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 보통 '요한계시록'하면 장차 되어질 일이 기록된 책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좀 더 들여다보면,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주는 최종 계시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시다. 과거에 사람이셨던 분이시다. 고로 예수님은 신성에 관한 칭호와 인성에 관한 칭호를 모두 다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천상에서 예수께서는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까? 요한계시록에서 그분을 칭하는 마지막 칭호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그분에 관하여 칭호 한 가지만을 고르라면 우리는 어떤 칭호를 고르는 것이 선택해야 하는가?

 

2022-06-0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의기독론(30)[최종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30)(계22:20~21)_2022-06-05(주일)

https://youtu.be/mUao2GcYn2s  [혹은 https://tv.naver.com/v/27207834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누구신가?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 중의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만큼 우리도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요,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아낸 만큼 저 천국에서 우리의 지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을 제대로 믿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가장 훌륭한 성경(교본)을 하나를 고르라면 우리는 단연코 요한계시록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계시의 완성으로 주어진 결론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기독론에 관한 연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에 관하여 거의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요한계시록의 기독론의 마지막 시간으로서 총 정리의 시간을 가짐과 동시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한 마디로 어떤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신성한 칭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에 관한 신성한 칭호들도 있고, 인성에 관한 칭호들도 있다. 그중에서 신성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칭호들을 종합해 보면,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신성한 칭호로서 자신을 맨 처음에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계1:17)"고 말씀하셨는데, 맨 나중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예수님의 칭호가 구약시대에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칭호로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사41:4, 44:6, 48:12).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실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바로 그분이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8에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누구신가? 그분은 '주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이'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올 자"라고 말씀하셨다(계1:4,8,4:8). 그런데 이분은 진정 누구신가? 우리는 이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곱째 나팔과 함께 ㅊ너국에서 공중하늘로 오신 예수께서 자신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신 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계11:17, 16:2). 이때 공중하늘로 오신 그분은 "인자같은 이"라고 표현되어 있다(계14:14). 그런데 요한계시록 1:13의 말씀을 보면, "인자같은 이"는 예수님으로서, 자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신 이이시다(계1:17).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좌에 앉으신 이"라고 하심으로 그분이 주 하나님 자신인 것을 드러내셨다(계3:21, 20:11~12).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라고도 하셨다(계1:18, 11:15). 그리고 이어서 그분은 자신을 '창조의 근본(시작)이신 이'라고도 하셨다(계3:14). 또한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이 땅에 보낸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는 전지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다(2:18, 23, 5:6).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바쳐진 동일한 경배와 찬양을 그대로 받고 계신다(계5:12~14). 고로 우리는 그분에게 불려진 칭호들을 종합해 볼 때에 예수님은 바로 '한 분 하나님'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3.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있는 예수님의 인성의 칭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지만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한 때는 사람이었던 존재였음을 분명히 밝히셨으니, 그의 칭호들 속에서 우리는 그분이 과거 인성을 취하셨던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원래는 '다윗의 뿌리'이셨지만(계22:16), 그분은 '유다지파의 사자'이자(계5:5) '다윗의 자손'으로서(계5:5,22:16)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아기'이자 동시에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계12:2,5). 그리고 그분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는, '그리스도'라는 3중의 직책을 수행하셨으며(계1:1,2,5, 11:15, 12:10, 20:4, 20:6), 인류를 위한 대속제사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었고(계5:6,7,8,13...총30회),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계11:8). 그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인자(사람의 아들)'로 오셨기에(계1:13,14:14)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되실 수가 있으셨다(1:18). 그분은 또한 그리스도로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가 되셨으며(17:14,19:16), 그분은 '목자'이기도 하신다(계7:17). 그리고 그분은 인간으로 오셔서 성실하게 사셨기에 아버지에게 대하여 자신을 "충성되고 신실한 이"라고 표현하실 수 있었다(1:5). 또한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이 땅에 아들로 보내어졌기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셨다(계2:1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한 때에 인성을 취하실 분이지 지금도 인간이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때 인성을 취하셨다는 측면에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이 누군지는 한 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님은 한 마디로 어떤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퀴리오스)이라는 칭호로 정의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왜냐하면 주님이라는 칭호는 그분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도 불려진 칭호이지만, 지금 천국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칭호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이라는 칭호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사람들과 제자들이 먼저 불렀던 칭호였다. 그때 '주님'이라는 칭호는 그것이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선생님'이나 혹은 '위대한 선지자'와 같은 의미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살고 계실 때에 사람들과 제자들이 불렀던 칭호를 보면, 그분은 "주님", "랍비", '선생님",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등으로 불리셨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만물로부터 '주님'이라는 칭호를 기꺼이 받고 계신다. 

