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2가지다. 그것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미 예정된 자를 사명자로 부르시는 경우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어떤 부르심으로 부름을 받았든지 그에게는 이미 하늘에 상이 준비된 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늘의 부르심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원래 예정된 상보다 더 큰 상을 받을 수도 있고, 그것보다 못한 상을 받을 수도 있으며, 아니 그 상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럼 대체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여기 주님의 놀라운 말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022-04-24(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마4:17~2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mT4ugbmOvQ [혹은 https://tv.naver.com/v/26516755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불러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과연 어떻게 부르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불러 사용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부르심에 응하는 자에게 주께서 주실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첫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어 일하게 하시는데, 그 모습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부르심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축복을 찾아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어떤 부르심으로 불러내시는가?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특별히 불러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시는 부르심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한 마디로 '사명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하여 아예 어떤 사람을 지명하여 불러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이다. 사실 예수님의 12제자 치고 스스로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한 제자는 하나도 없었다. 다 예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서 제자가 된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부르실 때에는 직접 부르시거나 아니면 간접적인 방식으로 불러내시기도 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부르심이 있다. 그것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들로 부르시는 부르심이 있다. 하늘의 부르심의 분깃에 동참하여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예는 히브리서 3장에 나온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들 대부분 두 번째 부르심에 동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히3:1).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를 사명자로 부르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게 하는 방식으로 또한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이다. 

 

3. 나는 어떤 부르심으로 부름을 받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아니면 하늘의 부르심에 동참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살아생전에 그 사람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소관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와 같으신 분이다(롬9:21). 그래서 토기장이인 그분이 우리를 어떤 그릇으로 쓰실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러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이 어떤 부르심으로 부름을 받았든지 2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는 주님께서 어떤 그릇으로 사용하시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딤후2:20~21).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그렇게 하는 자에게 하늘에서 이미 예비된 채 있는 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쓰시기 위해 부르시는 자는 대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불러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주님께서는 사명자로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날 때에 육체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유전자가 새로 조합된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부모의 특성들을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사람은 육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영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영은 어떻게 그 사람 속에 들어가게 되는가? 영안을 열어서 보면, 사람은 엄마의 뱃속에서 약 2~3개월 정도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을 그 아이에게 집어넣어 주신다. 그런데 이때 보내시는 영은 천국 낙원에 있는 영혼을 보내신다. 그래서 천국에서 자라고 있던 영혼이 엄마의 태중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는 갓난아이부터 시작하여 약 15~16세된 정도의 영혼이 들어간다. 만약 그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명자로 이 땅에 보내어졌다면, 그는 적어도 영의 나이가 7~8세는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이끌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영적으로 성숙한 나이였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가진 삶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영적으로 아주 어린아이는 늘 투정부리고 짜증내고 환경에 따라 마음과 신앙이 요동을 친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해서 이 땅에 보내어진 자는 결코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간다. 누가 시켜서 일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끝까지 충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죽는 것을 사명으로 안다. 참고로, 사람의 영의 나이는 보통 20년에 1살 정도가 올라가며, 일평생에 1살도 못 먹고 죽는 사람도 있으며, 중에는 1년에 두 살까지 먹는 사람도 있다. 

 

5.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을 불러내시며 또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로 쓰시는가?

