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가 행한 첫 번째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처음에 어떤 설교를 했을까? 그가 했던 설교가 대체 어떠했길래 그날 그의 설교를 들은 3천명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 위대한 일이 발생한 것인가? 우리는 그의 첫 번째 설교를 통해 오늘날 설교자가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반드시 해야 할 설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이 빠지면 복음전파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3대지 설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설교의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그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2022-09-1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13)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무엇이 핵심이었나?(행2:14~4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RxnSp7Ga18  [혹은 https://tv.naver.com/v/27452063 ]

 

1. 들어가며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시고 성령세례가 부어졌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이 전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더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120명이 성도들의 말했던 방언('글로싸')은 외국어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왔던 15개국의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는 방언을 들을 때에는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 듣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동안 행하신 엄청난 일이 무엇인지를 자기들의 언어로 듣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마가 다락방에 일어난 놀라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 중에 맨 나중에 온 자들은 그들의 방언이 통역이 되어 들리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들렸다. 그러자 그들은 120명의 성도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한 것이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그때였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을 향해 말씀을 선포한다. 그 설교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때 베드로가 일어서서 선포했던 말씀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베드로의 첫 설교는 대체 어떤 말씀이었으며, 그것은 거기에 모인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인가? 그리고 이때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2. 베드로의 설교는 크게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오순절날 방언소리를 듣고 몰려온 예루살렘 거민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했던 설교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딱 3가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세례와 방언은 구약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 거민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였던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였는데, 그들이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죽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셋째,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는 말씀이다. 그랬더니 베드로의 말을 받은 자들이 그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의 숫자 무려 3,000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도 역시 예루살렘 교회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기에 이른다. 

 

3. 베드로는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날 베드로는 무엇을 설교했는가? 그때 베드로는 성령세례와 더불어 120명의 성도들이 말하는 방언을 듣고 놀라서 찾아온 헬라파 유대인들 및 예루살렘 거민들을 향하여 설교를 한다. 그 내용은 오순절날 자신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말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모든 사람 위에 부어주실 것이라는 요엘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자신들은 절대 술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오전 9시인데 어찌 이 시각에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겠느냐면서, 그것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영이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가 인용했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요엘2:28~32의 말씀이었다. 그때 베드로는 이 말씀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되 나이에 제한없이 부어주시고, 성별에 상관없이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바로 그날이 오늘이라는 것이다(행2:17). 그렇게 되면 자녀들(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며, 연장자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이제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더욱이 그때가 되면 남종들과 여종들까지도 성별에 상관없이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셋째, 때가 되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지만 그때가 오기 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행2:19~21).

 

4.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죄악을 어떻게 책망했는가?

  이어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큰 능력들과 기사들과 표적들을 베풀어 그가 누군지를 증언하여 주셨건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러 그분을 못박아 죽였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 대로 섭리를 따라 죽임을 당한 것으로서,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윗이 썼던 시편 16:8~11의 말씀을 인용한다. 이는 다윗이 항상 자기 앞에 계신 주를 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할 것이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고 했는데, 다윗은 죽어 오늘날에 그 묘가 있기에 이것은 다윗 자신에게 관한 예언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는 왕이었지만 또한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예언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시자 그가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서는 그분이 약속했던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죽은 후에 부활하지도 않았고 승천하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편110:1에서 있음을 인용한다. 이는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서, 여호와께서 그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오늘 이루어져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이스라엘 온 집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의 십자가에 못박은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그리스도게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반응은 놀라웠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이 큰 죄악을 저질렀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게 된다. 

 

5. 베드로의 설교 내용 중에서 세 번째 부분은 무엇인가?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라. 그리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세례를 받으라. 죄들을 용서를 위하여. 그러면 너희는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행2:38)"라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한다. 그리고 회개를 통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에 대한 약속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해당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말로 밝히 증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시 삐뚫어진 세대로부터 구원받으라고 촉구한다. 그러자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자들이 전부다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에 삼천 명의 영혼들이 더해져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설교의 마지작 부분의 내용이다. 

