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2) 장차 누가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마7:15~23)_2022-02-22(화)

https://youtu.be/tDk4l6zvn0M [혹은 https://tv.naver.com/v/25317717 ]

 

1. 예수께서는 어떤 의미로 '천국(하늘들의 왕국)'을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과 유사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이라는 측면에서 상태적인 천국을 의미하는 말이라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실현된 공간적인 장소를 뜻하기에, 그 의미는 공간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장소적인 의미의 천국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비해 '하나님의 나라'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 지상에 계실 때에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이미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마12:28). 그러나 천국은 귀신이 잠시 쫓겨나는 그 정도의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귀신이 아예 없는 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장소적인 천국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사탄 마귀와 귀신들이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죄와 죽음도 없으며, 시기 질투와 근심 걱정 혈기 분노도 없고, 어둠도 전혀 없는 복된 장소다. 

 

2. 사도 바울은 구원의 최종적인 목표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순교 직전에 보낸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8)" 그렇다. 그는 자신이 이제 주님이 계시는 그 천국에 들어갈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구원의 마지막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구원의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회개와 예수님을 믿은 것은 곧 구원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구원의 끝(완성)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구원의 완성은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가고(사명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냈을 때라야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구원의 완성으로서 주어지는 최종적인 결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아니 된다. 그리고 이제 예수 믿었으니 당신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면 아니 된다. "이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달려가려고 100m 트랙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의 노정 어딘가에서 미끄러지거나 끝까지 경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탈락하기 일쑤다. 끝까지 경주에서 이긴 자들이 많지 않다. 그래도 경주에서 이긴 자들을 가리켜 요한계시록 2~3장에서는 '이기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자들은 거의 없다. 

 

3.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장소적인 천국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가?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셋째 하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12진주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새 예루살렘 성이 곧 천국인 것이다. 그곳 안에는 '영광의 광장'이라는 아주 넓은 장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혼인 잔치'가 치러질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혼인 잔치를 치를 장소가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자신이 천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을 말한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천국의 개념은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1~13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도 정확히 나온다. 열 처녀 중에서 오직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두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12진주] 문 안으로 들어가서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여분의 기름을 사러 갔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성 밖에 남겨진다. 그런데 이 비유를 천국 비유로 들려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로 그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곧 그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4.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누가 장차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누가 천국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한 가지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여 주여"라고 말했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들 안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행하고 있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마7:21).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계속해서 나온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다 행동(열매)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말씀한다는 사실이다. 천국 입성의 조건으로서 '믿음'만을 말씀하고 있는 본문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 행위로서 그 믿음이 증명될 수 있는 것 곧 열매로서 확인이 되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누가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첫째는, 자기가 가진 의로움이 최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것보다는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다(마5:20). 둘째는, 마태복음 7:21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셋째는, 마태복음 19:27~30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라고 하셨다. 이때 버려야 할 것으로는 집이나 형제자매, 부모나 자식 그리고 전토라고 언급하셨다(마19:29). 마지막으로 넷째로, 마태복음 25:1~13에서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자세한 것은 다음에 계속 나올 것이다).  

 

5.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행동(열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마태복음의 말씀만을 살펴본다면, 장소적인 의미로서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입성할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다 행함 곧 열매로 자신의 믿음이 증명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믿음만으로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는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국 입성의 조건은 행위라는 말인가?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딱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위가 뒤따르지 않은 자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에서도, 부활 승천하셨던 주님께서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에서 하신 말씀 속에 나온다. 거기에는 믿음과 더불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22:14)"고 하셨다. 그렇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비록 자신의 겉옷이 더럽혀져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겉옷을 빨아서 희게 하고 있는 자들은 12진주문을 통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함(열매)을 천국 입성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고로 정리하면, 행함(열매)은 천국 입성에 관한 충분조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회개는 천국 입성의 최소 조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간신히 믿음과 회개로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자신의 집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은 면류관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더더욱 144,000명이 앉는 보좌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왕 노릇하지 못한 채 섬기는 자로 살아갈 것이다(그렇다고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다.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살아가니까). 그러므로 믿음과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한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면서 그날을 준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2월 22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를 외치면 그는 행위구원론자인가?(마4:17)_2019-07-08(월) 

https://youtu.be/MXnMhfVwQEg

 


