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8) 예수께서 제4표적과 제5표적을 행하신 이유와 그 영적인 의미(요6: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KsFAZXxxqY  [혹은 https://tv.naver.com/v/30623657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에서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불릴 만한 7개의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바, 전반부는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고(1~12장), 후반부는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13~21장). 전반부는 보통 '표적의 책'이라고 부르며, 후반부는 보통 '영광의 책'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7가지 표적들 가운데 포함시켰으며 또한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 '표적'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오늘 다루게 될 2가지 표적들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표적들인가? 

 

2.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4표적과 제5표적을 보는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6장 1~15절과 16~21절에서 7가지 표적 가운데, 네 번째 표적과 다섯 번째 표적을 수록하였다. 이들 중에서 네 번째 표적은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린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 공관복음서에도 공히 기록되어 있는 표적에 해당한다. 그런데 원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인데, 왜 네 번째 표적으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요한복음에도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마태복음과 그리고 마가복음에도 등장하고 있는가? 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도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요한복음에 수록해야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두 가지 기적이 '표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기적일 때에 붙일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그분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놀라운 표적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복음에 수록된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것과는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는 단지 예수께서 이런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기적들을 표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공관복음서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기적들이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3.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떤 관점으로 기록된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떠한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는가? 우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관복음에서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께서 빈 들에서 행하셨던 음식의 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병이어(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성인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공관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할 때에는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리고 설교할 때에는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구체적인 기사를 공관복음 설교에 가져다 쓴다. 그래서 빌립처럼 저녁 식사 비용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계산만 하지 말고, 안드레처럼 예수님께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를 갖다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래서 그 작은 헌신이 결국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게 되면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건축을 하려 할 때에도 계산을 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작은 마중물이라도 주께 드리게 되면 그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러한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왜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건 2가지다. 첫째는 그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을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만나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까지 말해 준다. 사실 오병이어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저녁을 먹게 할 수는 없다. 당시 빌립은 200 데나리온 어치 떡을 구입한다고 할지라도 2만 명의 군중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200 데나리온으로 떡을 구입했을 경우 약 6,000명 정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병이어로 계속해서 창조의 기적을 행하시는 방법 이외에는 불가능한 것인데, 예수께서 그렇게 행하셨으니 예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 요지다. 그리고 둘째, 그분이 왜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려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영혼의 필요 곧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육신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필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분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구주로 붙들어서 하늘의 참 생명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생명을 주는 자이며,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영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표적만 추구하는 표적주의 신앙의 끝은 어떠한 것인가?

  그런데 당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한 끼의 저녁 식사를 해결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예수께서는 당시 수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먹을거리를 책임져 달라는 것이었다(30~34절). 마치 모세가 매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었던 것 같이, 이제는 예수께서 모세가 되셔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거리를 계속 제공해 달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못 먹고 못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의 영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러한 혜택을 계속해서 제공받게끔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15절). 그들에게 예수님만큼 좋은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즉시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백성들의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유월절 전날 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왕이기는 하지만 어떤 왕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벳새다에서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이유는 진정 자기들의 영혼에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던 것이다(26절). 

 

5.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통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제자들이 바다를 노저어 가다가 풍랑을 만난 뒤, 배가 뒤집혀질 위기에 처하자, 예수께서 그들을 살려 주시려고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들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건져 주신다는 것으로 설교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다섯 번째 표적으로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목적이 공관복음이 말하고 있는 목적과는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당시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워 줄 적임자로 알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제자들만큼은 자신의 스승이 기적을 일으켜 사람들을 배고픔에서 건져 주실 분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믿고 따라갈 예수님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이 표적을 기록한 것이다. 즉 그들이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다름 아닌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일부러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나니'라는 말은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으로서, "나 자신은 나다."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뜻으로서,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아주 특별한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표현으로 계속 등장한다. 또한 그때 제자들이 떨었던 것은 그들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떨었던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눈으로 목도함으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던 군중들이 다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떠나가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또한 이 땅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만큼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분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신 바 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6:68~69)" 그렇다. 이러한 대답은 제자들만큼은 여타의 군중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당시 군중들에게 어떤 권면의 말씀을 하셨는가?

