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크기와 내가 이 지상에서 누릴 축복의 크기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예수께서는 어느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는 어떻게 할 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가만히 있어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가?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이 둘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2022-02-2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주일예배] 천국과 그분의 의를 찾는 자들이 받을 은혜(마6:31~3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es9d-EWS70 [혹은 https://tv.naver.com/v/25310186 ]

 

1. 들어가며

  왜 우리는 회개하고 있는가? 아니 왜 우리는 회개를 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가 회개하는 목적을 정리한다면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회개를 함으로 지은 죄들을 사함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마4:17, 눅24:47). 그런데 회개의 목적은 이것만이 아니다.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회개를 함으로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성경 요한일서 1:9 말씀에 따르면, 사람이 회개하면 2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우리가 모든 불의함으로부터 깨끗하게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전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후자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전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자신의 영이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행위책을 떠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조금 가능하다. 왜냐하면 불의함으로부터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러운 영인 악한 영들이 내쫓겨남으로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이 우리 안과 밖에 있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 떠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늘에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회개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악한 영들이 잘 떠나가는 회개를 해야 한다. 즉 하늘에서 내 죄를 용서받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악한 영들이 잘 떠나가는 회개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회개할 때에도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회개의 방법을 알고 회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조상들의 죄를 대신 회개하면 그의 후손들이 온갖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가? 그건 아닐 수 있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는지 그리고 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배척해 왔음과 그동안 죄를 지어왔던 죄들을 회개하면 그는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옥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건 첫째로,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를 그 누구도 회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는 그냥 놔두면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둘째로, 우리가 회개하지 않은 채 우상 숭배의 죄들을 그대로 그냥 놔두면, 그냥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값을 후손 3~4대가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출20:5). 그럴 때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악한 영들로 인하여 온갖 종류의 저주와 질병,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게 되고, 자녀들에게 망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회개하는 우상 숭배의 죄 회개는 천국가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자손들이 저주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그리고 또한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받기 위한 회개인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는 '구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찾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말 성경으로 마태복음 6:33의 말씀을 보면 이렇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구하라'는 단어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한글로 보면 그 의미가 '요청하라'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 단어는 '요구하다, 요청하다'라는 뜻의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찾다'라는 뜻의 '제테오'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하고 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구하다'라는 단어는 사실 '요청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고, 더불어 '찾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헬라어는 '요청하다'라는 단어와 '찾다'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단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7에 보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서 '구하라'는 단어는 정확히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찾으라'는 단어는 '제테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로서 '구하다'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가 '요구하라'는 뜻인지, '찾으라'는 뜻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그럼, 마태복음 6:33에 나오는 '구하다'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인가? 그것은 '제테오(찾으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본문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이 단어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왕국)과 그의 의를 [계속해서] 찾고 있어라"는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요]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찾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찾아야 할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요청해야 할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전자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다 말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오직 그것을 찾고자 하는 자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있다면 그는 아마도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이 어떤 것인지를 그것을 찾아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천국과 그분의 의는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으면 안 열리기 때문이다. 한편 '찾으라'는 말씀은 말이 아니다. 행동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1장에서 빵을 구하는 친구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A라는 친구에게 어느 날 한밤중에 친구B가 찾아왔다. 그러자 A는 그 순간 어떤 결정을 해야 했다. B라는 친구를 그냥 굶길 것인가 아니면 좀 민폐를 끼치더라도 이웃 친구를 찾아가서 빵을 구해올 것인가를 말이다. 그때 A라는 친구는 이웃 친구들에게 가서 빵을 구해 오기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빵을 찾아 나선다. 그렇지만 어느 집에서 얼마만큼의 빵을 구할 수 있을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만약 그날 그가 빵을 구하러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그는 빵을 구해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마침 C라는 이웃 친구가 있었다. 