 

6.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고로 우리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핵심은 최종적으로는 회개의 촉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예수님의 공생애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오른편에 앉으심에 관한 내용도 설교에 같이 들어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사람이 오늘날에도 설교를 한다면 베드로처럼 하면 가장 좋은 설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먼저는 청중들의 당면한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를 밝힌 다음,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소개하는 것이다.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그 의미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그것이 예수님의 초기의 사역의 요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렇다. 모든 설교에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설교가 아닌 것이다. 설교란 예수님에 대한 무지한 자가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도와주고,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을지를 모르는 자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 후에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가 빠지면 그것은 더이상 설교가 아닌 것이다. 더이상 천국복음을 전하는 설교가 아닌 것이다. 

 

7.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맨 마지막에 외친 회개와 그것의 유익은 무엇인가?

  베드로의 설교는 자신이 죄를 지었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그에게 주실 것이라고 했다(행2:38). 그렇다. 이것이 천국복음전파의 핵심이다. 믿음과 회개를 전하여 구원받게 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천국복음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동안 회개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해왔다. 특히 오직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종교개혁의 사상에 물들여지고 그 뒤에 나타난 만세전의 예정론에 심취한 나머지 그만 회개를 소홀히 취급했던 것이다. 아니다. 회개 없이는 믿음만으로 구원얻을 수가 없다. 그런데 쉽게 구원받기 위해 회개를 빼버린 것이다. 그결과는 어떠해오고 있는가? 참담하기만 하다. 지금 개신교는 거의 구원파 수준의 잘못된 믿음으로 전락해 있다. 믿음만 가지면 구원도 받고 천국도 가게 되고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제사장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면 믿음만 가지고 있는 천국갈 수 있을까? 아니다. 많이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을 갖는 날, 그날에 죽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소유한 이래로 더 많은 시간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과연 마귀의 우리의 구원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했는가? 그놈들이 우리들을 천국가도록 가만 놔두겠는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여 넘어뜨리려는 판국에, 우리의 구원을 그들이 보장해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 녀석들은 택하신 우리들도 할 수만 있으면 유혹하여 죄짓게 하고 죄를 지었어도 이미 예수믿을 때에 해결되었다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속이고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한 번 믿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아니다. 지은 죄 중에 하나라도 용서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는 용서받지 못한 그 죄 때문에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수적이기 때문이다. 

 

8. 오늘날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회개는 구원받는 회개뿐인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당시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지은 죄만을 회개하면 되는 것인가? 물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더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방민족으로서 온갖 우상숭배를 행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죄로 인하여 수많은 악한 영들이 대물림되어 지금 우리 몸 속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기 위한 '회개'가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영들은 내가 지은 죄로 내 몸 속에 들어와 있기보다는 이미 조상들의 지은 죄로 인하여 조상들의 몸 속에 있던 영들이 대물림 되어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갖는 아주 특별한 상황이다. 이것을 미국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적어도 반 만 년 이상 무당신을 섬겨왔고, 1,600년 이상을 부처와 불교를 섬겼으며, 500년 이상을 조상제사를 드려 귀신을 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사람의 몸 속에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어도 회개가 없이는 이러한 영들이 우리 몸에서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회개없는 구원론이 가득 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아니다. 회개없이는 구원도 못받고 가난과 질병과 저주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 자신이 지은 죄도 물론 회개해야 하겠지만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도 회개하여 악한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악한 영들의 대물림을 끊어놓아야 한다. 

