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33) 하나님이 재앙을 그치신 이유는 회개 때문인가 제사 때문인가?(삼하24:10~25)_2022-02-11(금)

https://youtu.be/fHvOSSbxsFQ  [혹은 https://tv.naver.com/v/25124033 ]

 

1. 하나님께서는 다윗 시대에 왜 이스라엘에게 전염병의 재앙을 내리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다윗 말기에 왜 이스라엘에게 전염병을 내리셨는가? 다윗이 한 나라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다윗의 범죄를 그의 백성에게 물린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전염병을 내리신 것인가? 모든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만, 사무엘하 24:1에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재앙을 내리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묻기 위해 재앙을 내리기 전에 다윗도 범죄에 가담하게 하심으로 다윗과 함께 그 죄를 물으셨다는 것이다. 이 때 다윗이 범죄한 것은 인구조사를 한 것이다(삼하24:10). 사실 왕이 인구조사를 시행한 것을 두고 범죄라고 규정하기도 쉽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출애굽 초기에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은 사실 큰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백성의 세금징수를 위하여, 그리고 전쟁이 났을 때에 참여할 군인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위하여, 아니면 기본적으로 현재 국방력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하여서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자신의 개인적인 범죄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작은 일에도 자신을 자책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2. 다윗이 인구조사의 죄를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징계를 내리신 것인가?

  다윗은 이때 자신이 인구조사를 시킨 것을 회개했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삼하24:10)"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을 철회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죄를 지었는가? 성경에 어떤 죄를 지었다고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추정해보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인 다윗을 대적하여 반역한 죄를 묻는 것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던 악한 자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했던 것이 유다지파였으며, 이어지는 세바의 반란 때에 다윗의 왕국을 대적했던 것이 북이스라엘 10개지파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는 회개는 받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에게 3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신다. 그러자 다윗은 7년(혹은 3년) 기근과 3달 전쟁, 3일 전염병(온역) 중에서 결국 하나님이 치시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전염병(온역)'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루 만에 7만 명이나 죽어나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보시고 전염병을 그치도록 천사에게 명령하신다. 그때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칼을 빼어들고 있는 여호와의 천사를 본 다윗은 곧바로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옷을 입고 엎드려 회개를 시작한다. 그때 다윗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올린다.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데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대상21:17)" 이는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게 벌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용서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모든 인류의 죄값은 자기에게 물으시고 온 인류의 죄는 용서해달라고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아보인다. 

 

3. 다윗의 회개로 인하여 이미 재앙이 그치기 시작되었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더러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라고 하셨는가?