그에게는 여분의 빵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귀찮아서 A라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도 강청을 하기 때문에, C라는 친구는 A가 자기의 친구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않으려 했지만, 하도 강청을 하니 들어주겠노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발견하는 것도 다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 나서는 자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인 것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자는 결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성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반드시 찾고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도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가장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서 살게 될 천국을 여기서 잘 준비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방인들 곧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을 위해 아주 열심히 살아간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 오늘도 분주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지금도 부지런히 찾고 또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러다가 망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들과는 달리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도 그러한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찾고 구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과 그분의 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장차 들어가야 할 다음 세상은 어떤 곳인가?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살기 위해서는 그분의 의로운 기준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할 때 천국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떻게 할 때 그분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켜 드릴 수가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모두가 천국을 사모하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주님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이라는 말만 듣고 그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천국이란 어떤 곳인지, 또한 과연 그곳에는 누가 들어가게 되는지, 그곳에서 갖는 신분은 대체 어떤 것이며, 누가 어떤 종류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이 땅에서 그것을 장만할 수 있는 것인지를 찾고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만히 있으면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의 의로운 요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인지, 죄많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특히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는 더러운 영들을 떠나보낼 수 있는지를 우리는 찾고 구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과연 천국의 비밀을 얼마나 발견한 채 있으며, 그분의 의로운 요구에 얼마나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6. 천국과 그분의 의는 어떻게 해야 찾을 수가 있고 또한 발견할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천국의 비밀들과 그분의 의로운 요구들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있으면 그것이 결코 발견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을 내 것으로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노력과 수고 혹은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는데도 그것이 얻어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댓가를 지불한 분량만큼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천국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좋은 진주 장수의 비유'다(마13:45~46). 주님은 천국은 누가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떤 진주 장수를 말씀해 주셨다. 그는 좋은 진주들을 구하고(헬라어로는,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침내 그가 값비싼 좋은 진주 한 개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가 그날 발견한 진주는 천국에 관한 비밀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찾아낸 그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처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진주 하나를 산다. 그렇다면, 묻겠다. 왜 이 진주 장수는 그 비싼 진주를 사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 진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진주가 그만한 값을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 것이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다.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은 채 천국의 놀라운 영광스러운 자리와 지위는 결코 얻을 수가 없다. 또한 회개도 마찬가지다. 회개를 어떻게 해야 악한 영들이 잘 나가는지를 알려 주는 방법을 듣고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회개가 어렵고 힘들게 보이면 회개를 안 하고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회개 없이는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회개 없이는 깨끗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데, 그는 그 일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를 쓰시려고 해도 깨끗하지 않은 자를 하나님은 결코 쓰실 수가 없으며, 그를 혹 쓴다고 해도 그를 계속해서 쓰실 수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는 시간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어찌 악한 영이 떠나가겠는가? 악한 영들에게는 많이 바쳤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회개 헌금 한 번 드리지 않는 자가 어찌 더 자신이 깨끗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있는 천국과 회개에 관한 영적인 비밀들을 정말 가슴 깊이 새기며 그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7. 천국과 그의 의를 발견했으면 누구나 그것을 다 얻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과 그분의 의로운 요구가 무엇인지를 찾고 찾아서 발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내가 발견한 천국과 그의 의는 그냥 내가 다 가질 수가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먼저는 그것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다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좋은 진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내 재산이 너무나 아까워 그 진주를 사지 않는다면 그 진주는 내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과 회개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도 참으로 소중한 일이지만,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그것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결국 그런 자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클 것이며, 회개를 더 많이 하여 깨끗한 그릇이 된 자가 하나님께 더 크게 쓰임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얼마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만큼 그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가치있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지불해서라도 그렇게 살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분량이 작은 사람은 작은 분량만큼만 살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은 조상들이 물려준 것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낼 때에 그에게 주신 그릇의 크기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천국과 그분의 의를 다 똑같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지불하는 자만이 그것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을 내가 듣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천국의 많은 복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며, 이 땅에서도 더 크게 쓰임받을 수 있을 것이다. 