 

9. 나오며

  돌아보니,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께서 늘 하시던 복음전파의 말씀과 똑같은 것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고 죄지은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다만 이때 베드로는 복음전파의 서두에서 오순절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나타난 현상을 그들에게 설명해 준 것만 다르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행한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도 또한 베드로의 의 설교를 받아들이며 그날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인구의 약 1/10에 해당하는 약 3천명이 제자들의 수에 가입하는 놀라운 결과를 맺게 된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광경인가? 갈릴리 벳세다에 살던 어부 한 사람이 성령을 받고 은사를 받으니, 이렇게 변화되어, 새로운 영적인 리더로 우뚝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받은 자를 복음전파에 합당한 자로 바꾸어주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런 자에게 능력도 입혀주시고 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다. 만약 우리들이 지금 주의 종이라면 그는 설교할 때 반드시 예수님이 누군지를 설교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일반 평신도라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를 회개를 통해 해결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이때 예수님이 누군지를 분명히 알고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지은 죄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 같이 회개해야 한다. 그렇다고 회개가 한 두 번 만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욱더 힘써 예수님이 누군지를 배워야 하고, 또한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실 때에는 즉시 회개하여 그 죄가 우리의 인생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금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인 앞 날을 밝히 빛나게 해 줄 것이며, 우리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영육간에 잘 살게 해주는 비법이 되게 해 줄 것이다. 

 

2022년 06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영적 세계에서는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다 가진 자 같으나 주님 보시기에는 하나도 가지지 않은 자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건강을 가졌는가 아니면 지식을 가졌는가? 권력을 가졌는가 아니면 물질을 가졌는가?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서만 얻을 수가 있다. 자, 지금 나는 어떠한 영적 상태에 있는지 라오디게아를 통해서 주님이 내리신 처방전을 보라! 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2020-10-0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6)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 요한계시록 3:14~22 )
https://youtu.be/3TJSKMsYYfU [혹은 https://tv.naver.com/v/16065941 ]

 

 

 

1. 들어가며

  병원을 찾아간 환자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사가 진단을 잘못 내린 처방전 때문에 병은 낫지 않고 더 고생만 하는 것이다. 특히 수술을 해서 배를 갈랐는데 오진 때문에 다시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의사는 정확한 진단이 생명이다. 이것은 영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영혼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는데도 그 진단을 믿고 살고 있다면 그의 영혼의 문제는 더욱 더 악화될 것이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교회 곧 과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이사아 일곱교회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도 흡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과연 나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진단을 받아보고, 주님의 올바른 처방전에 따라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메시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실 요한계시록의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은 설교를 차지하는 본문이 있다면 오늘 본문일 것이다. "뜨뜻미지근한 교회"요, "물질이 주인된 교회"라는 주제로 많은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 더 알려진 본문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계3:20의 말씀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그림에서 특별한 것은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문은 밖으로만 열리는 문이기에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 수 없는 문이다. 그런데 문밖에서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 믿는 사람들에게 영접기도를 할 때에 이 말씀을 들려주면서 영접기도를 하곤 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이는 처음 예수믿는 자들을 위한 말씀은 아니며,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데도 어느샌가 자기도 모르고 예수님을 밖에 내놓고 자 곧 자기가 추구하는 것들로서 물질이나 명예와 인기 등이 주인되어 살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잘못된 정보는 무엇인가?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 가운데 잘못 알려진 정보가 최소 2가지 있다. 하나는 잘못된 예화 사용이요 또 하나는 이 교회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먼저, 이 교회가 뜨뜻미지근한 것은 이 도시에 흘러들어오고 있는 두 곳의 식수가 뜨뜻미지근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예화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이 도시에 오면서 뜨뜻미지근하게 되고고,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골로새의 차가운 냉수가 이 도시에 오면서 데워져서 뜨뜻미지근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팩트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의 식수는 이 도시로부터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니즐리"에서 직경 90cm되는 돌관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의미는 맞으나 예화가 좀 와전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이 교회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보통은 이 교회에는 황제숭배나 수호신숭배와 같은 우상숭배 강요가 없었으며, 그래서 고난과 핍박도 없었고 평온한 교회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 교회는 우상숭배와 황제숭배가 아주 만연된 교회였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도 그것이 우상숭배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가증한 행위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그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조금 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4.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은 무엇인가?