  우리는 여기서 재앙이 그치게 된 것이 회개 때문인지 제사 때문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은 둘 다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 무엇이 먼저인가?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회개가 먼저이고 제사가 나중이다. 그럼 만약 둘 중의 하나만 행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말해, 만약에 회개는 했는데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래도 재앙이 그쳤을까? 반대로 만약에 제사는 드렸는데 회개는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대한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제사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세례를 받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죄사함을 받는 것이 먼저인가 하는 것과 비슷하다.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은 자가 세례를 받은 것이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사람이 지은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사람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제사만 드리면 어떻게 될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해서 죄를 용서받게 되는지부터 살펴보자.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깨달은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의 신분에 맞는 속죄제물을 하나님께서 바쳐서서 제사드림으로 죄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레4장).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 백성의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1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집도하는 '대속죄일'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다(레16장).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으로 죄를 지었을 때에는 개인적으로 속죄제사를 드리면 되었다. 그리고 1년에 한 차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대속죄일 제사에도 참여하였다. 그런데 어떤 약삭 빠른 사람은 이런 생각도 한다. 대속죄일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1년동안 지은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다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야하는 개인적인 속죄제사는 굳이 다 행할 필요가 없고, 오직 대속죄일 제사에만 잘 참석해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만약 개인적인 속죄제사는 드리지 않고, 민족 공동체가 한꺼번에 드리는 대속죄일 제사만 참여하면 그 사람이 지은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속죄일 제사 때에 용서받는 온 백성의 죄는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 '허물'의 죄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히9:7). 여기서 '허물'이랴는 것은 '에그노에마'라는 단어로서로, "무지해서 지은 죄, 몰라서 지은 죄"를 뜻한다. 그렇다. 어떤 사람이 대속죄일에 제사를 드릴 때에 자신이 지은 죄와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평소 때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개인적으로 제사를 드려왔던 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빠뜨리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을 때에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바로 대속죄일 제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비록 십자가에서 공개적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을지라도, 개인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있는 자가 결국 나머지 죄들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의 개인적인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서 십자가 사건만을 믿는다고 하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 구약적인 복과 신약적인 복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복은 크게 보면 2가지다. 하나는 구약적인 복으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의 것으로 복을 받은 경우다. 대표적인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다. 아브라함이 우상숭배를 끊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2가지 복을 약속하셨다.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하셨고,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다. 즉 이 땅의 복으로서, 물질적으로 받는 축복과 자손번성으로 받는 축복이 구약의 2대축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는 신약적인 복도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바울도 언급한 것이다. 이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서 저 셋째 하늘에 있는 천국에 들어가서 그의 나라를 기업으로 차지하는 복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은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물질적인 축복이 아니다. 저 천국에 들어가서 영이 받게 될 축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도 영적인 축복을 받지 못했는가? 그건 아니다. 실제 천국에 들어가보면 24장로들 중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과 유다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구약의 백성들도 하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신약의 복에는 저 천국에 들어가서 그의 나라를 기업으로 차지하는 영적인 복 뿐만 아니라 땅의 기름진 복도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살고, 물질도 풍성해지고, 자녀가 형통함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3가지 축복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극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의 핵심은 역시 그가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영적인 복을 받아 천국에 들어갔는지를 일부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꾸로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서 이 땅에서의 축복을 받아 재앙의 문제를 해결받았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02월 11일(금)

정병진목사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로 구원을 받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를 믿고 있다면, 회개하지 않아도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용서되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분명한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믿은 후에 지은 죄들에 관하여는 반드시 자백할 때에 용서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요일1:9).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는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처리되었다고 믿고 있다. 진짜 그러한가? 이천년전에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이미 내 죄를 다 용서한 것인가? 여기 그 해답이 있다.

2020-08-02(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12) 영원한 속죄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히9:11~12)
https://youtu.be/6UAf16xWwKM [혹은 https://tv.naver.com/v/15090226 ]

 

 

1. 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수께서는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날 있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원한 속죄"라고 언급하였다(히9:12).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영원한 속죄"란 의미는 대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에게 미친 효과는 대체 어떤 것인가? 단순한 한 사람의 죽음이었는가 아니면 더 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어떤 이들은 그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두고서, 그 사건은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다 해결한 일이었으니 자신은 더이상 죄의 문제로 신경 쓸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옳은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모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실상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 스스로 죄를 지을 수 있는 나이가 찼다면 그는 반드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죄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받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는 단순히 죄의 문제만을 해결했다고해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장차 구원받은 자가 들어가게 될 천국은 죄용서를 받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또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면 그 사람은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명은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믿을 때에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얻게 된다. 그러면 그 순간에 저 천국에 있는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이 된다. 그러면 그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결국 한 마디로 사람이 구원얻으려면 죄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3. 인류의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그렇다면 인류의 죄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먼저 히브리서 기자는 "피흘림없이 었다면 죄용서는 없다"(히9:22)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사람이 죄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아무나 피흘려서도 되지 아니 한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값으로 죽을 몸이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이 지은 죄값은 곧 사망인데(롬6:23), 죄인이 죽는 것은 자신의 죄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없이 대속의 죽음을 죽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담의 죄의 유전을 받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죄없는 분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할 수 있는 대속제물이시다. 

