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복의 가장 안전하고 빠른 지름길은 무엇인가?(욥42:5~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dGWo5fUfMY [또는 https://tv.naver.com/v/32964187]

 

1. 들어가며

   과연 원인이 없는 고난이 있는가? 동방의 최고의 부자였던 욥은 자신이 바로 '원인이 없는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하면서 따졌다(욥40:2). 왜냐하면 자신은 분명히 지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시고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느냐면서 항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분명 깨끗하며 순전하고, 불의를 행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냐며 그 이유를 알려 달라고 대든다(욥33:9~11).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닭 없이 자신을 치시고 자기에게 괴로움을 더하신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욥9:17~18). 왜냐하면 자신은 잘못한 일이 없었는데도, 하루아침에 자신의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자신의 열 명의 자식들도 비명횡사로 잃어버렸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건강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욥의 세 친구들이 와서 그에게 이유 없는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동안 그의 고통은 감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은 과연 어떻게 되어서 그 길고도 깊은 고난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그는 왜 고난 가운데 계속해서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사람이 자신의 비참함에서 벗어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복의 가장 안전하고 빠른 지름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 욥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당한 고난은 어느 정도였는가?

  욥은 의인이었다. 그는 구속사의 라인에 서 있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그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의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악에서 떠나 살고 있었다(욥1:1). 그러므로 그가 동방에서 가장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아들 일곱에다가 딸은 셋을 두었으며, 그는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 소가 500 마리, 암나귀가 500마리나 되었고, 집안에 종들도 무수히 많았다(욥2:2~3).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욥은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 말해 그가 가진 모든 소유물 곧 가축들과 종들과 심지어 자신의 자녀들까지 모조리 잃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돋아나 살이 터지고 찢어지면서 진물이 흘러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렇다면 욥은 대체 얼마 동안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욥기서 자체만을 보면, 그가 언제부터 그리고 얼마 동안 고통을 겪었는지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판인 70인역을 보면, 그가 고난이 지나간 후에 170년을 더 살았고, 따라서 240년을 향유하고 죽었다고 나온다(욥42:16). 그리고 바울의 묵시록이라는 외경에 보면, 욥은 70세부터 고통을 겪기 시작하여 30년을 지냈다고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던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욥은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만을 겪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제자매와 친족들과 자신의 종들로부터도 버림을 받는다. 그러니 그 상실감은 어떠하였겠으며, 자신의 친구들마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갔으니 얼마나 힘들었던 것일까?

 

3. 회개의 비밀과 영의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욥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욥은 사실 인품도 좋았고 신앙도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사탄 마귀에게 자랑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훌륭한 사람이었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고 30년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첫째, 욥은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욥에게 있어서 영의 눈이 완전히 떠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았다(욥23:8~9). 비록 그가 꿈과 환상 정도는 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욥7:14), 자신의 영의 눈이 떠지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자신의 재산과 자녀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건강을 잃어버린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욥의 영성은 초보적인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하에 사탄 마귀가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주시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왜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을 안겨주느냐면서 하나님께 항변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적 세계를 모르는 것은 그의 세 친구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째, 욥은 율법적인 행위가 지닌 한계를 모르고 있었다. 욥은 율법의 행위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자신은 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원시적인 율법의 기준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고스란히 실천하고 있었다. 일례를 들어본다면, 그는 자신의 자녀들이 행여 잔치 때에 포도주를 마시고 실수했을까 봐 잔치가 끝나면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번제를 드릴 정도였다(욥1:4~5). 욥의 모든 행사가 다 그와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율법에 비추어서 흠이 될 만한 일들은 전혀 행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곧바로 제사를 드려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온전한 자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얼마나 흠없는 사람이었는지는 욥기서 31장에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10가지 사항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즉 그는 어떤 쾌락이나 유흥을 추구하지 않았고, 부정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남의 아내와 간음하지도 않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궁핍한 자에게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고, 우상숭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에게 복수하지도 않았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몰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위선적인 행동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무리 율법적으로 흠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몸에 이미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은 잘 몰랐다. 고백하기를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치신 이유가 바로 자신이 젊었을 때에 지은 죄로 인하여 형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욥13:26~27). 그랬다. 그도 젊었을 때에는 죄를 짓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그 죄로 인해 제사는 드렸겠지만 그는 회개를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자신의 몸속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에게까지 내려와 있는 것도 사실 잘 몰랐다(출20:5). 그러므로 자신의 현재의 삶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에 그는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들과 조상들이 지은 죄들로 인하여 자신의 몸에 악한 영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오직 회개만이 자신의 죄된 본성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게 해 주며 원래대로 자신을 회복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욥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속죄제사는 드려왔지만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율법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제사를 드렸기에,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율법 말씀을 어겨 죄를 지었을 때에, 제사만 드린다고 해서 악한 영들이 떠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속에는 많지는 않아도 악한 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참고로, 사람의 몸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신학적으로는 '죄된 본성'이라고 언급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아무리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과거에 지었던 죄로 인하여 들어온 악한 영들과 조상들이 물려준 악한 영들은, 오직 제사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그러한 죄된 본성들(영들)은 오직 자신의 입술로 죄를 자백하여 용서받을 때에 자신의 몸에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몸안에 남아 있는 죄된 본성 곧 악한 영들 때문에 30년간 시험을 받으면서 그 영들로 인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4. 욥은 고통을 겪는 동안 어떤 죄를 범하고 말았는가?

