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한 번 얻은 구원이라도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성도는 회개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회개 중에서도 열매 맺는 회개를 못했을 경우 결국에는 버림받아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진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냥 흘려 듣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회개는 대체 어떻게 행하는 것인가? 여기 그 방법이 들어 있다.

 

2021-09-19(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마3:7~1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nqmA5XtOwXs  [혹은 https://tv.naver.com/v/22575596  ]

 

 

1. 들어가며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은 저마다 누구나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과 그 회개는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회개를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회개가 진정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는 회개가 됨으로 자신의 죄가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과연 내가 드린 회개 기도가 온전히 상달되어 그 죄들이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부분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놀라운 말씀 중의 하나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간에는 내가 드린 회개가 진정한 회개였는지를 알아보고 어떻게 하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 후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는 대체 무엇이며, 그러한 회개는 어떻게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동안 내가 왜 영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했으며 회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를 한다. 그렇다면 회개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되어 자신의 죄가 하늘의 행위책에서 지워지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에 관한 기본 상식과 그리 멀지는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회개는 3가지 측면의 회개 즉 깨닫고, 뉘우치고, 고치는 회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는 어떤 회개인가? 첫째로, 죄를 깨달아야 한다(지적인 측면)는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죄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회개도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을 찾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계명 법을 주셨고 더 크게는 구약 율법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죄를 안 채 기도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제공하는 '회개기도문'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죄에 대한 24가지 항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죄를 뉘우쳐야 한다(감정적인 측면)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을 애통해하는 것이다. 정말 자신이 잘못 되었다고 후회하는 것이다. 그 죄가 우리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은 죄를 정말 뼈아프게 생각했던 사람이 구약시대에 살았다. 그는 다윗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황소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상한 심령과 통회(깊이 뉘우치는)하는 마음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시51:17). 그러므로 죄를 회개할 때에 통곡의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정적인 측면에 좀 약한 분들이라고 하겠다. 셋째는 죄를 고쳐야 한다(의지적인 측면)는 것이다. 죄를 지었던 현장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하는 것이다. 두 번 다시 반복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했지만 다시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사람의 회개는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것이다. 임시 회개인 것이지 완전한 회개가 아닌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말씀도 바로 의지적인 측면의 회개다. 고로 오늘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란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이 세 번째 방면의 회개를 잘 모르는 자는 자기가 지금 회개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회개가 아직 덜된 상태에 놓여 있는지 모를 수 있다. 만약 그러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는 쭉정이라는 말을 듣고 바깥 어둔 데 내지는 불 못에 던져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를 위한 마지막 단계로서, 회개의 의지적인 측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는 가끔씩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문구에서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말은 '합당한'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언뜻 '타당한', 혹은 '적합한'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뜻이 아니다. '합당한'이라는 단어는 '악시우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는 동사 '악사'에서 온 단어다. 그 뜻은 '무게가 나가다. 무게를 가지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단어가 뒤에 소유격을 달고 오면 '악시우스'는 '~만큼의 동일한 무게를 가지다. ~에 상응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회개에 적합한 무게를 가지는 열매'라는 뜻이며, 그 말은 자신이 진정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 어떤 행동들 곧 그것에 상응하는 무게 있는 열매들을 가리킨다. 고로 진정 누군가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하고 있다면, 그는 누가 보더라도 눈에 보여지는 어떤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자기 남편에게 말을 건넸지만 남편이 자기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 어떤 아내들은 남편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궁시렁궁시렁거릴 수 있다. 남편이 되어 가지고 부탁 하나도 들어주지 않는다며, 핀잔을 하거나 험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말을 퍼붓던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설거지를 하면서 하나님께 회개를 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 사라는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 모시듯 섬겼다는데, 저는 제 남편을 제 자식처럼 부려 먹으려고 하였고 그렇게 안 해 준다고 무시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기도를 끝내면 그 사람의 회개 기도는 끝난 것인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드시 남편에게 다가가 "여보, 아침에 내 성질을 참지 못하고 궁시렁거렸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요 입이 방정이에요. 당신의 사정도 있을텐데 오직 내 생각만 했어요. 미안해요."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남편이 먼저 말하기를 "여보,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당신의 말을 그만 흘려 듣고 말았어요.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아무리 바빠도 당신의 말을 꼭 경청해서 듣겠소." 그러면 아내는 "아니에요. 제가 먼저 당신을 두고 험담을 했으니 사과할 사람은 바로 나이지요. 미안해요, 여보." 그리고 "사랑해"하고 달려들어 와락 안아 준다. 이것이 바로 진정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라는 것이다. 