1. 믿는 이들 중에 어떤 이는 "회개하십시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고 외치는 자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판단은 옳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믿음의 양면과도 같아서 믿으려면 회개해야 하는 것이요, 회개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믿음과 회개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마4:17, 막1:15). 고로,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외치는 것을 두고 그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그렇게 정의한다면, 아마 예수님(마7:21)도, 야고보(약2:22)도 다 행위구원론자에 속할 것입니다.


2. "행위구원론자"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행위구원론자"란 예수 그리스도의의 구속의 필요성이 없이도 얼마든지 자신의 행위로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는 필연코 사람에게는 죄된 본성이 없다고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된 본성과 상관이 없으므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잘못된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롬5:12에 따르면, 이미 모든 사람은 죄된 본성 아래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롬5:12에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에, 한 사람 곧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때에 모든 사람이 아담의 허리에 씨로서 들어있어서 모든 사람이 범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도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자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8~20)"고 말씀함으로 사람 속에는 죄된 본성(원죄)이 자리잡고 있다 했습니다. 고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없이는 죄된 본성으로 말미암아 죄짓고 있는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시킬 수 없습니다.


3. 믿음만 있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볼 때, 그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단 한 구절도 자신의 믿음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다는 성경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부다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24:47, 막1:4, 눅3:3, 행2:38, 행3:19...).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은총을 받을 자격을 얻는 것이며, 실제로는 회개함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회개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행함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이 과연 성경에 있나요?

  아닙니다. "회개"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가르치는 성경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성경에 행함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에는 전부다 그것이 율법의 행위나 선행을 가리킬 때 사용될 뿐입니다. 오히려 회개는 항상 믿음에 같이 따라다닙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때 그는 무엇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죄를 지었는데 죄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기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믿고 또한 자신이 죄를 회개할 때에 비로소 죄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로, 회개함없이 죄용서를 받은 사례가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고로 회개는 믿음과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구원의 동반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오늘날 왜 지옥에 떨어지는 자가 부지기수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요일1:9과 요일1:7에 따르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에라야 비로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지은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찌하든지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5. 만일 회개하지 않은 남겨진 죄가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아서 남겨진 죄가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즉시 그것 때문에 내 삶과 자녀에게 귀신이 틈을 타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어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가 그만 마귀에게 속해버리기 때문입니다(요일3:8). 그러면 마귀의 졸개인 귀신들이 치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자신에게서 질병이 나타나게 되고 사건사고가 연이어 계속 터지며, 자녀들도 이상하게 변해버립니다. 귀신들린 자도 나오고 자살하는 자도 나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죽은 다음에,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는 어떤 죄이든지 다 예수님의 피로 깨끗히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 죄를 없애주시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을 믿어야 하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회개함으로 자기의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구원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19년 7월 8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주장하면 그는 행위구원론자인가?(약2:20~26)

https://youtu.be/EKXoRP_kqto


 

1. 행위구원론자란 어떤 사람을 두고 행위구원론자라 하는가요?

 

2. 행위구원론자들로는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어떤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 구원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자력구원설을 주장한 펠라기우스(A.D.350~409)이며, 후자의 대표적인 예배는 안식교나 베리칩종말론자나 유대교인들로서 예수님을 믿어도 플러스 알파로서 어떤 의식적인 행위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펠라기우스는 어떤 주장을 한 것인가요?