  그때 군중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주님을 찾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산 위로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밤에 배타고 가버나움으로 갔는데,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되자, 다음날 그들도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쫓아간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로, 이제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다(27절). 또한 그 양식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그때 군중들은 왜 가버나움까지 쫓아왔는가? 그것은 먹으면 소화되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으면 썩어 없어질 한 끼의 식량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육신의 양식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지 채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결국 주님께서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 그들의 곁을 떠나셔야 했는지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보내셨던 자신을 믿어서 영생을 얻으라고 권면하셨다(28~29절). 그들은 그때까지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일시적인 혜택을 맛보는 것일 뿐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혜택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가 만나를 매일 내려 준 것처럼 예수께서도 자기들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 아니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교정해 주었으며, 하나님의 떡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알려 주셨다. 

 

7. 나오며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다. 왜냐하면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의 표적들 가운데서 일곱 가지 기적만을 따로 모아 요한복음에 수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에서는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한 일곱 가지 표적을 만나게 된다. 그래야만이 독자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며, 그분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표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자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이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눠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이 보는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벳새다의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같이,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을 알라고 일으킨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찾든지 그가 진정 예수님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하늘의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 결코 썩어 없어질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만 주님을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로서 교회에서 바라고 소망할 것은 교회가 무슨 먹을거리를 주지는 않나가 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의 영혼에 필요한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시간 한 시간 떼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고로 이제는 내가 교회에서 과연 생명을 공급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09일(수)

정병진목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믿고 따라갈만한가? 결론적으로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유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는 아마도 잘 몰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고 실행하지 않는 그러한 째째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스스로 계셨던 한 분 하나님이시요, 그분이야말로 전지전능한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한 번 뜻을 정했다면 그,분은 결코 자신의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2020-08-23(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33)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21) 예수님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이시다(1)(계1:17~18)
https://youtu.be/c3gNGrwOMXc [혹은 https://tv.naver.com/v/15399982 ]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누군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면 우리는 미신에 빠질 수 있고 결국 우상숭배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경은 그분이 누군지에 관하여 분명하게 제시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만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위장한 귀신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예수께서도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분이 영원불변하시는 분이는 점에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고 우리는 과연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지에 관하여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과연 신뢰할만 한 것인가?

  좀 이상한 질문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 과연 믿고 따를만한 분인지에 관한 한 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분을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없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고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는 것 뿐이요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도 될 만한 분이신가? 정답은 한 마디로 "100% 그렇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만하다는 그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첫째, 그분이 누군지 몇 몇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분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누군지를 계시함으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신뢰할만한 분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도 역시 우리들에게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셔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잘 된 일이며 복된 일인지를 가르쳐주신다. 둘째, 그분의 속성이 바로 그분을 믿고 따를 만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며 재판을 굽게 행하지 아니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욥기 34장을 읽어보라. 엘리후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욥34:10-12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렇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결코 불의를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은 신뢰해도 되는 것이다. 그분을 믿고 따라가도 되는 것이다. 그분은 진실로 공의를 굽게 하지 않으시며 심판을 집행하시되 반드시 사람들이 행한대로 공의를 따라 의롭게 판단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으며 그분을 믿고 따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째, 그분은 일시적으로 사람과 함께 있을 대상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토록 함께 계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그분을 떠나서 그 어떤 것도 결국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그분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3.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존재하셨는가?

