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오늘날 구원을 위해 교회들이 목숨처럼 지켜내야 할 것은?(막6:10~13)_2022-07-10(주일)

https://youtu.be/gSYeRk8HDHc  [혹은 https://tv.naver.com/v/28024586 ]

 

1. 들어가며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 항상 우리 물으며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교회가 사회 기관 또는 친교 모임 기관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음부의 권세가 해하지 못하는 튼튼한 교회를 세우고, 교회생활하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18~19). 그러므로 겉으 아무리 멋있게 보이고 건물이 화려해 보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퍼센트가 적은 교회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친교 모임이 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와 다음주는 교회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 교회되게 만들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꾸준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우리가 과연 목처럼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가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가 대체로 타락하거나 세상이 부하게 되면 교회는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는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고 오늘날은 세상이 부하게 된 시대다. 그러니 중세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을 잘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는 약 천 년 혹은 약 오백 년 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천국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을 것인지와 죽어서 이미 연옥에 빠져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지를 전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현대 교회도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전해 왔다. 그 방법으로서 셀모임을 어떻게 잘 하는지, 제자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를 전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회개의 중요성을 빠뜨리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과연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잘못 가르쳐 주거나 혹은 너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방법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럼 중세 교회는 어떠했을까? 그때는 오직 교회의 사제 계급 곧 신부들의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그럼 왜 이렇게 천주교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3. 천주교회는 어떻게 천국복음을 전하지 않고 연옥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왜 천주교회는 참된 진리의 천국복음과 회개를 전해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천주교회의 타락과 그리고 세상과의 혼합주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D.378년 로마의 다마수스(Damasus)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 곧 고대 로마의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속한 최고 사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A.D.590년 제63대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 1세가 자신의 직함을 '교황'이라 사용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이교도인 태양신 종교와 혼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는 갖가지 이방 종교의 의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수많은 교리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다. 그중의 으뜸은 바로 '연옥'이라는 교리다. '연옥'이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기는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임시 감옥으로서,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구원에 대해 보장은 받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때부터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회가 가르쳐 준 것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에에게 기도를 바치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미 자신의 선행과 공로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은 잉여 공로가 있는 성인들에게 기도를 바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품들도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회마다 앞다투어 성물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숭배하고 찾았으니,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에도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는 평소 3배가 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 성당 안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속옷과 십자가의 녹슨 못 1개 그리고 마리아의 머리카락 3개 그리고 불가타역 성경을 만들었던 제롬의 이빨 3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드디어 A.D.1091년도부터다. 교회가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 하고 재정 축재를 하기 위해 재정 모으려다 보니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의 도장이 찍힌 면죄부를 사게 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사실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그때부터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리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못하게 했다. A.D.1123년부터 5차에 걸친 라테란 종교회의 결과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게 되면 종교 재판에 넘겨 온갖 고문을 하고 죽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녀사냥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죽인 성도들의 수가 무려 6천만 명이었다고 한다. 

 

4. 천주교가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준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런데 이러한 천주교회의 연옥복음에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신부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A.D.1483~1546년). 그도 죄로부터 해방되어 살기를 원했으나 온갖 고행과 선행 그리고 거지 성지순례, 성인 숭배 등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인 스타우핏츠 신부의 도움으로 성경을 접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루터는 사람이 구원얻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오직 의인은 믿음과 회개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롬1:17, 합2:4, 시32:5). 그리고 드디어 만성절(모든 성인 대축일) 하루 전날에 비텐베르크 성당에 자신의 생각을 함께 토론해 보고자 95개 반박문을 게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중세의 구원관이 성경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는 중세의 구원관 3가지 중에서 2가지 거부한다. 하나는 교회의 사제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가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과 구원에 달려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5. 루터가 성당문에 게제한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루터가 만성절 하루 전날에 나무로 된 성당문에 붙던 95개조 반박문을 읽어 보면 우리는 그가 대체적으로(학자마다 다르겠지만) 3가지 주제로 항의를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렇다.