 

8. 나오며

  열심히 찾지 않았는데 그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리가 없으며, 열심히 찾지 않았는데도 회개의 비밀을 터득할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견했어도 어떤 댓가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그가 천국의 풍성함을 누릴 수 없으며, 그것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는데도 그가 회개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다. 구원이라는 것은 사실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축복의 크기나 천국에서의 상급은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가치있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겼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는 자는 정말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그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별로 가치있다고 여기지 못한 자는 결코 그 진주를 사지 않을 것이다. 다른 싼 진주만을 찾아다닐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지금 어떠한 사람인가? 만약 지금 우리가 목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는 방법을 들었지만 어찌 그 많은 시간을 낼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더 깨끗한 그릇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면 주님으로부터 정말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지도 못할 것이다. 주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듣는 성도들이라면 그는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도전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천국과 그분의 의를 어떤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자에게 이방인들이 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같은 이 생에서의 필요를 가득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마6:33). 놀라운 축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02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신칭의를 얻었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노정에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골인하는 것인가?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며,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얻게 되는가? 그런데 그 예가 있다. 그 예를 통하여 우리도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오늘은 그 좁은 문의 두번째 키워드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2019-11-15(금) 금요기도회
제목: 좁은 문을 통과하게 해주는 회개란 무엇인가?(눅15:11~20)
https://youtu.be/W4apiY9VO9s


1. 들어가며

  구원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것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1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해주셨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대체 어떻게 해서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구원얻기 위한 좁은 문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되, 그중에서도 두번째 관문은 "회개"에 관하여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2.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으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눅13:28~29를 살펴보니, 한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후 구원은 혈통적인 조건에 따라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2가지다. 그것은 그들이 가졌던 "믿음" 때문이요, 또한 "회개"를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가. 구원받는 좁은 문은 첫째가 "믿음"이다.

  사람이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으려면 첫째로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및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고, 장차 동서남북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3:28~29).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귿르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구원의 첫번째 요소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가 없다.

 

나. 구원의 좁은 문은 둘째가 "회개"다.

  사람이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으려면 이어서 "회개"가 필요하다. 믿음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 믿은 즉시 순교할 때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은 그날에 죽지 않는다. 적어도 30~50년은 더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을 구원받게 해주는 또 하나의 관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회개"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후에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회개하지 못했던 그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예수님을 믿는 자인데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면, 그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른지를 말이다. 아니다. 못받는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계21:8).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반드시 지은 죄를 처리하기 위해 반드시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지은 죄들을 용서받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이기 때문이다.

 

3.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및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동서남북으로부터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가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그것의 첫번째 요소는 "믿음" 때문이다. 왜냐하면 눅13:28~29의 평행본문은 마8:10~12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음식을 먹기위해] 비스듬히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이들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믿음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대체 어떤 믿음을 가졌던 것일까? 그들은 2가지를 믿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임과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생전에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었고 자식들에게 자기가 믿었던 신앙의 내용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는 단수로서, 오실 메시야를 상징한다. 그렇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되, 특히 메시야에 관한 약속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그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데도 보는 것처럼 믿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움이 뒤따라온다. 이를터면, 무엇인가를 다 보여주고 그리고 다 만지게 해놓고 난 뒤, 믿으라고 한다면 믿지 아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여주지도 않고 손에 만질 수도 없는 것인데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믿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한 번 가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좁은 문이다. 믿다가 흔들려 포기하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믿음을 끝까지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시 안 믿는다고 한 다음, 자신의 목숨을 살려놓고 그리고 나서 회개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러한 믿음으로는 천국가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넓은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은 결코 구원의 바른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4.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회개"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구원을 위하여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누가복음에 나와있는 사례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매우 "회개"를 강조하는 복음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누가복음을 "회개복음서"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첫 외침이 회개였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눅5:32).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전해야 할 복음도 이신칭의의 복음이 아니라, "회개의 복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24:46~48). 왜냐하면 부활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께서 유언처럼 제자들에게 그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때 이후로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 전파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셨고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칭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얻는 칭의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통하여 얻는 칭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가. 회개의 시작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회개는 어떻게 시작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례는 "고기잡이의 기적"으로 알려진 베드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눅5:1~11). 밤이 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어부 베드로였지만 그는 예수님의 레마를 듣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다. 그리하여 동역자의 배까지 고기로 가득 채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다. 왜냐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는 예수께서는 정말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소문이 헛된 소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창조주요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절대 하실 수 없는 일을 직접 경험했다. 베드로는 겸손했다. 그리고 고기잡이의 기적으로 인해 즐거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했다.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로면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된다. 고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일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회개의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죄인은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회개하는 것인가? 그것은 낱낱의 죄를 다 고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눅15:18~20). 그것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고스란히 나온다. 둘째는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는데도 자기의 몫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하여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멀리 떠나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길이 미치는 않는 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더니 결국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둘째아들은 이제 남의 집에 붙여사는 인생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되자, 그는 송구스럽지만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어찌 아버지의 얼굴을 그냥 볼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아들로서 자격없는 자라고 시인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자신을 일꾼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고백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15:21)." 하지만 그는 자기가 준비해간 세 가지의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까지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자식의 용서를 비는 마음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 낱낱의 죄를 자백할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된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것이다. 그때부터는 지은 죄를 고백할 때 죄가 용서된다(요일1:9). 죄를 자백하지 않는데, 어찌 자동적으로 죄가 용서되겠는가? 어떤 이는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용서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죄는 자백할 때 비로소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내어 용서받게 되기 때문이다.

