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도들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가? 과연 믿음만 붙들고 있어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구원을 받아서 장차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오늘 야고보서 2장과 마주 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의 복음과는 색깔이 상당히 다르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설마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버리고 야고보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여기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2022-04-06(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3) 이웃사랑 계명 실천과 행함 없는 믿음의 허구와 실상(약2:1~26)_2022-04-06)수)

https://youtu.be/pRdwIFZJ_gw [혹은 https://tv.naver.com/v/26081592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총5장의 108구절로 이루어진 야고보가 쓴 서신이다. 야고보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A.D.49년 직전의 교회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이 저작이 A.D.45~49년의 기록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현재 신약 27권의 성경책 가운데에서 가장 빨리 기록된 성경책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은 내증에 따르면, 로마의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아마도 스데반의 죽음 이후 A.D.34년경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그런데 그때 당시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는 일부가 안디옥으로 건너가서 A.D.40년경 하나의 교회를 세웠으니 그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다. 그런데 이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교회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교회를 위해 바나바를 파송했고 바나나는 사울을 데려다가 같이 사역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다가 로마의 전 지역으로 흩어진 나머지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석하였고 거기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이러한 정황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때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2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며 또한 아주 잘못된 일도 행한 채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한 편으로는 그들을 위로하려고 이 편지를 썼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오늘은 그가 쓴 제 2장의 말씀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여러 정황들이 많이 포착된다. 대체 이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또한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들 중에서도 야고보는 이들을 향하여,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말해야 했는가? 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던 것인가?

 

2.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이때 야고보서라는 편지를 받고 있는 이들은 대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으며,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인가? 우선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야고보서 2장이 들려주는 정보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첫째, 매주일 유대인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2절). 둘째, 이들 중에는 가난한 자들도 있었고 부자들도 있었다(6절). 그런데 셋째, 이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8~11절).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 이웃사랑하기를 자기의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이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21절). 여기서 '우리'라 함은 야고보와 이 편지의 수신 대상이 다 유대인들이라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들이 유대인들인 것은 '회당'이라는 표현과 아울러 율법말씀의 인용하고 있고 그리고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인 '아브라함'과 여호수아에 나오는 '기생 라합'을 예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유대인인 것을 말해준다. 다섯째, 이들은 자유의 율법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있었다(15~16절). 여섯째, 이들은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었다(19절,1절). 이들은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3.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먼저,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2가지였다첫째로,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들은 종교적인 핍박도 같이 겪고 있었다(5절). 그럼 이러한 어려움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당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어려움을 끼치고 있는 자들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동족 유대인들이었으며 그리고 또 하나는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로마 황제로 추정이 된다. 그렇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동족에 의하여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가? 그리고 왜 로마 황제예배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먼저, 이들이 같은 동족의 유대인들로부터 겪고 있던 어려움부터 살펴보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도 역시 안식일이 되면 유대교 회당으로 나가서 기도를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그때 유대인들로부터 잘못된 것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바로 회당에 손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들어오는 부자들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남루한 옷을 입고 들어오는 가난한 자들은 외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의 수신자들도 역시 이것을 고스란히 배워서 그대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야고보는 유대인 부자들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부자들은 첫째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자들이라고 말했다(6절). 그리고 둘째로, 부자들은 사실 이 편지의 수신자를 압제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6절). 그리고 셋째로, 부자들은 오히려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가서 세우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배 모임 중에 유대인으로서 부자들이 왔을 때에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가난한 자가 들어왔을 때에는 저기 서 있든지 아니면 자기들의 발판 아라에 있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죄라고 지적한다(3절). 

  더욱이 이때는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는 때였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는가? 야고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A.D.45~49)는 로마의 제4대 황제인 글라우디오(Claudius, 재위A.D.41~54)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사도행전에 등장하고 있는 '글라우디오'를 가리키며, 바울이 항소하려 했던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황제 때에 중요한 3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는 이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에 천하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헹11:28). 그래서 민심이 흉흉해진 것이다. 둘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는 것이다(행18:2).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타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때 로마인이었던 브리스길라도 자신의 남편이자 유대인이었던 아굴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고린도로 이주하여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방령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불안한 마음을 더 갖게 만들었다. 셋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자신의 조부인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조모를 신으로 예배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석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어서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산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더욱더 가난한 자들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들도 위태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로마인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인 유대인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며, 로마인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아물러 신앙(종교)생활의 어려움도 같이 겪어야 했던 것이다. 

