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가? 그것은 우리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누구든지 그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왜 그러한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인지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여기, 그 해답들이 나와 있다.

2021-12-0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5) 형제 사랑 실천 및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법(요일3:13~4: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_ahm0Ylu_c [ 혹은 https://tv.naver.com/v/24018315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에 대한 영적 성장을 다룬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의 미혹에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인가를 알려 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초신자들을 위한 양육 지침서라고 정의할 수 있고 더불어 이단 세력으로부터 성도를 지켜 주는 예비 주사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요한일서 1-2장의 내용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다룬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고, 이어지는 3:1-4:6에서는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로서의 성도의 신앙과 그것에 합당한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오늘은 3:13~24까지의 말씀을 살펴볼 것인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삶의 적극적인 측면의 특징으로서 형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4:1~6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계를 권면하는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형제 사랑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정리하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했는데 첫째 이유는, 믿는 이들은 형제 사랑에 대한 실천을 통하여 과연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3:13~14). 그러므로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고 또한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사망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내 안에 과연 하나님의 생명이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형제 사랑의 실천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형제 사랑을 결국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는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가인이 자신의 형제 아벨을 미워한 것이다. 결국 그의 미움은 살인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가인 자신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마음을 악한 자가 치러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아우를 돌로 쳐죽이고 만다. 가인 안에는 자기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과연 자기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는 아니다. 다시 말해, 혹 누가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꼭 영생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에, 그냥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요일3:23). 그렇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응당 형제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3:16).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시기 위해 먼저는 사람으로 오셨고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인류의 대속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성령으로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동생으로 삼으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시고 또 낮추시어 피조물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숨을 죽기까지 내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다른 형제를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삶으로 형제를 도와 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재물(재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가 궁핍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도 본체만체 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요일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말이나 혀로서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형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직접 행동과 진실함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 자기의 형제가 궁핍에 처하여 있는 것을 보고도 그를 도와줄 마음을 닫아 버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어떤 그리스도인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면, 그에게는 어떤 유익이 나타나는가?

  이어서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자가 갖는 상태를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자기를 책망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 이 수준에 도달하는 자에게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3가지로 언급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다(요일3:21). 이는 성도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자에게 담대한 믿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에 담대함이 없는 자는 악한 영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 버리거나 겁먹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영들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겁먹는지 아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가 책망을 들을 만한 죄악들이 자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또한 생명의 교통을 나누고 있으며 또한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 안에 어떤 거리낌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자는 악한 영들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담대해지는 것이다. 아니 당당히 맞서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한 것을 다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요일3:22). 왜나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그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는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기도 응답을 풍성하게 받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회개하고 생명을 성장시켜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 그러면 그것으로 인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분량을 맞춰 주실 것이다. 셋째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분에 거하는 상호 교통과 상호 내주가 가능하다고 했다(요일3:24). 그렇다. 주님과의 친밀도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의 친밀도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이 또한 우리 안에 거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구한 것들은 또한 즉시 응답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요15:7).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으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는 가지처럼 잘려 나가 밖에 버려져 불에 던져져 살라지고 말 것이다(요15:6). 

 

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초신자들은 사실 사람의 말만 듣는 것으로서 그 속에 역사하고 있는 영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영들을 무조건 다 믿지 말라고 권고한다. 오히려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분별해 보라고 권고한다(요일4:1). 왜냐하면 당시에도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이미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영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느냐 시인하지 않느냐로 구분하라는 것이다(요일4:2~3).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영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와 있다고 했다(요일4:3). 한편 사도 요한은 2장에서도 역시 적그리스도가 누군지를 경고하였다.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하였다(요일2:22).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했다(요일2:22). 이는 당시 초기 기독교 이단 세력인 영지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아들은 하나님으로 인정했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물질을 창조했기 때문에 저급한 신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예수님은 같은 하나님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모든 창조물들 창조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 곧 예수께서 물과 피로 오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요일5:6). 