 

5.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어떤 칭호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칭호였을까? 요한계시록을 보면, '주님'이라는 칭호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대상에게 사용되었다.

  첫째는 '한 분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때 '주님'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동시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주 하나님"(11회)(계1:8, 4:8, 4:11, 11:17, 15:3, 16:7, 18:8, 19:6, 21:22, 22:5, 22:6)이라고 불리셨다. 그리고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7회)(계1:8, 4:8, 11:17, 15:3, 16:7, 19:6, 21:22) 혹은 "주 하나님이 전능하신 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2회)(계1:8, 4:8) 라고 사용되기도 하였다. 둘째로, '주님'이라는 칭호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계11:4). 이것은 구약의 말씀인 스가랴서를 인용하여서 그렇다(슥4:14). 마지막으로 셋째, 그것은 순수하게 우리 주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총 6번에 걸쳐서 나온다(계1:10, 11:8, 14:13, 17:14, 22:20, 22:21).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라는 용어는 사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동격의 칭호라고 정의할 수 있다. '주님'이라는 말과 '하나님'이라는 말이 사실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요한복음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나의'라는 소유격을 빼버린다면,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이는 '주님'이라는 칭호가 곧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대신하는 동격의 칭호라는 것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제자들이 '주님'이라고 불렀던 분을 이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 부분에 가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주 예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0-21)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도 요한은 맨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주님'이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함으로써 그분이 곧 '주 하나님'이신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계22:16에서는 예수님께서 손수 자신을 가리켜 "나 예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분이 구약시대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라는 것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는 의미의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스스로 있는 자시요 그분만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6. 나오며

  우리는 장장 30번의 시간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살펴보았다. 처음에 그분은 흰 머리를 가지시고 흰 옷을 입으신 분으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다. 그것은 다니엘이 보았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단7:9). 하지만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나타나신 것이며, 신약시대에는 아들로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하늘로 되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지금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는 바로 예수께서 앉아계신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한 분 하나님의 보좌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불렀다(계22:1,3). 예수께서는 원래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우리를 위해 사람으로 오셨으며,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신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경륜을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가 아니며,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칭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차 오실 이'로 표현된 하나님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계11:17, 16:5). 영국의 신약학자 리차드 보컴(보쿰) 교수는 그의 저서 "요한계시록 신학"(한들출판사, 2000)이라는 책에서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보컴 교수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였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요, 예수님이 통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앉으시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이 곧 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06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28)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계22:20~21)_2022-06-02(목)

https://youtu.be/0CNJTL8V-Vw  [혹은 https://tv.naver.com/v/27141976 ]

 

1.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이며, 신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혹은 '야훼')이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여쭤봄으로 인하여 비로소 알려지게 된 이름이다(출3:13~15). 그렇다면 신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이다(마1:21, 눅1:31). 그렇다면 '여호와'와 '예수'라는 이름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2. '여호와'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출3:14~15). 그럼 그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이거나 아니면 "나는 '나는 ~이다'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 호쉬아[흐]'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서,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혹은 '구원하러 오신 여호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 39권 가운데 단 한 군데에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이렇게 이제는 '예수'라고 계시되었기 때문이요, '예수'라는 이름 속에 이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의 꿈속에 나타난 천사가 장차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일러주었을 때, 그 이름의 뜻은 이미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자'였음을 요셉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마1:21).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 나는 ~이다"라는 뜻을 지녔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가 구원하러 왔다"라는 뜻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어 아들이 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예슈아[흐]'이다. 이는 '여호와 호쉬아[흐]'의 축약형이다. 여기서 '호쉬아[흐]'라는 단어는 '야솨'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구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환영하던 군중들의 외침 소리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때 군중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요12:12). 또한 여기에 나오는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여호와 호쉬아나'이다. 그리고 여기서 '호쉬아[흐]'는 구원하다는 뜻이며, '나(NA)'라는 뜻은 '지금(NOW)'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호쉬안나(=호산나)라는 단어의 뜻은 '여호와여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3. 구약 시대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이름을 모두들 '여호와'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맞다. 그때에는 '여호와'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음가가 '여호와'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히브리어는 모음이 붙여진 상태이지만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만 있을 뿐 모음이 없는 글자였다. 그러므로 원래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록된 신명사문자 곧 "요오드 헤 와우 헤"라는 자음도 사실은 '나의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의 모음을 가져다 거기에 붙여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연구해 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발음보다는 '야훼'가 훨씬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이름을 '3인칭 미완료'로서 말씀하신 것이요,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1인칭 시점으로 말씀하셨기에 그 음가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학자들이 찾아낸 하나님의 이름은 '아하야[흐]'라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축약형이 '야[흐]'이기 때문이다(예: 이사야, 예레미야, 할렐루야 ...).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혹은 '야훼')가 아니라 '아하야[흐]'였던 것이다.