  욥이 자신의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을 잃어버렸을 바로 그 시기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징계가 철회되지 않자, 욥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악한 영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3가지 죄를 범하고 만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원망 불평의 죄를 짓고 만다(욥7:10, 10:1). 그는 먼저 하나님을 저주할 수 없으니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욥3:1). 왜 자신이 어머니의 태 속에서 나올 때 죽어 나오지 않았을까 하면서 탄식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겠다고 말하면서, 왜 자신이 이런 고생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욥7:10).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물을 사해 주지 않고 죄악을 제거해 주지 않아서라고 항변한다(욥7:21). 그리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지니까, 불평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치시는지 모르겠다고 따진다(욥10:1,17). 고통의 기간이 길어지니,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술로 불평의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그는 비교적 작은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불신앙의 죄를 짓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속에 남아 있는 악한 영들로 인하여 언젠가 혹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과 건강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다고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3:25~26)" 그랬다. 그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이것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는데,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롭다고 함으로 교만한 마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항변하다가 그만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판단해 버린다(욥32:1~2). 죄를 지은 것이 자신에게는 없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통 속에 밀어넣었다고 판단하고는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한 일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게 여기는 마음 곧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5. 욥은 어떻게 되어서 회개하게 되었는가?

  그러하면 욥은 어떻게 되어서 회개하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이때 욥이 회개를 시작하게 되었던 그 출발은 젊은이 엘리후의 강력한 책망 때문이었다(욥32~37장). 욥은 엘리후의 변론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행하고 있는지를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엘리후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항목을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말은 이러했다. 첫째,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지만 사람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의로움보다 클 수가 없다고 했다(욥33:12).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문제에 대답하지 않으심은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함이라고 했다(욥33:17). 셋째, 욥은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잘못되었다고 정죄할 수는 없다고 했다(욥34:17). 넷째, 그래도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욥은 끝까지 하나님의 시험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다(욥34:36). 다섯째,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주님을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욥36:23). 결국 엘리후는 욥이 무지하여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없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고 책망한 것이다. 그러자 욥은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욥은 절대 알 수 없는 일들 곧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일들을 욥에게 질문하심으로 비롯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일들과 하늘과 자연 만물이 운행하는 이치를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대답해 보라고 하신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던진 질문들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만 자신의 입술을 가릴 뿐이라고 말한다(욥40:4~5). 그리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웠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깨닫지도 못한 것을 말해 왔었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일들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욥42:3). 그래서 그는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면서 회개하기 시작한다(욥42:6).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무지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기에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었으며, 율법 준수만을 최고로 여겼기에 악한 영들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고, 회개만이 악한 영들을 내보냄으로 진정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만이 모든 곤경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비로소 회개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6. 욥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의  곤경에서 벗어나 회복될 수 있었는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세 친구들도 역시 무지한 상태에서 욥을 정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표시로 세 친구들이 자신에게 와서 번제제사를 드릴 때에 그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라 말씀하신다. 그러자 욥 자신도 무지로 인해 하나님께 따지며 항변했던 일이 있었기에, 욥은 기꺼이 자신의 친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욥42:7~9).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모든 곤경에서 돌이켜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욥42:10). 