  그래서 주님께서 내리신 최종적인 결론은 이 교회를 입에서 토해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16절). 더이상 이 교회를 품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 교회를 버릴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예수님은 문바깥에 서 게셨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것은 3가지였다. 

  첫째, 불로 연단된 금을 주님에게서 사라고 하셨다(18a절). 그래서 자신을 부요하게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회를 영적으로 진단해보면 매우 가난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가진단은 달랐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교회 성도들은 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이 도시에 있는 3가지 특징 때문이다. 그 첫번째 특징은 이 도시가 동서양의 무역로에 위치해 있어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융업이 발달하였고 그러다보니 은행의 금고에 금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금 부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부자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지만 믿음이 큰 서머나교회가 부요하다고 선언하셨다(계2:8~9).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다보니, 자기들의 부자로 살게 된 것마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어떻게 되어서 부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이들도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상업조직에서 수호신들을 경배하고 있었고, 제사에 바쳐진 음식을 같이 나눠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정금같은 신앙을 다시 소유해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그들이 우상 앞에 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단지 "도시문화"라고 생각했고, "친교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순결하고 순수한 믿음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은 주 예수님 이외에 신이 없다고 하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 신도 있고 우리 신도 있는데, 다 자기 신을 잘 섬기면 되는거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믿음을 가진 자에게 우상은 없는 것과 같기에 그것에 절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잘못된 우상숭배의 교뢰가 교회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금같은 정련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자로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떨어져서 결국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께서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도록 흰 옷을 사라고 명령하셨다(18b절).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겉옷조차 입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옷들을 잘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도시의 2번째 특징인 "모직 직물" 산업 때문이었다. 라오디게아가 위치한 메안더강 상류인 리쿠스 계곡에는 풀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양떼가 많았다. 그것도 검은 양떼가 많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흑양모산업이 발달하였고 그것으로 고가의 옷을 만들어 팔아서 수입을 올리고 있었으니, 당시 소아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부티나는 옷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걸치고 있었던 사람이 이 도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그랬다. 그러므로 자기 딴에는 자기들이 옷을 잘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드에서 가서 수호신을 경배할 때 예수님의 옷을 벗어놓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랬다. 영적으로 음란한 짓을 하기 위해 그들은 주님의 옷을 벗어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회개하여 검은 털옷을 벗고 예수님만이 구세주인 것을 믿어 흰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순결한 믿음을 얻으려면, 그들의 신앙의 열정을 타올라야 한다고 권면하셨고, 그들의 회개는 냉철하게 하여 단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계속해서] 열심을 내라. 그리고 [단호하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3:19).

  셋째, 이제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멀어버린 눈에 바를 수 있도록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다(18c절). 이것은 이 도시의 세번째 특징과 관련이 있다. 이 도시는 의료기술이 매우 뛰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안과 의료기술이 뛰어났다. 왜냐하면 당시 이 도시에 "멘 카루"라는 신전이 있었고, 의료학교(오늘날로 치자면 단과대학과 같은 것이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치료의 신을 숭배하는 학교로서, 당시에 이 학교에 유명한 대학교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드향료를 가지고 "안연고"를 만들었고, 히에라볼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부르기아 가루 안약"을 만들었으며, 기름을 섞어 "안약"을 제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라오디게아 성도는 눈의 건강에 대해서만큼은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안약을 주님으로부터 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영적인 것을 도무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았던 바울도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하나님에게 원수처럼 행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부자로 살고 있었고 부족함 없었으니, 자기들은 영적으로부터 부요한 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눈이 멀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말씀을 들어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이기는 자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영혼에 대한 진단다운 진단을 받고 정련된 믿음을 갖기 위해서 열심을 내면서 회개하여 다시 흰 옷을 입는 자들은 어떤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2가지 축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는 현재적인 축복이요, 또 하나는 미래적인 축복이 그것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다시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0절). 왜냐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주인으로 맞아들인 자들은 다시 주님과 교제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적은 축복으고서, 주님께서는 장차 주님이 오실 때에는, 이기는 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21절).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이기고 승리하여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처럼, 이제는 그들이 이기는 자들이 된다면 주님의 보좌에 그들을 앉혀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요, "통치의 보좌"이기 때문이요, 주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위임하시고 또한 왕노릇할 것을 위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실행하셨으니, 지금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들을 위하여 심판과 통치의 보좌 24개를 더 만들어 하나님의 보좌 좌우 뒤편에 배치해놓으시고 계신다(마19:28, 계4:4, 딤후2:11~12). 그렇다. 뜨뜻미지근한 신앙에서 벗어나 순전한 믿음과 회개의 흰 옷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러한 축복이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6. 나오며