 

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 준 진짜 하나님의 이름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혹은 '야훼')정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의 이름은 '아하야[흐]'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계시할 때에는 어떤 발음이었는가? 그것은 출애굽기 3장 14절을 맛소라 텍스트로 보면 나온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이다. 그러니까 출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문구는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로 되어 있다. 이를 번역하면, "나는 에흐예이다"이다. 그러니까 출3:14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에흐예'였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들이 과연 '에흐예'라는 발음이 정말 적합한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에흐예'라고 읽을 것이 아니라, '아하야[흐]'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보다 더 정확한 진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발음은 '아하야[흐]'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하야[흐]'란 '아'(히브리어로 '나'라는 뜻)에다가 '하야'라는 동사가 합쳐진 단어이다. 여기서 '하야'라는 동사는 영어로 be동사로서 그 뜻은 "있다" 혹은 "~이다"이다. 그러니까 '아하야[흐]'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나는 '나는 ~이다'이다"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아하야[흐]'는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렢' 더하기 '야하[흐]'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원래는 '아하야[흐] 아쉐르 아하야[흐]'여야 함)라는 뜻은 "나는 '나는 알파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가 무슨 뜻인지를 헬라어 구약 성경(70인역, LXX)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고 에이미 호 온'이다. '에고'는 1인칭 '나'라는 뜻이요, '에이미'는 be동사로서 '있다' 혹은 '~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호 온'은 '하야'동사(be동사)의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구문으로서, '호 온'만을 따로 해석한다면, "이제도 계시는 이"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8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문구에서 맨 앞에 나오는 문구(호 온)를 그대로 옮겨서 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혹은 '야훼')나 '아하야[흐]'의 이름의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이거나 "나는 나는 ~이다고 하는 이다"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5.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라는 이름의 용례가 가르쳐 주는 사실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총 12번 나온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라는 이름도 이 땅에 속한 이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이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7'은 이 땅의 완전수를 뜻하고, '12'는 하늘의 완전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2번의 예수의 이름 가운데, '예수'라는 이름이 '그리스도'라는 직책과 더불어 쓰인 것은 3번이다(계1:1,2,5). 이 때 '예수'라는 말은 특별히 그분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분의 직책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것은 곧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직책을 함께 명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 차례 더 '예수'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들 중에서 여섯 개는 예수님을 믿게 되는 자가 환난을 받을 수도 있고 왕국에 참여할 수도 있으며, 참음(인내)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차례는 그것이 주 하나님과 관련되어져서 표현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용례는 "나 예수는...(계22:16)"이라는 표현이 한 번, 그리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의 문구 속에서 두 번 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 불려지는 예수님의 명칭들 셋의 경우를 보면, 이 세 가지의 것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심과 더불어 그분에게는 못할 것이 없는 '전능한 분'이신 것을 드러내 주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불려지던 '예수'라는 이름이 천국에서도 동일하게 계속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한 번 쓰인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 이름이 '정병진'이라고 치자, 그러면 그때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 집의 문패에도 역시 한글로 '정병진'이라고 쓰여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결국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께서 누군지를 계시하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쓰였지만, 예수께서 그 이름으로 충성함으로서 천국에서도 그대로 그 이름이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름이 천국에서도 불려질 이름답게 이 땅에서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1] 창세기강해(08) 하나님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출3:13~15)_2021-02-03(수) https://youtu.be/qvFFH9TdGos

[참고2] 창세기강해(12) 아하야흐(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요5:43)_2021-02-07(주일) https://youtu.be/09LHNpumiHM

 

2022년 06월 02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9)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던 한 분 하나님이시다(1)(계1:4~7)_2022-05-20(금)

https://youtu.be/MkQ-uO2JXNk  [혹은 https://tv.naver.com/v/26940566 ]

 

1.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의 인사말(계1:4~6)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소개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사실 계시의 책이자 묵시의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예언의 책이자 또한 편지의 책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 보면 요한계시록은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바로 요한계시록 1:4~6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누가 누구에게 편지하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요한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서,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때 요한은 성자 예수님이 누구시며 또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이 편지를 쓰고 있다. 

