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가 처음으로 직면해야 했던 핍박과 위협의 어려운 상황에서, 대체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우선 피신시켰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나중을 기약하자고 결의를 했을까? 그런데 그들이 선택했던 선택지는 다름 아닌 '합심기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보니, 우리가 보통 드리는 기도와는 달랐다. 그러면 그때 그들의 중보기도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우리도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대처와 중보기도는 우리의 갈 길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은 그 기도를 분석해보자.

 

2022-06-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19)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서 드린 첫 번째 기도는 어떤 기도였나?(행4:23~31)_2022-06-26(주일)

https://youtu.be/438S6AMWq6c  [혹은 https://tv.naver.com/v/27620853 ]

 

1. 들어가며

  세상에 이제 갓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와 복음전파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 못걷게 된 자를 고쳐 준 일이 있게 된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군중들을 향해 그 이유를 전하게 되었는데,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친 것과 예수님이 누군지를 전하는 것을 두고 불법이라면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어 그들을 심문해 보았지만 잘못한 일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하고 위협하면서 내보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바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면서 공회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곧장 성도들이 모여있는 장소(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됨)로 이동하여 그동안에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랬을 때에 과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 대책회의를 세웠던 것일까? 아니면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자들이 최고로 긴장을 하고 있으니 지금은 자제하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결의했을까? 아니면 죄없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또한 취조했으니 산헤드린 공회를 심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을까?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의 교회가 최초로 직면한 위험 앞에서 과연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루살렘 교회는 당면한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보고를 듣고 결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어디로 피신시키는 일을 논의했을까? 아니면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니 만큼 복음전파를 자제하자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루살렘은 복음전파를 하기에 합당한 곳이 아니니, 복음전파의 기수를 사마리아나 이방인에게 돌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고 했을까?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것은 놀라운 결정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합심으로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는 대책회의를 강구하지도 않았으며, 차기를 기약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 하나님께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을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은 과연 어떤 기도를 주님께 드렸을까? 

 

3.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고 또한 찬양했는가?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주께 기도할 때에 그들은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기도했을까?

  첫째로, 그들이 기도하면서 불렀던 하나님의 명칭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기도의 대상을 향하여 "대주재여!"라고 기도하였다(행4:24). 헬라어로 보면, '데스포테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그 뜻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호칭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앙이란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대주재'라는 명칭은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며, 그분의 뜻과 섭리를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이다. 참고로, 신약성경에서 '대주재'라는 표현은 사도 베드로가 한 번(벧후2:1), 사도 바울도 한 번(딤후2:21), 사도 요한이 한 번(계6:10),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한 번(눅2:29), 사도행전에서 한 번(행4:24),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한 번(유1:4) 사용한 적이 있는 흔히 않는 호칭이다. 

  둘째로, 그들은 대주재에게 어떤 찬양을 먼저 드렸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먼저 어떤 찬양을 드렸는가?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던(만드셨던) 분이십니다. 또 당신의 종(파이스) 우리 조상 다윗의 입으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렇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섭리대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것을 찬양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것은 시편2:1~2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행4:25~26). 왜냐하면 시편의 예언을 따라 예루살렘의 도시 안에 헤롯 안디바(B.C.4~A.D.39 재위)와 본디오 빌라도(A.D.26~36 재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드린 중보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그들은 무슨 기도로 중보기도를 드렸을까? 그들은 3가지 기도를 드렸다.

