분이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는 정말 이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만 강조하다보면, 여호와증인 이단과 유대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증인들은 여호와만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미가엘천사장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만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천국가기 힘들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삼위일체식으로 강조하다보면, 하나님의 교회와 신천지와 같은 이단과 천주교가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 분인 줄 모르고 둘, 셋이라고 하니, 아버지 하나님이 있고 아들 하나님이 있다면 당연히 어머니 하나님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니, 다들 수긍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 흉내낸다는 말인가? 그녀는 과연 무소부재한 존재인가? 전지전능한가? 아니면 동시존재가 가능한가? 이적 하나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머니 하나님이라 불려서는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어떠한가? 천주교는 A.D.451년 칼케톤회의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정의해버렸다. 이 얼마나 불경스런 일인가? 마리아는 인간 예수를 낳은 것이지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태만 빌려주었을 뿐이다. 선재하신 그리스도이자 선재하신 말씀이 육신을 입었는데, 천주교는 이 신조 때문에 마리아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다.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알아야 하고, 또한 삼위일체 방식으로 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영생이란 유일하신(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아는 것이라고 했다(요17:3).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기 때문이다(요1;18). 아버지의 생각 속에 계셨던 것이다. 그것을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미리 언급하였다. 그래서 그것이 육신을 입고 탄생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다. 그분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활동하셨던 아들이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신 것이다(사9:6, 딤전3:16). 그분은 동시존재하신 하나님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10. 나오며

  우리는 교리를 믿고 따르기보다는 먼저 성경말씀을 믿고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성경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나온 상황신학의 결과물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말씀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사람을 이단이니 삼단이니 정죄해서는 아니 된다. 성경을 어겨서 말하거나 잘못 해석할 때에 비로소 이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장차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알려주었을 때, "임마누엘"이라고 했다(마1:23).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한 분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동시존재하시며 사역하고 계시는 것이다. 잘 알고 있게씨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상고해 보라.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2020년 11월 08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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