 

다. 회개의 결과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죄인이 진정 회개를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것의 예가 바로 "삭개오의 회개"다(눅19:1~10).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다. 그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그는 자신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인물로 보인다. 심지어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치는 세금징수요원으로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2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잃어버린 것도 있었다. 첫째는 동네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철저히 잃어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 멀어져 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그의 이름은 "삭개오"로서, "깨끗한 자"요 "의로운 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함받을 수 없는 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눈물짓는 밤이 계속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다가 어느날 조건없이 심지어 창녀라도 만나주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라도 그분을 만나기를 사모했다. 그때 주님이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는 겸손히 내려와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는 즉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팔아 율법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토색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4배가 갚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그렇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그는 이미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도 그 사람의 회개를 인정해주셨던 것이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치자. 그런데 심판의 날에 주께서 우리를 모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셔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자신에게서 나타나고 있느냐가 말해준다. 삭개오는 이미 회개의 열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그의 회개를 인정해주신 것이다.

 

5. 구원받는데 회개의 중요성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렇다. 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요체다. 믿음 없이 구원받을 수 없고, 회개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런데 종교개혁이후 그만 "회개"가 축소되었거나 회개가 약화되고 말았다. 회개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이 교회를 가득채우고 말았다.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 회개복음이요,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가 회개하지 않아서다. 눅13:3,5에 보면, 예수께서는 사람이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을 받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셨다. 특히 평소 때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기 전에 회개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눅23장에 나오는 "한 편 강도의 회개"다. 한 편 강도의 회개는 죽음 직전에 사람은 회개하고 죽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고 그때라도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구원은 결코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며, 좁은 문을 통과하여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주셨다. 찬찬히 보니 그렇게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누군지를 주님께서 알려주셨다. 그러한 예를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믿음과 회개가 그것의 관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믿음"이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믿는 믿음이며, 이 믿음도 끝까지 지키는 믿음이라야 한다. 그리고 "회개"는 자신의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지은 죄를 낱낱히 고백하는 것임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한 후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어야 진짜 회개라는 것도 들었다. 말은 사실 간단한 것이지만 그렇게 살아내기는 여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구원의 길이다. 이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구원인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좁은 문을 통과하여 꼭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9년 11월 15일(금)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돌아온 탕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둘째아들이 진짜 범죄한 것이 맞기는 한 것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자신이 쓴 것이 과연 죄가 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아들은 아버지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 왜 둘째아들은 회개해야 했던 것일까? 사실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려고하지 않았다면 그는 굳이 회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려고 하니까 회개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집으로 갔을 때 과연 아버지께서 자신을 어떤 신분으로 받아줄 것인가를 생각해보았을 때 회개가 필요했다. 그렇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왜 회개가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과연 어떤 결과를 맞게 될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어떤 종국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 이제 직접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올 해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그래서인지 저마다 종교개혁 500년에 걸맞는 어떤 일들을 수행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500년을 기념하여 오늘날 우리 교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잃어버린 회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시대로부터 비록 잃어버린 믿음은 회복했지만 회개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은총과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교회를 통한 은총만으로 구원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중세시대 성도들은 신부들이 수행하는 7가지 성사를 통해서만 은혜가 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신부들을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신부를 통하여 고해성사를 해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며, 신부를 통하여 세례(영세)를 받아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세시대의 가르침은 틀렸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다 용서받을 수가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과연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심각한 결과가 뒤따르게 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 예수믿는 자라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날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회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회개하려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회개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 회개치 않은 죄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럴까? 한 가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다.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혹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가 결코 끊어지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다. 여기 부활승천하시어 사도요한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비겁한)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렇다. 알파와 오메가되신 하나님이시자 예수님께서는 예수믿고도 범죄한 자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눌랍게도 그것의 끝은 불못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을 믿는 자가 우상을 숭배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다. 예수믿는 자라도 우상숭배하는 자는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우상숭배한다고 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일부 성도들은 이러한 말씀은 예수께서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이요, 경고에 불과한 것일 뿐 진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천상의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번 더 말씀하셨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2:14~15에 나온다. 여기서 알파와 오메가되신 예수께서는 믿고도 범죄했다면 반드시 예수님의 피에 자신의 잘못된 행위들을 씻어내야 한다고 하셨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성밖에 곧 바깥 어두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도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심각하게 들여다 보아야 한다.