 

6. 성도들이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이 말한 바, 적그리스도란 악한 자인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악한 자인 사탄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는 이 세상의 임금(왕)으로 활동하고 있는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다(요12:31, 14:30, 16:11).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하셨다. 사실 영적인 권세로 서열을 매기자면 그는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와 능력을 소유한 자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를 어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임금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있는가?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악한 자인 사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서 내주하고 있는 분이 이 세상에 있는 악한 자 곧 사탄 마귀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요일4:4).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가 아무리 위대한 지혜와 강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를 결코 손댈 수가 없는 것이다(요일5:18).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들이 비록 사탄 마귀보다 약한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탄 마귀는 우리가 가진 권세와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강한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와는 달리 오히려 이 세상 임금인 사탄 마귀의 말에 순종할 것이라고 했다(요일4:5). 이는 그들이 세상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했다(요일5: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세상 임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성도들은 누가 진리의 영을 소유한 자인지 반대로 누가 미혹의 영을 소유한 자인지를 구분할 수가 있는 것이다(요일4:6).

 

7. 나오며

  요한일서는 구조가 참으로 특이하다. 점진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수미쌍관형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일서가 순환론적인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통하여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도록 2장에 이어 또다시 그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말씀을 들었다. 그래서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요한일서는 반복해서 말씀을 가르침으로 초신자들을 깨우치고 양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이 책의 기술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20:31). 그러나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 4가지로 나온다. 첫째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 쓴 것이기 때문이다(요일1:4).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고 마귀에게 속하게 만들어 버리는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게 하려고 썼다고 했다(요일2;1). 고로 성도들의 일상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죄를 범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는 성도들이 미혹하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분별하여 그들에게 속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요일2:26).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요일5:13). 그렇다. 요한일서는 이처럼 영생에 관한 서신이요, 이단에 대한 예방 주사를 맞히기 위한 책이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는 이 책을 통하여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을 더 성장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명의 능력들이 형제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오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잘 분별하여 시간을 허송세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1년 12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성경에 딱 5번만 나온다. 그런데 이 다섯 번이 모두 다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요한 사도는 대체 누구를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칭한 것인가? 그리고 대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죽은 후에도 이 신분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은 성도들의 이러한 실제적인 삶을 한 번 돌아보자.

 

2021-12-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4)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요일2:18~3: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m4E7q1esmc [혹은 https://tv.naver.com/v/23859584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을 보는 신학자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확실히 이 책은 초신자를 위한 양육서라고 할 수 있고 동시에 이단의 세력을 대항하게 해주는 예방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생명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책이며, 당시 이단세력인 영지주의를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일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관하여 관심이 요청되며, 당시 기독교에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초기 영지주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영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에 맞서는 하나님의 자녀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2. 요한일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요한일서는 구조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교차대구법이 쓰인 것도 아니며, 직선론적인 논리전개방법도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일서는 어쩌면 순환론적인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하나의 바퀴가 굴러가고 있는데 또 하나의 다른 바퀴가 같이 굴러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므로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요 소제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1장에 보면 '빛'과 '어둠'과 '진리'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런데 요한일서 2장에서도 역시 '빛'과 '어둠'과 '진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일서를 큰 주제별로 구분한다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의 주제는 '교제'(코이노니아)로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더불어 사귀는 교제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 1~2장의 말씀이다. 그리고 두번째의 주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제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존재이며 그리고 무엇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요한일서 3~4장에서 증거한다. 그리고 세번째 마지막 주제는 요한일서 5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승리'라는 주제다.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비결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당시에 이미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었으나 떨어져나간 바 있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대체 누구를 지칭하는가?

  사도 요한은 성도들간의 교제에 있어서 이제는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성도들에게 들어온 이단적 세력에 주의할 것을 권고하기 시작한다. 사도 요한은 그들을 '적그리스도들'이라고 하였고(요일2:18,22,4:3, 요이1:7),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요일2:26, 요이1:7).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바로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초기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의 말씀을 통하여 적그리스도 혹은 미혹하는 자가 영지주의자라는 사실을 계속 언급한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으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였는가? 사도 요한은 요일2:18~29의 말씀에서, 영지주의 이단세력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3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이단세력은 정통교회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요일2:19). 즉 한 때는 영지주의자들도 정통 교회 안으로 들어왔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더이상 참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자기들이 참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라고 알게 되어 교회를 떠나고 없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간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이단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진리는 진리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함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리를 외치는 교회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만약 참지 못한 채 참된 교회를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하여 그리고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이 누군지에 대하여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단세력이라는 것이다(요일2:22~23). 즉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거나,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이단세력이요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것이다. 셋째, 이들은 계속해서 성도들을 미혹함으로서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요일2:26). 누군가 말씀을 가르치는데,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점점 더 자신을 헤매게 만드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세력인 것이다. 왜냐하면 참 진리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진정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시기 때문이다(행2:33). 이때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4. 초기 영지주의가 당시 '이단세력'이자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당시 교회에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말하였다(요일2:26). 여기서 교회에 이미 들어와 미혹하고 있던 자들은 바로 다름 아닌 '초기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요(요일4:2~3), 둘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일2:22a). 그리고 셋째,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하나님으로 시인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일3:22b). 넷째,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일3:3). 그렇다면 이들의 고백이 이단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었다(요일4:2~3). 왜냐하면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영은 선하고 육(물질)은 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결단코 육체를 가지신 예수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동안에 나사렛 예수에게 들어갔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를 탈출했다고 말했다. 