  첫째, 그들은 지금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적대세력을 지켜보아달라(주목해달라)고 기도했다(행4:29a). 그들은 "이제도 그들의 위협들 위로 그것들을 주목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좀 감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고, 고난을 아예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대세력을 없애달라고도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을 위협하고 대적하고 있다고 할지라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는 것이니만큼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 대로 행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적대세력에 대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겠다는 기도였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핍박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행4:29b).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당신의 종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계속 말할 수 있도록 담대함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옵소서" 그랬다. 그들은 대적들이 함께 모여 복음전파를 대대적으로 방해하고 있고, 또한 복음을 전파한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적들의 위협에 겁먹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셋째, 치유와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일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행4:30). 그들은 "당신의 손 안에서 고침을 위하여 당신에게 사람들이 손을 내밀게 하옵시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당신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계속 일어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것들 곧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기적들이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제공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께서도 공생애 시절에 제자들을 파송하여 천국복음을 전하게 할 때에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파송하셨다(마10:1, 눅9:1~2). 12사도들와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박해로 인해 좌절하거나 결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들과 동행하여 일하시는 교회가 되어, 천국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5.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이 내려졌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땅을 진동시켰다(행4:31). 그들이 기도하고 있던 장소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는지를 잘 대변해주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들과 계속해서 동행하시겠다고 하는 싸인을 그들에게 주신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기들이 비는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생활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핍박과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많은 이들이 그만 핍박에 주눅이 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과연 어떠했을까? 고난을 피해 도망을 쳤는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맞딱뜨리게 된 핍박과 위협 속에서 차후 대책회의를 강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놓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는 자신의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주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간구한 것이다. 그리고 다만 그들에게 누르고 있는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잘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 곧 천국복음을 계속해서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특히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일어나기를 간구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음과 더불어,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옳게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도응답을 받았고, 더욱 더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06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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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알려진 마태복음 18:19의 본문의 말씀의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드리는 합심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잘 응답하신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는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것을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면 혼자 기도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합심기도의 본래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루고자 한다.

 

2. 교회공동체가 탄생했을 때 꼭 주의해야 할 3가지 사항들

  A.D.29년경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약2년이 지난 다음,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12제자들을 향하여 장차 교회가 탄생할 것을 아시고, 제자상호간 혹 성도간의 상호관계에 대해 말해줄 필요성을 느끼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바로 마18장의 3가지 말씀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교회공동체가 제대로 서기 위해 첫째,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둘째, 서로간에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과 교회공동체가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요청하면 어떤 것이든 주께서 응답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셋째, 죄를 지은 자라 할지라도 회개한다면 그를  꼭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두번째의 경우로서, 성도 서로간에 존중히 여기는 마음과 교회공동체의 결정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이다.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교회공동체의 결정에 대해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것을 그대로 집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공동체가 갖고 있는 매고 푸는 열쇠인 것이다.

 

3. 교회공동체가 사용할 수 있는 매고 푸는 열쇠란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교회공동체가 시행할  수 있는 매고 푸는 열쇠란 무엇이며, 그것을 사용할 경우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딱 2번 매고 푸는 열쇠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한 번은 개인이었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마16:18). 그리고 또 한 번은 교회공동체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다(마18:18). 그렇다면, 매고 푸는 열쇠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게 하는 권세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려있게 하는 권세를 가리킨다. 여기에 등장하는 '땅'은 인간을 비유하며, '하늘'은 하나님을 비유한다. 그렇다. 비록 사람이 말을 하고 사람이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고 푸는 권세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약속이자 놀라운 선언이다. 어찌 인간이 내리는 결정과 인간의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도 그대로 실행하실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어주실까? 사실 두번째로 언급하신 마18:18의 매고 푸는 열쇠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권세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공동체가 가지는 권세다. 그것은 교회공동체가 일치된 마음이 되어 있을 때 어떤 권징을 실행하는 것과 일치된 마음이 되어 있을 때 기도를 하는 경우다. 첫번째의 경우는 교회권징의 실천의 방법으로서 알려준 것이며, 두번째 경우는 교회공동체가 일치된 마음이 되어 있을 때 기도하는 방법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4. 교회의 권징 실현을 위한 매고 푸는 열쇠의 사용

  먼저, 교회의 권징의 실현에 대해 매고 푸는 열쇠의 사용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말씀 이전에 어떤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교회에서 범죄한 형제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말씀이다. 그때에는 3단계로 범죄한 형제를 바로잡으라고 하셨다. 1단계에서는 당사자가 범죄자를 찾아서 일대일로 책망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그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범죄자가 끝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제는 두 세 명을 데리고 가서 그가 하는 말마다 증참하라고 하셨다. 그래도 범죄한 형제가 건성으로 듣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회에게 말하라고 하셨다. 만약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한다면, 교회는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처리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때 교회는 아마도 범죄한 형제를 향해 이렇게 선포했을 것이다. "우리 교회는 여러번 형제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해 보았으나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교회가 공적으로 선포합니다. 아무개 형제는 이제 더 이상 우리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렇다. 권징은 대단히 무서운 형벌이다. 하나님께서도 교회의 요청을 그대로 받으셔서 그 형제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세리는 죄인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교회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형제를 이제 교회공동체로부터 추방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범죄한 형제를 바로잡기 위해 동행했던 두 세 명의 증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개인적인 생각을 가진 자에 불과한가 아니면 교회공동체의 생각을 가지고 온 자들인가? 그렇다. 비록 그들은 두 세 명이기는 하지만 교회전체의 생각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두 세 명은 두 세 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 기도의 실행을 위한 매고 푸는 열쇠의 사용