 

7. 욥이 회개하고 자신의 친구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하여 욥은 자신의 영적인 무지함과 자신의 잘못을 먼저 회개한다. 그리고 친구들의 죄까지 대신하여 빌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모든 곤경에서 돌이켜 주신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잃어버린 '건강'과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게 해 주신다(욥42:10~11).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앓았기에 피부가 시커멓게 변해 버려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내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왜냐하면 그의 범죄와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악한 영들이 그에게 악성 종기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사라지니, 몸이 회복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나간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이전에 알던 자들이 다시 돌아와서 그를 위로하면서 그를 원래 지위로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게 해 주신다(욥42:10,12). 그런데 그것도 두 배로 복을 주신다. 그래서 양과 낙타, 소와 암나귀가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회개로 인하여 그에게 역사하고 있던 '재산을 잃게 하는 영'이 그에게서 떠나갔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잃어버린 자식들 대신에 다시 10명의 자식을 주시되 이전보다 훨씬 더 빼어나고 준수한 자식을 허락하신다(욥42:13~14). 그중에 그의 세 딸들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이라고 소문이 난다. 왜냐하면 회개함으로 인하여 그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죽음의 영''과 '살인의 영'이 욥에게서 완전히 떠나갔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욥 자신에게 장수의 축복을 허락하신다(욥42:16~17). 그래서 욥은 이 일 후에도 70년(혹은 140년)을 더 살면서 자손 4대를 보았고 늙어서 장수하고 주님 품에 안긴다. 

 

8. 나오며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회개의 대표자가 있다면 아마 그는 바로 '욥'과 '다윗'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 '욥'은 이방인의 회개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고, '다윗'은 할례받은 자의 회개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 역시 범죄를 했으나, 다윗은 놀랍게도 곧바로 곤경에서 벗어나게 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죄를 지은 후에 어떻게 했느냐에 있어서 달랐기 때문이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에 용서받기 위해서 속죄 제사를 먼저 드리지 않았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회개를 먼저 했던 것이다. 그는 회개의 비밀을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다윗은 회개를 행함으로 자신의 죄도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때 들어온 악한 영들도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욥은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잘 몰랐기에 30년의 세월 동안 기나긴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아마 그가 사탄의 시험을 받은 즉시 회개를 시작했더라면 그는 좀더 빨리 모든 것에서부터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가서야 그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회개'야말로 회복을 최고로 그리고 가장 빠르게 가져오는 지름길인 것이다. 

 

 

2023년 02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2023-01-2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아담성의] 회복, 그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창1:26~2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Xop6ncpmnWI [또는 https://tv.naver.com/v/32647022]

 