 

4. 구약시대에 속죄제사는 어떻게 드려졌는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레위기 16장에 속죄일제사법에 나온다. 속죄일 제사 때에는 흠없는 두 마리의 속죄제물이 드려졌다. 그때 백성의 대표인 장로들은 그 속죄제물에 안수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넘겼다. 그리고 난 후에 한 마리의 양은 대제사장이 성막에서 죽여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안수후에 무인지경에 내다버림으로 속죄제사를 드렸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그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속죄일제사를 성취하는 것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첫째, 속죄제물로서 예수님은 합당해야 하는데 그것은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태어나셨으므로 조건에 부합한 것이었다. 둘째, 안수를 통해 온 인류의 죄를 전가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랬다. 마11;11에 보면, 여자가 낳은 자가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인류의 대표자가 될 수 있는 자였다. 사실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으며, 자신도 또한 제사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름받은 선지자이기도 했다(마11:9). 그는 사실 구약의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였던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세례요한까지였기 때문이다(마11:13).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전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분이 바로 지금 여기 계십니다. 바로 이 분이십니다." 결국 여자가 낳은 자 중에 대표자로서 그리고 제사장과 마지막 선지자로서 그는 예수님에게 인류의 죄를 전가할 수 있었다. 어떻게 전가했는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 그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인류의 죄를 전가했다(마3:16). 그래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세례요한의 안수로 인하여 인류의 죄를 전가받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요1:29).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큰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왜 그런가? 그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인류의 대표자인 세례요한으로부터 인류의 죄를 전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그는 두 마리의 속죄제물로서 하나는 성전에서 피흘려 죽어야 하고 또 하나는 무인지경에서 버림받은 양으로 죽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이 땅에 장막을 치러 오신 분이시다(요1:14). 다시 말해 당시 그분의 육체 곧 몸이 하나님의 성막이자 성전이셨다(요2:19~21).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셨던 골고다는 당시 성문밖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때 온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으시고 골고다에서 죽으신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구속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고, 인류의 죄를 한꺼번에 속량하기 위한 속죄제사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랬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속죄제물이 되심과 동시에 성막이 되셔서 성막에서 그날 돌아가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날 스스로 자기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집례하셨다. 고로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에의 죽음은 인류의 속죄를 모든 율법과 예언의 성취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5.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한편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2가지를 내포하는 것이다. 첫째는 그분은 누구로 믿느냐 하는 것이요, 둘째는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느냐 하는 것이다. 먼저, 첫째로 우리는 그분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죄를 없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 곧 구원자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마16:16). 그리고 둘째로 그분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것이 곧 믿음의 두번째 방면이다. 좀전에도 살펴보았지만 그분의 죽음이야말로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은 단순어떤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분과 죽음을 믿을 때에 우리의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은 믿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속죄의 죽음이었을 믿지 못한다면 그러한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바로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죽음이 곧 나의 죄를 대속하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음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6. 예수님을 믿었으면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의 보혈의 피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믿은 자가 곧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고 있다면 그는 지금 다른 복음이자 거짓된 복음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도 않고, 그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있다면 그는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런 자는 결국 구원을 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7.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가?