  둘째,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부인하고 있었다(요일2:22). 이들은 자기들의 교리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육신을 입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에, 당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 중에 어떤 이는 그날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다름이 아니라 그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까지 말했다. 왜냐하면 '영'은 결단코 죽을 수가 없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역시 아버지와 아들 중에 한 분을 부인하고 있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 땅에 보내어진 아들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신앙고백이 아버지도 믿어야 하고 아들도 믿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두 분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보면 하나의 하나님의 보좌에 다름 아닌 예수께서 앉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루 우리 주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여호와를 무시하였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물질세계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말한다. 둘 다를 한 분 하나님이라고 시인하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말이다. 그러나 두 분은 아울러 동시에 존재가 가능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때에 우리는 구별된 두 분을 또한 다르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두 분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상호침투 내지는 상호내주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만 당시 유대교나 오늘날의 여호와증인은 하나님은 믿으나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이들이 바로 이단세력인 것이다. 

 

5. 요한 사도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왜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하였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오셨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어떤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으면 그는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으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장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는 분은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이미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 증언하는 것으로서(사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1-3)"라고 하였다. 더욱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주실 때에는 남녀 구분 없이 모든 자에게 보내주실 뿐만 아니라(욜2:28~29), 사람 속에 내주하실 것이라는 말씀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겔36:26~27, 렘31:33). 그러므로 마가다락방에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보혜사 성령과 성령의 내주에 관하여 그는 요한복음에 그것을 기록할 수가 있었다(요14:16).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교회의 성도들은 영지주의자의 교사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배울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요일2:20). 그리하여 이상한 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말라고 했다(요일2:27). 오로지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분은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어 예수께서 누구시며, 또한 그분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14;26). 그러므로 영지주의의 미혹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대체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님과 교통(코이노니아)를 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아울러 이러한 교통을 방해하는 이단세력이 있으니 그 세력을 잘 분별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후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는 대체 어떤 존재를 가리키며, 또한 현재는 어떤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는지를 언급하였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 3장 1~12절까지의 말씀의 핵심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난다고 했다(요일3:10).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을 가리키며, 마귀의 자녀들은 미혹의 영으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라고 하였다(요일4:6).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3가지 면이 갖춰진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다.

  그것은 첫째로,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분과 같이 되기 위해서 지금 그분이 깨끗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있는 자라고 말했다(요일3:3).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영은 선한 것이고 거룩하며, 육은 악한 것이고 더럽다고 판단했기에, 자기의 육체를 성결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육체로 죄를 짓는 것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어차피 육은 영에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않고 있는 자는 장차 주님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의 자녀로 발견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둘째,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께서 의롭게 있는 것처럼 자신도 의를 행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요일3:7).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뒷받침되지도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장차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의로움이 비록 발견되지 않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재림시가 되면 응당 자기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미혹'이라는 것이다(요일3: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면 그는 마귀에 속한 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자는 결코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닌 것이다(요일3:8). 셋째,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자라는 것이다(요일3:11~12).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야말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 자는 사망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자라고 하였다(요일3:14). 만약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은 여전히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있는 자이다(요일3:12). 그러한 자는 마귀에게 속했기에 결국 최초의 형제 살인자였던 가인처럼 자기의 형제를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요일3:12). 

