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범죄는 죽어 마땅한 범죄였다. 그는 십계명 중에서 3가지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당장 죽지도 않았고 그의 왕위를 빼앗기도 않았다. 그런데 선왕 사울은 결국 비참하게 죽어야 했고 그의 왕위도 빼앗기도 말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편애하시는 분이신가? 어찌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라면 누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말씀이다.

 

2022-01-21(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하강해(16) 하나님께서 범죄한 다윗을 죽이지 않은 3가지 이유(삼하12: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r94sd8P0ak

 

1. 들어가며

  여호와의 이상적인 종이었던 다윗도 사람이었다. 그도 역시 범죄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기는 죄를 짓고도 뻔뻔스럽게 지냈다. 남의 유부녀와 간음을 행하고 범죄를 은닉하려고 사람을 죽이게도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정면으로 어기는 파렴치한 행위이자 중대한 범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왕 사울에게서처럼 그에게서 왕위를 빼앗지도 않았고 그를 죽이지도 않았다. 사실 다윗의 범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고 4배의 변상을 해 주어야 할 중대한 범죄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는 그러한 처벌을 무겁게 물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는 편애하시는 분인가? 선왕 사울은 미워하고 다윗은 사랑한 것인가? 언뜻 보기에도 다윗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볼 때에, 다윗에 대한 어떤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이 중대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다윗이 무슨 죄를 범한 것인가?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한 선한 종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예수님 이외에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이미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전혀 안 짓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죄의 경중에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윗은 중대한 죄를 지었다. 십계명 중에서 3가지를 범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제7계명을 어겼다. 간음죄를 지었던 것이다. 둘째는 살인죄를 지었다. 그것도 죄질이 나쁜 살인죄를 지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 죽이지 않고 남을 시켜서 죽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제6계명을 어긴 것이다. 셋째는 탐욕죄를 지었다.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0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들에 대한 처벌은 무엇인가? 간음죄와 살인죄는 사실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죄다(20:10, 레24:17). 그리고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의 경우도 죄가 무겁다. 그것이 소의 경우라면 다섯 배로 갚아야 하고 양의 경우라면 네 배를 갚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출22:1). 그러니 이것에 상응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의 범죄는 사형만이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은 죽지 않았다. 왕위를 빼앗기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3. 다윗의 범죄가 가르쳐 주는 영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의 범죄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정리하면 그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받은 자로서 주께서 인정한 종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범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다윗이 주변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안정을 이루게 될 무렵, 다윗왕도 서서히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을 보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권력의 맛에 점점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를 남용하여 성착취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모든 사람은 이처럼 죄를 지을 수 있다. 넘어질 수 있으며, 양심이 마비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남자는 성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돈과 권력과 여자를 정복할 수 있다면 그 종은 참된 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아담 이후 죄된 본성을 자기 안에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죄를 범할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롬5:12).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다윗이 성령을 받은 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다(삼상16:13, 시51:11). 물론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성령이 경륜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께서 사람 위에 머물러 있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도 내주하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구약시대에도 여전히 성령이 내려오셔서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몇 사람이 되지 않는다. 다윗도 그러한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범죄한 것이다.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죄를 자원하여 범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멸시하고) 나 보기에게(내 눈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12:9)"라고 말씀하시고 호통을 치셨다. 그것은 그를 왕으로 세워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요 일어나서도 아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이러한 중대한 죄를 범함으로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기뻐하시고 그를 나단 선지자에게 '내 종'이라고 자랑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대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4. 극악무도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에게 사울왕처럼 왕위를 빼앗지도 아니하고 그를 죽이지도 아니한 것인가? 우리가 그 이유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결코 미신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신뢰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과 판단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 누가 그분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은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절대 바뀔 수 없고 바뀌어서 안 되는 법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두 개의 법칙이 상충될 때에는 어떤 법이 우선하는지도 알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당신이 세워 놓으신 법칙과 어긋나게 판단하셔도 아니 되고 벗어나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 노릇하기가 그리 쉽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만약 심판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상실된다면 하나님은 마귀도 여전히 심판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왜 사울왕과는 달리 다윗에게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경 전체를 가지고 그 이유를 3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크게 볼 수 있는 안목이요 둘째는 당장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이요, 셋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5. 다윗이 죽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나마 그렇게 관대하게 처리하신 것은 그의 윗대 조상(선조들)이 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갈6:7). 다시 말해 선조들 중에 누군가가 자기의 후손을 위해 심어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에게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일에는 심은 대로 거둔다(갈6:7)는 법칙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으며, 콩 심은 데에 팥이 날 리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윗을 이처럼 살게 했을까? 그것은 그의 선조 3대와 4대 조상이 심어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 목숨과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그의 3대 조상이었던 증조 할아버지 보아스와 증조 할머니 룻이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고엘 제도를 더 넓게 적용하여 과부이자 홀로 남게 된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편 말론의 땅을 사 주었다. 다시 말해 과분한 친절, 넘치는 친절을 그녀에게 베푼 것이다. 그리고 룻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찾아서 자기의 고국과 부모와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기꺼이 넘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과부의 신세였고 더욱이 그녀가 봉양할 홀로된 시어머니(나오미)가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평생을 시어머니를 봉양하고자 고향 산천을 두고 남의 나라로 넘어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보셨다. 또 하나는 다윗의 4대 조상이었던 고조 할아버지 살몬과 고조 할머니 라합이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이 첫 번째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앞두고 있었을 때에 일어났다. 살몬이 가나안 땅의 두 명의 정탐꾼으로 발탁되어 파송된 것이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여리고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쫓김을 받고 있었다. 그때 기생 라합이 그 두 사람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지켜 준다. 그래서 결국 살몬은 기생 라합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조상들 중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선택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마땅이 죽어야 할 사람이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이 그동안 계속해서 신본적인 삶을 살았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고픈 마음을 가졌다는 것에서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다윗이 직접 한 일이라기보다는, 다윗의 조상들이 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서 다윗에게 허락된 은혜라고 할 수 있다. 