 

4. 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왜 회개할 때에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까지 맺는 회개를 해야 하는가? 그냥 하나님께 말로 혹은 마음을 다해 회개 기도해도 아니 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회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가 덜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식으로 회개를 다 끝마쳐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열매가 없는 회개를 하게 되면 마귀가 우리의 죄의 약점을 알고 그 방면에 계속해서 죄를 짓게 만들어서 결국 마귀의 손아귀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심판대 앞에 우리가 섰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선고를 할 것인가? 그것은 "너는 쭉정이였느니라"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열매 없는 회개를 한 자는 결국 마귀의 손아귀에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십일조와 헌물(예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말3:8~9). 그런데 웬만한 그리스도인 치고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의 월급이나 보너스 정도는 십일조로 내고 살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들어오는 용돈들이 있다. 그럴 때에는 5천 원이나 만 원 정도를 십일조로 내야 하는데, 그것을 매번 십일조로 내자니 번거롭고 해서 모아서 내겠다고 했다가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달에 나가야 할 돈이 너무 많아서 십일조를 내지 못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며칠 후에 내야지 하고 있다가,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 제가 이번에 십일조를 떼어 먹었어요. 죄송해요"하고 회개 기도만 하면 그것으로 끝인가? 그러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죄를 용서받는 것인가? 아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회개하고 있는 장면을 하나님도 보고 계시지만 귀신들도 다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귀신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데 문제가 있다고 간파하고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을 만든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면 자신의 약점 때문에 사탄 마귀의 포로가 되어 계속해서 반복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열매가 뒤따르지 않는 회개를 하면 영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 반복적으로 죄만 짓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는 쭉정이가 되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든지 아니면 쭉정이를 불태울 꺼지지 않는 맹렬한 불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마3:12).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할 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국 자라지 못할 것이다. 계속 죄가 깨끗이 제거되지도 못한 채 반복적으로 죄를 짓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죄들로 인해 우리의 신앙은 결국 껍데기만 갖춘 신앙인 곧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그 약점에 따라 죄를 짓도록 계속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 알곡의 모양은 갖추긴 했지만 결국 그 속이 차지 못해 쭉정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죽는 날, 주님의 심판대에서 쭉정이라는 판정을 받고는 쭉정이를 불태울 맹렬한 불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정말 그 무시무시한 지옥에 던져지고 마는 것이다. 