  신약시대에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그중에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들어온 분이신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맞지만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때가 차매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 안으로 오셨기 때문이다(요8:42,갈4:6). 그러므로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치부해서는 아니 된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실로 자존자이시며, 무소부재하신 자시이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자 영원불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는가? 그분은 족장들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피흘려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사람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자신을 아들로 계시하신 예수님은 실은 원래 한 분 하나님이셨고, 구약시대로 치자면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하여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는 속성에 대해서는 구약의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그분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 영원하시며 불변하시는 사실을 알려면, 우리는 구약시대에 자신을 계시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영원성과 불변성이 어떻게 언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곧 그것이 예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이라고 이해해도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약성경은 히브리인들만의 경전이요 유대교의 경전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믿는 기독교인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진리의 책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라는 뜻은 무슨 뜻인가? 그것에 대해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102:1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102:25-27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하나님만이 영원히 계시고 그분만이 한결같으시며 그분이 무궁하시다는 것이다. 그럼, 다른 것들은 어떠하다는 것인가? 다른 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또한 변경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말은 그분이 시간적으로 볼 때에도 영원하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따르게 된다면, 그분은 변함없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세상 권력자를 의지한다고 해보자, 그가 가진 권력이 영원할 것인가를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도 인간이기에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권세자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만 통용되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어느 시대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또 다른 존재를 우리의 의지의 대상으로 정할 필요가 없다. 그분을 의지하는 것은 영원히 유효하고 든든한 것이며 영원히 안전한 것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90:1-6 주여(아도나이), 주(당신)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그렇다. 시편기자는 오직 주님만이 대대에 우리 인생들의 거처가 되실 수 있고, 그분만이 영원하다고 했다. 또한 그분만이 전저진능하시기에 그분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일 그분이 우리더러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분의 말에 모든 만물은 다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분의 시간 속에서 볼 때, 밤의 어느 한 경점과 같을 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생은 아침에 돋아났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되면 곧 시들어버리고마는 풀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시간 밖에서, 시잔 자체를 만드시고 시간을 당신의 뜻대로 엮어가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5. 하나님이 "불변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조석으로 변하는 이스라엘 최초의 사울왕을 바라보면서, 사무엘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15:29). 그렇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하루에도 여러 번 자기의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떤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까지는 하나님은 인내를 가지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쭉 지켜 보신다. 하지만 한 번 그 사람에 대해서 결정하게 되면, 그분의 뜻을 아무도 돌이킬 수 없다. 그분은 전능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한 번 어떤 선한 뜻을 행하기로 정했다면 변함없이 그뜻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니엘을 보라. 그도 어린 청소년의 시절에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주관하는 환관장의 마음을 바꾸시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는가? 그렇다. 뜻을 정하여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인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시면 반드시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시고 성취해 가신다는 예가 있다. 그것은 발람선지자의 이스라엘 축복사건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 잘 알고 있었던 모압의 바락왕은 발람선지자를 불러 그에게 돈을 주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라고 시킨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서도 발람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민23:19-20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0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실행하신다. 그분은 언제 내가 그러한 말을 했느냐고 따지지 아니하산다. 한 번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그렇게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시려고 하는데 어찌 자신이 그것을 돌이킬 수 있겠냐는 것이다. 고대근동의 위대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한 번 정해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한 번 뜻을 정하게 되면 그분은 그것을 절대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신뢰할 만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불의하지도 않으실 뿐더라 한 번 뜻을 정하면 그 뜻대로 추진하는 일정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의 생각과 행동은 항상 일정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분은 절대 왔다갔다 하지 않는데, 우리만이 상황에 따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이다. 아니다. 하나님은 일정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면 오직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들을 찾아보고, 그 말씀대로 자기에게도 이루실 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된다. 

 

