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73)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체 어떤 신앙을 가졌는가?(행17:1~9)_2022-11-23(수)

https://youtu.be/YzIlWrpqihM  [혹은 https://tv.naver.com/v/31023246 ]

 

1. 데살로니가교회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데살로니가교회는 A.D.52년경 제2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교회 다음으로 개척했던 교회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로마 마게도냐 주의 수도였다. 인구는 20만 명의 대도시였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빌립보에 비해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회당이 있었다. 바울이 여기에 얼마나 거했는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데살로니가에서 밤낮으로 일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회당 설교를 하였다. 그 내용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언급한 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전했다. 그랬더니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이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중에는 야손도 들어 있었다.

 

2. 바울과 실라는 왜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는가?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가 복음 전함을 시기하여, 저잣거리의 불량배를 동원하고 군중을 선동하더니, 바울과 실라를 체포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매도하면서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정치범으로 잡아들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바울 일행은 그들이 머물고 있던 야손의 집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 소식을 들은 바울과 실라는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다. 

 

3.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에게 어떤 교회였는가?

  실제로 3주간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세워진 교회였지만 바울에게 데살로니가교회는 자신의 자랑의 면류관이었다. 그에게는 이 교회가 그만큼 사랑스러웠고 귀했다(살전2:19~20). 그건 그들이 짧은 기간 중에도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켜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 그리고 아덴에 도착했을 때에 디모데를 보내 이 교회의 사정을 파악한 후에 다음 기착지인 고린도에 도착한다. 그리고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교회의 소식을 들은 후에 그들을 격려하고자 또한 그들에게 몇 가지 다듬어져야 할 신앙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우리는 데살로니가전후서의 기록을 통해 이 교회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이 교회는 자신이 그동안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기꺼이 하나님을 참 신으로 섬기는 교회였다(살전1:9). 이방인들이 이렇게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기꺼이 자신의 신앙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었다. 둘째, 이 교회는 재림 신앙이 좋은 교회였다. 즉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만왕의 왕으로 믿었으며 그분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교회였다(살전1:10). 셋째, 이 교회는 환란을 잘 이겨내는 교회였다. 이들은 바울과 실라를 따라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 때문에 잡혀가고 어려움도 당했지만 그들은 환난을 잘 이겨내었다. 넷째,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교회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울과 실라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살전2:13). 

 

4.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어서 다듬어져야 할 신앙은 무엇이었는가?

  데살로니가교회는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굳은 신앙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부족한 점들이 있었으니 적어도 다음과 같은 4가지 것들이 있었다.

  첫째, 이들은 우상은 버렸지만 음란을 깨끗이 버리지 못했다(살전4:3~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대할 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색욕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하였다(살전4:3~6).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은 잘못된 재림 신앙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자들이 더러 있었다(살전4:11, 5:14, 살후3:11). 이들은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졌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게으른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살후3:6). 일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조용히 일하여 자기의 양식을 먹으라고 권면하였다(살후3:12). 

  셋째, 이들은 잘못된 부활 신앙으로 죽은 자들에 대하여 낙심하고 있었다(살전4:13~18). 이들은 주님의 재림 이전에 성도가 죽자 그들에게 소망이 끊어진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죽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 있다가 주님의 재림시에 같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재림시에 죽은 자들은 그때 먼저 일어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는 홀연히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넷째, 이들은 잘못된 은사 이해로 인하여 은사를 부정하거나 터부시하였다(살전5:19~21). 그러자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려고 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권면하였다. 

 

5. 바울은 주의 재림에 관하여 어떻게 바른 재림 신앙을 가지라고 권면했는가?

  바울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쉬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살전5:11~5, 살후2:1~12). 주님의 재림은 어느 날 갑자기 임할 것이지만 그날을 준비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주님의 재림은 도둑같이 그리고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올 것이지만 빛의 아들들에게는 그날이 도둑같이 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살전5:4). 그러므로 그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요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살후2:3~4). 그는 대적하는 자로서, 어느 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내세우게 될 것인데, 이러한 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결코 그날이 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권면했다. 