  그런데 오늘날에 자신은 믿는 성도라고 하는 이들 중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과연 이것은 옳은 믿음인가? 아니다. 우선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피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와 죽음이 모든 인류가 감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즉 자신은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 중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다면 어떤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자신의 죄를 다 용서받았기에 자신의 구원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예수님을 믿었으니 이제는 더이상 회개생활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는 믿은 잘못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런에 이렇게 생각하는 자의 특징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어도 그러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다. 예수께서 골로다에서 흘리신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하고도 남음이 있는 충분한 효능을 가진 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을 과거에 믿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미래의 죄가 다 용서받았닥도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그리고 죄를 짓고도 회개를 게을리하고 있다면, 이사람은 대단히 지금 살얼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은 죄들은 오직 우리가 그러한 죄를 지었다고 자백함으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사도요한이 분명하게 언급했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느니 큰 죄들만 범하지 않으면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한편 자신이 어렸을 때에 지은 죄들 가운데 미처 고백하지 못해서 남아있는 몇몇의 죄들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옥에 보내시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한 편 강도의 회개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한 편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임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분이 가시는 왕국에 가실 때에는 자신을 좀 기억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믿고 회개하는 자들을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회개 때문에 그는 그날 죽기 전에 예수님과 더불어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낙원이 지금에는 이미 천국이 되었으니 그는 천국에 들어간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회개를 찬찬히 들여다보라. 그가 과거에 지었던 죄를 낱낱이 회개하고 죽었는지를 말이다. 아니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자신의 죄값에 의한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했다. 하지만 그가 어릴 적부터 지었던 모든 죄를 다 고백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 자신이 철저히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믿을 때에 지난 날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다 낱낱이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어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믿기 전에 지었던 죄 특히 우상숭배의 죄는 입술로 다시 자백할 때에라야 그 죄로 인한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8. 예수의 피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는 것을 두고서, 예수의 피로 인하여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굳이 연결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는 이유를 보면, 자신의 지은 죄를 다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는, 첫째, 예수의 속죄의 제사가 다른 제사나 제물이 더이상 필요없는 완전한 제사였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어야 한다. 그렇다. 그분의 피는 모든 죄를 다 용서하기에 충분하고 완전하다. 그리고 더이상 다른 피를 요구할 필요도 없다. 그분의 피로서만이 모든 인류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금도 항상 살아서 대제사장으로 사역하심으로 우리가 자백한 죄들을 다 용서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편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한 번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분의 영원한 속죄의 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죄는 다 용서받았다고 믿으려 한다. 이는 그 저변에 자신은 혹 죄를 지을지라도 그것에 상관없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우리가 예수믿기 전에 지었던 죄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진정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용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분배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난 후에 그날 바로 죽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다. 또 다시 죄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럼, 그때 지은 죄는 가만 두어도 되는가? 아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죄를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과거에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 때에 지금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죄는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죽는 그 날까지 회개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죄를 안 짓고 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좋겠다고 판단된다. 그때부터는 지은 죄를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어떤 죄들이라도 자백하기만 하면 2천년에 골고다 언덕에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다 용서될 것이다(요일1:9). 그분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8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Who's 갈렙

  다윗의 쓴 시편 중에서 회개와 관련된 시편이 무엇인지 혹 당신은 알고 있는가? 다윗의 회개 시편은 시편 6편과 32편과 51편이 그것들 중의 대표적인 시편이다. 그런데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하나님께 제사와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만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제사와 예물을 드려 용서를 받아야지, 왜 그는 제사와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말인가? 다윗이 왕노릇을 하다보니 율법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지만 그가 말했던 말씀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다윗의 선언에서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도 처음에는 잘 몰랐던 것이었는데, 회개하고 난 뒤에 비로소 알게 된 비밀이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용서와 관한 놀라운 비밀이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이 범죄한 후에 취한 행동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되어서 죄를 용서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제사와 번제를 기쁘게 받으시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다윗은 일 평생에 두 번 큰 범죄를 저질렀다. 하나는 삼하 11장에 나오는 범죄로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죽인 일이다. 또 하나는 삼하 24장에 나오는 것으로서,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왕국에 싸움에 나갈 만한 군사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계수한 일이다. 오늘은 이 두 번의 사건 중에서 앞의 사건인 간음과 살인사건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우선 삼하 11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윗의 범죄는 2가지다. 하나는 밧세바를 범한 일이며, 또 하나는 그녀의 남편 우리아장군을 죽인 일이다. 고로 율법상 다윗은 제7계명(간음하지 말라)을 어긴 것이며, 제6계명(살인하지 말라)는 어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의 아내에 대한 탐심을 품었으니 제10계명도 어긴 셈이 된다.