 

7.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죄를 짓지 아니하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들을 멸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멸한다'는 표현은 그것을 무효화시킨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것을 폐하여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마귀가 아무리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를 짓게 한다고 해도 쓸모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오셔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해 놓으셨기에, 믿고 회개하는 자는 지금도 그분의 피로 인하여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마귀가 어떤 일들을 해도 그 일은 무효화되어버릴 것이며, 폐지될 것이다.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때에 사람 속에 '하나님의 씨'도 주셨다고 말했다(요일3:9).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씨'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고 '성령'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씨는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을 믿은 후 거듭날 때에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다. 그러면 그때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싹이 트게 되고, 말씀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범죄하지 않으려면 최소 자기 안에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8. 나오며

  가인은 당시에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노아훙수 이전까지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가인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잃고 만다. 그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따라가지 않고 악한 자 곧 마귀의 인도를 따라갔기 때문이다(요일3:12). 결국 회개하지 않은 가인은 영원한 멸망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다시 말해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결국 누구의 음성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다시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의 음성을 따라가지 않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미혹하는 자 곧 적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의 특징에 대해 3가지를 말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들에 관하여 3가지를 언급하였다. 요한이 자꾸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미혹하는 영에게 속지 말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서 꼭 영생을 얻으라는 권면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신천지나 하나니의 교회와 같은 이단이 횡횡하고 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여 끌어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당시 이단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었으니,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이단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서 마지막 날에 꼭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21년 1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에 혹시 잘못해서 죄를 범해도 그 죄가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 것은 잘 믿는 것일까? 누가 오늘날에도 역시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며, 누가 지금 어두운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자인가? 이 놀라운 물음들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들어 있다.

2021-11-24(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3) 형제 사랑 준수와 세상 사랑에 대한 경계(요일2:3~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_egdl9DRrA [혹은 https://tv.naver.com/v/23743219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어떤 책인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특징을 딱 2가지로 요약하여 말하라고 한다면, 이 책은 예방 접종책이자 초신자용 훈련 교재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자신이 없는 여러 교회들을 비집고 들어 온 영지주의라는 이단에 맞설 수 있도록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교리들을 써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자에게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시간을 통하여, 이 책의 서론 부분과 아울러, 성도의 교제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표징으로서 형제 사랑 계명 준수와 세상에 대한 사랑 경계 부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번 시간을 통하여, 영지주의의 미혹을 보다 더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고 그것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유혹을 이길 수 있는지도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2.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과 성도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3~11의 말씀에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참된 성도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미혹에 직면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피부에 와 닿는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썩 다가오지 않는 말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은 영지주의의 실체를 알아보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이 책은 사실 이단의 세력에 대한 예방 접종을 위한 책이다. 그러므로 이단의 예방을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을 보다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이단들 역시 성경을 이용하여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단들의 특성과 그들의 접근 방법을 잘 알아 놓는다면 그들을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어떻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로, "나는 그분 곧 하나님(혹은 그리스도)을 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요일2:4). 그들은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었을 텐데, 그들은 지금 계명을 준수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들은 "나는 그분 안에 살고 있다(머무르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요일2:6).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말한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그분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그분이 행하셨던 바대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아무리 자기들이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셋째로, 그들은 이미 빛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요일2:9). 그러나 그들이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형제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어둠에 있었던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말로서는 자신들이 어떠어떠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들의 말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영지주의의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