 

6. 다윗이 죽지 않은 두 번째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서 다윗이 죽지 않고 왕위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세 번째 이유를 알아보자. 

  둘째, 다윗이 죽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다윗을 죽이지도 않고 그로부터 왕위를 빼앗지 않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에게만 주어진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고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윗이 피를 많이 흘려서 그 일에 대한 허락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것을 진정 원하였고 또 원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이 진정한 것이었음은 그가 일평생을 성전을 짓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해 주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개인적인 약속을 해 주었다. 그것은 "네 수한히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것이다"(삼하7:12)는 말씀이었고, 그의 후손까지도 계속해서 왕위가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삼하7:13).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 혹시 범죄할지라도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에게서 왕위를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 있었다(삼하7:14~16). 이것은 다윗이 잘 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했어도 그를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 다윗이 죽지 않은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 함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은 아담의 범죄와 함께 다 죄인이 되었다. 아담의 범죄에 씨의 형태로 다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아담의 범죄가 의도적인 범죄 곧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와를 사랑해서 저지른 범죄였고, 또한 하와도 역시 뱀의 꾀임으로 죄를 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일부러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로 결정하신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을 상쇄시킬 자를 보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더 이상 자비가 베풀어질 수는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이 잘못했을 때에도 그를 급히 죽이시지는 아니하시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다윗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어 놓고도 죄를 죄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의 죄를 책망하셨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그로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울왕과는 반응이 달랐다. 사울왕은 그렇게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정말 달랐다. 나단 선지자가 자기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내어 들려주자 즉시 그것이 자기를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기가 탐욕 때문에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것을 인정하고 눈물로 통곡하면서 회개를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할 수 있다. 넘어질 수 있으며 실수할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인정해 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그랬다. 그도 모든 것을 버린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왔지만 그도 여전히 사람이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였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채 아내의 말을 듣고 첩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례를 통해 그는 철저히 회개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기쁘게 받으셨다. 이것은 다윗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윗도 아브라함도 약한 것이 있었다. 그는 성적인 측면에 있어서 약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탐욕의 죄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는 인간이면서 가장 탐낼 수 있는 왕권도 그렇게 탐하지 는 않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버린 왕이었지만 끝내 사울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있었을 때에도 그는 기꺼이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자에게서만큼은 약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남의 아내였으며 그것도 자신의 충성된 부하 장수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훔친 것이다. 그리고 부하 장수를 전장의 최전선에 보내 죽게 하였다. 참으로 비열하고도 나쁜 죄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왕위도 빼앗기지 않았으며 죽임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수한이 차서 죽었으며, 그의 왕위도 역시 여전히 보존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조상들이 자기의 후손을 위해 한 일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잘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약속을 받아 놓은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긍휼의 법칙 곧 회개할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지적하실 때에 금방 알아차리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사울왕은 그것을 알려 주었어도 그것에 무감각했다. 알려 주었어도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과연 나의 후손을 위해 무엇을 심고 있는지를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에게 회개하라고 사인을 보내고 있는지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징계를 받아도 긍휼이 있는 징계를 받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2022년 01월 21일(금)