  셋째, 열매 없는 회개를 하는 생활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주님 앞에 행한 일들마저도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 하나님께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에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럴지라도 그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행한 일들마저 제대로 상급으로 계산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의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린 헌신이 온전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린 모든 헌신들이 온전히 하나님께 열납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열심히는 살았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권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열매 맺는 회개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왕이면 천국에서 시녀 신부로 살기보다는 왕권 신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5.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회개할 때에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회개 곧 열매 맺는 회개를 할 수 있는가? 그 방법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2가지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첫째는, 열매 맺는 회개를 하려면 '즉시' 하라는 것이다(마3:7,10). 왜냐하면 뒤로 연기했다가는 회개할 기회마저 얻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 위에 놓여 있는 싯점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로 회개를 뒤에 가서 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고로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려면 지금 가서 사과하기를 바란다. 용서해 줄 사람이 있으면 지금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즉시 감사를 표현하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즉시 지금 가서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남을 도울 때에 없는 돈을 빌려다가 할 일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이 정도로 한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감당할 만한 수준에서 하면 된다. 남을 도와준다고 행한 것이 내 가정을 힘겹게 만들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인 회개는 사람에게만 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도하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면 지금 즉시 무릎을 꿇으라. 예배를 빼먹고 있었다면 즉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든지 오는 주일에 주일 예배에 참석하라. 혹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와 예물을 빼먹었다면 즉시 그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상 생활이 되지 않을 정도로 힘겹게 바치라는 말이 아니다. 떼어 먹은 것을 다 드리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서 주님 앞에 드리면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철저히 계산해서 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더 이상 십일조와 예물을 가지고 사탄이 나를 장난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것이 힘들더라도 죄의 무게에 상응하는 회개를 시행하라는 것이다. 지은 죄가 클수록 열매 맺는 회개를 하기란 더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유부남과 살고 있다고 치자. 상대가 원 가정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에게 집을 얻어 주고 매월 돈도 준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을 떠나 보낸다면 내가 살기가 막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유부남하고 살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것은 음행의 죄로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는 죄이기 때문이다(계21:8). 그런데 주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막9:43,45,47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렇다. 열매 맺는 회개를 실천하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져서 그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 아무리 열매 맺는 회개를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져서 숨도 제대로 한 번 쉬지 못한 채 영원의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귀신들이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수만 가지 고문을 주는 그 장소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지 아니한가? 고로 죄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죄를 청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가 무엇에 중독되어 있다거나, 물질에 묶여 있다거나, 사람에 묶여 있다면, 그곳에서 벗어나는 회개를 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신이 장차 그 영원한 지옥에 던져질 것을 생각하고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를 바란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6. 나오며

  우리가 열매를 맺는 회개를 실천한다는 것은 실로 힘겹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자기의 핸드폰도 정지시키고 기도원에 들어가 한 달이나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으실 분이 결코 아니시다. 회개를 한 후에 들이닥칠 물질의 문제를 두고서도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난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다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 그분이 진정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회개를 하려고 몸부림 치는 것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으실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청산하려는 그 의지를 볼 때에 한걸음으로 달려오실 분이시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에게 힘도 주시고 용기도 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실 분이시다. 그분을 믿으라. 그분은 전능자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동안 죄를 끊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죄를 끊어 내지 못했던 것일 뿐, 우리가 진정 죄를 끊어 내려고 결단하고 실행에 들어가면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능히 감당하시도록 도와주실 분이시다. 그렇다. 회개란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끝내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은 반드시 행위를 고쳐야 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죄를 계속 그냥 놔두게 되면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약점이 될 것이고 그것을 빌미로 사탄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우리는 반복적으로 죄만 짓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속이 차지 않은 곡식은 쭉정이가 되어 불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여! 이제라도 결단하라. 계속해서 사탄 마귀의 노예로 살다가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지 말라. 지금 힘들더라도 그 죄를 끊어냄으로서 주님이 도와주시는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라. 주님은 죄짓다가 회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럽혀진 채 있는 자를 거룩한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라. 죄를 회개하다가도 그것을 끝내지 못해 미완성된 채 그대로 죄를 남겨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열매 맺는 회개를 하라. 그것은 깨닫는 즉시 실천할 때 가장 잘 행할 수 있다.

 

2021년 09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5)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26) 세례요한의 회개관(마3:1~12)_2020-09-22(화)

https://youtu.be/7lQ_xIQ1IaY  [혹은 https://tv.naver.com/v/15894405  ]

 

 

1.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인가요?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제사장이요(눅1:5,24~25) 또한 선지자인 사람입니다(마11:9). 예수께서는 그를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언급하심으로써(마11:14,말4:5~6)), 그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서(요1:23,사40:3) 그는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으며, 이 땅에서 그 일을 성실히 수행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구약 곧 율법과 선지자의 최종 주자로서 메시야를 이 땅에 공개적으로 소개한 자였기에 그는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임에 는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이었기에, 인류의 대표자의 자격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시킨 장본인이 될 수 있었으니(요1:29),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그는 안수식을 통해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서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마3:15). 