6. 유한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짧은 시간을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간과 은사와 달란트를 잘 선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도 짧은데, 어떻게 그 시간에 부부가 서로 치고박고 싸울 수가 있겠는가? 서로 사랑해주고 살아도 너무나 아까운 시간대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위로해주고 기도해주고 보듬어주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시간은 우리에게 매주 짧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초를 아끼며 시간안배를 잘 하여야 한다. 그래야 짧은 인생 가운데서도 영원한 하늘의 것을 잘 준비해 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화날 일이 있다고 해서 즉각 화를 내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다. 만약 그렇게 화내는 것을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신뢰만 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곧 신의라는 것이 깨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여러차례 반복되어 일어나게 된다면, 결국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 할지라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아. 그리고 믿음 위에서 굳게 서서 결코 세상풍조에 휘말리거나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모든 징계의 화살을 멈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나쁜 환경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 아니 된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지금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라고 말씀하셨다(계1:17~18). 이것은 그분이 곧 시작하는 분이고 또한 그분이 마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분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목적 대로 모든 것일 이끌어가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분은 결국 당신이 원하시는 결과를 낳게 하고 마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처럼, 영원히 존재하신 분이며,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고 안전하고 든든한가를 믿고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지금도 만물의 근원으로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이끄신다. 또한 그분은 만물의 결과를 지금도 만드시고 계신다.  그분이 마지막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하고 알았다면 그분의 말씀의 섭리를 믿고 오늘도 그분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우선 그분의 속성을 하나님을 스스로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결코 그분은 스스로 불의를 행하실 수 없다는 것과, 그분은 결코 스스로 재판을 굽게 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속성은 항상 선하시며 항상 의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러한 속성은 한편 영원이 지속될 것이다. 그분만이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영원히 선하시며 의로우시고, 또한 불의하지 아니하시고 공평하게 행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그분이 바로 육체를 입고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불의를 행하지 말고 항상 공평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쭉 지켜보시다가 어느날 "합격"이라고 판정을 내리시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만을 믿고 신뢰하고 따라가야 한다. 그런 성도가 복된 성도들이 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8월 23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28)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16)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2)(마18:18~20)_2020-08-18(화)

https://youtu.be/dEsCY_IGCt4 [혹은 https://tv.naver.com/v/15308722 ]

 

 

1.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님에게도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신성한 본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한 분이셨으므로, 그분에게는 자존성과 무소부재성, 전지전능성, 영원불변성 등이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다만 육신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육신 자체만으로 볼 때에 예수께서는 무소부재성에 있어서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2.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도 여전히 신성한 본성에 있어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증거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도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18:20). 그런데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이유는 사실 기도하기 위해 모든 모였음을 문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현장에 항상 예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육체를 지니셨기에 비록 육체적으로는 무소부재하지 않으셨지만, 영으로는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 현장에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3. 육체를 가지셨지만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무소부재하시다는 실례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요한복음1장 43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면서 부정적인  태로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이 예수님의 출신을 나사렛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나사렛"은 "네째르"라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써, 뿌리에서 올라오는 감람나무의 새로운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기에, 예수께서 다윗의 뿌리요 모든 인류의 근원이 되심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오직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나, 사신 곳이 나사렛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도 간곡히 권면하자, 빌립을 따라나서게 된 나다나엘은 주님과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께 어떻게 자신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현재의 시간에 계신 예수께서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현장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 과거의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영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현장에 현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4. 거슬리는 풍랑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나요?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는 육체만큼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어느날 예수께서는 기도할 일이 있어서 남으셨고 산 위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고 있는데, 제자들이 먼저 배타고 가다가 거센 풍랑과 마주치므로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건져내기 위해 육체를 지니셨던 예수께서는 빨리 제자들에게 가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은 상태라, 갑자기 밤에 배를 빌릴 수는 없으니, 그냥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배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도 육신을 입으셨을 때에는 육신적으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제한을 받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의 영은 신성한 본성 안에 있었으니 제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다 보실 수가 있었고 또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영적인 세력을 제압하시고자, 예수께서는 걸어서 배에까지 가신 것입니다. 이는 언제고 당신의 백성들이 위험한 현장에 있을 때에 주님은 거기에 아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도와주신다는 점을 우리에게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5.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나요?

  지금 하늘에서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상태로서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마28:20).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현장에서 드고 계십니다(마18:20). 그리고 즉시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도 하십니다(막6:48). 그러므로 지금도 하늘에서는 천상에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예수님 앞에, 모든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들과 구원받은 신구약성도들의 대표인 24장로들이 엎드려 경배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24장로들의 손에는 2가지가 들려있습니다. 하나는 거문고요 또 하나는 금대접입니다. 거문고는 어린양되신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고, 금대접은 예수님에게 성도들의 기도를 바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받고 계십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과정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사건에 개입하시면 마귀가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기도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무소부재히신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즉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요14:14).