  이제는 기도에 있어서 매고 푸는 열쇠의 사용에 대해 살펴보자. 주님께서는 매고 푸는 열쇠의 사용을 두 군데에 사용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명령과 선포의 경우에 사용할 수 있다 하셨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의 경우에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것은 기도의 경우란 어떠한 경우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마18:19절에 나온다.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의 뜻을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기도할 때에 혼자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후자의 기도를 더 잘 응답해주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러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 기도하는 것이라도 얼마든지 기뻐받으시고 또한 그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고, 헬라어성경원문을 보아야 한다. 첫째, 문맥에서 두 세 사람은 단지 두 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둘째, 헬라어성경원문에 보면, 두 세 사람의 자신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합심해서 기도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요구하였으면 하는 일에 관하여 일치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에, 교회공동체의 구성원들 중의 두 세 사람이라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겠다는 뜻이다.

18:19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만일 너희중에 두 사람이, 그들이 (당장) 요구하였으면 하는 일(사건, 송사)에 관하여, 땅 위에서 (단번에) 일치한다면, 하늘들 안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그것이 성취되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 교회구성원들이 하나님께 요청했으면 하는 모든 일들(송사포함)에 관하여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단지 두 세 명이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교회공동체의 일치된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혼자서 자기 기도할 내용을 기도하는 것보다 두 세 사람이 합하여 하나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응답해주신다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구절에서 교회공동체의 일치된 마음에 따라 두 사람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주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왜냐하면 두 명이나 세 명의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채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에 계속해서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두 명이나 세 명은 단지 개인적인 생각을 가진 두 명이나 세 명이 아니다. 교회공동체의 일치된 뜻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서, 교회에서 기도하는 대표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나쁜 의도를 가지고 교회공동체가 일치된 마음과 뜻을 가지게 된다면,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공동체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비는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 구절에서 "내 이름으로"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의 요구사항이 주님이 보실 때에는 합당한 것이었을 때에 두 세 사람이 기도하더라도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에 100% 응답해주시는가? 개인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받고자 두 세 명의 중보자을 얻어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공동체의 일치된 소원이지만 그 소원이 주님이 보시기에게도 인정할만한 것인데, 그때에 그 문제를 놓고 두 세 사람이라도 함께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겠다는 것이다.

 

6. 어떻게 하면 교회가 일치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비는 기도의 핵심은 과연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댗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단 한 가지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의 충성도가 약해서가 아니다. 교회가 한 마음이 되지 못해서인 것이다.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기도를 들으신다고 약속하셨다. 사실 집안에서도 부부가 한 마음만 된다면, 어떤 세찬 비바람도 헤쳐나갈 수가 있으며,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합해질 수 있다면 어떤 시련도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열심히 기도하는 것에 방불하게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사도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해법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빌2장에 나온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을 통해서, 교회가 한 마음과 뜻을 갖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첫째는, 남을 나보다 더 낫게여기는 태도와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였다(빌2:1~4). 둘째는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예수님을 본받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빌2:5~8). 그렇다. 겸손과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게 하는데 매우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7. 나오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신앙의 패턴이 다르며, 개인의 성격과 성품이 각각 다른데, 어떻게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내놓기가 쉽다고 하겠는가? 그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내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버리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며,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어 섬길 때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오로지 자기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늘 묻고 그 답을 따라서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만 가질 수 있다면, 교회의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놀라운 기적을 맛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부터 일치된 마음갖기를 위해 힘써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이 예수님께서도 인정해줄만한 것이라고 한다면, 두 세 명의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에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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