 

3. 어거스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펠라기우스(A.D.350~409)는 첫째, 갓난아기는 타락이전의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하는 유아세례를 받지 않아도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사람이 타락했어도 아담만 타락한 것이며, 그의 범죄는 인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원죄도 없으며 죄의 유전도 없고 죄성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셋째, 또한 사람은 누구든지 온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자유의지는 죄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가 없으며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종류의 행위구원론자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매우 위배되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이후 사람은 다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할 때 아담만 범죄한 것이 아니라 아담의 허리에 씨로서 참여했던 모든 인류(아담의 후손들)이 함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하고 있습니다(롬5:12). 그래서 사도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곧 아담의 한 범죄가 모든 사람들의 범죄였음을 말했던 것입니다(롬3:23).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이 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늘 악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속에 거하고 있는 죄라고 했습니다(롬7:18~20). 그는 이미 죄성으로 오염되어 있는 인간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또한 쾌락에 대한 탐심으로 인해 간음죄와 살인교사죄를 저질렀던 다윗도 훗날 나단선지자의 책임을 듣고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으여, 어머니가 죄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이라고 자신의 죄성을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위구원론의 또다른 형태로서 또 어떤 것이 있습니까?

 

4. 행위구원론의 두번째의 유형은 예수님을 믿어도 또다른 알파의 행위가 있어야 구원얻는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교의 경우는 예수님을 믿어도 제칠일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십계명 중에 넷째계명인 안식일계명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만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데에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충분합니다. 거기에다가 어떤 의식적인 행위들을 덧붙히게 되면 그것을 일컬어 행위구원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세미행위구원론자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 믿어서는 아니 되고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하며 안식일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베리칩종말론자도 이러한 부류에 속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베리칩을 받으면 절대 안되고 그러면 불못에 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말고도 어떤 행위들을 덧붙혀 그것이 구원의 당락의 중요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행위구원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행위들로부터 인하여 믿음이 비로소 온전케된다고 했던 장로 야고보의 말씀은 어떤 유형입니까? 정말 그도 행위구원론자입니까?

 

5.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장로의 경우는 행위구원론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제대로 된 믿음을 가졌다면 당연히 행위의 열매들이 뒤따라와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뿐입니다(마7:15~23). 만일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들이 뒤따라오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야고보장로의 말씀입니다. 참 잘 말했습니다. 아니 제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자신의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서 비로소 행위로서도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약2:21~22). 즉 행위가 뒷받침되는 믿음이 참 믿음이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요, 칭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약2:21,24). 그런데 이것은 인생을 마칠 무렵 자신을 뒤돌아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행위는 어떤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적어도 3가지 의지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행위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행위들이 구원의 요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위의 열매들을 통해서 3가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지금 구원을 향해 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심판대 앞에서 행위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마7:21, 25:31~36)을 잘 대비하게 해 줍니다. 셋째는 우리의 행위들은 만약 우리가 최종적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나에게 상급이 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믿음과 행위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를 구원을 받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나서는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 하며 자신이 지은 자범죄들을 날마다 회개하는 자가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또 다시 죄된 본성과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날마다 지은 죄들은 회개(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한 번 믿었다는 것이 자범죄들을 회개하지 않아도 영원히 속죄의 은총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은 죄를 시인하고 자백해야만 합니다(요일1: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이후에는 제자들에게 "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눅24:47)"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 수석사도였던 베드로도 후에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함을 받아야, 새롭게 되는 날이 주님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선포했으며(행3:19),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도였던 사도바울은 각 성에 복음을 증거할 때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20:20~21)"을 증거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회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구원론이요 회개와 천국복음방송에서 외치는 구원론입니다.