 

2020년 08월 1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24)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12)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4)(요8;21~30)_2020-08-14(금)

https://youtu.be/VPeQtHZVV2k  [혹은  https://tv.naver.com/v/15263189 ]

 

1. 구원얻는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는 만약 유대인들일지라도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며, 예수께서 가시는 곳 곧 천국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21). 고로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을 때에 우리의 죄도 사함받을 수 있고(막10:45), 그분이 주시는 영생(생명)도 함께 받을 수가 있습니다(요10:10). 

 

2.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일까요?

  예수께서는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마1:1,2,6,16, 롬1:3). 그런데 예수께서 비록 육신을 따라서는 마리아를 통해 탄생하셨지만, 동시에 그분은 원래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딤전3:16). 그러므로 그분은 아브라함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요8:58), 다윗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자체이십니다(계22:1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고 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시편110:1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기를,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칭했는데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입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마22:41~46). 그러므로 혈통적으로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에 있어서 예수님은 다윗의 창조주이자 하나님이십니다. 

 

3.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나  신앙고백 가운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요 하나님이신가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들이나 신앙고백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혹은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이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나온 어떠한 교리나 신앙고백에서도 예수님을 "자존자(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항목은 없습니다. 다만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분"이라고만 고백하고 있을 뿐입니다. 특히 가장 오래된 신조들인 사도신조(A.D.150년경)나 니케아신조(A.D.325년)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대신조들(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칼케돈신조)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예수님도 하나님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거기에 예수님을 자존자로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거기에 예수는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분"이라는 항목은 있어도, 그 어떤 곳에서도 예수께서 자존자라는 항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라는 말씀합니다. 동시에 예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8:24,28,58). 특히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자존자(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씀이 무려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요8:24,28,58).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던 예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로마의 권력자에게 맡겨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하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은 자존자로서 고백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고 하겠습니다. 

 

4. 예수님은 자존자로서 한 분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종속된 아들이신가요?

  예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분의 육신은 동정녀(처녀)인 마리아의 태를 빌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버지로부터 시간 이전에 나오신 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면서(종속설), 동시에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믿어야 한다면서 서로 모순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기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시간 이전에 계신 분이자,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밖으로 나오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을 가리킵니다(요1:18). 

 

5. 지금 천국에 계신 예수께서 스스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우리는 구약성경의 기록자들과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밖으로(헬라어원문) 나오시어 아들로 오셨지만,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즉 요8:42에서는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밖으로 나와서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3에서 그분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5~6에 보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원문은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신 분은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부활승천하사 천국에서 흰 옷을 입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당신은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내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계1:17b~18)"고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모세에게 비로소 알려주셨으며,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나는 여호와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44:6)", ""나 외에 다른 신이 있겠느냐?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44: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이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이후에도 없으리라(사41:10)"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천국에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셨고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육체를 입고 오신 아들의 신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지금 천국에 있는 보좌 위에 앉아계십니다. 어떤 분은 천국에서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계시며, 하나님은 보좌 위에 앉아계신다고 하는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린양"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죽임당하셨던 아들의 신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따로 있고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따로 있어, 두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천국에서 어린양이 실제로 계시다고 한다면 큰 일 납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머리가 일곱 개와 뿔도 일곱 개인데 그러면 그분은 괴물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어린양이 144,000명의 성도들을 인도하신다고 언급하고 있는데(계14:4), 그러면, 어린양이 어린양들을 인도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어린양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고로 "어린양"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찍 죽임을 당하신 분이셨음을 잊지 말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위에 실제하는 어린양이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앉아계시기 때문입니다(계2:13,21:5~6).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한 개입니다(계22:1,3). 

 

2020년 08월 14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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