  주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을 불러내어 사용하시며  또한 누구에게 하늘의 부르심에 동참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우를 보니, 2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를 불러내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게으른 자를 당신의 사명자로 사용하시지 않는다. 먼저 베드로와 안드레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보라.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배에서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래도 게으른 자보다는 부지런한 자, 열심 일하고 있는 자를 불러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을 보라.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타작하고 있을 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에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마태는 세관에 앉아 일하고 있을 때에 부름을 받았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예정하시어 이 땅에 보내신 자를 불러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우연히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것이 아니며, 우연히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내신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사용하시기 위해 어느 집에 어느 자궁에 태어나게 하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들을 찾아가서 불러내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쓰실 때 이렇게 예정되고 준비된 영혼을 불러서 사용하셨다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왕정 시대의 최초의 왕으로 세우신 사울왕 때를 보자. 그가 그만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의 길로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집에 장차 왕으로서 이스라엘 나라를 반듯하게 세울 영혼을 보내셨다. 그는 바로 '다윗'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윗이 15세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그를 왕으로 기름붓게 한다. 처음에는 이새의 첫째 아들이 바로 그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중심'이란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을 선택하여 그에게 준비된 영을 집어넣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때가 되자 불러내신 것이다. 이러한 예는 사무엘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엘리 제사장 가문 타락하여 더 이상 그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차 사사 시대를 끝내고 왕정 시대를 이끌어 갈 사람에게 기름붓게 하기 위하여 선지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자 했다. 누구에게 그 영혼을 보내실까 생각하실 때에 성막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하는 한 여인을 보셨다. 아들을 낳지 못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었다. 만약 아들을 주시면 그를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태에 그 영을 보내셨다. 그가 바로 '사무엘'이다. 엄마의 기도는 영이 훌륭한 사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6. 주님이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느 날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즉시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적미적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때가 찼기 때문에 그때 그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가 아직 차기 전인데 그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일을 통하여, 다른 주님의 종들을 통하여, 듣고 있는 설교 말씀을 통하여,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므로 그때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뒤로 미뤄서는 아니 된다. 즉시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랬으며,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다(마4:20,22).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는 어떤 이유를 대면서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영혼과 미래에 손해가 될 뿐이다. 우리는 즉시 응답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떤 상황에서 부르심을 받았는가? 베드로는 이제 그 집안의 가장이었다. 결혼도 했고 장모님과도 함께 살고 있었다. 부양할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 그 집안의 생계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시더니 자기와 자기의 동생 안드레를 쓰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대답했겠는가? 아마 이랬을 것이다. "주님, 저는 한 가족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시려면 저만 불러서 사용하시든지, 아니면 제 동생만 부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둘이 다 주님을 따라간다면 누가 제 가족을 부양합니까? 그리고 저와 제 동생은 어부가 평생 직업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용하시려면 좀 배운 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정식으로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 율법 교육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습니다. 좀 학식있고 율법을 잘 아는 자를 불러서 사용하시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즉시 자신의 생업을 버린 채 주님을 따라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어떠했는가? 그들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가정도 버리고 부모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신가? 그건 아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은 가족을 책임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 사용하시려는 것은 하늘에 속한 특별한 뜻으로서 우리가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사역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시는가?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부르시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의 귀한 사역을 위해 특별히 쓰실 일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목적으로 우리를 이 땅에 내려보내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어서 이 땅의 어느 시대에, 어느 가정에, 어떤 은사와 달란트를 주어서 보낼 것인지를 그분이 결정하셔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계획과 목적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그분이 부르실 때에 즉시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에서 우리가 누릴 최고의 복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자신의 가족을 내팽개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에 따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위한 새로운 길을 마련해 놓으시고 또한 책임도 져 주심을 믿으라. 그럼, 베드로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를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다(마4:19). 이는 결국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불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먼저 시범을 보이셨다. 그분이 먼저 갈릴리에 다니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치셨던 것이다(마4:17). 그리고 첫 네 명의 제자들을 차례대로 불러내시고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들에게 영혼을 낚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그것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되 두 가지 것을 병행하는 방식이었다(마4:23). 하나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다. 다시 말해 천국의 중요성과 회개의 중요성을 모르는 자에게 그것을 말씀으로 풀어주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들린 자로부터 귀신을 제거해 주시는 일을 하셨다. 사실 불신자들에게 천국은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가난과 질병과 저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주셨다. 그러자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입을 열어 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을 소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첫 제자를 불러내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역을 잇게 하시기 위함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동탄명성교회에게 회개와 천국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 하신 것인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탄명성교회는 지금까지 약 9년 동안 회개와 천국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여 왔으며, 함께 회개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 지속해 온 것이다. 

 