 

2019년 01월 16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정이철목사,. 그가 외치는 행위구원론의 기준은 과연 합당한가?(마7:19~27)
https://youtu.be/s44uodEP_vU

 

1. 미국에서 "바른 믿음"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정이철목사(자신이 총신출신이라고 밝히고 있음)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며, 현재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구원파와 가깝다"고 말한 전 총신대 김세윤교수에 대해서 행위구원론자라고 하고,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고신대 박영돈교수를 이단옹호자라고 매도하더니, 지난 1월 10일에는 정병진목사(동탄명성교회)에 대해서 기독교의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구원론자요 이단사상 전파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가 그분이 쓴 글을 보았더니, 믿음과 더불어 회개와 성화가 구원을 얻게한다는 주장을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행위구원론이 무엇이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른 구원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단정죄를 하려는 거짓된이단판별사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행위구원론"같은 말로 매도하기를 잘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행위구원론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교회사적으로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해보십시오.

 

2. "행위구원론"이란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중세시대를 열기 직전에 펠라기우스(A.D.354~418)라는 사람이 주장한 이단사설입니다. 어거스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펠라기우스가 말한 그의 사상을 요약해보면, 그것은 이렇습니다. "첫째, 인간은 본성은 선하며 선하게 태어난다. 그러므로 둘째, 모든 태어나는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셋째, 아담의 범죄는 단지 개인적인 일에 불과하다. 넷째, 인간이 구원을 얻는 데에 성령의 역사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비성경적인 주장들입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주장이 왜 비성경적인 주장인지 말해보십시오(시51:3~5, 롬5:12, 요16:7~9, 마12:20).

시51:3-5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요16:7-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마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3. 펠라기우스가 주장했던 거의 대부분은 다 비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최초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의 내면에 죄성을 가진 채 태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은 모태로부터 자신이 죄가운데 태어났고 그래서 죄를 범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했으며(시51:3~5), 사도바울도 한 사람 곧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했습니다(롬5:12). 그리고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은 필요적인 것임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16:11). 왜냐하면 인간의 상태는 이미 죄로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여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의 상태가 전적으로 무능력하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셔야 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인간이 죄로 오염되기는 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인간이 그것을 반응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을 향하여 바르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진단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마12:20, 사42:1~3).

마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사42:1-3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구원얻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사도들이 증언했던 참되고 바른 구원관은 어떤 것입니까?(막1:15, 마4:17, 눅24:47, 행5:30~31, 20:21)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행5:30-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5. 고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실 참된 믿음을 가지려면 회개가 필요하며, 회개하는 자가 비로소 참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이철목사는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증언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을 그대로 전파하는 정병진목사를 행위구원론자로 매도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의 가르침이나 만세전개인예정 및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칼빈의 가르침을 제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루터와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루터나 칼빈처럼 위대한 신학자라도 성경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루터나 칼빈같은 신학자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회개가 구원을 위한 행위라고 언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이철목사는 무슨 근거로 회개를 말하면 그것이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그것을 남들을 정죄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기준을 세워놓으면 그것이 진리이고 정통이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소용이 없고 자기의 말이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믿음에 따른 열매로서의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비록 그것을 구원의 기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약하면, 행위는 첫째로, 자신이 온전한 믿음을 가진 채 그 믿음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척도(바로미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약2:14,21~26). 둘째로, 구원을 받으면 그것이 상급으로 내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마16:27,계22:12).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장차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사람들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7:19~20).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기준을 "믿음과 회개"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믿음과 회개와 행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마7:21~23, 마6:1~4, 눅18:11~12, 마7:1~5)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렇습니다. 행위(정확히는 율법이 제시하고 있는 행위들)를 구원으로 기준으로 제시한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죄성을 자기 내면에 가지고 있고 밖에는 귀신들이 유혹하고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구원의 기준의 하나로 넣으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첫째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데 그것을 기도와 말씀으로 해결하지 않은채, 행함으로 떼우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7:21~23). 예를 들어 믿음이 부족하고 회개하지 않아도 자기는 빠짐없이 주일성수했고 십일조를 내고 봉사하고 있으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꾸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의를 행하려고(보이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6:1~4, 눅18:11~12). 그리고 셋째로, 행위를 하지 못하는 남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7:1~5).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르게 예수님을 믿었으면, 일생동안, 계속해서, 매일, 죽을 때까지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8년 2월 6일(화)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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