  첫째는 진정한 계속된 회개없이는 사제의 어떤 고해성사도 죄용서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95개 조항의 첫 번째부터 4번째 조항이다. 그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4:17), 그분은 신자들의 전 생애에서 회개가 지속되기를 원하셨다. 
제2항 이 ‘회개하라’는 말씀은 고해성사 곧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어지는 고백과 속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3항,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마음 속에서의 참회만 국한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참회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들을 죽이는 외적인 표지들을 낳지 않는다면 그 참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4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존재하는 한(즉 진정한 내적인 참회가 없는 한), 죄의 형벌은 [계속] 존재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죄의 형벌은]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 루터는 사람이 죄용서를 받는 것은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직접 하나님에게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고할 수 있으며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제직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만제사장설).

  그리고 둘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은 실제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요, 째는 교황이 가지고 있다는 사죄권(천국 열쇠) 합당한 것이 아니며, 돈을 받고 면죄부를 발하는 권한이 교황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 중 핵심적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5항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제6항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제10항 죽은 자에 대하여 연옥을 교회법적 형벌로 유지하려는 사제들의 행위는 무지하고 사악한 짓이다.
제22항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26항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 사죄를 허락할 수는 없다(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은 당치도 않다).
제27항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빠져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제28항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32항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36항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데, 이는 면죄부 없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제52항 면죄부로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 성지순례와 같은 고행, 성자 유품과 유물 숭배를 통한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나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루터는 중세 시대에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진정한 회개만이 죄용서를 받게 해 준다는 것을 찾아낸 놀라운 중세 신학자였던 것이다. 

 

6. 루터의 공헌에 맞물려 그가 가졌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루터의 모든 주장들은 다 들어맞는 것인가? 아니다. 그가 외쳤던 회개에 관한 부분과 연옥교리 및 교황 수위권에 있어서는 옳은 주장을 했지만 그가 주장한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의 실수 여기서부터 발견된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게 되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이후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것이 면류관이 되고 상급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우리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직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 의지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라고 했으며, 인간이 자유 의지를 사용한다면 구원을 얻는데 적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구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책임이 없다면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다 정해 놓고 하는 일을 가지고 말이다. 또한 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명하셨겠는가? 왜 우리의 시인과 부인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며 말했겠는가? 그리고 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님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셨겠는가?(마5:39~40) 그렇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반응함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나아오고 결단을 할 수 있는 의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했다(마12:18~21).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꺾여지고 말 것이며, 우리의 심지는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꺾여진 갈대라도 다시 바로 세워지고,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타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 의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천국에서 상급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믿었으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천국을 위해 살고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도 있고 주님 보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 교회와 싸우느라고 미 이런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죄용서받는 것이 회개라는 것까지만 생각했던 것이다. 회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상황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지 아니했을까...

  둘째, 위와 맞물려서 또 한가지는 신약 성경 중에서 믿음으로서의 행위 곧 회개의 열매로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나 유다서를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는 사실 성경을 잘 이해한 것이다. 그는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한 책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에 어긋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했으며, 이는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야보고서 강해 서문에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쓴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이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한 의가 어떻게 믿는 이들에게 전가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인생의 결말에 갔을 때에 자신을 되돌아보건 믿음에 따른 행위가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각도가 다르다. 그리고 그는 야고보서가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 무려 21가지가 거의 인용다시피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심판주(5:9), 재림주(5:8), 생명의 면류관의 수여자(1:12), 치유자(5:14~15)로서 묘사하고 있으며, 비록 자신이 예수님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이 자신은 종이라고 칭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한 것이 무려 10번 이상이나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그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놀라운 발견 곧 회개의 중요성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잃어버렸으며, 결국에는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절대예정와 절대작정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는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배턴을 그만 넘겨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회개의 중요성을 외쳤어야 했다. 그리고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잘못된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원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쉽게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줌으로서 결국 올바른 구원관의 퇴보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주에 한 번 더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루터가 중세의 500년간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정말 기뻐 춤을 추어야 한다. 비록 그가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연옥의 실상에 대해서 분명한 관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이 땅에서 수고하는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 주었다. 또한 참회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현재 살고 있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가 되었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는 것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상관없이 죄용서가 일어난다는 것도 밝히 드러내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는 사람이 죄용서받는 것까지는 잘 말했으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무시해 버렸고 그것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회개만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죄용서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사탄에게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사수해야 할 진리는 바로 진정한 회개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며, 이 땅에서도 벌을 면죄해 준다는 사실이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래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알려 주신 회개 이후의 삶에 관한 말씀들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회개되어진 자유 의지로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는 날,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 얻고 보좌 자리를 차지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 가까이에 서서 주님께 찬양하고 감격하며 예배할 그날을 위하여... 