 

4.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가 행한 책망과 충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들을 향하여 첫째로, 그들이 자기의 동족인데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그들을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율법말씀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그 율법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부자가 있었지만 이들은 역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특히 영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교회의 성도들을 엄히 책망하였다. 이들은 그때 영광의 주님으로 하늘에 계시지만 한 때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낮고 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마굿간에 태어나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아파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는데, 지금 영광의 주님을 믿는 수신자들은 가난한 자를 더욱 더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그들에게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준수하라고 권고한다(8절). 왜냐하면 다른 율법 말씀은 잘 지키고 있어도 이웃사랑 계명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라이기 때문이다(8~9절). 그러므로 야보고는 그들을 향해 엄하게 충고한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동도 하라는 것이다(12절). 다시 말해, 자유케 하는 율법 곧 복음은 성도들에게 어떤 의무를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말씀을 들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3절). 그렇다. 우리가 충분히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지 않고 끝내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한다면, 마지막 날 심판대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지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라며, 긍휼을 베풀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5.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가?

  이어 야고보는 자신의 형제들이 궁핍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은 자기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15~16절).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14절).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17절). 그러한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유대인 부자들과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을 전한다. 그것은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그렇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귀신들도 역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지만, 귀신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야고보 당시에도 성도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믿는 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뒤따라올 때 그 믿음을 가리켜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 우리에게서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자신에ㅐ게서 어떤 행위도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며, 또한 자신을 천국에까지 데려다 줄 것이며, 더욱이 자신을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일이다. 이것은 다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 믿음은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입증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6.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가 아니면 행함으로 비로소 얻어야 하는가?

  이어서 야고보는 약2:20~26의 말씀을 통하여 이제는 칭의가 믿음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제시한다. 아브라함과 기생라합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에게 효력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야고보는 이때 창세기에 나오는 두 인물들 곧 히브리인이었던 '아브라함'이라는 남자 인물(창12~25장)과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이방인 '기생라합'이라는 여자 인물을 예로 든다(수2장). 이 둘은 믿음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다음의 2가지를 채웠던 자였기 때문이다. 첫째는 행위들을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비로소 온전케 되었다는 점이다(22절). 여기에서 '온전케 되었다'는 말이 완전하게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도 자기아들 이삭을 제단에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뜻이다. 이때 비로소 그 믿음이 실제라는 것이 입증이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가 있으니, 그녀는 "기생 라합"이었다.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녀는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 천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기생집을 하면서 소문을 들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기꺼이 자기들이 믿었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결단을 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최초로 행한 것이 여리고성을 정탐하려고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 두 명을 은밀하게 숨겨두고 잘 도망가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기생 라합은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가족과 친척들을 여리고성의 멸망으로부터 건져낼 수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들이다. 그렇다. 자신이 이제 가을 나무가 되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지 않은 나무라면 과연 이 나무가 열매맺는 나무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7. 바울의 칭의론과 야고보의 칭의론은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칭의론과 야고보가 말하는 칭의론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칭의론은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는 믿음이지만, 야고보는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같이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칭의라는 것도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과 함께하는 믿음이어야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칭의론이다. 그러하면 바울의 칭의론과 야고보의 칭의론은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욌는 자들이며,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역시 성경말씀에 이미 나와 있다. 야고보가 말하는 칭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정립할 수만 있다면 이 문제도 역시 손쉽게 풀 수가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선언적인 칭의가 아니라 그것이 성장하여 충만케 되는 칭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것을 두고서 그를 의롭다고 칭하셨다. 하지만, 창세기 22장에 가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비로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칭의가 충만케 된다. 그러니까 창15장의 믿음의 칭의가 창22장에 갔을 때에 비로소 가득찬 칭의가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이 이전부터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의 믿음도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22절).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칭의는 이제 시작으로서의 칭의이자, 선언적 의미의 칭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22장의 칭의는 완성으로서의 열매가 가득한 칭의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미 갖고 있었던 칭의가 어떤 것이었는지 입증이 되는 칭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자신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입증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완전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고 충만한 믿음이라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8. 나오며