  주님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자신을 "아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다(14a절). 이는 예수께서 "아멘" 곧 "진실하시고 참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동안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허상을 진짜인 줄 알고 좇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육적으로 부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적인 부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이며, 죽어서는 죄값에 따라 불못에 들어가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무나 오래동안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온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소개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시면서 말이다. 말세에 과연 우리는 어떤 교회를 찾아가야 하는가? 첫째는 불순물이 하나도 들어가지 아니한 순전한 말씀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둘째, 회개를 외침으로 흰 옷을 입게 해주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셋째, 영적 분별력을 길러주고 키워주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만약 그런 교회가 내 교회가 아니라면 그러한 교회가 되어지도록 날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않으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그 교회를 밖으로 토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10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는 과연 무엇일까? 이사야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감없이 선포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죄들이 들어 있다. 우상숭배의 죄말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는 무엇일까? 오늘날에도 이러한 죄는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닐 것이다.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는 죄, 이사야가 언급한 3가지 죄는 과연 무엇일까?


1. 들어가며

  성경은 우리에게 2가지를 알려준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어떻게 행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에 관한 문제이며,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것은 죄를 어떻게 깨닫고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는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본문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메시야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또한 내가 과연 무슨 죄를 지었으며 그 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성경을 보고 있는데도 이것 외에 다른 것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성경을 잘못 보게 된다. 성경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해 것이다.


2. 이사야서에 대한 2개의 큰 구분

  우리는 지난 29번의 이사야강해를 통해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집중해왔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에서 말하고 있는 메시야는 어떤 존재이며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살펴본 것이다. 하지만 이제 30번째 시간부터는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후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해내고 처리하는 데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행할 것인지에 대해 2가지 측면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인데, 하나는 이 본문은 과연 무슨 죄를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러한 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각한 3가지의 죄들

  이러한 차원에서 이사야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해본다면, 1장~39장은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해 보다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40장~66장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 1장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서론이자 핵심주제를 말하는 시간이다. 특히 사람이 지은 죄들 중에 어떤 죄가 제일 하나님 앞에 심각한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이 어떤 죄를 짓고 있을 때, 자신이 지은 죄가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사야 1장에서는 3가지 죄를 언급한다. 그것은 배은망덕의 죄요(2~9절), 형식적인 신앙으로 전락하는 죄요(10절~15절), 마지막으로는 우상숭배의 죄이다(21~31잘). 그리고 중간중간에 지은 죄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고(사1:24~26) 회개를 촉구하는 부분(사1:16~20)이 들어 있다. 우리가 비록 아무리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사야가 언급한 이 세가지 죄에 대해서는매우 높은 경각심으로 대하고 그것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언급하고 있는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참상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짓고 있는 죄들은 무엇이었으며,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4.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첫번째의 죄

  첫째, 배은망덕의 죄를 알고 처리해야 한다(사1:2~9). 세상의 하찮은 미물인 소나 나귀라도 자신의 임자와 주인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하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을 자식처럼 양육했던 하나님을 버린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얼마나 더 매를 맞으리고 반역을 거듭하느냐고 말이다(사1:5). 이미 맞은 곳이 많아 성한 곳이 없는데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신다. 이 세상에 가장 나쁜 것은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를 저버리지 말자.