 

2.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첫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기 직전에 메시야의 오길 길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외쳤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입니다. "너희은 [계속해서] 회개하고 있어라. 왜냐하면 하늘들의 왕국이 이미 가까이 온 채 있기 때문이니라(마3:2직역)"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포하기 전에, 먼저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이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첫 번째 특징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구원을 위해서 회개를 말해야 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구원은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므로, 세례요한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라고 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3.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두 번째 특징은 회개는 아름다운 열매들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마3:8). 다시 말해, 자기가 회개했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거나 아직도 없다면, 그는 회개를 안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진실로 회개했다고 한다면 그에게서 회개했다고 하는 하는 것에 맞게 열매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로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벌써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도 자기에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거나 없었다면 그는 회개를 안 했던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은 특별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아름다운(선한, 칼로스) 열매"라고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선한 열매로서 하나님의 본성이 그에게서 나타나서 맺어지는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내가 회개했다고 하는데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진실로 자신은 회개했는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될 수 없지만, 그러한 열매들은 내가 진정 회개한 자인지를 알려주는 척도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세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특징은 그는 회개는 지금해야 한다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회개의 긴박성을 강력하게 호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3:10에 보니,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모든 나무가 찍혀지게 되고 불속으로 던져지게 된다고 했는데, 그 시간이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헬라어원문으로 마3:10을 직역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를 향하여 놓여있느니라.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만들고 있지 않는 모든 나무는 [지금] 찍혀지고 있느니라. 그리고 불 속으로 [지금] 던져지고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지금 찍혀지고 있으며, 불 속에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뤄질 미래적인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있을 일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는 예수께서 타작마장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장차] 들일 것이고, 쭉정이는 모아서 꺼지지 않는 불에 [장차] 태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타작마장을 정리하는 일은 주님의 재림시에 있을 우주적인 청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모든 사람은 지금 죽는다면 즉시 그는 0.1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곧바로 천국와 지옥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에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아니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5. 세례요한의 회개관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결국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회개"야말로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진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죽기전에, 아니면 신앙이 좋아지면 그때 가서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겠다면서, 회개하는 일을 뒤로 미뤄서는 절대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일이 있으면 당장 회개해야지,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알아서 나를 회개시킬 것이니까 지금은 문제가 없어"라고 하면서 회개를 뒤로 미뤄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회개할 시간은 항상 현재인 것이지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20년 09월 22일(화)

정병진목사

1. 들어가며

  회개는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영역이다. 만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을 다 믿고 거기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가 회개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을 때에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회개인 것이다. 회개할 때에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풀려지기 시작하며, 회개해야 자신의 영혼도 죄와 죽음과 사탄마귀로부터 벗어나 천국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이어야 할까? 어떻게 회개해야만이 참된 회개를 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떻게 회개해야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회개인 것인가?


2. 회개의 과정과 회개의 결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참된 회개란 지정의가 수반되는 회개여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그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대답이다. 참된 회개란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지적인 영역), 두번째로는 통회 자복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정적인 영역), 마지막으로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의지적인 영역). 하지만 이것은 회개의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란 회개의 과정과 더불어서 회개에 합당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것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3:8)"라고 말했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행함이 수반되는 믿음(약3:14)"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정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참된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일까?


3. 회개는 꼭 지정의가 포함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었고 이삭이 따라갔으며 야곱을 변화시킨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식대로 믿어서는 되는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출3: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만났고 이삭이 따라갔으며 야곱을 변화시킨 바로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 사람이 기록된 창세기의 기록에서 자기자신의 잘못을 통회자복했다고 하는 곳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장면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음에 그들이 돌이킨 흔적들은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순간 다시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회개를 했는가?