정병진목사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눈에 띠는 것은 회개에 대한 강력한 요구다. 세례요한부터 시작된 회개의 촉구는 요한계시록 2~3장에 가서 절정을 이룬다. 그런데 개인구원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출애굽세대들에게는 회개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왜 출애굽세대들에게는 회개하라고 책망하지 아니하셨을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회개촉구방식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 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020-07-2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4) 사람이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시7:12~13)
https://youtu.be/K5pH9bDOB3o [혹은 https://tv.naver.com/v/14977232 ]

 

1. 들어가며

  B.C.1446년경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한 곳은 풀 한 포기 없고 물도 찾을 수 없는 척박하고 메마른 광야였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로 인도하셨을까?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그곳에서 무려 40년간동안이나 살아야 했다.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40년동안을 광야에게 생활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생활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광야생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혹 이 광야에 머물러 있을 때,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는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광야에 있는 도들을 어떻게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에는 또한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람이 진정 회개했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의 시편의 노래를 통하여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 회개한 사람은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출애굽세대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지 않으셨는가?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출발이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요한의 외침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를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왔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도 역시 "회개"할 것을 외치심으로 복음전파사역을 시작하셨다(마4:17). 그리고 부활승천직전에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윽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했는데 회개를 전파하였고(행2:38),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방인으로 사도가 된 사도바울도 역시 회개하고 믿을 것을 외쳤다(행20:21).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들려준 소아시아에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도 역시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었다(계2~3장). 이처럼 회개는 신약성경의 핵심메시지였고, 그것은 결국 믿음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2가지 핵심요소였다. 