1. 들어가며

  이 시대는 마지막 시대다.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이 마지막 시대에 사용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시대에 부여하신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받을 기업을 위해 지금 이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결해야 하고, 은혜를 나눠줄 줄 알아야 하며, 영적 수준을 높이는 자라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영적 수준을 어느 정도까지 기대하시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온전히 회복이 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회복이란 어떤 것이며,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리키는 것이며,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했던 아담은 어떤 수준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 그중에 인간은 맨 마지막날 해가 넘어갈 무렵에 창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의 창조는 다른 창조와는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적인 피조물로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영적인 피조물로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직 온 우주 가운데 사람만이 영을 가진 존재로서 영으로서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영적 수준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그리스도를 모델로 해서 창조했기 때문이다(고후4:4, 골1:15). 즉 창조된 아담의 수준은 예수님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의 수준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 수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서 그 수준을 헤아릴 수 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종류로 창조되었기에, 그 지혜와 능력이 무궁하다는 것이다(창1:26~28). 사실 모든 식물이나 동물들은 각기 자신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창1:24~25). 그런데 사람은 사람의 종류대로 창조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장차 인간이 천국에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려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첫째 아담은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었다. 마치 육신을 입으셨던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나다나엘의 과거를 아시고, 베드로의 미래를 아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이 자신의 옷가를 만졌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모습도 속사람(영)이 육체보다 더 빛나는 상태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몸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둘째, 아담은 이 땅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지배할 수 있는 왕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 맨 마지막으로 창조된 고등 생명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창1:28). 그러므로 타락하기 전 아담은 모든 만물 위에 있는 왕적 존재였다. 모든 만물이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음성에 순종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남의 나귀를 자신의 나귀처럼 가져다가 쓰실 수 있는 것과 같다. 사실 아담은 모든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창2:19~20). 아담이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그것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들은 자신의 왕이 누군지를 알아보았고 아담의 말에 순종했던 것이다. 만약 아담이 화가 나서 무화과를 저주했더라면 그때 무화과도 역시 뿌리채 말라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뱀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면 에덴동산에서 나가야 했을 것이다. 뱀은 아담이 다스릴 수 있는 권한 안에 있는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특별했다. 육체적인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의 몸과 그리고 영혼의 몸 즉 2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육의 눈으로는 자연 만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영의 눈으로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을 빛처럼 볼 수 있었고, 천사도 사탄 마귀도 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천국도 볼 수 있었고 지옥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의 귀가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은 영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창3:8,10). 그것은 타락 후에도 얼마까지는 계속해서 영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영의 눈은 점차 닫히게 되었고 육의 눈은 더 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4. 아담은 어떻게 되어서 영적인 감각과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그렇다면 아담은 어떻게 되어서 이 엄청난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뒤에,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 하나를 창설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모든 종류의 나무들이 나게 하셨다. 그런데 동산의 한 중앙에는 생명나무를 두셨다. 그런데 그것과 가까운 곳에 선악과가 있었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특이한 나무였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생명수가 공급되어 자라고 있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생명나무는 이 땅에 속한 나무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적인 나무였던 것이다. 이 나무는 하늘에 있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가져다 심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나무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마시고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담이 그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전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를 짓고 말았다. 그러자 죄를 지은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시키셨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전에 생명나무를 하늘로 올려가셨다. 그래서 지금 이 생명나무는 천국에 있다. 

  문제는 선악나무다. 선악의 지식의 나무는 어떤 나무였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나게 하신 평범한 나무였다. 하지만 마귀가 이 나무를 변조시켜 놓았다. 사탄 마귀는 원래 일반 나무의 열매에다가 자신의 악한 영들(뱀들)을 이용하여 선악나무의 열매로 만들었던 것이다. 보기에는 생명나무의 열매와 비슷해 보였지만 뱀들이 그 나무의 열매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담과 하와가 이 열매를 먹게 된다면 평범한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열매를 둘러싸고 있는 악한 영들(뱀들)을 먹게 되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제사상에 올라 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음식을 둘러싸고 있는 악한 영들을 같이 먹는 구조와 같다. 그런데 그만 하와가 먼저 뱀의 꾀임을 받아 이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고 그의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자 아담도 그것을 먹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람의 몸속에 사악한 영들인 뱀들이 치고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적인 감각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육의 눈은 더 밝게 열려지기 시작했다. 타락 직후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충만히 있었으나 자손으로 내려갈수록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은 희미해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영의 눈이 닫혀 있고 영의 귀가 막혀 있어서,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동식물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하여 자연 만물에게 무슨 명령을 한다 할지라도 자연 만물이 복종하는 것은 흔하지 않다. 그리고 귀신에게 명령해도 귀신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다. 

 