 

2022년 07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5)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26) 세례요한의 회개관(마3:1~12)_2020-09-22(화)

https://youtu.be/7lQ_xIQ1IaY  [혹은 https://tv.naver.com/v/15894405  ]

 

 

1.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인가요?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제사장이요(눅1:5,24~25) 또한 선지자인 사람입니다(마11:9). 예수께서는 그를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언급하심으로써(마11:14,말4:5~6)), 그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서(요1:23,사40:3) 그는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으며, 이 땅에서 그 일을 성실히 수행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구약 곧 율법과 선지자의 최종 주자로서 메시야를 이 땅에 공개적으로 소개한 자였기에 그는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임에 는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이었기에, 인류의 대표자의 자격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시킨 장본인이 될 수 있었으니(요1:29),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그는 안수식을 통해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서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마3:15). 

 

2.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첫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기 직전에 메시야의 오길 길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외쳤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너희은 [계속해서] 회개하고 있어라. 왜냐하면 하늘들의 왕국이 이미 가까이 온 채 있기 때문이니라(마3:2직역)"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하기 전에, 먼저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이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첫 번째 특징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구원을 위해서 회개를 말해야 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구원은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므로, 세례요한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라고 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3.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두 번째 특징은 회개는 아름다운 열매들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마3:8). 다시 말해, 자기가 회개했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거나 아직도 없다면, 그는 회개를 안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진실로 회개했다고 한다면 그에게서 회개했다고 하는 하는 것에 맞게 열매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로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벌써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도 자기에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거나 없었다면 그는 회개를 안 했던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특별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아름다운(선한, 칼로스) 열매"라고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선한 열매로서 하나님의 본성이 그에게서 나타나서 맺어지는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내가 회개했다고 하는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진실로 자신은 회개했는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될 수 없지만, 그러한 열매들은 내가 진정 회개한 자인지를 알려주는 척도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세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특징은 그는 회개는 지금해야 한다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회개의 긴박성을 강력하게 호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3:10에 보니,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모든 나무가 찍혀지게 되고 불속으로 던져지게 된다고 했는데, 그 시간이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헬라어원문으로 마3:10을 직역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를 향하여 놓여있느니라.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만들고 있지 않는 모든 나무는 [지금] 찍혀지고 있느니라. 그리고 불 속으로 [지금] 던져지고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지금 찍혀지고 있으며, 불 속에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뤄질 미래적인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있을 일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는 예수께서 타작마장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장차] 들일 것이고, 쭉정이는 모아서 꺼지지 않는 불에 [장차] 태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타작마장을 정리하는 일은 주님의 재림시에 있을 우주적인 청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모든 사람은 지금 죽는다면 즉시 그는 0.1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곧바로 천국와 지옥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에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아니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5.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결국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회개"야말로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진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죽기전에, 아니면 신앙이 좋아지면 그때 가서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겠다면서, 회개하는 일을 뒤로 미뤄서는 절대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일이 있으면 당장 회개해야지,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알아서 나를 회개시킬 것이니까 지금은 문제가 없어"라고 하면서 회개를 뒤로 미뤄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회개할 시간은 항상 현재인 것이지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20년 09월 22일(화)

