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8(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진정한 소망(벧전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M2sh7IvBxwc  [혹은 https://tv.naver.com/v/29303960 ]

 

1. 들어가며

  우리에게 '바울'이라는 사도와 그리고 '베드로'라는 사도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왜냐하면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 선택받은 사도였으며,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선택받은 사도였다. 그러므로 굳이 그들을 시간차로 구분한다면 한 약 8년어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복음전파의 대상이 조금 달랐다. 베드로는 주로 할례받은 이들 곧 유대인들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며, 바울은 주로 할례받은 이들 곧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갈2:7~8). 그렇다면 이 두 사도가 전파했던 복음전파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지난 주에 바울이 말년에 기록된 에베소서를 통하여 바울이 드린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베드로가 말년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가 진정 바라고 소망했던 성도들의 산 소망이 무엇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도들의 편지를  통하여 그들이 진정 성도들을 향하여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소원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왜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가 되었고 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을까?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한 번 베드로를 어린양의 12사도들 가운데 대표자로 세웠으면, 그를 끝까지 사용하시어 이방인의 선교까지 담당하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를 그대로 놔둔 채로 또 다른 사람 곧 바울을 선택하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한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에 대해서 유연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 그랬던 것일까? 그것은 두 사도들의 탄생과 성장배경에서 찾을 수가 있다. 바울은 이방지역인 길리기아 성의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곳은 로마의 속주였다. 그리고 어찌되어서 그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의 아버지는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바울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다 더 여행이 자유로웠고 로마시민으로서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헬라어, 히브리어(아람어), 로마어(라틴어)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헬라파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율법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났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된 것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그는 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는 순간 그가 해야 할 복음전파의 사명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행9:15~16).

  그러나 베드로는 좀 달랐다. 베드로는 히브리파 본토박이 유대인이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 나라로 치자면 서울이 아니라 부산과도 같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근거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벳새다에서 태어나 자랐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율법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음식법대로 음식을 먹어왔고 정결법을 잘 지키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과 식사 한 번 하지 않았으며, 이방인의 집에 방문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는 이방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환경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고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좋지 않은 선입관은 그에게도 게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 상당기간 동안 그는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 가서 이방인교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가 한 번은 사울의 사역지인 안디옥교회에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본토박이 유대인들이 온다고 하자 식사자리를 쓸쩍 피해버린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바울로부터 면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하던 베드로가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3. 베드로전서는 대체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그렇다면 베드로는 끝까지 이방인 복음전파에 있어서 소극적으로 임했던 것일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베드로전서는 그가 죽기 약 1넌 6개월 전이나 2년쯤에 로마에서 쓴 편지다(그의 나이는 70대 중반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때도 여전히 유대인들 특히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는 이제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어버린 예수님의 사역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는 오늘 읽었던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다. 그런데 1절 말씀에 보니, 그들은 로마의 속주인 소아시아지역에 위치한 여러 주들에 흩어져 거주하는 나그네들(체류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은 본도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을 통해 혹시 우리는 그것이 흩어져 거주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의 여러 속주로 흩어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읽어보면 그들이 누군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벧전1:18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들이 헛된 행실을 물려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벧전2:10에 의하면 그들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벧전4:3에 의하면, 그들은 무법한 우상숭배를 자행해 왔으며, 이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을 즐겼다고 말한다. 고로 우리는 이들은 로마에 거주했다가 흩어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베드로가 말년에 되었을 때에 그는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누구든 다 형제자매로 받아주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4.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 편지의 수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고 있었을까?

  베드로가 편지를 보낼 당시 편지의 수신자들은 흩어진 지역에서 많은 고난을 겪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의 신들이나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요, 우상숭배 후에 벌어지는 술취함과 방탕함과 음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불신자들로부터 엄청 비방을 받았고 인격적으로 모독적인 말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일터에서 해고를 당하기 일쑤였고, 폭행과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은 살 곳을 찾아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들어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히11:38). 실제로 이들이 동족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도망가서 산 지역 중에서 '가바도기아'를 가보니,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은 바위에 구멍을 파고 집을 만들어 살았고, 거기에서 수백년을 거주했던 것이 확인이 된다. 그랬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대인도 아니었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나니, 말씀대로 살아야 했고 죄를 거부하고 살아야했기에 사회적으로 따돌림과 불이익을 당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5. 베드로는 핍박과 고난 중에 있던 흩어진 나그네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라고 칭했을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비록 땅에 살고 있어도 그들의 신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편지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3가지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피뿌림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벧전1:1~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거듭난 자로서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하였다(벧전1:3~4). 그들은 이제로 하늘의 상속자로서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로서 잘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믿음을 통해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된 구원을 받은 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받은 이들이라고 했다(벧전1:5). 이들은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원받은 이들로 있었던 것이다. 고로 우리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상속자로 잘 준비되고 있던 자들인 것을 알 수가 있다. 