 

 

2022년 11월 23일(수)

정병진목사

 


  골1:24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는데, 과연 그분께서 감당하지 못하고 남겨두신 고난이 있다는 말인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그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자신의 육체 안에 채운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당시에 무엇을 채우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라어원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로 된 성경으로 보면, 똑같은 단어인데도 번역자에게 따라 약간의 상이한 번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바로 그러한 부분 중의 하나다. 먼저,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으로 말씀을 읽어보고, 헬라어원문에 따라 직역해보도록 하자.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개역개정]

골1:24 나는 지금 너희를 위하여 고난 가운데서 기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환난의 부족한 부분을 그의 몸을 위하여 내 육체 가운데 채운다. 그것은 교회다.[직역]

  그렇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사실상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두신 고난은 없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가 받을 고난을 다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담당하신 고난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고난이 한 부분이요,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낫게 하시기 위한 고난이 또 한 부분이다. 앞의 고난은 그분의 육체가 죽는 고난이요, 뒤의 고난은 그분의 육체가 상함으로 받는 고난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가 받은 고난의 영역이 2가지였던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질병을 없애기 위한 고난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의 죄를 없애주기 위한 고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없애기 위해 째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예수게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는 고난을 받으셨다.

  어느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고 하자,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다윗의 왕국을 세우실 날이 도래했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내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자신을 앉혀 달라고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한 부탁의 대표는 요한과 야고보 제자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이렇게 물었다(막10:38~40).

막10:38-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렇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고난의 잔을 가리키고, 죽음의 세례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면 그리스도가 당하실 고난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해야 할 고난이 그것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피조물의 형상인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 그래야 고난을 당할 수 있고 피흘려 죽으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고난을 다 당하셨음을 큰 소리로 외치셨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지불해야 할 질병의 값과 죄값을 다 지불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또 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들어가야 인류의 질병이 없어지고 인류의 죽음이 해결되는 그러한 고난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다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남겨두신 고난은 위에서 말하는 질병을 대신 담당하는 고난이 아니며, 죄값을 대신 담당하는 고난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받아야 할 환난을 가리킨다.

  먼저, 헬라어원문을 보자.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의 환란의 부족한 부분"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고난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할 환난인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환난'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바로 '들립시스'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온전케 하려 할 때 우리가 당하게 될 환난과 역경과 고뇌와 고통을 가리킨다. 이것이 없다면 교회는 사실상 교회가 세워지기가 어려우며,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온전케 되기가 어려울 것이.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행20:23~24).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들립시스)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이 환난은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은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들립시스)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렇다. 우리 인간들은 불완전하다.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된 본성을 자기 육체 안에 가진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환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환난은 징계라는 것도 들어가 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불완전한 교회이니까 그 교회가 거룩해지고 그리고 온전해지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환난이 거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이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롬5:3~4).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들립시스)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들립시스)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의 신앙이 정금같은 신앙,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신앙이 되기 위해서 환난은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요 필요한 요소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환난이 없다면 우리가 버림받은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소다. 그러므로 결국에 천국에 들어간 자들은 이러한 환난을 겪고 이겨낸 자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백성이 누구인지를 보라(계7:13~15).

계7:13-15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들립시스)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떠나시기 며칠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요16:33).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거나 신앙에 실패하도록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너진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고 신앙의 길을 올바르게 가도록 세워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 가운데서 닥치는 환난을 당할 때,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것 없이 우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가 어려우며, 깨끗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고난에 대해서도 조금 더 살펴보자. 조금전에 고난이란 질병값과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순교하는 자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급은 환난을 받는 성도들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그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롬8:17~18).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이러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작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난당하는 자를 놀랍게 보상해주신다. 그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는 것도 한 가지 대처 방법일 것이다.


  한편, 사탄이 주는 이러한 고난을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핍박'이요, '박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핍박과 박해를 만나면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에게 주어질 상이 매우 클 것이기 때문이다(마5:10~12).

마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렇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 이런 것들은 결코 좋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다 아픈 것이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정금같은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죄와 허물  투성이인 우리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올 때 이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말라. 이것은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하여 받는 환난이 있다면 그때에는 빨리 회개하라. 그리하여 그러한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탈출해 나오라. 혹 만약 그것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회개하라. 그리고 회개한 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환경과 질병을 꾸짖어버리라. 그리고 끝까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힘쓰라. 그리고 교회가 온전해질 때까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앞으로 전진하라.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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