  그렇다면 율법에서 말하는 다윗의 범죄는 어떻게 처리되어야 마땅하는가? 우선 다윗이 저지른 간음죄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보면, 그는 사형 이외에 다른 처리방법이 없다. 돌로 쳐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20:10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요, 다윗의 저지른 살인죄에 대해서는 율법규정 레24:17~21을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살인죄도 사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으로 탐심을 품었던 죄는 율법에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 것일까? 탐심을 가진 대상에 따라 처벌의 수위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때는 속죄제사를 드리고 강제로 빼앗은 것에 1/5에서 5배정도 배상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다(출22:1, 민6:5~10, 레5:14~6:7). 그래서 우선 탐심죄에 대한 처벌로서 다윗은 4배의 고통을 받았다.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죄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 4명(밧세바가 난 첫 번째아들, 자신의 장자 암논, 셋째아들 압살롬, 넷째아들 아도니아)를 잃었으며,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장수 4명(아사헬, 아브넬, 아마사, 요압)도 아울러 잃었다.

  그렇다면, 그가 지었던 간음죄와 살인죄는 어떻게 처리되는 것일까? 놀랍게도 율법규정에 의하면, 다윗이 지은 범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다윗이 저질렀던 간음죄와 살인죄에 대해서, 율법은 다만 사형만을 언도할 뿐이다. 다만 한 가지 예외는 있기는 하다. 그것은 간음죄를 저질렀든지 아니면 살인죄를 저질렀든지, 만약 자신의 행위가 고의가 아니라 실수 혹은 부주의로 인한 것이라면, 속죄제를 드림으로 용서받을 수가 있기는 하다(레4:2,13,22,27). 하지만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는 둘 다 고의적인 죄들로서 돌이킬 수 없는 죄들이었다. 어느날 다윗은 옥상에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어떤 여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녀는 우리아 장수의 부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녀를 데려다가 동침하였으며, 우리아 장군도 요압장군에게 기별하여 적이 있는 최고 전방에 배치하여 죽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저지른 간음죄와 살인죄는 이 세상에 있는 방법으로, 아니 율법의 규정하는 법으로는 도저히 용서받을 방법이 없었다. 한편 다윗도 자신이 범한 죄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 죄들은 더이상 용서받을 수 없을 뿐더러 그 값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범한 죄를 비유로 말했던 나단선지자더러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삼하12:6)"고 확고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윗이 자신을 질책하는 나단선지자의 말을 듣더니, 즉시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토설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죄를 짓게 되었는지 변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시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눈물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였다(시6:6). 또한 죄를 지적하는 나단선지자를 죽여 없애버릴 수도 있었음에도 그는 나단선지자를 해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때 하나님께서 나단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그랬다. 율법의 규정만을 놓고 따졌을 때에 그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었다. 하지만 다윗은 용서을 받았고 죽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가 낮은 자세로 회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은 율법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규정이 율법에는 없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위해서 제사나 번제를 드리기에 앞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희생제물로 주께 드리는 것이었다(시51:17). 다윗은 그것을 체험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시편51편에서 하나님께 제사와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먼저 지은 죄에 대해서 부서진 심령과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드리지 않고서는 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이미 회개가 전제되지 않고 통회가 수반되지 아니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번제를 드린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회개의 제물은 다른 어떤 것을 드리지 않아도 그것 자체로 죄용서를 받게 해주는 가장 중요하고도 먼저 드려야 할 희생제물인 것을 다윗이 비로소 회개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제사와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먼저 회개의 제물을 드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때에 속죄제사나 번제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산상수훈에 의하면, 마음으로 간음한 자는 간음한 것이요, 마음으로 분노하거나 욕을 한 자는 이미 살인한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5:27~28, 5:21~22, 요일3:15).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라도 간음죄와 살인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회개를 통하지 않고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있다.

  당신의 삶은 지금 어떠한가? 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수소를 주님 앞에 드리며 스스로 기뻐하고 있지 아니 한가? 회개하지 않고서 주님 앞에 예배하고 있거나 주님께 봉사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먼저 회개해야 한다. 먼저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제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수소를 바치든지, 봉사를 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해야 한다. 이것이 순서요, 이것이 바른 길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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