 요한서신 강해 첫 시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영지주의 이단은 2세기 말경부터 3세기에 맹위를 떨친 가장 위험한 기독교 이단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기독교와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빛과 어둠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말하며 진리를 찾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빛'과 '어둠' 그리고 '진리'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과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바는 차이가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은 그들의 구원관과 사도 요한이 말하는 구원관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영지주의의 구원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영지주의자들은 영지를 깨닫는 것을 곧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속죄양 같은 것은 필요 없다. 그들에게 죄나 사탄 마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영지(영적인 지식)'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은 인간은 원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멀리 있다 보니 어둠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느 날 예수라는 청년의 육체 속에 잠깐 영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30세 때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속에 들어왔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깨우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준 다음,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기 전에 그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요 미혹하는 자요 이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가?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과 참된 성도들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는가? 그것은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았으면 그것으로 구원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선한 행실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중에 어떤 분파는 육체라는 것은 영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죄를 저지른다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에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을 가리켜 '에피큐로스(쾌락주의) 학파'라고 부른다다. 그런데 당시 교회에 침투해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생각도 그랬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도덕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제 사랑을 성도가 실천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새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곧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들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13:34~35). 이는 형제가 서로 사랑할 때에 그가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그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언급하신 계명(도덕적인 계율)은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구약시대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레19:18).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새 계명을 말할 때, 그것은 옛 계명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했다(요일2:7). 그렇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구약 계명에 비하면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계명은 원수는 미워하고 이웃은 사랑하라는 명령이었다면, 신약의 예수께서는 이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까지도 위해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5:43~44). 이처럼 새 계명은 사랑해야 할 대상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자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죽이라고 하신 것일까? 정말 영지주의자들의 말처럼 여호와가 저급한 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리하여 죄를 짓게 되면 어떤 심판과 어떤 결과를 맛보게 되는 것임을 알려 주어야 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꼬?"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비로서 그때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께서는 죄를 지어 죽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 흘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고 그분은 죽을 우리 인간을 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형제를 미워했고 심지어 살인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깨달은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5. 성도들은 영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성장하는가?
 사도 요한은 이제 영적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신 자들을 성도라고 하면서, 이제 갓 태어난 모든 성도들은 성장해 가야 한다고 하였다. 즉 어린 아이로 태어난 성도가 양육을 받아 점점 자라서 청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라도 지금 자신이 어떤 영적 성장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영적인 나이에 따른 권면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보았을 때에 '아이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키며, '청년들'과 '아비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첫째, '자녀들' 혹은 '아이들'을 두 종류의 단어로 표현했다. 하나는 '자녀들(테크니아)'이라고 말했다(요일2:12). 이것은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할 때에 쓰는 단어이다. 그런데 또 하나는 '아이들(어린이들)(파이디아)'이라는 용어도 있다(요일2:14). 이 단어는 스승이 자기의 제자를 양육하고 훈련해야 할 때에 쓰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들은 어떤 영적 상태의 성도를 가리키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그것은 영적으로 초신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자기가 어린 자녀라 할지라도 두 가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첫째로, 어떤 죄든지 지은 죄들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요일2:12). 그리고 자신은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요일2:14). 
 그리고 사도 요한은 둘째, '청년들'이란 영적으로 성장하여서 이미 강해진 자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악한 자인 사탄 마귀와 싸워서 이미 이긴 싸움을 싸워 이기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요일2:13,14). 그렇다면 청년들은 대체 어떤 무기로 악한 자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요일2:14). 하나님의 말씀이 칼이 되어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적 싸움에서, 이 세상 임금인 사탄 마귀를 이기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낸 당신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요일5:4~5). 그리고 또 하나는 악한 자를 대적할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요일2:14). 고로 영적인 전쟁을 수행할 자는 말씀을 많이 알수록 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 '아비들'이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한 마디로 영적인 지식과 생활이 성숙한 상태에 도달해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들은 이미 성경을 꿰뚫고 있는 자들이고 영적인 세계를 꿰뚫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예수께서 '태초부터 계신 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태초부터 계신 이'라 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태초부터 계신 이라고 불리운 것이다(요일1:1, 요1:1~3).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온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요일2:13~14). 처음에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적자였던 사탄 마귀의 반란으로 인하여, 인간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자는 태초부터 계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라도 결코 거듭난 성도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참 믿음인 것이다(요일5:18). 

6.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
 이어서 사도 요한은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것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형적없이 사라질 때에 같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일2:15~17). 그렇다. 이 세상에 속한 물질적인 세계는 영의 세계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이다. 또한 영의 세계에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영적인 세계를 사모하고 그 세계에서 누릴 것을 잘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악한 자요 미혹하는 자인 사탄 마귀는 사람을 한사코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미쳐 살도록 꼬드긴다. 악한 자가 인간을  꼬드길 때 사용하는 미끼가 사도 요한은 총 3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육체의 정욕' 곧 '육신의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부추켜서 그것을 일평생 추구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육체가 즐거워하는 것에만 푹 빠져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다 헛된 것이다. 이것들 모두가 언젠가는 썩어 없어져 갈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에 필요한 먹을 양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다면 거기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힘써야 한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이란 '눈들이 보는 대로 갖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사람이 되어서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은 사실 끝이 없다. 우리나라처럼 잘 살아도 상대적인 빈곤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번 눈으로 보면 그것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나는 이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래서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치자, 과연 사람은 그것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까?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또 안달이 나서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 결코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이생의 자랑이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떠벌리고자 하는 마음이 '이생의 자랑'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랑하는데 바쁘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것도 헛된 것이다. 아무리 비싼 것이 있다고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도 그것을 내세에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 물질적인 것, 유한한 것에 결코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있으면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이 되어야 한다.  