  그런데 죄인이 예수님을 믿어 교회생활을 한 후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미리 보여주고 있는 샘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1세대들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1세대들에게는 한 번도 회개할 것을 명령하지 않으셨는가? 참고로 이들의 여정이 기록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짧은 생각이었다는 것이 금방 들통난다. 왜냐하면 회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출애굽1세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회개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회개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서 "회개하다"라 의미로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슈브"라는 동사이며, 신약성경에서 쓰인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에오"라는 동사다. 특히 히브리어의 "슈브"라는 동사는 보통 "돌아오다, 돌이키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회개하라는 말의 의미는 "이방신을 버리고 참된 신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께서 출애굽1세대들에게 회개할 것을 직접적으로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신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참된 신인지를 보여주심으로 회개를 촉구하신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애굽인들이나 하나 같이 애굽신들을 섬기며 살았다. 다신론적 신관을 가졌던 그들은 강과 동물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을 신으로 섬기고 살았다. 그중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숭배했던 신은 농사에 꼭 등장하는 "송아지"신이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결코 신이 아니며, 오직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심으로 회개하기를 바라셨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약간 달랐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쓰신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도롤 사용하신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식으로 사용하신 것은 "회개촉구명령"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북분열왕국이후에 쓰신 방식이다. 출애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부터 여호와께서 누군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동영상으로 그들을 가르쳐주신다. 그래서 애굽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거대한 나일강이 피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개구리들이 떼로 기어나와서 집떡반죽 그릇에 이르기까지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으며, 이가 올라와 사람과 가축에게 기어 오르는 것도 함께 보고 경험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파리떼가 불어닥쳐 집집에 가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파리떼가 오지 않은 것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 그때 이후부터 그들은 재앙이 히브리인들에게는 내리지 않고 오직 애굽인과 그들이 사는 지역 및 그곳에 있는 가축과 동물에만 내리는 것을 본다. 이후 그들은 애굽인의 가축들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 돌림병이 발생하여 죽는 것을 보았지만,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는 것을 본다. 또한 우박과 불덩이가 내려 밭에 있는 채소와 들의 모든 나무를 후려치는 것도 보았으며, 메뚜기떼가 일어나 우박으로 인하여 면하고 남은 것을 다 먹어치우는 장면도 본다. 그리고 애굽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섬기는 신이 태양신인데 그것이 힘을 잃어 어둠이 가득찬 애굽인 지역을 본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 재앙으로서 각 집에 있는 장자와 가축의 첫 것이 죽어나가는 재앙도 지켜보게 된다. 그날밤 아직 발효되지도 아니한 반죽을 등에 들쳐메고 출애굽은 시작되었고, 그들 앞에 거대한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애굽땅을 빠져나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여러가지 재앙을 내리되, 애굽인들이 신처럼 여기고 있는 나일강과 동물들과 태양을 내려치는 재앙을 내렸던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5. B.C.1446년경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히브리인들은 과연 회개를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때 무려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에 있는 신들을 심판하신다(출12:12). 그때 히브리인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상천하지에 참된 신이요 가장 최고의 신임을 믿었어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방신들을 모조리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했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회개였던 것이다. 하지만 애굽군대로 인해 홍해에 갇히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죽이려고 이곳에 데려왔느냐? 우리가 애굽사람에게 죽는 것보다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낫겠노라(출14:11~12)"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에게 대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결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홍해를 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아라비아 땅에 도착했지만 가져온 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고, 애굽에서 가져온 먹을 것이 떨어지자 새벽마다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게 하셔서 40년동안 굶주리지도 않게 해 주심으로 인간의 의식주를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후에는 반석을 쪼개 생수를 공급해 주심으로 그분만 있으면 흡족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끝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시내산에서였다. 출애굽한지 약 50일이 지난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을 불러내셨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하면서,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섬기던 송아지우상을 만들어놓고는 광란의 춤을 추면서 잔치를 벌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대노하셨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적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셨는가? 오직 한 가지. 가짜인 이방신을 버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은 그저 본 것일 뿐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온토 이방인 숭배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였다. 만약 그때 모세의 슬기있는 답변과 목숨을 건 기도가 아니었다면 그날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짜 멸하시겠다고 결정한 일이 발생하고 만다. 정탐꾼을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을 서슴없이 토해냈기 때문이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땅(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기로 결정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40년에 걸쳐 광야에서 죽어나간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1세대들의 불신앙의 역사의 기록이다. 

 

6.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기적과 기사와 표적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쓰시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와 같이 신약에서도 기적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있었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곧 예수께서 설교후 베드로에게 말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말로 안 되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회개했다는 것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무능한 자이며, 쓸모없는 죄많은 인간인 것을 자백하고 용서를 빈 것이다. 그에게 기적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는 방식은 선지자의 외침이나 기적과 같은 방법만이 아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시고, '천사'를 보내시기도 한다. 때로는 고칠 수 없는 중한 '질병'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시고, '자녀'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시기도 하신다. 다만 그때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있어 회개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7. 회개를 촉구한다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회개를 촉구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 오늘 다윗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려 하시는지를 부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본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재판장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기 위해서 막 무기들을 쳐들고 조준하고 있는 군사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날마다 격분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만일 사람이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자신의 칼을 갈고 계시며, 자신의 활을 당기어 겨누신다. 또한 그분은 죽음의 무기들을 예비하신다. 그분이 만든 화살은 불화살이로다(시7:11~13)" 그렇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용서해주시지 아니하신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상태로서 긴장이 증가될 뿐이다. 고로 누구든지 어서 빨리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출애굽세대들은 그렇게 많은 기적을 맛보았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죽임당하고 말았다. 