정병진목사

자신이 진정 회개한 자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눈물콧물 흘린 경험이 있다면 그는 진정 회개한 자일까?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그가 회개한 자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가 진정 회개한 자라면 자신이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어 진정한 통곡을 할른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게 되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눅23장 39~43절에서는 진정한 회개를 한 사람은 대체 누군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가 회개한 자로서 증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2019-07-28(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한 자의 마지막 증표는 무엇인가?(눅23:39~43)
https://youtu.be/Mo4fszW_Mh0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은혜받기를 원하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고(딤전2:4),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벧후3:9).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은혜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이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그 책임은 결코 하나님에게 있지는 않다. 바로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행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서 모든 인류는 다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교리나 상식 가운데 구원론의 문제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부분은 성경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지난 시간에, "회개없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틀렸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예수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자백함으로 용서받기 때문이다(요일1:9). 뿐만 아니라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붙잡고 있으면 복이 되지 못하고 저주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그것은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가 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귀가 시키는 말을 하며, 마귀가 하는 말대로 행동하면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바로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과연 어떻게 회개하는 것이 진짜 회개하는 것이며, 회개의 최종적인 증표는 과연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강도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두 명의 강도들은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같이 못박히게 되었나?

 눅23:39~43에는 누가복음의 회개씨리즈 가운데 하나인 "한 편(아마도 오른편) 행악자(강도)의 회개"에 관한 말씀이 기록된 본문이다. 그런데 이 행악자는 방화와 약탈, 폭력과 살인을 저질러 로마의 형법에 따라 사형언도를 받은 자로서, 그때 그시간 예수님의 한 편에 못박혀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 편에도 또 한 명의 행악자가 못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 둘이 예수님을 가운데 놓고 예수님과 혹은 자기네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이러한 대화를 듣고서 성경에 기록해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행악자들에게 일어난 구원과 멸망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영적인 진리들을 던져준다. 그런데 이 두 행악자는 헬라어원문에 보면, "범법자"들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강도"다. 이들은 헬라어로 "레스테스"라는 사람들인데, 겉으로는 "강도, 약탈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혁명가"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 고로, 이 둘은 진짜 강도가 아니라, 혁명군으로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쳐 있는 열심당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들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은 자로서 범법자가 되어서, 가장 잔인한 형벌을 그때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 편에 강도들이 함께 못박히게 된 것은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따라, 장차 고난받는 메시야는 범죄자들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에 대한 성취였다(사53:12).

 

3. 오른편 강도는 어떻게 되어서 그날 낙원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가?

  시작은 왼편(?) 강도가 먼저 시작했다. 자신의 죽음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네가 진짜 구원자라고 한다면, 너도 한 번 구원해 보시고 우리도 한 번 구원해 보시지?"라고 말이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강도가 구짖으며 말했다. "우리들은 우리가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합당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이분은 그 어떤 부당한 것도 행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는 정중하게 예수님께 말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4. 회개란 무엇인가?

  우리는 오른편 강도의 이 두 마디의 말을 통해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회개란 사실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셋째,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넷째,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는 그 당일날 죽임을 당했기에, 죄를 멀리할 기회는 없었다. 다만 앞의 세 단계의 회개를 한 것이다. 첫째, 그는 자신은 사형언도를 받기에 합당한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으며 그리고 죄를 시인했다. 하지만 다른 편의 강도는 자신이 사형집행이 매우 억울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 오른편 강도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분에게 죽은 후에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다. 그런데 오른편 강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더러 "이분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람은 오른편 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비로소 그 시간에 회개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오른편 강도는 그날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때까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쭉 지켜보지 못했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른편 강도는 사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일해온 자였다. 그는 열심당원이 되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고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그가 해온 것은 약탈과 방화와 살인 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들은 율법에 의하면,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었다. 범죄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한 행위를 할 때마다 많이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어떤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예수님이었다. 그분도 역시 자신과 똑같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로마에 항거하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분의 주장은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병들고 신음하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그분이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이 진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진짜인 것을 소개해주었다. 결국 오른편 강도는 이미 길을 잘못 들었지만 자신의 행위는 결코 바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 바른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강도는 공교롭게도 그날 예수님 곁에 자신도 같이 못박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는 평소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을 그대로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렇게 선포하셨던 천국에 자신도 들어가기를 바랬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다. 그러자 주님은 진짜 회개하는 강도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그에게 그날 낙원에 자신과 함께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 고로 이 강도는 진짜 회개를 한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가 그날 죽지 않았다면 두번 다시 약탈과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회개는 죄가 죄인지도 모른채 열심히 죄를 짓다가 죽을 무렵에 딱 회개하고 죽을 수 있는 그렇나 성질의 것이 아니다. 평소 때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깨우침을 받고 있어야 하며,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있어야 하며,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회개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5. 오른편 강도의 회개가 알려주는 놀라운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오른편 강도의 회개를 통해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비밀들을 깨닫게 된다.

