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1) 요한의 세례 주 예수 이름의 세례 그리고 성령세례의 차이(행19:1~7)_2022-12-14(수)

https://youtu.be/wNuEujrs1bY  [혹은 https://tv.naver.com/v/31818142 ]

 

1. 에베소교회에서는 어떤 세례가 베풀어졌는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만났던 에베소교회에서는 3가지 세례가 베풀어졌다. 먼저는 아볼로에 의해서 '요한의 세례'가 베풀어졌고, 이어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주 예수 이름의 세례'와 '성령세례'가 베풀어졌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으며,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세례를 강조하고 있지만, 당시 에베소교회에서는 3가지 세례가 전부다 베풀어진 것이다. 

 

2. '요한의 세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요한의 세례'라 함은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를 가리키는데, 세례 요한이 죽게 되자 그를 믿고 따르는 후계자들이 베풀었던 세례를 가리킨다. 특히 요한의 세례는 세례 중에서도 '회개의 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서(행19:4, 막1:4),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죄사함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자 점차적으로 요한의 세례는 교회 가운데서 사라졌다. 

 

3.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베풀었던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는 어떤 세례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는 세례를 가리키는데, 예수 믿기 전에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거나 혹은 육체 내지는 사탄 마귀가 주인이었던 자가 이제는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자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 예수 이름의 세례'는 이전의 자기 자신 곧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으로 다시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받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롬6:3~4). 고로 사람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게 되며, 새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은 뒤에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28:18~20).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4. '성령세례'란 어떤 세례인가?

  성령세례는 사람이 주는 세례는 아니다. 성령세례는 주 예수께서 주시는 세례이기 때문이다(마3:1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데,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다(마3:11~12). 여기서 자기보다 능력이 크신 분은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고로 '성령세례'는 주 예수께서 베푸시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런데 '성령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견해로서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세례를 의미하기도 한다(고전12:13). 다시 말해,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어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세례'와는 조금 다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는 성령이 믿는 자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말씀을 듣고 있는 고넬료 가정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 이는 성령께서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위에 부어지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이 방언을 말했고, 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다(아마도 방언으로 찬양했던 것 같다)(행10:44~46). 그러자 베드로는 자기와 함께 온 신자들에게 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한다.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이들은 이미 성령을 받은 상태이고 또한 성령의 은사까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베드로는 '성령세례'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교회에 돌아가서 보고할 때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행11:15~18). 

행11:15~18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렇다.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서 베드로는 이것이야말로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은사)이 그들 곧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왜 주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가? 그것은 성령이 믿는 자들 위에 내려오심으로 능력을 받고 또한 은사를 받아 담대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행1:8). 성령의 강력한 체험과 은사가 나타나야 비로소 성도도 용기를 갖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요한의 세례, 주 예수 이름의 세례, 성령세례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구원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렇다. '요한의 세례'는 한 마디로 "나는 죄인입니다"를 인정하는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요,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는 "나는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령세례'는 "나는 이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아서 담대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라고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2가지의 세례를 받고 있다. 하나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마28:19). 이때 성도는 물로 세례를 받으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 주 예수님만이 자신의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섬기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믿는 이들 중에 어떤 이는 믿을 때에 혹은 믿고 난 후에 성령세례도 받게 된다. 이것은 성령이 그에게 쇄도하여 그 사람의 위에 머물러 있음으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주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것들은 일종의 의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주 예수님만이 구원자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형식이 구원의 문제를 결정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자신은 할례를 받았으니 언약 백성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언약백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성스러운 주님의 명령이므로, 이것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만방에 공포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무시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신랑 신부가 새롭게 한 가정을 시작하려 할 때에 결혼식을 올리고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혼인 신고를 하고 살게 된다면 그들이 부부인 것은 맞지만, 기왕이면 혼인 예식을 통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부부가 된 것을 알리고 살면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14일(수)

