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에 있던 일곱교회 가운데 하나였던 사데교회, 이 교회의 별명은 살아있다고 하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라는 것이다. 사실 이 교회는 오직 책망만 받은 두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 대체 이 교회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들었야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에 대한 주님의 처방책에 따르면, 과거 그들이 받았고 들었던 복음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확고히 붙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 그들의 현재의 상태를 단호하게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는 이 사데교회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시대의 교회(A.D.1517~1700)라고 말한다. 정말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죽어있는 교회였는가? 정말 생명책에 이미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름이 지워질 위기에 처한 교회인가?
1. 들어가며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칭찬과 책망, 권면과 당부의 말씀을 사도바울이 기록한 책이 요한계시록 2~3장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은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밧모섬에 있을 때 본 것(1장) 그것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이었다. 둘째는 지금 있는 일들로서, 예수께서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라는 편지다(계2~3장). 셋째, 그것은 장차 될 일들로서 사도요한이 하늘보좌와 일곱인과 일곱나팔 그리고 일곱대접재앙에 관한 계시다(4~22장).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소아시아에 써보내라고 했던 일곱교회들 가운데 다섯번째 교회에 해당하는 사데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살았다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상 죽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가 역사적으로는 어느시기에 해당하며, 그 시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과연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지까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2. 사데는 어떤 도시이며,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사데교회는 사데(사르디스)라는 도시에 세워진 교회다. 그런데 이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특이하다. 양쪽에 아주 많은 무덤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데교회 옆에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거대한 시벨레(Cybele) 여신의 신전이 떡하고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매우 평화로워 보인다. 왜냐하면 이 도시가 크지는 않지만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삼면이 절벽으로 구성된 산 위에 놓여 있었고,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도시는 단 2번의 침략 이외에 침략을 받아보지 못했던 도시였다. 이 도시 사람들은 자기의 도시를 휘감고 도는 강에서 사금을 채취하였고, 흰 양털로 옷감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가난같은 걱정은 하지 않고 있던 동네였다. 그런데 이 교회는 3가지 면에서 참 특이하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첫째, 에베소나 버가모나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처럼 이단의 공격이나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유대인들이나 로마정부로부터 핍박이나 고난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이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오직 책망만 들었던 교회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 교회의 신앙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사실 신앙이 견고해지고 강해지려면 유혹이나 핍박이 있는 것이 더 낫지 아니한가 싶다. 하지만 사데교회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던 평화스러운 교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들이 들어야 했던 책망은 무엇이었고, 격려는 무엇이었으며,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또 무엇일까?
3. 사데교회에게 주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는가?
첫째, 이 교회를 예수께서 자신을 어떤 존재로서 소개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첫째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가지신 이이다(계3:1). 하나님의 일곱 영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로서(계4:5), 이 세상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예수님)의 일곱 눈들이다(계5:6). 그런데 여기서 어린양의 눈들이 숫자적으로 일곱 개는 아니다. 그러면 어린양은 괴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곱 눈들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7이란 숫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7(4+3)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인데, 이 세상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킨다. 한편 12(4*3)라는 숫자는 천국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킨다. 고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이 세상을 불꽃같은 눈으로 온전히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전지하신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눈으로 사데교회를 감찰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그러니 예수님의 판단(책망)은 100% 확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이 표현은 성령이 곧 예수님의 영인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이 영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이 영은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둘째로, 예수님은 일곱 별들을 가지신 이로 소개된다. 요한계시록 1장에 의하면, 일곱 별들을 예수께서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다. 그리고 일곱 별들은 일곱교회의 사자(메시지 전달자)라고 예수께서 직접 사도요한에게 알려주었다(계1:20). 고로, 예수께서 일곱 별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목회자들을 붙들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사데교회의 목회자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있었다. 고로 만약 그가 그 상태로 계속 간다면 그는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다(계3:5).
4. 사데교회가 책망받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둘째, 사데교회가 들었던 책망은 무엇이었는가?(계3:1b~2) 사데교회는 2가지 책망을 들었다. 사데교회는 살아있다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계1:1b). 둘째, 하나님 앞에 그들의 행한 행위들의 온전한 모습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5. 죽어가는 사데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책은 무엇이었는가?
셋째, 그렇다면 주님의 처방책은 무엇이었는가?(계3:3) 그것은 3가지다. 첫째로, 사데 교회가 처음에 복음을 어떻게 받았는지와 어떻게 들었는지를 계속해서 기억해보라(곰곰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둘째로, 받고 들었던 것을 확고하게 게속해서 붙들라는 것이다. 셋째로, 그리고 단번에 회개하라는 것이다. 지금 변질되어버린 곧 식어버리고 미지근한 상태를 회개하고, 처음에 열정적으로 들었던 것처럼 다시 열심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우상숭배나 음행을 책망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책망하고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주님께서는 갑작스럽게 가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도둑같이 임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주님의 갑작스러운 재림 곧 재림의 돌발성을 가르쳐주는 경고의 말이다.
하지만 환란전휴거론자, 베리칩종말론자, 세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도둑처럼 오신다는 것을 보물만을 훔쳐가기 위해 오신다고 하면서 잘못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아니다. 예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말씀(마24:43)이나, 사도바울(살전5:2)이나, 베드로(벧후3:10)나 다 갑작스러운 주님의 재림과 그리고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있는 것이다(계16:15).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 들었던 복음을 상기해보고, 그것을 견고히 붙잡고, 잘못된 행위들을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데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이다.