 

6. 베드로가 언급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베드로가 언급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지난 주에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성도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에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고, 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로부터 풍성한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의 핵심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그것은 곧 베드로의 간절한 소망과도 같은 것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럼, 베드로가 ㅁ라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놀라운 사실은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성도들이 가져야할 살아있는 소망은 하늘에서 우리 성도들이 받을 유업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으로 받을 자들인 것이다. 

 

7.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을 확실히 일치한다. 그것은 곧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서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말하고 있는 하늘의 유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차지하게 될 하늘나라의 기업의 속성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동일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크고' '풍성하고'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엡1:17~18), 베드로는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유업의 3대 특성을 그것의 '영원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의 속성을 3가지로 말했다. 첫째는 그것이 썩지 않는다고 했다(벧전1:3a). 즉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의 받을 유업은 불멸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더럽혀지지도 않는다고 했다(벧전1:3b).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악한 영들의 공격도 없으며 죄지를 일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쇠하지도, 시들지도 않는다고 했다(벧전1:3c). 이는 하늘나라에서 유업으로 받은 상은 결코 약해지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받게 될 유업의 상은 결코 썩거나 더럽혀지거나 시들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은 유업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예를 들어 하나의 건물을 내가 유업으로 받는다고 하자. 그 건물이 처음에는 빛나고 화려하고 멋있게 보일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은 낡아지고 더럽혀지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유업은 영원무궁토록 빛날 것이라는 것이 베드로가 말한 하늘나라의 기업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8.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게 될 유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게 될 유업이 3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영원히 거주할 처소로서 천국집이요 또 하나는 빛나는 면류관이며, 마지막 하나는 성도들의 보좌에 앉아서 왕노릇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러한 유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을까? 역시 그도 바울과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도 역시 하늘에서 성도들이 받을 유업이 3가직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첫째로, 하늘에 장막집이 있다고 했다(벧후1:14). 그리고 둘째로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벧전5:3~4).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로, 왕같은 제사장직분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벧전2:9). 고로 우리는 두 사도 역시 유업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곧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간절한 소망은 서로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9. 나오며

  아무리 성도라 할지라도 사람은 무두가 땅에서 산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땅에 사는 이들로부터 때로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들과 같이 죄를 지어야 하는데 우리는 죄를 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둠에 속한 일도 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을 하려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기 일쑤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로부터 핍박과 멸시를 당하기도 하며,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죽임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우리는 죽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서 받을 유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은 껍데기를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니다.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땅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의 고난은 영광으로 변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핍박받으며 흘린 눈물은 보석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련이 깊어질수록 그것에 낙심하고 넘어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쇠하지도 아니하는 기업이 영원토록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09-16(금) 금요기도회

제목: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엡1:5과3: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lkSUcY0XEc  [혹은 https://tv.naver.com/v/29303680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갈 때에 어떠한 신분으로 들어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갈 때 우리가 갖게 될 신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때에 어떤 사람에게 정해진 신분은 영원한 그 사람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고로 천국 안에서는 신분상승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서의 신분은 이 땅에서 우리가 수고하고 심은 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때에 한 번 받은 신분은 영원히 그대로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하늘나라의 상속자'라는 신분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서는 우리 믿는 이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어떠한 신분으로 들어가는지와 더불어 상속자는 과연 누가 되는 것이며, 천국에서 보다 나은 신분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받게 되는 기본적인 신분은 무엇인가?

  천국에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열려져 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절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최소 2가지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며, 둘째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과 '회개'가 그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받게 되며, 회개를 함으로 죄사함을 받게 된다. 특히 여기서 하나님으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을 가리켜,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하며, 그 뒤부터는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함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명이 없어도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지만, 죄가 있어도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성도를 어떻게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른다. 여기서 '자녀'라는 말은 사실 의역해서 한 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딸'이라는 말은 사실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 내지는 '하나님의 자식들(the children of God)'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식들'이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테크나 데우'인데 이는 영어로 'the children of God(하나님의 자식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단수로 표현하면, 'the child of God(하나님의 자식)"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번역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번역했던 뿐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붙여지는 칭호는 '하나님의 자식(자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식을 성경에서는 또 다른 용어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대상이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은 백성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대표적인 표현은 역시 '하나님의 자식(자녀)'인 것이다. 

 

3. 천국에서 누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 가운데 누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가? 하늘나라 곧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은 원래는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어받는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이는 성도들 중에 하늘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을 받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당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시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 나라를 물려받을 합당한 자격을 가진 자에게만 그 나라를 물려주신다. 그럼, 하나님께서 상속자에게 물려주시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신분과 지위'요 또 하나는 하늘나라의 '땅'이다. 특히 신분과 지위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스리는 자'라는 신분과 지위를 주실 것이다. 이러한 신분과 지위도 사실 천차만별인데, 그것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최고의 지위는 역시 예수님처럼 왕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지만, 성도들은 그분이 가지고 있었던 지위의 일부를 물려받아 어떤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하늘의 상속자는 하늘나라에서 왕이 되어 자신이 다스리는 공간 곧 땅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크며 어떤 것인지는 마태복음에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마25:14~30)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열 므나의 비유를 통해 암시되어 있다(눅19:11~27)

 

4. 바울은 말년에 에베소 교회를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렸는가?