5.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두번째의 죄

  둘째,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의 위험성을 알고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사1:10~15).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상적인 왕국은 다윗왕국이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벌써 260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제사제도와 안식일준수과 절기준수같은 것들은 완숙한 경지에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그들에게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분향이나 월삭이나 절기나 대회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성전마당만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들은 완전히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인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죄를 지으면 그들은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죄를 지으면 양과 소를 바치면 된다는 식으로 이미 마음이 형식화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죄없는 동물이 죽는다는 것을 보고도, 죄를 미워하거나,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자기에게 희생제물이나 기름이나 향을 가져오지 말라고 명하신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왔어도 자신을 보이려고만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형식주의, 그것이 그들에게 배여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이러한 죄에 한 번 빠지게 되면 사람은 무력한 신앙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미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죄를 짓게되면, 죄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은 가지지 않은채 "그래, 오늘은 양 한 마리 잡지 뭐."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형식적인 제사에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사1:14).

  이러한 삶은 그때로부터 700년이 지난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제사장들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제사에 사용될 희생제물로 돈 벌 욕심만 있었지 다른 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장로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들을 정죄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힘써야 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죄는 내버려둔 채 오로지 남들을 정죄하는 데에 빨랐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과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고 책망하셨다. 형식적인 것으로 볼 때에는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었다. 그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돈벌 욕심에만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명예와 인기를 얻는 데에세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도 아낌없이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구별하여 드렸다. 심지어 회향의 십일조를 드릴 때에는 좁쌀같은 알맹이마저일일이 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높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6. 하나님 보시기에 심각한 세번째의 죄

  셋째, 그들이처리해야할 세번째의 죄는 우상숭배의 죄였다(사1:21~31).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숭배의 죄를 같이 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신실한 성읍이었던 예루살렘을 창기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사1:21). 특히 이샤야가 활동하던 당시 아하스왕 때에는 우상숭배의 죄가 아주 심각했다. 왕도 하나님을 등진채 보라는 듯이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자녀들을 몰렉신에서 불태워 바치는 죄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어떠했을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산에 있는 푸른나무, 상수리나무 아래에 우상을 세워놓고 그것들에게 분향하며 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1:29, 57:5, 겔6:13, 호4:13, 왕상14:23, 왕하16:4, 대하28:4, 렘2:20). 하나님의 백성에 있어서 제일 싫어하는 죄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의 죄일 것이다. 혹시 앞에서 언급한 첫번째 배은망덕의 죄와 두번째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죄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봐주실만하다. 하지만 당신을 섬기도록 선택받았던 백성이 당신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죄를 범할 때에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도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셨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잘 몰랐기에 우상을 숭배할 수 있었다고 하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상태에서도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기근을 보내고, 상수리나무가 말라죽게 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 백성들은 칼에 쓰러지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그들을 정결케 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연 어떠한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백성들에게 우상숭배의 요소는 없을까? 아니다. 우리들에게도 우상숭배의 요소가 있다. 우리도 사두개인처럼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는 죄를 범하고 있으며(마6:24), 물질에 대한 탐심을 끝없이 펼치고 있다(골3:5). 또한 죽은 자를 놓고 예배드리는 우상숭배(추도예배, 장례예배)의 죄를 전통이라는 명목하에 자행하고 있다. 이러한 우상숭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질병과 저주와 가난에 3~4대가 고생하고 있다. 아니다. 그러면 아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명예와 물질과 쾌락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끝없는 탐심을 지금이라도 당장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칼을 가시다가 그것을 내리칠 것이기 때문이다(시7:11~12).


7. 나오며

  그렇다. 이사야가 살던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3가지 죄는 계속되고 있다. 배은망덕의 죄,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죄, 우상숭배의 죄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럴려면 먼저는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꼭 감사하도록 하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항상 기대를 가지고 나오도록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만족하려 하는 우리의 태도와 생각을 과감히 버리도록 하자. 그것이 회개요. 그것이 살 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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