8.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그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마19:27~29). 우리는 그동안 여러 시간을 통하여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될 지위와 영광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중에 왕 노릇하고 다스리는 자가 있으며, 또한 섬기는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주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왕 노릇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사명자일수록 강도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특히 주님의 특별한 사명자일수록 그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도록 요구하신다.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마16:24~25).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만큼 천국에서 누릴 영광과 지위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목적으로 이 땅에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몸소 먼저 실천해 보이셨다(마16:21). 그분은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고난도 받으셨으며 목숨까지 다 내어놓으셨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역자들 또한 다 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사도 바울은 말한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의 앞길에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받은 사명 곧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행20:22~24). 그런데 지금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천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70줄의 144,000명의 이기는 자들 중에 각각 제1번 줄 보좌에 앉아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을 대표하는 24장로들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갔던 12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베드로는 70줄 가운데 제1번 줄에 들어갔고 24장로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왕 노릇하는 3~6번 줄에 들어갔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예정하심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12제자들 중에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성밖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적어도 3명의 제자들(OOO와 OOOO와 OOO) 6번 줄에 들지 못했다. 그것은 자유 의지를 가진 우리의 몫인 것이다. 주님은 분명 12명의 제자들을 다 왕 노릇하는 자로 예정하셔서 이 땅에 보내셨지만, 그중에 한 명은 더 높은 반열에 들어갔고, 2명은 왕 노릇하는 반열에서 밀려났으며, 1명은 아예 성밖으로 내어 쫓겨났으며, 1명은 제자의 반열에 새로이 들어왔다. 

 

9. 나오며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든지 아니면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하늘의 분깃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충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하늘에 예정된 채 있는 우리가 받을 복을 받는 비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우리를 찾아 불러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이 된다면 그때 가서 순종하겠다고 응답하지 말라. 그 자리와 복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지금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하늘에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자가 틀림없다. 최소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나 이러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의 예로,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다가 세웠던 빌립보 교회에서 자신의 선교 사역을 도와 헌신했던 두 여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두 여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빌4:3). 그런데 그 여인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한 마음이 되지 못한 채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한 마음으로 합하라고 권면하고 있었다. 심지어 둘이 싸우고 있는 자일진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회개를 실천하고 있고 천국복음을 증거하는데 자신의 삶을 바치는 자가 어찌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겠는가? 물론 끝까지 싸운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음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22년 04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19) 사명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사명을 깨우쳐 주신다(삼상9:25~10:16)_ 2021-12-08(수)

https://youtu.be/4yeocdpsdcw  [혹은 https://tv.naver.com/v/23983667 ]

 

 

1. 모든 믿는 이들은 다 사명자인가?

  그렇다. 모든 믿는 이들은 다 사명자다. 최소한 3가지 측면에서 사명자다. 첫째는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사명자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막16:15). 특히 자기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행16:31). 둘째는 기도에 있어서 사명자다. 기도 없이는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 어떤 일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또한 제자로 삼는 일에 있어서 사명자다. 이것은 자기의 가족 구성원을 비롯하여 영적으로 가족이 된 자들에게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에 '일반적 사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각자에게는 개인적으로 다른 사명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가정을 세우도록 보냄을 받은 사명이 있고, 어떤 이는 주의 종을 도우라는 사명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교회를 세우라고 보내어진 사명자도 있고, 물질로 봉사하라고 그리고 자신의 달란트로 봉사하라고 사명을 받은 자도 있다. 

 

2.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받은 사울은 특별한 사명자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사명자를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워 쓰시는 사명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정해져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사명자로 선택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사무엘과 다윗과 같은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는 엘리제사장과 사울왕의 경우다. 그러나 이들의 수고한 것에 대한 결과는 모두가 다 자기의 복이 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사울은 이 땅에서 세워진 사명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서 왕으로 선택되어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플랜B가 작동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끝으로 사사시대를 끝내고 다윗을 세워 왕정시대로 건너가기를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유 의지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는 플랜A가 아니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플랜B가 작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초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왕의 기초를 세워줄 자를 찾았다. 그리하여 선택된 자가 바로 기스의 아들 사울이었던 것이다. 그가 특별한 사명자로 선택된 이유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의 가문이 좋았고 그의 성품이 훌륭했으며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5대째 신앙 좋은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났으며(삼상9:1),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어른을 공경할 줄도 알았고,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도 소유했기 때문이다. 

 

3.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시는가?

  하늘에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기 시작한다. 이런 자들에게서는 벌써 어릴 적부터 남다른 데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윗의 경우를 보자. 그는 15세 때에 사무엘로부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사울왕은 이 땅에서 선택받은 특별한 사명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에 태어나서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내어진 사명자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사울왕은 이 땅에서 선택된 사명자였기에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의 왕의 기초를 놓을 초대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사무엘을 시켜서 그가 특별한 사명자인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4. 사명자인 것을 깨닫도록 사무엘이 사울에게 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는 사울에게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시작한다. 그를 만나자마자 "당신은 잃은 암나귀들 때문에 염려하지 마시오, 이미 찾았소. 그런데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인 줄 아시오. 바로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온 집이라오(삼상9:20)"이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를 찾아온 사울을 화목제사의 식사 자리에 초대했는데, 그때 사무엘은 초대된 30명 중에 사울을 맨 상석에 앉혔고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을 먹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받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과 헤어지기 전에 사울만을 따로 불러서 그를 앉힌 다음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서 말한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그분의 기업(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소(삼상10:1)".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사울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3가지 일들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7일 후에 길갈에서 자기와 보자고 했다. 이는 그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번제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5. 사울이 집으로 가면서 경험하게 된 신비한 일 3가지는 무엇인가? 