 

3.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타나 있는 핵심진리는 과연 무엇일까?

  오늘 예수께서는 돌아온 탕자(둘째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와 천국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돌아온 탕자에 비유에 나타난 회개와 천국의 상관관계를 주의깊게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 할지라도 범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4. 과연 자식이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것이 범죄인가?

  오늘 읽었던 말씀(눅15:17~21) 곧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를 떠난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아들로서 합당하지 않게 살았던 것을 두고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되돌아가 용서를 빌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과연 아버지께서 자기자식에게 준 재산을 자식 마음대로 썼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일까? 율법규정을 보자. 부모의 재산을 자식이 상속받는 것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신21:15~17). 다만 이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 좀 일찍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아들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행위였음을 고백하려 하고 있다. 결국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용서를 빈다. 왜 그랬을까?

 

5. 나중 둘째아들이 깨달았던 죄란 무엇이었는가?

  자, 그렇다면, 둘째아들은 대체 무슨 죄를 범한 것일까? 그것을 알려면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을 찾아보면 된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 앞에 찾아가서 꼭 고백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것이다(헬라어직역). "내가 일어난 후에 아버지께 갈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 안으로와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지 않나이다. 나를 당장 당신의 품꾼들의 하나로 만들어주십시오(눅15:18~19)" 둘째아들은 자신의 범죄가 그가 이방 땅에 가서 자신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전혀 합당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다. 그가 이방 땅에 가서 저질렀던 죄는 아버지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범죄행위였던 것이다. 그것이 곧 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떤 것을 범죄라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십계명과 같은 큰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이 범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둘째아들은 무엇을 범죄라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그가 아버지의 품위에 합당하지 않게 살았던 것이 죄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어도,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만약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합당하지 않게 살았다면 그것이 곧 범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지 않게 산 범죄의 댓가는 어떤 것인가? 둘째아들로 치자면 그것은 굶어 죽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을 보면, 그것은 굶어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파멸을 받는다는 뜻이다.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팔아 이방땅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것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재산에 대해 헬라어 원문에는 '우시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재산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눠준 '살림'이라는 단어는 '비오스(목숨,생명)'였다. 그것은 그것이 목숨이나 생명같은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 둘째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 아버지의 생명과도 같은 본질을 그냥 막 써버린 것이다. 또한 그가 재산을 '낭비해버렸다'는 말은 헬라어로, '흩어버렸다'는 뜻이다. 그렇다. 둘째아들은 농부가 곡식을 까불 때에 흩날리듯이 아버지의 목숨과 같은 생명을 그냥 펑펑 날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그것이 죄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왜 둘째아들은 자신의 행위를 범죄로 보았을까? 그것은 단 한 가지이유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자신이 행위가 범죄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했다면 그는 회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6. 왜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가?