  어떤 사람은 지갑이 회개를 해야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라도 기꺼이 남을 위해 내어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람은 자기 욕심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에 진정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지가 그에게서 입증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풍성한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변환경이 좋지 않거나 자신의 앞날이 걱정이 될 때에는 쉽게 자신의 지갑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는 즈음에도 여전히 똑같다면 어떡하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오늘 나누었던 말씀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약2:19).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또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며,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 정도로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믿는 이들의 상당수는 지금도 시작으로서의 칭의가 인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기에게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다. 자신이 이제 믿음생활을 시작했다면 그에게서 아직 행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성으로의 믿음을 점검할 때인데도 자신은 시작으로서의 믿음은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 사람의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지금 진정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은 100미터 달리기 선수인데, 트랙의 출발 선상에서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선수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고백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의심해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제는 행함으로서 입증되는 믿음을 나도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그래서 그날에 가서 후회하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4월 06일(수)

정병진목사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왜냐하면 이 책의 기록 시기가 A.D.45~49년경이라고 보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앙과 예수님에 대한 높여진 신앙고백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으며, 회당과 교회라는 공간이 동시에 등장한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야고보는 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시험과 은사 그리고 참된 경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인가?

2022-03-30(수) 수요기도회

제목: 야고보서강해(02) 야고보가 말하는 시험과 은사 및 참된 경건이란 대체 무엇인가?(약1:13~2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EdhicFSo6Y [혹은 https://tv.naver.com/v/25953907 ]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언제 쓰였을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쓴 책은 사도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전서'라는 책이며,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쓴 책은 '마가복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학자마다 저술 시기를 다르게 보기는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는 A.D.53년경에 쓰여졌던 것 같고, 마가복음은 70년경에 쓰여진 것 같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는 언제쯤 쓰였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야고보서 1:1~12절의 말씀을 통하여 야고보서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기록 목적을 살펴보았고, 시험을 당할 때에 성도의 신앙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었다.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서 지난번에 다 나누지 못했던 야고보서의 개요 부분과 아울러, 야고보서 1:13~27에 나오는 말씀 곧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부의 욕심에 대한 경계(1:13~16) 및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사'와 '선물'(1:17~18) 그리고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직 실천으로만 입증되는 참된 '경건'(1:19~27)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야고보서는 언제 쓰였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맨 처음 야고보서의 저자 문제를 다루었다(약1:1).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다. 그는 A.D.4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장직을 수행하였던 자로서 초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둘째로,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군지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흩어져 있는 나그네'로서 유대인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셋째로, 이 야고보서 편지를 쓰게 된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2가지였다. 그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 중에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유대교에도 몸 담고 있으면서 부자로 살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가난한 형제들을 보고도 돕고 있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깊게는 이방인 지역에 이신칭의의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예수만 믿으면 어떠한 회개의 열매들이 없이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므로 그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지난 주 야고보서 개요 부분에서 함께 다뤘어야 했던 부분을 보충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대체 언제였을까?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보통 이른 시기로서 A.D.45~49년경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늦은 시기로서 A.D.60~62년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야고보가 A.D.62년경에 순교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쓴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내증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이 편지는 아무래도 A.D.45~49년경 곧 예루살렘 총회가 있기 전에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이 편지에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A.D.49년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의 대표가 모여서 총회를 개최했다. 이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방인들도 역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함이었다(행15:1). 그때는 베드로와 야고보서의 발언권이 매우 중요했는데, 마무리는 의장격인 야고보가 하였다. 그는 주께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울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결국 이 총회에서는 야고보 안이 채택되었고 예루살렘 총회가 잘 마무리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야고보서가 A.D.49년 이후에 쓰였다면, 그 편지에는 당연히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안도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야고보서에는 단 하나의 결정 사항도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이 편지는 A.D.49년 이전에 쓰인 책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둘째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갈등이 표출되기 전의 상황이 본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방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약2:2). 이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많이 충돌하지 않은 시점인 것을 말해 준다. 