  사무엘은 사울더러 그가 왕으로 선택받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때 이후로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경험하게 될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려 준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일은 실은 사울을 하나님께서 왜 부르셨고, 그를 어떤 상태에서 부르셨는지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어떻게 쓰실 것인지를 알려 주고 그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에는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첫째 표징은 길을 가다가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다(삼상9:2). 그때 그들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은 이미 발견되었소. 보시오. 당신의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지만 당신들(사울과 그의 사환) 때문에 걱정하고 있소.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소. '내 아들이 나귀를 찾으로 나간지 삼일이 넘었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이 징조는 그가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사실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실은 사울왕이 더 걱정된다는 예언적인 말이었다. 왜냐하면 라헬은 야곱의 부인으로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가면서 아이를 살려 낸 여인이기에,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귀중하게 보신다는 뜻이다. 

  둘째 표징은 거기서 더 가다가 다볼 상수리나무 아래를 지날 때에, 벧엘에 제사드리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때 첫 번째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이끌고 있을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지고 있고, 세 번째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울에게 평안을 빈 다음에 떡 두 덩이를 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전쟁 중에 시행할 세 번의 제사가 중요한데, 두 번째까지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겠지만 세 번째는 잘못된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였다. 왜냐하면 사울은 염소 새끼 셋과 포도주는 받지 못한 채, 떡만 두 덩이를 받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셋째 표징은 시간 관계상 내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하여 사명자를 세워서 일하시는데, 사명자가 그것을 못 깨달을 수도 있으니, 사명자 본인이 사명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인도해 주신다고 말씀을 배울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명자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사역을 하다가는 장차 있을 사울왕의 경우처럼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그만 낙마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2021년 12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어떻게 살아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목적으로 나를 지으셨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들은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살 거룩한 자(성도)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어떤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따라 사역자로 지음받은 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최적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2020-07-1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가?(롬8:28~29)
https://youtu.be/Z69WfzzCkL8 [혹은 https://tv.naver.com/v/14745094 ]

 

 

1. 들어가며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일컬어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했다(히3:1). 그는 왜 성도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했는가? 그리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으며,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은 또한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은 우리 인간의 시작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 과정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과정까지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2. 인간은 어디에서 시작된 존재인가?

  인류의 시조였던 아담은 언제 어디에서 창조되었는가? 인류의 시조 아담은 이 땅에 있는 흙(티끌)로 빚어졌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생명의 숨 곧 영을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었다(창2: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동방에 있는 에덴(평원)에 동산을 하나 만드셨다. 그리고 지으신 아담을 그곳에 두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만들어 주신 에덴동산은 일종의 '낙원'이었다.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담은 이내 그곳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후 언젠가 에덴동산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에덴동산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다. 예수께서는 회개했던 한 편 강도에게 그가 죽은 후에 예수님과 함께 낙원(동산)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낙원이란 곧 에덴동산으로서, 이곳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환상 중에 낙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후12:4). 그리고 A.D.95~96년경 사도요한은 환상 중에 주님을 뵈었고 주님께서 써보내라고 하신 말씀에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자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어떤 것으로 등장한다(계2:7).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다. 고로, 우리는 오늘날에 들어와 낙원은 천국에 있거나 천국의 한 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때 이 세상에도 천국에 있는 생명나무가 존재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였다. 아담과 하와가 그곳에서 쫓겨난 직후 인간은 생식을 통하여 자녀를 산출하기 시작했다. 가인과 아벨은 첫째와 둘째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생명나무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주시고 있다. 