  그렇다. 오늘날 이 원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치자.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죄짓지 아니하고 살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내면에는 죄된 본성이 남아 있고 밖에는 귀신들이 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아버지의 아들로서 합당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 행위를 지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것은 파멸인 것이다. 문제는 둘째아들이 이방 땅에서 파멸당하지 않고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려고 하니까 회개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로, 우리 믿는 이들이 회개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범죄를 회개하지도 않은 채 그것을 그대로 놔둔 채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합당하지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둘째아들이 회개한 내용을 보면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려준다그것은 그가 비록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되돌아간다하지만 과연 자신의 신분이 예전처럼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 가서 "나를 품꾼들 중의 한 사람으로 행하여 달라"고 마음먹었다. 그렇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아버지 앞에 합당하지 않게 살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라.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지 않는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장은 아니겠지만 점차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금이 가고 언젠가는 완전히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해야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아버지와의 깨어지고 있는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회개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장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요(요8:34),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요일3:8).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게 되면,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죽는 순간 마귀의 자식이 되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7. 나오며

  회개하자.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살 길이 없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결국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죄의 종으로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 있는가? 오늘 본문 말씀 눅15:17을 다시 읽어보라. 회개는 아버지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둘째아들이 스스로 돌이켰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능동태구문인 것이다. 수동태구문이 아니다. 회개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나아가 용서를 빌어야 하는 능동태구문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회개시킬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러한 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회개란 죄를 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요, 아버지의 집 곧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며, 아버지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나를 천국으로 데려다주는 것이 아님을 알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범죄한다고 해도 당장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지 않게 산다면 죽는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깨어질 것이고 마귀의 자식이 되어 지옥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회개하자. 회개만이 살 길이다. 왜냐하면 첫째, 회개만이 아버지와 신분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둘째, 회개만이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인가 회개인가? 기본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없어서 천국에 못 들어갈 성도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회개치 못해서 천국에 못 들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회개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신약에 나오는 두 세리의 회개를 통해서 이것을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신구약성경에는 회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등장한다. 그중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대표자는 욥과 다윗이며, 신약성경에 나오는 회개의 대표자는 베드로(눅5:1~11), 탕자(눅15:11~24), 세리(눅18:9~14), 세리장 삭개오(눅19:1~10) 그리고 한 편 강도(눅23:32~43)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총 7명의 회개자들을 통해서, 회개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을 회개해야 하며 또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이들 중에는 두 명의 세리도 들어 있다. 이들은 온전히 죄인취급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앞에 나오는 세리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세리이며(눅18:9~14), 뒤의 세리는 당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로서 실제 있는 이야기였다(눅19:1~10). 오늘은 이 두 명의 세리의 회개를 통해 회개가 무엇이며, 이들은 무엇을 회개했으며, 어떻게 회개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회개란 무엇인가?