계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2.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사도 요한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언뜻 보기에는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을 쓸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다르다. 다른 이유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 첫째로, 사도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원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표현도 사실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둘째,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순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성령'하나님을 통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편지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있기만을 기원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편지의 인사말에 바울의 편지 속에는 결코 성령 하나님이 들어 있지 않는 데에 비해, 사도 요한의 편지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서두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를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3~4에서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분의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표현은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얼핏 보기에는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 관한 표현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다고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처음에 표현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것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장차 오실 이'는 분명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근거가 바로 7절에 나온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 이 말씀에 나오는 '그'는 분명 그 앞 구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인 것이지 성부에 대한 소개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라는 표현도 성령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표현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며(계5:6), 구약 시대로 치자면 이 표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곱 눈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슥4:10). 다시 말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것들을 감찰하는 분이 곧 하나님이신을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4.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순서로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소개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서로 말하지 않고 있다. 성자와 성령의 순서가 앞뒤가 서로 바뀐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성자에 대한 소개가 너무나 길어질 것 같으니까 먼저 간단하게 성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이유가 될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의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고 나타내시어 일하시는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사44:24). 그분은 성자와 성령과 협의하거나 회의하지 않으시고, 홀로 하늘을 펼쳤으며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이 홀로 땅을 펼치셨다. 그리고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다시 4,000년이 지난 후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요16:27~28).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이지 처음부터 따로 있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단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고로 요한계시록 1장의 서두 인사말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는 한 분 하나님이 아들로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5.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요한계시록의 서두의 인사말에서 예수님은 3가지 신분을 가진 자이자, 3가지 활동을 하시고 계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첫째, 그분은 세 가지 신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참된 증인'이자, '죽은 자들의 먼저 나신 이(첫 열매, 원형)'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시다. 둘째, 그분은 세 가지 활동가로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분'이자, '우리를 그분의 피 안에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던 이'이시다. 그리고 더불어 그분은 '우리를 왕국으로, 하나님이신 그의 아버지에게 제사장들로 만드신 이'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일은 현재의 일이며, 그분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던 것은 실은 과거의 일이며, 더불어 우리를 왕국과 제사장들로 만들고 있는 일은 과거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것이며 그 일은 아마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과거에 인간이셨던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에, 그분이 인성을 취하실 때에 신성이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로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예수님을 인성을 배재한 분으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그분을 신성만을 가진 분으로도 소개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20일(금)

정병진목사

 

 

 

 

성도들이 엎드려 경배할 유일한 대상은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로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핍박하여 때로는 죽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시기가 곧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의 핍박에 대비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될 보상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배 관련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찬송하고 그분만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022-05-1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5)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계5:6~14)_성도가 예배를 바칠 유일한 대상은 누군가?_2022-05-15(주일)