 

8.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한 자들도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눅18장에 보면, 세리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돌아갔다. 눅19장에 보면, 삭개오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선언과 함께 떳떳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그리고 눅23장에 보면, 한편 강도의 회개가 나온다. 그는 비록 그날에 죽었지만 죽은 이후 예수님과 함께 낙원(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요9장에 보면,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나온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조상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눅5장의 베드로를 보면, 그는 사명을 발견하고 가치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 회개는 용서도 받게 해주고, 구원도 받게 해주며, 천국에도 들어가게 해주고, 병고 고침받게 해주고, 저주가 떠나가게도 한다. 그리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게금 만들어준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할 때에 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는 것이다

 

9.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회개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벧후3:9). 주님은 시7:12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 인간은 약하나 누구나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만약 지은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용서와 축복이 따라올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수많은 싸인을 주셨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심판과 파멸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회개해야 한다.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회개할 때 저주도 떠나가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우리는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의 하나님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7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구원탈락의 가능성에 관한 히브리서의 다섯번째 경고(히12:14~17)_2020-04-10(금)

https://youtu.be/PppdpcO1POg [혹은 https://tv.naver.com/v/13294933 ]

 

 

1. 구원탈락의 가능성에 관하여 히브리서는 어떻게 경고하고 있나요?

  히브리서는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하여 다섯 번이나 경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히2:1~4에 나오는데, 그것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겨서는 구약시대처럼 공변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히3:7~4:13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참된 안식에 들지 못할 자가 있다면서, 믿지 아니함과 불순종을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히5:11~6:12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타락하게(떨어져 나가게 된) 된다면 그는 버림을 받고 저주함으로 나아가다가 결국 구원받을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자신이 그런 자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맺고 있는 열매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 경고는 히10:26~31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짐짓(고의로) 계속해서 범죄하는 자는 그를 위한 속죄제물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심판과 맹령한 불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짐짓 범죄하는 경우의 예는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속죄를 부정하며,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훼방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다섯 번째 경고로서, 이는 히12:1~29에 나오는데,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2. 왜 성도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나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성도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불화를 일으키고 더러움에 빠져 있으면 그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히12:14).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미 자기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툼을 일으키고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면 그는 주인을 온전히 바꾸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대해 다 평화를 추구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그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했던 느부갓네살왕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화하지 않고 평화를 추구했다면 그는 구원에서 탈락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함을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동시에 거룩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히12:4). 피흘리기까지 말이죠. 그래서 온전한 거룩함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3. 성도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3가지 이유 중 첫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3가지로 제시했습니다(히12:15~17).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배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히12:15a).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배제되지 않으려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값없이 베풀어주신 선물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이처럼 순전히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전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성질대로 살아버리고 그리고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죽는 날에 그는 심판의 주님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4. 성도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도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쓴 뿌리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같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쓴 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새롭게 접붙힘을 받았지만 죄된 옛사람의 본성(근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이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된 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고 온유한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옛날의 죄된 근성이 뽑혀지지 않아서 그것이 수시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인해 타인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반드시 상처가 해결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쓴 뿌리를 주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되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요 거룩함의 근본이십니다. 

 

5. 성도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도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 세 번째는 이유는 회개할 기회(자신의 실수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에서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크게 2가지를 잘못했습니다. 첫째는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음행의 본성을 이기지 못해 이방여인을 데려다가 그만 자신의 아내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부모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창26:34~35). 둘째는 망령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배고픈 자신의 육신을 위해 그만 장자의 명분을 쉽게 팥죽 한 그릇으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는 당시에 당장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대수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아 전해주고자하는 열망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장자가 갖는 축복에 대해서 귀히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대한 갈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만 장자의 축복까지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자,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장자의 명분대로 해주기를 구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 중에도, 나중에 후회를 하고서 다시 원상태로 돌이키려고 하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 상태로 회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짓는 일을 쉽게 넘겨서는 아니 됩니다. 특히 음행의 죄는 과거로 돌이키기 어려운 대표적인 죄에 해당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일시적인 육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영적인 것을 가볍게 여기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는 영적인 하늘의 축복을 우리는 갈망해야 합니다. 이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죄된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2020년 04월 10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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