  

3.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쓰여질 당시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이때 야고보를 비롯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신앙관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불렀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대인이자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먼저 첫째로, 야고보가 하나님을 '만군의 주(여호와)'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오는 아주 독특한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사무엘상에서부터 등장하는 하나님의 칭호로서(삼상1:3,11),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의 칭호다. 그런데 여기에도 그러한 표현이 나온다(약5:4). 또한 둘째로, 야고보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약2: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야고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빛들의 아버지'(1:16), '하나님 아버지'(약1:27), '주 아버지'(3:9)라고 표현한다. 이는 유대인들은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칭호로서,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들이었던 성도들은 당시 하나님을 '만군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동시에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는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주 예수 그리스도'(1:1), '영광의 주'(2:1),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5:7),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5:8)',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5:14), '주께서 그(병든 자)를 일으키시리라'(5:15)고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고보를 비롯한 당시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이미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면류관과 같은 상주시는 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1:12).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장차 오실 '재림주'와 '심판주'로도 믿고 있었다(5:7~8, 9). 또한 그들은 그분을 '치유의 하나님'으로도 고백하고 있었다(5:14~15). 

 

4. 야고보서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약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었는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약 15~20년 정도 될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에 야고보서는 회당 예배를 드리면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늘 들었기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친히 하신 말씀은 직접 듣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구약성경을 그대로 인용한다. 최소 6군데에서 그가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구절로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표현(창15:6, 약2:23)이 나오고 있으며,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의 말씀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출20:13, 신5:16,약2:11), '간음하지 말라'(출20:14, 신5:17, 약2:11)는 말씀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레위기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약2:8). 그리고 그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표현을 이사야 40:8에서 가져왔으며(약1:11),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는 표현을 잠언에서 가져온 것 같다(잠3:34, 약4:6).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마5~7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대로 인용한 말씀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읽으면 그것이 산상수훈의 말씀이라고 그냥 생각되어지는 말씀이 무려 21군데나 된다. 이는 당시 야고보가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서와 똑같은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사용하고 있지만,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야고보에 등장하는 말씀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이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5. 사람이 시험받는 원천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일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야고보는 1:2~12의 말씀을 통하여 시험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를 언급한 바 있다. 이어지는 1:13~18절의 말씀에서 야고보는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이 인간 내부의 욕심(욕망)에 있음을 경고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면서 동시에 사람을 시험하지도 않으신다고 말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각종 좋은 은사와 선물들을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는 분이며, 성도들을 피조물들 가운데 첫 열매로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고 있는 대목을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있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창22:1)" 또한 사무엘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격동시키어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는 말씀도 나온다(삼하24: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들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고 또한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시험 중에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그렇다. 시험('페이라스모스')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세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 중에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그 시험은 '테스트(test)'로서의 시험을 가리키며, 야고보서 1:2~3에 나오는 시험은 '시련(trial)으로서의 시험'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여 죄짓게 하기 위해 시험하는 것 같은 시험(temptation)을 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좋은 은사와 선물을 주시고 거듭남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6.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와 성도의 경건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는가? 야고보는 1:19~25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신중하게 들어야 함과 들은 바는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수신자였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일부가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도는 듣기는 신속히 해야 하지만 말하기도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권면한다(1:19). 왜냐하면 사람이 분노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1:20).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더러운 말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온유함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1:21).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마치 자기의 얼굴이 더러운지 아니 더러운지를 거울을 보고 알게 되지만 돌아가서는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도 같다는 것이다(1:23~24). 그러므로 진정 복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 진정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1:25).

  이어서 야고보는 실천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믿음의 한 예로서, 유대인들이 옛날부터 실천해 오고 있는 '경건 생활'의 예를 하나 든다. 만약 어떤 성도가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말은 하는데, 자기의 입술을 재갈물리지 않은 채 말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는 것이다(1:26).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지켜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1:27). 오직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말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7. 나오며

  야고보는 초대 교회가 탄생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12사도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안에 남아 있어 신앙 지도를 해야 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삶은 기독교 내에서만 인정받았던 신앙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지켜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도 그를 '낙타 무릎'을 가진 자라고 표현하였으며, 그를 '의인 야고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으면 그러한 별명이 붙었겠는가?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에도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였던 것이다. 그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그러한 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기도 생활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던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의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야고보가 염려했던 것처럼, 믿음은 갖고 있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은 아닌가? 야고보는 말한다. 믿는 것은 귀신들도 잘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2:17).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2:14).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역시 귀로 듣기만 한 채 아무런 열매가 없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러면 우리의 경건은 헛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 보자. 그것만이 내 영혼이 살 길이요 내 영혼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구원의 생명길이기 때문이다. 