정병진목사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일까? 구원받기에 정말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장면을 통해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회개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요단강에서 베풀었던 세례에 담긴 회개의 참된 속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부터 살펴보자. 보통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랬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떤 해야 할 행위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만 믿으면 우리의 죄가 자동적으로 씻겨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막1:15에 의하면, 예수께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2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씀하셨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이다. 그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하는 것과 믿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회개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여 죄용서를 받는 것을 가리키며,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속죄사역을 완성한 일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잘못된 예정론에 빠진 자는 회개도 하나님께서 시켜주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대신해 주지 않으며, 끝까지 믿음을 붙드는 것도 하나님께서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과연 하나라도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 것을 믿도록 강요하기 위해 예정론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시고, 누구는 버리기로 예정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개인구원예정이 없다는 것을 아는가?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되 끝까지 그 믿음을 붙드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신 것뿐이지, 아무아우개를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예정해놓으신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믿기로 결단했다면, 그때부터는 날마다 자신을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목욕탕이 동네에 들어섰는데, 직접 그 목욕탕에 들어가서 자신의 때를 벗기지 않는다면, 동네에 목욕탕에 들어왔어도 자신의 몸이 여전히 더러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유다광야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과연 세례는 회개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참된 회개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자신이 지은 죄를 자복하는(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일은 회개하는 데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요소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마음과 입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일로만 그들을 돌려보내지 말고, 그들을 데리고 모압평지와 여리고평지 사이에 위치한 요단강으로 가서 거기서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셨다(요1:33). 하나님은 왜 세례요한에게 요단강으로 올라가서 세례를 주라고 했던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그냥 물있는 곳을 찾아가 세례를 주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흙탕물로 가득한 요단강까지 가서 그곳에서 세례를 주라고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세 가지의 놀라운 영적인 뜻이 들어있다.
  첫째, 그곳은 과거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서 가져온 12개의 돌이 묻어놓고(수4:9), 그곳에서 새로운 12개의 돌이 캐내어 가져온 장소이기 때문이다(수4:20). 요단강을 건넌 후에 들어가게 되는 가나안땅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육체적인 죽음 후에 우리의 영혼이 들어갈 ‘천국’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데 가나안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애굽을 동경하고 애굽생활을 갈망하던 자들은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광야생활에서 4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은 그들을 다 광야에서 엎드러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가나안땅으로 인도해 들이는 여호수아는 과거 죄악된 옛생활을 좋아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은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을 요단강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12개의 돌을 캐어다가 요단강을 건넌 다음 가나안땅 첫숙영지인 길갈에 세워두었다(수4:3,8,19~20).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었다. 이것은 사탄마귀에게 노예로 살면서 죄를 짓기 좋아하던 이스라엘의 옛 12지파 사람들을 다 물 속에 장사지내고, 이제는 물 가운데서 새로 살아나온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을 가져다가 가나안땅에 둠으로써,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사는 자만이 가나안땅을 들어간한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롬5:3~4).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회개’란 과거의 나를 장사지내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례란 이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날마다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지으심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 자만이 가나안땅에 세우둔 12개의 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곳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선지자가 죽어서 곧바로 천국에 올라간 장소이기 때문이다(왕하2:7~11). 요단강은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새사람으로 사는 세례의 참된 의미를 말해주는 장소다. 하지만 여기에 부수적으로 요단강은 2가지 의미가 더 있다. 왜냐하면 요단강은 진짜 사람이 죽으면 즉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죽은 다음에 곧바로 천국으로 올라간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의 세례가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마지막의 결정적인 요소인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그곳이 나아만장군의 영적인 교만이 깨어진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왕하5:10~14). 요단강은 문둥병자였던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들어가서 일곱 번 자기의 몸을 잠금으로 그의 문둥병이 나았던 장소다. 그때 나아만 장군은 불평했다. 아람나라의 왕의 친서를 가지고 자신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엘리사를 찾아왔는데, 그가 와서 자신의 당처에 손을 흔들고 기도해줄 줄 알았는데,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왕하5:11). 그리고 그때 나아만 장군은 또 이렇게 말했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왕하5:12)" 그렇다. 아람나라에 있는 유명한 아바나와 바르발 강은 강물도 깨끗하고 좋은데, 굳이 흙탕물이 흐르는 요단강에서 자기의 몸을 씻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의 문둥병이 낫게 된 것은 요단강의 흙탕물이 효험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해서였을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더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게 한 것은 나아만 장군처럼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만을 생각하는 교만을 꺾지 아니하는 자는 결단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이 비록 세례요한이 있던 요단강까지 나오긴했지만 그들은 세례에 동참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방식대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할례받은 자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받은 할례와 의식적인 율법의 준수가 자신을 구원해주기에 충분하므로, 무엇이 부족해서 흙탕물 속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면서 요한의 세례를 뿌리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구별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교만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 되고 말았고,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일을 하다가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나아만 장군은 어떻게 했는가? 처음에는 버럭 화를 냈지만 자신의 종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위치와 신분을 내려놓은채 흙탕물 속에 들어감으로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과같이 회복하게 되어 깨끗함을 받게 되었다(왕하5:13~14). 계속...

2016-05-22 그들은 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까(마3;1~13).jp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