 

3. 인간의 영혼은 언제 어디에서 창조되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은 언제 생성되며 어디에 오는가? 사람은 일반 동물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아주 특별한 존재다. 그런데 우리도 잘 알거니와 사람의 육체는 부모의 수정란이 만나서 세포분열을 하여 생겨난다. 하지만 거기에는 유전자정보가 함유되어 있어 그 정보대로 사람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영은 어떻게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수정란에 만들어질 때에 갑자기 영이 만들어져서 갑자기 그 수정란 속에 들어가게 되는가? 이에 관하여 정보를 알려주는 2가지 단서가 있다. 첫째는 렘1:5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빚기)도 전에 너를 알았다(렘1:5)" 다시 말해, 아기가 엄마의 태중에서 생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영이 어떠한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땅에 육신의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기 전에 영이 먼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모친의 태중에서 생성되지만 영은 하나님께서 먼저 창조하신 후 그 사람 속에 넣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믿음의 조상들이 소망했던 장소가 어딘가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그곳은 하늘 본향이라고 나온다(히11:13~16). 여기서 "본향"이라는 단어는 "파트리스"라는 단어로서, 이는 "아버지의 나라", 곧 "조국"이라는 뜻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태어난 곳" 곧 "고향"이라는 의미까지 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가기를 바라고 소망했던 곳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사람의 영이 원래는 하늘에 있다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의 영이 창조되는 공간은 하늘이며, 아직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영이 그곳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다음,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감으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4. 사람의 크기와 분량은 언제 어떻게 정해지는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에 관한 크기와 분량은 사실 이 땅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람의 영의 크기와 분량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보시고 새롭게 결정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러한 그릇으로 만드셔서 그러한 그릇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하늘에서 영이 창조될 때 이미 결정되어 있다가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따라 창조된 영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보내짐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라. 

렘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사49:1,3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태를 짓기 전에 예레미야의 영을 창조해 놓으셨기에 그를 알고 있다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영을 집어넣어주셨기에, 그가 선지자적인 사명을 갖게 된 것이고, 때가 되어서 그를 부르셨기에 그가 선지자로 쓰임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선지자도 이미 자기를 어머니의 모태부로서 선지자로 부르셨고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너는 나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창조하신 후 이 땅에 보내시는가?

  사람은 이 땅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늘에서 그 크기와 분량과 쓰임새가 결정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의 권한이다. 그분은 토기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시고 창조하신 것일까? 그것은 천국에서 사는 "거룩한 자(성도)"로 생각하시고 창조하시어 내려보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목적이 "거룩한 자(성도)"로 조성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7, 고전1:2).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그 사람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내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미 만세 전에 품으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함으로 지옥에 떨어지고,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죄짓다가 회개하지 못하고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신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더 크게 쓰시려고 준비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어떤 직분이나 직책이 주어져 있던 자들이다. 그들이 때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면 그들은 구약시대로 치면, 선지자로(렘1:5, 사49:1.3), 왕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신약시대로 치면, 사도와 복음전하는 자, 목사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엡4:11, 고전1:1).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늘에 있을 때 어떤 그릇으로 만들었는지 우리가 알고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자는 특별한 부르심으로 그를 불러내신다. 특별한 부르심이 없이 특별한 사역자로 쓰임받는 일은 거의 없다. 

 

6.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입었는지는 알았던 자들은 누구인가?

  그런데 신비하게도 이 땅에 사는 부모들 중에는 자기 자녀가 하나님의 특별한 종으로 쓰임받는다는 것을 알았던 자들도 있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보면,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은 대표적인 경우다. 그들은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는 빼어난 아이라는 것을 즉각 알았다(히11:23). 그러므로 그는 나일강에 던져 죽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몰래 3달을 키웠다. 그런데 더 이상을 숨겨 키울 수 없었던 부모는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돌려드리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그 부모는 그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워보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로의 공주가 건져 양자로 키우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모세가 애굽의 왕궁에 들어가 모든 학문과 기술와 무예를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른 삶을 살아가도록 안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자로 쓰임받을 사람은 아이가 잘 길러질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사무엘의 부모였던 엘가나와 한나의 경우를 보자. 당시 엘리 제사장 가문은 타락했고 그의 아들들을 불량자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제사장이 될 자를 이 땅에 보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아들을 주시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하는 기도가 올라온다(삼상1:11).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가정에 사무엘을 보내셨다. 그래서 그는 초기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정제도를 세우는 일이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이러한 예는 신약에 들어와서는 예수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고, 세례요한의 부모였던 사가랴와 엘리샤벳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7.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가?

