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그리고 이 교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칼빈의 예정론 중에서 거의 결론에 해당하는 '성도의 견인'교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여러분도 알다시피 칼빈의 예정론은 크게 5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전적타락(Total deprivity),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이 그것이다.  흔히들 이것을 일컬어 영어앞글자만 따서 튜울립(Tulip)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5가지 교리 중에서 맨 마지막 교리가 바로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그런데 '성도의 견인'이라는 한자어를 살펴보면, 그 단어가 끌어당긴다는 의미의 '견인(牽引)'이 아니라, 굳게 참고 견딘다는 뜻의 '견인(堅忍)'인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성도의 견인교리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도록 하자. 장로교의 신조의 대명사라고 일컬어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7장 1항을 보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력 있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으며 마지막까지 그 상태에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견인이란 성도가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러가지 유혹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견디어 결국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신앙이 끝까지 보존되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여 구원을 결코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교리가 과연 어딘가 모르게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일이 없는가?
  칼빈주의자들은 말한다. 성도가 한 번 구원받으면 결코 멸망받을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구원은 만세전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성경에 근거한 교리인지에 대해 성경을 유심히 살펴본 일이 있는가? 오늘날 생각 외로 수많은 장로교인들은 이 교리를 무턱대고 신뢰하고 있다. 칼빈이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 교리만큼 무서운 교리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탄은 지금도 이 교리를 사용해 수많은 성도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도들 중에는 이 교리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줄로 알고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장로교인들은 지금도 나 자신이 구원받도록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하시고 나를 불러주신 것이니 나의 구원은 보장된 상태이고 안전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가 죽는 날 자신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예정론의 5번째 교리가 결국 장록교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데 가장 많이 쓰임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제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으나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천사는 섬기는 종으로 예정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후사로 예정하셨다. 하지만 어떤 개인을 예정하신 적이 없다. 어떤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다 그 사람의 사역을 위한 예정일 뿐이지 결코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니다. 둘째, 사람이 한 번 믿어서 구원을 확신을 갖는다고 해서 그 구원이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도 결국 믿음에서 떠나 그 구원을 잃어버린 사례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셋째, 믿음과 회개가 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구원을 향하여 인간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알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믿어 구원받기를 바라시며,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말이다(딤전2:4, 벧후3:9). 그러므로 믿는 일과 회개하는 일을 우리 인간이 할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베풀어놓으신 구원의 은총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다. 칼빈주의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결코 성부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신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속죄사역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의 피의 효능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도 충분하다. 다만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지 아니함으로 속죄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이다. 만약 성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만 구원하려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절대 이렇게 외쳐서는 아니 되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10:1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리사(요7:37)" 그리고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도 이렇게 말해서는 아니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요일4:15)" 

  성경을 직시하라. 무턱대고 믿지 마라. 칼빈주의자들은 이때껏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로서 아래와 같은 성경말씀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 잘못된 주장이요 다른 주장을 억지로 꿰맞춘 것임을 알라. 예를 들어 보자.
  첫째,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 37)" 칼빈주의자들은 말한다. 자 보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결국 다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본문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아버지께세 예수에게 주시는 자라고 할 때, '주신다'라는 단어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다. 이 말은 아버지께서는 예수에게 모든 영혼을 계속해서 주신다는 뜻이며, '내게 오는 자'라는 부분에서 '오는'이라는 단어는 '동사, 분사, 현재, 중간태디포, 목적격, 남성, 단수'이기 때문에  이 말은 누구든지 자기자신을 위하여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나오는 자를 가리킨다. 한 번만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를 주님께서 쫓아내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는 영생을 주실텐데,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그들을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도 없다고 했으니 성도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틀린 주장이다. "내 음성을 들으며"와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에 사용된 동사는 둘 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인칭, 복수'다. 이 뜻은 "내 음성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며"이며, "그들은 나를 계속해서 따르느리라"는 뜻이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결코 한 번 듣고 한 번 믿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다.
  다른 구절들도 다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다.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는 현재진행형이지 결코 완료형이 아니다(빌2:12). 사실 구원에 관한 모든 준비는 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셨다(마22: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종들을 시켜 그 잔치에 참여하라고 초청하신다. 하지만 그 잔치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이 결정할 일이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어떤 이는 초대된 그 잔치에 가겠다고 약속해놓고도 가지 않았다. 밭을 사놓았으니 가보야겠다고 핑계를 대고는 안 갔다. 어떤 이는 소 다섯 쌍을 사놓았으니 검사하러 가보아야겠다고 하고서는 안 갔다. 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거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한 것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는 인간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초대를 거절한 자가 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예정해 놓은 사람만 구원하고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지 않은 사람을 버리신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버림받을 영혼들을 심판하실 수 있겠는가? 선택의 기회를 주셨어야 심판도 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칼빈의 교리를 따르지 말라. 그것 따라가면 지옥행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자이므로 언제라도 회개해야 할 것이지만, 칼빈의 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회개할 마음을 주실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면 다 잘 될 것이라고 믿고 회개를 뒤로 미루거나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살펴보라. 회개는 탕자가 하는 것이지 아버지가 대신 해 줄는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8-19)" 이 말씀을 보라. 회개할 책임은 다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억지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다가 거지가 되어 다 죽게 된 것이다. 그러니 용서는 주님이 해 주실 것이지만 회개할 책임은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라. 회개해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한 가지 진리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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