그런데 "깨어있으라(정신차리고 있으라)"는 말의 에피소드가 있다. 사데라는 도시는 사실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하지만 두 번 정복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졸던 사데의 병사가 떨어뜨린 철모를 주으러 내려오는 것을 본 페르시아와 헬라병사가 그 장소를 따라서 올라가 도시의 성문을 열어젖힘으로 가능했다고 한다. 믿는 자는 언제 주님이 오실른지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잘못된 삶을 날마다 회개하고 있어야 그날 도둑처럼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6. 사데교회에 남아있는 소수의 흰 옷 입은 자들은 누구인가?
넷째, 한편 이 교회에 소수라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을 위한 격려의 말씀을 들어보자(계3:4). 이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는 성도였지만 그들은 빛나는 옷(흰 옷)을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있었던 자들이다(막1:15). 여기서 옷은 겉옷으로서 믿는 성도들의 행실을 나타내는데, 주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여 빛나는 흰 옷을 입으려면, 자기의 두루마기를 예수님의 피에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계22:14,7:14).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의 행실이 깨끗해지지는 아니한다. 그럴려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행위들이 흰 양털깥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7. 사데교회의 상황에서도 이기는 자들은 어떤 보상을 받는가?
다섯째, 이제는 주께서 사데교회의 이기는 자들에 주신 약속의 말씀을 보자.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에 대한 축복을 3가지로 약속하셨다. 첫째로, 그에게 흰옷이 입혀질 것이라고 했다(계3:5a). 이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다 용서함받아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될 것임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다. 둘째로,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계3:5b). 이것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이미 구원받은 성도라도 계속해서 충성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죽는 순간에 그의 죄가 다 용서받았기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한 번 기록된 이름이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만약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로서 불못에 떨어지게 될 것임을 요한계시록은 더 말해준다(계13:8,17:8, 21:27). 한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생명책으로 존재여부는 이미 모세도 알고 있었고 다윗도 알고 있었다(출32:32, 시69:28). 셋째로, 이기는 자는 아버지의 앞과 거룩한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이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다(계3:5c). 이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에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던 것을 예수께서도 기억하사 그대로 갚아주심을 말해준다(마10:32). 그리고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계3:6).
8. 사데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제는 끝으로 사데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를 살아가서는 성도들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많은 성경주석가들은 에베소부터 라오디게아교회까지 일곱교회의 열거순서가 곧 역사가운데 등장했던 교회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거의 맞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에베소교회는 참된 진리를 수호하고 첫사랑이 식어진 교회로서 초기교회(A.D.65~95)를 가리킨다. 그리고 서머나교회는 믿음을 지키려다가 환난과 궁핍을 받는 고난받는 로마박해시대의 교회(A.D.95~313)를 가리킨다. 한편 세번째 버가모교회는 지도자들은 참된 진리를 수호하려 노력하지만, 성도들이 그만 발람의 교훈을 따라 핍박(고난)과 경제적인 궁핍을 해결하고자 우상숭배하고 음행에 참여하는 로마국교시대의 교회(A.D.313~590)를 가리킨다. 그리고 네번째,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마저 거짓 선지자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성도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와 음행에 죄가 죄가 아닌 것을 가리치던, 중세로마카톨릭시대의 교회(A.D.590~1517)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교회사적으로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것은 A.D.1517~1700년 까지의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대의 교회가 최고였다고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것일까?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진단했는가? 그것은 사데교회가 살았다고 하는 명목상의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어있는 상태라고 하셨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처음으로 뜨겁도록 살아났으나, 뒤를 이은 칼빈이 치고 들어옴에 따라 그의 예정론 때문에 교회가 또 다시 죽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루터의 처음 종교개혁은 아주 복음적이고 성경적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사람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종교개혁자 칼빈에 의해 다시 종교개혁은 거대한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어거스틴의 잘못된 신학사상을 물려받은 칼빈이, 구원론을 믿음과 회개에서 믿음과 예정으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구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것이었다. 사실 루터도 처음에는 오직 믿음과 지속적인 회개를 통한 구원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가 쓴 95개조의 반박문 중에서 무려 11조항이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회개를 지속해야 한다 것이었다. 그렇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어받은 칼빈이 개인구원예정과 견인교리를 가지고 들어옴에 따라 교회는 다시 중세와 같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칼빈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서 아니라, 만세전의 성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의 절대적인 작정에 의한 구원은 바꿀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 번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어찌하든지 구원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그것은 비성경적인 교리였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어떤 아무개 개인을 구원으로 예정했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복음을 듣고 믿어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 놓았던 것이다(막1:15). 다시 말해 성경에는 개인구원예정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인구원예정 교리를 칼빈이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교뢰를 붙드는 순간,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는 구원을 그만 따놓은 당상처럼 여겨서, 신앙의 긴장의 끈을 무장해제시켜 버리고 만다. 자신이 설령 죄를 지었어도, 칼빈의 견인교리를 믿고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눅15장의 회개하는 둘째 아들의 예를 보라. 그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 회개는 하나님이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코를 꿰서 억지로 회개시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과거의 삶을 돌아보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가 용서를 빌어야 용서받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함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아니했다. 그러니 처음에는 예정론에 의한 구원론으로 인하여 감격함으로 반응하지만, 나중에는 구원의 감격이 다 식어버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의 교회가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교회라 알려졌지만, 사실은 죽어가고 있는 교회였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9. 나오며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회개해야 한다. 또한 회개와 믿음을 통한 예수님의 구원을 견고히 붙들어야 한다(빌2:12).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면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돌이켜 다시는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성도라 할지라도 죽는 순간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가 있다. 정신차려야 한다. 사데교회와 종교개혁시대처럼 잘못된 생각과 교리 가운데 자신이 속해 있다면 빨리 빠져나오라.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기게 합당하게 날마다 더러운 자신의 행실 옷을 예수님의 피에 씻어(회개하여) 흰 옷이 되게 하라.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