 

2022년 03월 30일(수)

정병진목사

 

  성경 중에서 중요하지 않는 성경이 있을까? 그렇지만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면 우리는 로마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롬1:1,16~17). 그래서 모든 사람은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마서가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모든 과정을 총망라한 서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로마서의 소주제인 이신칭의를 구원과 거의 동일시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고 있다. 특히 이신칭의로 말미암아 한 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거나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주장은 맞는 것이며 성경적인 것일까? 오늘은 로마서강해 두번째 시간으로써,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보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어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로마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은 무엇이며,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로마서를 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로마서는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유익한 서신서다. 죄인이 어떻게 이신칭의를 얻게 되는지 그리고 칭의자가 어떤 성화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그리고 결국에는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로마서는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단계로 이어지는 구원의 여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러한 구원의 여정은 구원에 관한 모든 절차를 다 포함하고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구원이란 죄사함을 받는 것 혹은 중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죄사함과 중생은 구원의 모든 개념을 다 포함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결국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죄사함을 받았던 자라도, 중생을 얻었던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음을 말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은 결국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죽기 전까지는 한 개인의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로마서를 통해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이 구원받아 영화롭게 되기까지는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의 여정의 끝마치기 위해서는 칭의의 단계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칭의를 강조하다가 그만 성화의 과정을 소홀히 여기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열매가 없을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쳐온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은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아주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가 구원의 여정을 말하고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구원에 관한 완벽한 책이라고 단정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만약 구원의 여정에서 성화를 빼버린다면 그것은 곧 구원을 헐값에 팔아 넘기는 것이 되어 나중에는 죄를 회개치 못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일까지 발생할 수가 있다. 사실 구원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회개와 성화의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러한 성화의 과정이 없는 이신칭의는 결국 성도를 천국으로 보낼 수가 없다.