  예를 들어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던 인물이다.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나중에는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보기까지 했다(창18장).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해 자신의 성질대로 처리하는 성급함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었더니 그 말씀이 내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성질대로 행할 때가 있었다. 약속한 아들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날에는 자기 아내의 말을 듣고 첩을 들여서 아들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이스마엘 탄생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음성마저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도 13년이 흘러갔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문득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육신을 따라 행했던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고추의 포피를 잘라내버리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할례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에게 아들을 주셨다. 그가 바로 '이삭'이다. 그런데 이삭이 장성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하지만 한 번 공과를 배웠던 아브라함은 두번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아들과 함께 제물잡을 칼과 나무를 가지고 3일길이나 떨어진 모리아산으로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기꺼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을 바치려고 칼을 들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급히 말리셨다. 그리고는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한 줄을 알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물어보자. 아브라함은 이때 과연 회개를 했는가? 혹시 육신을 따라 행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뉘우쳤던 것일까? 창세기를 자세히 읽어보라. 그래도 당신은 그가 통회자복했다는 장면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그 일 뒤로 두 번 다시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갔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그가 회개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5. 회개의 표준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다.

  그렇다. 회개라는 것이 지정의의 모든 영역에서 다 일어나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과정은 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반대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찬양집회가 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회개가 거짓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회개는 말짱도루묵의 회개다. 왜냐하면 찬양집회를 마치고 난 후 그들의 모습은 옛날과 똑같기 때문이다.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심지어는 남녀가 음행을 저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하지만 사실 회개는 회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뒤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란 회개의 과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나타난 여러가지 합당한 열매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없다면 그 사람의 회개는 더이상 회개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회개를 한다는 것은 회개자체를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느냐가 중요하다.  지은 죄를 죄로 인식하고 그 죄를 미워하며, 그 죄로부터 떠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라는 것은 입술로만이 아니라 죄 자체를 죄로 인식하고 그것을 미워하며, 그 죄로부터 떠나는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했다는 사람이 다시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 짓던 죄를 또 짓고 있다면, 그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참된 회개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6. 참된 회개에 대한 정의

  성경을 통틀어 참된 회개를 종합해보면, 회개란 인생의 목표가 바뀌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인생의 목표는 세상 것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이 귀중히 보시는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는 이 세상의 많은 소유물이 인생의 목표였고, 자신의 명예가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최대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친구가 더 소중했는데, 뒤바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아침 안개와 같이 허망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 세상의 명예나 인기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이 세상의 귀한 친구도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에 그는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 이 사람이 진정 회개한 사람인 것이다.

  이제 회개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다. 구약의 인물은 다윗이며 신약의 인물은 사도바울이다. 오늘은 사도바울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행9장의 싯점에서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전만 해도 그의 인생의 목표는 세상적인 성공이었다. 그것도 랍비로 성공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이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실행하였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으며, 나중에는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가두는데, 다른 지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자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른 지역까지 손을 뻗치려 했을 때에 그를 정지시키셨다. 하늘에 계신 한 분 하나님 다시 말해 부활승천하시어 보좌에 앉아계셨던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막으신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그때 그는 삼일동안이나 눈이 멀어 있었다. 그리고 삼일 후에야 비로소 눈을 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생의 목표가 바뀌어 있었다. 그전에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그가, 이제는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전하는데 인생의 목표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인생의 목표는 거의 동일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요, 세상의 명예와 인기를 가지는 것이며, 세상의 재물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갑자기 사람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기 시작한다. 영적인 눈이 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를 즐겁게 하고 육체를 위해 살던 것을 멈추고, 그후부터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살아가려 하는 것이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이 실패한 인생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바라보는 그곳에 자신의 시선을 맞추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제는 우리의 시야를 떠나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곳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고 싶지 아니한가? 그러면 당신도 이제 회개에 눈이 떠진 것이요 참된 회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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