  첫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이 강도는 로마의 사형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단지 사람만 죽인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어도 이 사람은 그날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잘못과 범죄를 했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 진실로 회개한 자는 자신에게 그 어떤 선한 행위가 없어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강도처럼 죽지는 않는다. 회개하고 그날 죽을 사람은 많지 않다. 더 많은 날들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도 회개하지만 하면 선한 행위들을 행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 강도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셋째, 사람이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회개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죄문제를 다 해결해야 한다.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강도는 회개하고 곧바로 죽었다. 고로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회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므로 홀연히 자기자신 앞에 죽음이 찾아오거들랑 그때는 회개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넷째, 회개한 자의 마지막 증표가 천국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람이 진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면 그때에 강하게 다가오는 것은 천국에 대한 믿음이 강력하게 다가온다. 천국이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자신이 진정 회개한 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려면 자기에게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해보면 된다. 지금 죽는다면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이 서지를 않는다면 그는 사실 회개를 하지 않은 자이거나 회개를 덜 한 자이다. 그때에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기도하라. 나에게 회개할 마음을 부어주시라고,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에 대한 강한 확신을 달라고 말이다.

 

6. 죽기 전에 회개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람이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려 할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한 가지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가기 위해 귀신들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아담의 범죄이후 모든 사람들은 사탄마귀의 소유였는데, 그가 예수를 믿게 됨으로 그를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제 그가 죽기 전이나마 마지막으로 그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 귀신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귀신들이 그의 영혼에 잘못된 교리를 심어 거짓된 구원을 확신시켜주고, 세상 근심 걱정을 더 강력히 하게 하여, 죄사함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앞에 어느날 죽음이 찾아올 때에는 반드시 귀신들도 자신의 영혼을 지옥에 끌어가려고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생각나는 모든 죄를 다 회개하기를 바란다. 특히 남을 용서하지 못한 죄, 미워하고 있는 죄를 반드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속에 그러한 죄를 숨기고 있으면 그 죄 때문에 결국 자신의 영혼이 음부로 끌려내려갈 수 있음을 명심하라. 둘째,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가족에 대한 연민을 다 내려놓기 바란다. "내가 죽으면 내 회사는 어떻게 하나?", "내가 죽으면 내 자식들은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에 자신의 정신을 쏟지 말라. 그것은 살아 있을 때에 건강할 때에 해야 할 걱정이다. 지금 자신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른지 지옥에 들어가게 될른지를 결해야 하는 마당에 세상걱정, 자식걱정하다가는 회개할 시간을 놓쳐 그만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그때에는 다 내려놓고 죄를 회개하는 일에 집중하라. 그래야 죽기 전에 하늘에서 빛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회개가 진정한 회개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가 회개했다는 회개의 마지막 증표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이다. 만약 그에게 천국이 더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 회개한 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만약 진정 회개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라면, 그에게 있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은 아마도 희미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는 왜 천국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왜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는 아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있으면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값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려 하는지를 잘 모르는 자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모든 사람은 그분 앞에 꺼꾸러질 수밖에 없다. 전능한 창조주가 나같은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피조물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값어치 있게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 마음이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채워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바로 진정 회개한 자다. 그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른편 강도였던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7월 28일(주일)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