7. 나오며
 참으로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매우 위협적인 이단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오직 깨달음만이 중요했기에, 예수님의 성육신도 그들에게는 필요없는 것이었고, 더욱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런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깨달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자들이고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구원파나 신천지 등은 신종 신세대에 땅을 뚫고 올라온 영지주의의 변형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어서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믿는 것도 신종 영지주의에 물든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에 물든 자들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아도 이미 예수께서 자신의 죄와 죽음과 저주를 끝내셨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처음 믿을 때 곧 회심할 때에는 회개(돌이킴)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자범죄가 발생하면 즉시 회개(자백)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다. 이미 골고다의 사건으로 자신의 구원은 결정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예수께서 치르신 골고다의 사건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가 믿어도 비로소 다시 회개할 때에 그분의 피로서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한 번 믿었다고 해도,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을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라도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다면, 그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기 때문이다(빌2:12). 

 

2021년 11월 24일(수)

정병진목사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성도들의 친교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런데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이 말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이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은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왜 사도 요한은 그들을 분별하라고 그렇게 강조해서 말해야 했던가?

2021-11-1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2) 성도의 코이노니아의 핵심요소와 그것이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일1:5~2;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gvXSoKg9Gs [혹은 https://tv.naver.com/v/23470017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초신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자양분을 얻게 하고, 영혼을 노리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었던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실천적인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소중한 책이다. 요한일서는 알다시피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와 함께 사도 요한이 쓴 서신으로서, 이것들 중에서 첫 번째 책이 요한일서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 A.D.90~95년경으로 추정되며, 그 대상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로서 사도 요한이 전파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거나 신앙의 기초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초신자용 신앙 지침서가 바로 요한일서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요한일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서, 코이노니아(교제, 교통, 사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코이노니아가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코이노니아에는 어떤 방면이 있으며,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고 그것을 지속시켜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코이노니아'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코이노니아(koinonia)'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교제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인데, 이 단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에는 보통 '교제(친교)' 내지는 '사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어에서는 이 단어를 대부분 'fellowship'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가끔식 'communion'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코이노니아'의 본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단어의 뿌리를 찾아보면 알 수가 있는데, 원래 이 단어는 '코이노스'라는 형용사에서 온 말이다. 형용사 '코이노스'는 우리말로는 '공통된'이라는 뜻을 가졌다. 따라서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상호 간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서로가 공통된 정서를 함께 나누며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코이노니아'란 공통된 분모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교제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제를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인 간의 공통 분모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크게 확대해 보면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와 교제를 나누실 하나님이 먼저 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으며(요5:26), 이 생명을 예수에게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일1:2, 5:11~12) 또한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요일5:13). 이때 하나님께서 분배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를 일컬어 성경에서는 '거듭난 자'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영적인 교통을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대체 누구와 코이노니아를 가지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에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고 했다. 그것들 중 한 가지는 하나님 및 예수님과 갖는 교통이라고 했다(요일1:3).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성도들 간의 교통이라고 했다(요일1:7). 그런데 이것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를 수직적 교제라고 부르며, 성도들끼리 갖는 교제를 수평적인 교제라고 부른다.

 

3. 성도들이 서로 코이노니아를 갖기 위하여 꼭 해야만 하는 일 2가지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 간에 교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 2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중 첫 번째는 성도들은 반드시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요일1:5~7). 왜냐하면 우리 주 하나님이 빛이시며(요일1:5),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그 빛을 비추러 오신 참 빛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1:9, 요일2:8). 그러므로 성도가 이 빛 가운데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는 어둠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즉시 죄를 자백하여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요일1:9). 이는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회개'라는 것을 알려 준다. 주님과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 코이노니아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리하면, 그것의 첫 번째는 반드시 성도가 어둠의 일을 끊고 생명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이다. 이때 자신이 빛 가운데 걷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죄를 짓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현재 어둠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은 죄를 자백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4. 사도 요한은 왜 빛 가운데서 걸어감으로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이루어야 하고 그래서 형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하는가?