  그렇다면 평신도로 나는 어떻게 살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첫째, 내가 어떤 존재로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알고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다(딤후1:9). 우리가 이 땅에 보내어질 때에는 멸망으로 들어가도록 보내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용서받아 하늘의 거룩한 자로서 살도록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내가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지를 알고 예수님을 믿어 하늘의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늘의 성도가 되는 것이다. 둘째, 내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동역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히3:1). 우리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동역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신실해야 한다. 셋째, 특별히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 보내어진 사역자들을 도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나가는 것도 요청된다.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자기는 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 것이요, 다른 주변의 지도자들도 그것을 알고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많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교회에게 부여하신 사명만으로도 가슴 벅찬 사명임을 깨닫고 충성하면 되는 것이다. 

 

8. 나오며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원래 하늘나라에서 시작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우리는 원래 고향 곧 하늘의 본향으로 되돌아가기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땅에서 살 때, 내가 누구며 어떤 존재인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뒤에는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가기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일이다. 믿음 없이 생명얻을 수 없고, 회개 없이 죄용서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이러한 부르심에 참여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목회자를 도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최선을 다해 섬기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7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늘의 종족과 땅의 종족(빌3:12~14)_2020-02-04(화)

https://youtu.be/dCqjsVj2lUc

 

1. 사도바울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했나요?(엡1:17~18)

  사도바울은 엡1:17~18에서, 에베소성도를 향하여 기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혀져서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분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아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2.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나요?

  사람은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 먹어야 살 수 있고, 쉬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의 범죄에 인해 사람의 육체 속에는 죄된 본성이 자리하게 되어서, 인간은 누구나 권력과 쾌락을 탐하며, 돈과 명예 그리고 인기를 추구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는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사람이 반지를 끼기 전에는 전에 몰랐던 권력의 맛을 알고는 그 반지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듯이 말이죠.

 

3.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것인가요?

  사람은 특별하게 창조된 신비한 종족입니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없는 영(spirit)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체를 위해서도 살아야 하지만, 더욱 더 영혼을 위해서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이 물질세계에서만 살며 또한 그 시간이 120년정도로 한정되어 있지만, 영은 혼과 결합되어 살다가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여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시간은 사실 영혼의 때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농부가 밭에서 콩을 재배하는 이유는 단지 콩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콩(알)을 얻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체를 얻기 위해 이 땅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저 하늘의 사람을 얻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에서 살게 하기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세상에서 우리가 진짜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땅에 있을 때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저 세상의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의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하늘의 종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영화 "헤리포터"라는 영화에서 헤리포더가 자신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마술을 사용할 줄 아는 종족인 것을 깨닫고 그것을 훈련하고 배우듯이 말입니다.

 

4.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성도들을 어떠한 존재라고 명명했나요?(히3:1)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히3:1)" 그렇습니다. 사람은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나기는 하지만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반대로 땅의 것에 몰두해서는 아니 됩니다(골3:2). 왜냐하면 이 땅의 것은 썩어 없어질 것이며, 죽을 때에는 그것이 나의 영혼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세상은 내 육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의 것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늘의 종족인 우리 인간이 이 땅의 것에만 몰두하고 이 땅의 것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땅의 것을 얻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여 남의 것을 빼앗거나 착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결국 죽음 앞에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내 자신의 정체성 곧 나는 하늘의 사람 곧 하늘의 종족이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 태어난 땅의 종족이지만 실은 하늘의 종족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연 하늘의 종족으로서 합당한 것인가를 늘 관찰해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혼을 가진 특별한 종족으로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귀히 보시고 그들을 위해 하늘에 정말 좋은 것들을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5.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다고 했나요?(빌3:12~14)

  사도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기 전에는 결코 자신에 대해 만족하거나 자신을 자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영적인 하늘의 것을 얻고 또한 그것을 위해 사역을 감당해 왔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이미 얻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전하게 된 채 있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헤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갈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땅의 것을 얻는 데에 자신의 삶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아서 자신도 그 발자취를 따라감으로 하늘에서 받을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해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예수님처럼 이기는 자가 되어, 하늘에서 받을 기업이 있음을 알고 이 땅에서의 부끄러움도 마다하지 않은 채 살으셨던 예수님처럼, 오늘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를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왜나하면 예수께서도 그러한 삶을 사셨기에 죽음 이후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땅의 사람이지만 정말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요?

 

2020년 2월 4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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