  바울의 생애 가운데 말기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편지를 써 보낸 것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때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옥중서신을 써보냈는데, 그 편지 가운데에 바울의 그 유명한 기도가 들어있다. 그때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엡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해 2가지를 기도한 것이다. 하나는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들이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구하지도 않을 뿐더러 역시 그것을 차지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어떤 것을 주시기를 바라고 계시다고 말했을까? 그것은 3가지다. 첫째는 '부르심의 소망'에 관한 것이다(엡1:18a).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과 마귀로부터 불러내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자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는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쁘신 뜻으로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식이 되게 하시겠다는 내용이었다(엡1:5).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단어다. 그런데 지금도 유대인들은 할례받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부르심의 소망은 거기에서 끝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을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작정하셨다는 것이다(엡3:6). 이는 원래는 예수님만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하늘나라를 상속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우리를 세상과 마귀로부터 불러내신 바로 그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성도 안에서 그분의 '기업의 풍성함'이다(엡1:18b).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은 '유업, 상속재산'이라는 뜻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나라를 상속으로 물려주실 것을 예정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풍성하게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 땅에서 힘써야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받아누리게 될 상속분량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우게 주시고자 하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누리게 될 그분의 크신 능력이다. 이것은 온 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천사와 귀신들을 복종시키는 능력이며,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다. 이것을 위해 사도바울은 늘 기도했던 것이다. 

 

5.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상속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그분의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수준으로는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최소조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분의 상속자가 되고 그분의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충분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순종'과 '충성'이다. 그것은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서로 사랑하라", "남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라.", "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가르치라', "봉사하라" 등의 말씀에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자신의 달란트와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을 가리켜 '충성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소임이 없는 자는 충성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주의 종이 어떤 일을 맡겨주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시는 일인 줄 알고 충성하는 자는 뭔가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아예 처음부터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이 세상에 들어온 자들이 있다. 그러한 직임은 주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며, 주님이 그에게 맡겨주시는 것이다. 고로 이러한 주님 명령에 충성하는 자는 결국 천국에서 반드시 상속자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기업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자가 하늘나라를 상속받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자신에게는 이러한 책임이 맡겨진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책임을 맡은 자와 함께 일할 때에 책임을 맡은 자가 받게 될 상에 같이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10:40~42).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직접 책임을 맡지는 않았어도, 자신이 가진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다른 주님의 사역자와 사역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물질로 헌신하며 봉사할 때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바울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 어떤 길을 달려갔을까?

  그렇다면, 바울은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자신이 상속자가 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갔을까? 사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아들들)'에게 운반하기 위한 그릇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행9:15). 그러므로 그의 삶을 살펴보면, 비교적 초기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는데 혹 잘못하다가 버림을 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전9:27). 하지만 그의 말년에 그가 로마의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서 위에서 자신을 위해 준비해놓으신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빌3:13~14).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고 그의 순교하기 직전에 쓴 편지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달려갈 길을 잘 마쳤다고 말했다(딤후4:7~8).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된다면 그에게는 어떤 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은 첫째로, 빛나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딤후4:7~8). 이것은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예의 상'을 가리킨다. 둘째로, 하늘나라에서 왕노릇하는 신분과 지위 그리고 차지할 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딤후2:11~12). 그리고 셋째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 거처 즉 천국집이 기다리고 있다(요14:1~4).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속자의 신분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실 기업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우리의 길을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신앙생활의 목적을 위해 살아왔으며 달려왔는가? 어떤 이는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천국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한 번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받게 될 신분과 그 지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한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천국에 들어갈 때에 얻게 될 땅이 얼마나 크고 엄청나다는 것을 그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섬기는 자'의 신분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다스리는 자'의 신분으로 들어가느냐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20:26~27). 이러한 성도들은 에베소서를 더 공부해야 한다. 에베소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더 들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늘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하며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서 후회하거나 천국에 들어가서 다른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진 자를 영원히 부러워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목표가 달라져야 한다. 천국은 다 똑같은 신분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우리가 똑같은 신분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자식)'이라는 신분일 뿐이다. 천국에서는 하늘나라의 '상속자'라는 신분이 더 있으며, 이것도 다 똑같은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속의 분량이 각기 다른 신분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 회개생활을 잘 감당하여 천국에 들어갈 최소조건을 잘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더욱이,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영원히 누리게 될 기업의 풍성함을 얻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맡겨준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9월 16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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