5. 죄짓기 전의 아담으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죄짓기 전의 아담의 영성으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선악과를 통해서 들어온 악한 영들을 내 몸에서 내보내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첫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악한 영들을 받아들였지만, 그 후에는 사람이 범죄할 때마다 뱀들이 몸속에 치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창3:14).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후 뱀에게 "너는 흙을 먹고 살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흙은 '아파르'로서 사람의 몸의 재료에 해당한다(창2:7). 그러므로 뱀은 지금도 사람이 범죄하면 사람의 몸속에 들어와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통해서 몸속에 들어온 영들과 자신의 범죄로 인해 또 불러들인 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몸은 더럽혀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로 인해 더럽혀진 몸을 예수님의 피로서 반드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할 때에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악한 영들을 몰아내어 내 몸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주가 끝나지 않고 있으며, 죄짓기 전의 아담의 영성으로 회복되지 아니한가? 그것은 우리 몸 안에 침투해 들어온 악한 영들을 내보내지 않아서 그렇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구약시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드리는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1년 동안 자신의 지은 죄가 다 용서될 수 있었겠는가? 만약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개인이 범죄했으면 개인은 반드시 속죄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 얄팍한 사람이 있어서 자신의 개인 속죄제사는 한 번도 드리지 않고 1년에 한 번 속죄일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신의 죄를 다 용서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예수께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믿었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함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인도 낱낱의 죄를 회개해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회개생활을 등한히 여긴다. 이미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가 회개함으로 그 악한 영들을 내 몸에서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곧 충분한 회개만이 저주를 완전히 끝내고 죄짓기 전의 아담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고로 지금 내가 아담의 수준까지 회복되지 아니한 것은 아직 충분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결코 한꺼번에 내 몸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 몸에 있어서 온갖 저주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 때문에 우리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재물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내게 재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온갖 사건 사고에 휘말리고 마는 것이다. 또한 내 앞길이 방해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충분히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예수께서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들은 우리가 이것을 안다고 하여 순순히 그냥 나가지 않는다. 우리의 입술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들까지도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들도 우리 몸에서 합법적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문제는 충분한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충분한 회개를 했다면 지금까지 내게 병을 주고 있는 귀신이 비로소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병에서 곧바로 나을 것이다. 온갖 가난의 저주를 갖고 들어온 뱀들이 떠나가게 되니까, 가난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귀신이 떠나가면 우리의 영안이 열리게 되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천사를 보고 귀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돕는 천사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볼 수 있고, 귀신들을 보고서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명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의 세계인 천국과 지옥도 수시로 눈을 뜨고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의 귀도 열리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 천사와도 대화가 가능하고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물을 말로서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무화과나무를 하루아침에 뿌리채 마르게 할 수 있고, 물 위를 걸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과거를 당겨서 볼 수도 있고, 현재의 영적 상태도 볼 수 있으며, 미래의 상태도 당겨서 볼 수 있다. 이것이 타락하기 전 아담의 영적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회복은 바로 이러한 회복, 곧 아담성으로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룻기서강해(01) 룻기서, 과연 어떤 책인가?(룻1:1~5)_2021-11-09(화)

https://youtu.be/5TU4MRw6FaA  [혹은  https://tv.naver.com/v/23428995  ]

 

1. 룻기서는 어떤 책인가?

  룻기서는 기독교에서는 역사서(여호수아~에스더) 중의 한 권으로 분류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케투빔(성문서)의 하나로 분류한다. 룻기서는 사사기의 말기쯤에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하늘의 영적인 지혜를 전달해 주는 책이어서 교훈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성은 1장은 발단을, 2장은 전개를, 3장은 절정을, 4장은 결말을 말하는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이 책 이야기의 맨 마지막이 유다의 아들 베레스에서 다윗까지의 족보를 수록하고 있기에, 다윗왕 때에 누군가가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그런데 룻이 결국 다윗왕의 증조할머니라는 것을 계산해 보면 다윗왕의 윗대 선조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이 이야기는 과부였던 룻이 보아스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으로 끝을 맺어도 아무런 흠이나 잘못은 없다. 그런데 굳이 다윗의 족보를 집어넣어서, 보아스가 과부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으며,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가 다윗왕(8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7째 아들이 됨)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윗왕과 많은 관련이 있어 보이기는 한다. 

 

2. 룻기서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룻기서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얼핏 보기에 책 제목처럼 '룻'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룻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빛나게 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룻을 주인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책의 주인공은 사실 '나오미'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책의 플롯이 나오미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두에 해당하는 룻기 1:1~5의 말씀은 나오미의 '텅 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이 책의 끝부분은 4:13~17에는 나오미의 '채워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3. 룻기서의 특이점은 무엇인가?

  룻기서의 특이점은 이 책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이름이 책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이 책 제목이 된 책은 룻기서 외에는 에스더서 뿐이다. 그만큼 룻기와 에스더의 이야기는 특이하며 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에 무슨 기적이라든지 환상이나 꿈 또는 초자연적인 계시 등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작용하여 누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경66권 가운데 선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 여인 룻을 등장시켜 이 책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은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을 높이 평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만을 선민으로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책은 상당히 의외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절기 때에 낭독하는데, 오순절날과 결혼식날에 이 책을 지금도 낭독하고 있다고 한다. 

 

4. 룻기서의 배경은 어떤 상황인가?