  먼저, 두 명의 세리를 통해서 회개란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눅18장에 나오는 세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가운데 나오는 자다(눅18:9~14). 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조금 알 수 있다. 즉 회개란 자신이 지은 죄를 애통해하며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잠깐 그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성전에서 따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만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자신의 죄를 속죄해 달라고 고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이제는 눅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를 보자. 삭개오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회개란 바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오직 돈(물질)을 위해 달려왔다.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로서 취급했고, 죄인 남자(눅19:7, 원문)라고 불렀다. 여기서 사람들이 그를 죄인 남자라고 칭한 것은 그는 당시 사회로부터 확실히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죄인 남자라 칭하는 한 부류가 있었다. 그리고 또한 죄인 여자라 칭하는 한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세리들과 창녀였다(마21:31~32). 그런데 세리장 삭개오는 죄인 남자라 칭하는 부류의 제일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리가 되었고 이어서 세리장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을 산더미처럼 가졌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고 외로웠으며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죄인이라도 기꺼이 맞아주신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분을 만나보고자 결심한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된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시더니 자기 이름을 부르시면서 자기집에 유하러 들어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내려온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그리고는 회개했다. 이전까지 살아왔던 그의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자신을 사람으로 맞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을 움켜쥐는 인생을 놓았다. 그리고 돈을 나눠주는 인생으로 살기로 결정해버렸다. 그랬다. 그는 자신이 그처럼 생명처럼 여겼던 돈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속여서 강탈한 것이 있다면 4배나 갚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까지는 인색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후한 사람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전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율법말씀에 불순종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곧 그는 유턴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 회개란 가던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에 더 이상 그 길로 쭉 가지 않고 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고, 돈을 위해서 살고, 쾌락과 명예를 위해 살았던 자가 유턴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돈을 나눠주며 그것으로 구제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3.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둘째로, 두 명의 세리들이 과연 무엇을 회개했는가를 살펴보자. 앞의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했다. 뒤의 세리는 자신이 돈만을 최고로 추구하던 삶을 회개했다. 그렇다. 사람이 회개하는 데에는 딱 3가지 것을 회개한다. 하나는 낱낱의 범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자신의 죄성을 회개한다. 살아보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시인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눅5장에서 고기잡이의 기적을 체험한 후에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서 "당신은 나로부터 떠나주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죄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여(눅5:8)"라고 말했다. 당시 죄인 남자는 세리밖에 없었는데 베드로는 자신이 구제불능의 죄인인 것을 그때 시인한 것이다. 주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제자로 삼으실까? 그리고 어떤 자를 곁에 두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철저히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앞의 세리는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했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회개하는 한다. 이것을 적극적인 회개라고 한다. 이런 자는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고 난 뒤 죄성을 회개한 자가 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르지 않으며 이제부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 이전에 행하던 범죄행위를 따르지 않고 주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그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번째 회개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적극적인 회개를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세리장 삭개오였다. 그는 마음을 돌이킨 후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회개했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회개의 내용은 구제하는 것이저 배상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칭했다. 그렇다. 우리도 회개한 자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회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자는 처음부터 다시 회개를 시작해야 한다.


4.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이제 셋째로, 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자. 앞에 나오는 눅18장의 세리는 마음을 찢어가며 회개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자의 바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심정이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도 없었기에 그는 성전 뒤편에서 멀찍이 떨어져 기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바른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다. 회개를 하는 자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가? 그런 모습은 회개자의 모습이 아니다. 또한 나도 이렇게 회개했으니 이제 복을 달라고 하는 자도 바람직한 회개의 모습이 아니다. 회개한 후라도 주님이 어떠한 처우를 내린다고 해도 달게 받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렇게 부족하고 잘못된 존재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오니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회개가 바로 탕자의 회개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의 세리 곧 눅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를 보자.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자면, 그는 인천세관의 세무서장이나 부산세관의 세무서장에 해당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권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모신 그는 차마 앉아있지도 못했다. 종처럼 서 있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식사할 때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눅19:8을 보라. 그는 종처럼 서서 예수님께 시중들고 있다. 종의 신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바른 모습이다. 그는 꼭 종처럼 예수님을 받들었다. 그리고 그가 여리고의 세리장의 직책까지 올라갔으니 아마 나이도 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 앞에 종처럼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인 것이다.


5. 나오며

  자, 이제는 우리를 돌아볼 차례다. 과연 우리는 회개하고 있는 사람인가? 자신이 정말 못난 죄인인 것을 깨닫고 시인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세리장 삭개오처럼 잘못 가고 있던 삶에서 유턴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자인가? 만약 우리에게서 이러한 회개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천국에서 멀리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자는 결코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으며, 주님께서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아니 그러다가 영원히 주님곁을 떠나 살아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낮은 자세로 주님 앞에 지은 죄를 자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죄성을 가진 자를 시인하고 눈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이 추구하던 삶에서 유턴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이 조금이라도 열리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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