  잠깐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조금 요약해보자. 로마서는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잘못된 구원론사상으로 인하여 요즘 현대의 개신교인들은 로마서에 나오는 이신칭의를 마치 구원인량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은 구원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성화의 과정를 놓치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개신교회는 구원의 여정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끝까지 구원의 경주를 마치지 못하고 그만 구원을 놓쳐버리는 성도들도 있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이 없는 구원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칭의만으로 결코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믿어야 그것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구원의 첫 출발이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통과하여야 죽은 다음에 영화의 단계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는 성도들은 칭의에서 곧바로 영화의 단계로 넘겨버린다.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칭의는 얻었으나 성화되지 아니한 자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화의 과정은 성도들의 구원에 있어서 매주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사실 칭의는 구원의 첫 시작점에 불과하지만 성화는 구원의 거의 모든 전노정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리고 칭의가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만, 성화는 일평생 일어나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확대해석하여 성화없이도 구원에 이를 것처럼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구원론에 대한 반격 때문이다. 당시 카톨릭이 주장하는 구원의 방편은 3가지였다. '세례'와 '선행'과 '물질적 기부'다. 누구든지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선행을 하며 돈을 기부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공덕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찌하든지 세례만 받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행위구원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구원인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과정의 일부분이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첫 발을 내딛는 시작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다 해 주신 것을 그저 믿는 것 뿐이다. 칭의를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행위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 사실 인간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취해야 할 어떤 조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속죄제물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의 후손치고 죄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인간은 단 한 명도 자격을 갖춘 자가 없었기에, 죄없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셨다. 이로써 인류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는 완료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에게 효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하다. 우리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의 기본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말고 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하는 일이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이었던 것을 시인하고, 지었던 죄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이러한 회개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회개까지 하나님께서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는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눅15:11~24).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돌아갈 분깃을 가지고 도망쳤다는 것은 그가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지은 인간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땡전한푼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아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비로소 아들이 스스로 뉘우친다(눅15:17). 회개하는 것이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8~19). 그렇다. 아버지가 대신 회개할 수는 없다. 회개는 아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아들이 회개하도록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그의 회개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회개까지 하나님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만세전에 구원받기에 택정함을 입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회개시키겠지 하면서,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라. 그러다가 회개하지도 못한 채 죽으면 큰 일나기 때문이다. 회개까지 하나님이 대신하도록 밀쳐내지 말라. 회개는 죄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외치셨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의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은사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구원얻기 위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때 행하는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회개다. 그리고 이때는 동시에 자신이 지었던 생각나는 죄까지 같이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신칭의를 받아 구원의 노정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로마서에 의하면 그후에 신자는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성화의 과정을 크게 2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믿는 자 속에 들어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성도들은 과연 자신의 옛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고 있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가? 아니다. 이 질문에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대문에 이미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신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고 오히려 옛사람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구약의 성도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에 들어갔고(마8:11~12), 모세와 엘리야도 천국에 들어가 있다(마17:15). 구약의 성도들은 오직 여호와님 한 분만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그분이 메시야를 보내주어 인류의 죄를 사해주실 것을 믿었다. 또한 그들 자신이 율법에 따라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했던 것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성령의 내주가 없이도 구원받았던 것이다. 그들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오실 메시야를 믿으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라도 혹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해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 편 강도의 경우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도 큰 죄를 지어 십자가의 한 편에 못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그는 3가지를 말했다. 자신은 죄를 지었으니 마땅이 죽임당할 일을 한 것이라고 자백했으며, 자기들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신 분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분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자신을 불쌍히 여기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인으로 받아들였고 죄인이라도 천국에 데려가실 수 있는 메시야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선행이나 물질적인 기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낙원(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성령세례를 받지도 않았고  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지도 않았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도 나가서 전파한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막6:12). 예수께서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파했던 베드로도 군중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으며(행2:38, 3:19, 8:12),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활동했던 사도바울도 회개할 것을 명했던 것이다(행17:30).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60년이 지난 시점에 사도요한에게 일곱교회에 써 보내라고 했던 편지의 핵심내용은 곧 회개였던 것이다(계2:5,16,21~22,3:3,19). 그렇게 회개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개하라는 명령은 자범죄를 회개하라는 명령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일곱교회에게 명한 것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미 이신칭의를 통해 구원 안으로 들어온 신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자범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처음으로 복음을 접한 자가 있다면 그는 2가지 회개가 다 필요하다. 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하는 단회적인 회개와 지었던 자범죄를 회개하는 반복적인 회개를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이신칭의를 통해 단회적인 회개와 구원얻기 위한 믿음을 가진 자는 자범죄에 대한 회개를 하면 된다. 당신은 지금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가? 아니면 교회밖에 있는가? 어찌되었든 당신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날마다 회개를 지속하라. 그래야 죽을 때에 깨끗히 죄를 떨쳐버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두번째로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의 실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복음이란 무엇일까? 사실 인간이 해야 할 두 가지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이다. 복음을 믿되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믿어야 한다(막1:14, 롬1:1). 그 복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2~4)" 그렇다. 복음의 요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다. 예수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을 가리킨다. 그 아들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되어져왔다. 그 예언에 따르면, 예수그리스도는 인성에 있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실 것기고, 거룩의 영 곧 신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로 인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난 다윗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시작은 이렇게 선포한다. "아브라함의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1:1)" 예수님에게 있어서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후손이었고, 예수님에게 있어서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인 나단의 후손이었다. 이렇듯 다윗의 가문의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만나 약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해산할 무렵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로마황제에 의한 호적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요셉은 혹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여 배가 불러온 약손녀인 마리아를 데리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간다. 사실 당시 여자는 호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천사의 고지를 받은 요셉은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그리하여 다윗의 후손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된다. 이것이 메시야에 관한 약 300가지의 예언 중에서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예언의 성취의 시작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따라 오셨고 그리고 공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진 바로 그 메시야인 것을 안다. 만약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해야 할 일은 행하지 아니한 채, 혹시 하나라도 죄를 지어버렸다면 그분은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했다. 그분이 부활했다는 것은 예수가 메시야로서 해야 할 사명을 다 성취했다는 것이며, 정작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분은 누구의 죄로 죽은 것인가? 예수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활을 통해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죄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제 모든 만물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확정되기에 이르셨다. 그분이 해야 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심으로 인류구원의 새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 이외에 결코 메시야는 존재하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온 재림예수 내지는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신천지의 이만희도 결코 메시야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도 아니며, 통일교의 문선명이도 아니고, 신앙촌의 박태선이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 단 하나도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이만희를 제외한 모든 교주들을 다 죽었지만 결코 살아나지 못했다. 그들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이만희와 안상홍과 문선명과 박태선을 메시야나 재림예수나 보혜사로 믿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믿고 아무리 회개한들 그 회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이 분을 믿으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 이외에 구원자가 없음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든든한 반석 위에 있는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5-10-14 로마서강해(02) 로마에 전해야 할 복음과 바울사도의 사명(롬1;1~7).ts_00021649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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