  룻기서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룻1:1). 그것도 다윗왕이 태어나기 전의 상황이므로, 이때는 사사기의 말기 정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사사기서는 이때가 어떤 시기였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것은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기 자기의 소견(눈)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삿17:6, 21:25). 한 마디로,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서 바르게 인도할 만한 뚜렷한 지도자가 없던 시기여서 사람마다 자기가 생각할 때에 옳은 것 같다고 하면 그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룻기서에 등장하는 룻이라는 여인은 달랐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시어머니가 자신의 본국인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할 때에, 이제는 자유롭게 재가하여 결혼하여 자식 낳고 잘 살라고 하는 시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오미의 첫째 며느리였던 룻은 자기 편할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시머어니를 봉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따라가려 했으며, 시어머니가 전해 준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을 버릴 수 없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고향 산천과 부모를 남기고 유다 땅으로 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모압 여인 룻이 서로 비교된다. 

 

5. 룻기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시대에 룻기서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다른 책과는 달리 이 책에서만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 비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하나로서 한 예를 들자면, 고엘 제도의 실현이다. 즉 이 책은 유대인들의 토라서(모세오경)의 하나인 레위기 25:25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있는 바, '기업 무를 자의 제도(고엘 제도)'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장차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를 취하러 오실 때에,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는 어떤 자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크게 보면,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갈 이기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에는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해당되는 것이며, 거기에는 남자들도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나오미의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의 경우를 통해서, 원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나 탈락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는 귀중한 책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나오미의 삶을 통하여, 불행으로 기쁨으로 전하기 위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부의 조건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신부가 되는 조건으로서 '회개'가 부각되지 않는 시대인데, 이 책이 구약성경의 하나임에도 그것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의 매우 중대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11월 09일(화)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은 생명의 책이요 하늘의 책이다. 요한복음을 손에 쥐어 짜게 되면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생명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태초에 계신 말씀 안에 이미 생명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유일한 아들(독생자)이요, 퍼도 퍼도 다하지 아니하는 생명수를 제공하시는 이시요, 생명의 떡이며,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게 하며, 부활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지어졌으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요한복음 8장 14장을 보게 되면, 그분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그분 곧 여호와이심을 영안을 열어 깨닫게 하신다(요8:2-25,28,58, 14:7,9, 18:6).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결론인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으로 끝난다(요20:28).
그리고 최종적으로 요한복음은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해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이다(요20:31).
 
그렇다면, 왜 사도요한은 20장으로 끝마치지 아니하고, 21장을 추가했을까?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긴가민가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알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하기 위해서요, 둘째, 사명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사명을 다시 고취시키기 위함이며, 셋째, 사도요한은 죽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라는 소문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함이다.
특히 요21:1-14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회복의 주님이신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부인을 경고하기에 앞서 당신이 죽고 나서 부활하게 되면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예고하셨다(마26:32). 그리고 부활직후에는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를 통해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고 알려주었다. 결국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게 된다. 특히 갈릴리 출신의 7명의 제자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기다리는동안 베드로는 고기라고 잡아야겠다고 바다로 나간다. 그러자 나머지 6명의 제자들도 그의 뒤를 따른다. 하지만 밤새도록 던진 그물에 고기 한 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드디어 날이 새어갈 무렵, 어떤 젊은이가 뭍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시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보시오." 그러자 그곳에 그물을 내렸는데 그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사도요한은 즉시 자신이 처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던 그때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그는 뭍에서 외치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에 뛰어들어 예수님께 나아간다.
그때 이미 예수께서는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놓고 계셨다. 숯불에 떡과 물고기를 굽게 계신 것이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잡은 고기를 가지고 오라 하신다. 뭍에 끌어올려보니 무려 큰 고기가 153마리나 되었다.
 
그날따라 고기가 한 마디가 잡히지 않았는데 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을 때 찢어지도록 많이 잡혔을까? 그리고 왜 주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또한 오병이의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굳이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을까? 이는 다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그들로 하여금 새로 시작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자신의 부인으로 인해 주님 앞에 나아가기가 부끄러운 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숯불이 피워진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풍성함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음과 비록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라도 주님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과 만남의 장소를 갈릴리로, 그리고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회복의 주님을 이 시간에도 찬양드린다.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를 물으시며, 언제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주님의 능력의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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