https://youtu.be/78PrmrpXy04 [혹은 https://tv.naver.com/v/26829855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들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그것의 핵심은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양에게도 주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에서 예배하고 있는 존재들 곧 네 생물과 25장로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천상의 피조물들은 현재 천국에서 어떻게 예배하고 있을까? 이들이 어린양에게 올려드리고 있는 찬송과 경배는 과연 어떤 것이며 또한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 이 지상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누구에게 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고 하는 새력들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 누구이며, 무슨 이유 때문에 한 분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그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 성도들도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환난의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러한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경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하나님을 사칭하는 세력이 누군지를 살펴보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성도들은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성도들은 천국에서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즉 천상의 예배에서 우리가 예배드릴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천상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계7:11). 우리는 천상에 계신 하나님과 엎드려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비단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곧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24장로들 그리고 144,000명 되는 보좌에 앉은 이들과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들이 찬송과 경배를 드리며,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피조물까지 다 경배를 드린다. 이중에서 네 생물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엎드려 경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 어떤 표현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총 4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첫째는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이 보좌는 하나님 한 분의 보좌로서 통치의 보좌와 심판의 보좌이다. 둘째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하나님만이 항상 살아계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14:7). 그분만이 창조주이시며 창조된 피조물을 다스리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어린양'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5:8,14). 어린양께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3.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과 경배를 동일하게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오직 주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리가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 11~12을 보면, 모든 천사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천사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7가지의 흠숭을 드린다. 그것은 찬송과 영광, 지혜와 감사, 존귀와 권능(능력) 그리고 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천만만의 동일한 천사들이 어린양에게도 7가지 흠숭을 드리는 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그렇다. 순서만 바뀌었을뿐 하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동일하게 어린양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에서 예배드리는 존재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통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4. 하나님께 바쳐야할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데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바쳐야할 흠숭 곧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들이 있음을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세력은 바로 용이다. 이 '용'은 타락한 천사장이었던 루시퍼로서, 옛 뱀이요 마귀와 사탄이요 온 천하를 꾀는 자다. 그런데 이 놈이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자신도 받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 놈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리고 예수님을 가둬놓으려했던 무저갱에 지금 자신이 갇혀 있다. 그는 [천국에서의] 천년왕국이 끝나는 어느 시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잠깐 내어보내는 시기가 올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지낼 것이다(계20:2). 그렇지만 그놈은 자신이 찬송과 경배를 받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하여 2인자를 내보내서 그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이다(계13:1~10). 이 짐승은 이 세상 제국의 왕들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제국의 왕들이 이 짐승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으려하고 또한 경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세력을 사도요한은 여러 짐승을 가지고 알려주었는데, 그 짐승은 사자와 곰이요, 표범과 열뿔 가진 무서운 짐승이다(계13:1~3). 이러한 짐승은 사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짐승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다니엘 7장에서 짐승은 각각 '사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요, '곰'은 메대와 파사의 다리오와 고레스 왕이요, '표범'은 그리이스(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무서운 열뿔 가진 짐승은 앞에서 출현했던 짐승들의 특징과 더불어 무서운 이빨을 지녔는데, 이는 로마제국의 왕들로서 당시에는 네로 황제나 도미시안 황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을 대신하여 바다에서 올라운 첫째 짐승(=적그리스도)이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 때에 발생한다. 그때가 되면 땅에서 올라오는 두 뿔 가진 어린양같은 [둘째]짐승(=거짓선지자)이 용처럼 말을 하고 첫째 짐승의 권세를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미혹하여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첫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한 후 그 우상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첫째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 이든지 다 죽이는데, 이때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표(짐승의 표=666)를 준다. 그러므로 이 표를 받지 못한 자는 매매를 못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로마황제 시대에도 있었고 장차 앞의 어느 날에도 있을 것이다. 

 

5. 왜 성도들은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왜 [첫째]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1~2계명을 어기는 자를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자손 3~4대가 그 죄값을 물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는 우상숭배의 죄는 큰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어떤 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고난을 받게 되고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계14:9~11). 그렇다.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는 영원한 고통이라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존재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일곱대접심판이 내려지는 마지막 환난의 시기에 이 땅에 남겨지기 때문이다(계16장). 요한계시록에서는 말세(예수님의 승천이후 재림때까지)에 되어서 일어날 일을 일곱 가지 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마지막 일곱번째 인은 또다시 일곱 나팔 재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 나팔 재앙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든지 비그리스도이든지 상관없이 다 받는 것이지만, 일곱 나팔 재앙들 중에서 마지막 일곱번째 나팔 재앙인 일곱 개의 대접 재앙들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가 이 땅에 남겨지는가? 그것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남겨진다. 물론 이때 남겨지는 기간은 아주 짧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그때 남겨져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하려면 목숨 걸고 짐승과 그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만약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고 표를 받는 자는 일곱번째 나팔 재앙 곧 일곱가지 대접 재앙들을 고스란히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첫째 대접 재앙 때에 싸인으로서 짐승의 표를 받고 그것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앙들은 일곱 대접 재앙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짐승을 경배하지 말아야 하고,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우리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그러한 자들만이 천국의 유리바닷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계15:2~4). 다시 말해, 짐승과 짐승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자들만이 일곱 대접 심판들을 받기 직전에 하늘에 휴거되어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15:1~8). 셋째, 이러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면 왕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계20:4). 이러한 자들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먼저 천국에 들어가서 거기서 천년동안(주님의 승천후 재림전까지 하늘에서의 시간) 왕노릇할 것이요, 만약 주님의 재림시에 부활체가 되어 주님을 맞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경배를 올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사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에 천국에 들어간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육신의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는 말이다. 그렇다고 악한 사탄 마귀가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자기들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지만, 그러한 영광스러운 저 천국을 자기보다 능력이 적은 인간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놔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기질투의 화신들이다. 자기가 못 들어간다면 들어가는 이들이라도 잘 다독거려야 배려해 주는 작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정반대다. 자기가 못 들어가는 그곳을 다른 이가 들어가려는 것을 배 아파한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악한 영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핍박을 우리 성도들은 인내로서 잘 이겨내야 한다(계13:7~10). 이들은 한사코 자기들의 경배를 받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이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공생애 기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들의 핍박을 너무 염려할 필요가 있다. 핍박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만 경배하고 그분에게만 찬송을 올려드리자. 이것이 천국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니까. 

 

2022년 05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