  사도 요한이 '빛'과 '어둠'이라는 단어를 꺼내어 사용할 때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를 염두해 두고 쓴 것이다. 영지주의자들도 역시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을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다른 것이다. 그들은 영지를 깨달은 자를 일컬어 빛 가운데 있는 자요,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지만,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참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빛의 아들이 되어 빛 가운데 살 수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렇지만 당시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은 현재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늘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도 역시 죄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영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에 속한 어떤 것이 자신의 영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는 죄를 짓고 있었어도 그들에게 그것은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약 그 상태로 죽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불타는 영영한 불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 있어서 '영지'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인간이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되어 나온 신적 존재이므로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빛을 받는 것이요 영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길을 사람들이 모르니까 그 길을 알려 주려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진리의 빛을 깨닫도록 빛을 비추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빛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는 굳이 예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다만 영지를 깨우쳐 줄 존재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인가? 그리고 왜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오직 우리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었기 때문이다(롬6:23). 그런데 하나님은 본래 영이시므로 죽으실 수가 없으셨다(요4: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 흘려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요1:14). 그러나 이미 영지를 깨달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육체를 입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물질세계는 저급한 신이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주 저급한 신으로 밖에는 생각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육체를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거짓 선지자요,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했다(요일4:1~3, 요이1:7).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을 일컬어 가현설론자라고 부른다. 그렇다. 기독교의 최대의 이단이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영지를 깨닫기만 하면 자기도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영지를 깨달으면 하나님이 된다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어찌 피조물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가르침은 사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던진 미끼였다. 그런데 이것을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정말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께서 더러운 육체를 입으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때에 예수께서 육신을 입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까지 인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 중 단 한 사람도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 드리자. 그리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 찬양을 올려 드리자. 왜냐하면 그분의 성육신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지를 깨달은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계명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를 가진 형제를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영지만 깨달으면 그들은 이미 신이 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득도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자신이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들을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빛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런 자하고는 교제를 끊으라는 것이다. 그들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요, 그들은 거짓말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코이노니아가 단절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모셨음에도 죄된 본성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우선 사도 요한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을 한다든지 혹은 자신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미혹하는 자 곧 영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따르지 않고 사탄이 가르쳐 준 말장난을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연약함에 쌓여 죄를 짓는 성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이미 2천년 전에 예수께서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그 속죄의 효력이 나타나게 하려면 반드시 지은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다(요일1:9). 죄를 자백할 때에라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지은 죄들로부터 그를 깨끗하게 하고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가운데는 현대 영지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한 번 믿어서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자신이 예수를 믿을 때에 이미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사실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회심의 회개를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이때에 지옥 갈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하신다. 그러면 그가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죄된 본성이 영영 사라진 것이 결코 아니다. 여전히 죄된 본성은 남아 있다. 그래서 그것은 육체가 죽는 날까지 활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러한 고민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로마서 7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회심의 회개를 하였고 예수님을 모셔 들였다면, 그는 그때부터는 발을 씻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는 이미 목욕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을 씻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현대에도 있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이다. 한 번 믿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영지주의자들인 것이다. 속지 말자. 우리는 요한 사도를 통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어느 때고 죄를 지었다면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2천년 전에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6. 성도의 단절된 코이노니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래서 사도 요한은 편지를 써 보내는 목적을 2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1:2)"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죄를 지었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라는 것이다(요일1:9). 그리고 우리의 최대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요일2:1).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바로 의로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첫 번째 변호사(파라클레토스)인 셈이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두 번째 변호사(파라클레토스)인 셈이다(요14;16, 26, 15:26). 그런데 이미 속죄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는 것일까? 아니다. 그분은 믿는 이들의 죄를 용서해 줄 화목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장차 믿을 자들까지 포함하는 화목 제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때마다 즉시즉시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코이노니아)을 단절시키지 말아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단절되지 않도록 미리미리 예방해야 하는데, 그것은 빛을 따라 행하든지 아니면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사도 요한이 A.D.90~95년경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제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속아 마치 그것이 진리의 가르침인 줄을 알고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예방 주사를 미리 맞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제 갓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시작하는 이들이자, 성도 간에 코이노니아를 소망하고 있는 이들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영지주의자들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며,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인도해 주는 선구자이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 가운데 어디 틀린 말이 있는가? 없다. 여기까지는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들의 가르침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럽고 추한 물질계를 만든 신은 저급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육체를 입고 오셨건만, 그들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그분이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속에 잠시 들어가서 일하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그를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미혹이요 사탄의 궤계요 적그리스도의 속임수인 것이다(요일2:18, 26, 4:1,3,6, 요이1:7).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 편지의 서두(요일1:1~2)에서부터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요일2:2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5:5~6a)".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히 찬양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2021년 11월 10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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