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44)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와 그 앞에 있는 4생물과 24장로는?(계4:1~11)_2022-04-12(화)

https://youtu.be/I0RC06AXgn4  [혹은 https://tv.naver.com/v/26214822 ]

 

1. 사도 요한은 어떻게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앞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을까?
  사도 요한이 어느 날 밧모섬에 위배되어 있을 때에 그는 영 안에 있게 되었다. 그때 그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된다(물론 이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이었을 것이다). 그때 되돌아 보니 일곱 금촛대 사이를 돌아 다니고 있는 인자 같은 이 곧 예수님이 보여졌다. 그때 사도 요한은 그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계1:10,12~13,19). 그때 그가 '본 것'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이었고(계 1장), '지금 있는 일'은 일곱 교회에게 보낼 편지 내용이었으며(계 2~3장), '장차 될 일'은 하늘의 광경들과 환상들(계 4~22장)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난 후, 사도 요한은 하늘에 이미 열려진 채 있는 문(아마도 12진주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을 보았는데, 그때 그가 처음에 들었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을 다시 듣게 된다. 그것은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게 네게 보이리라"는 음성이었다(계4:1). 그러자 그는 자신의 영이 몸에서 빠져 나온 뒤, 하나님이 계시는 새 예루살렘 성의 보좌 앞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의 말씀에는 사도 요한의 영이 천국에 가서 직접 본 것들도 있고, 그때 주님이 장차 되어질 일을 보여 준 환상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 이것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4~5장과 21~22장은 최소한 사도 요한이 직접 본 것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2. 하나님은 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가?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보았을 때 천국에서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가? 그것은 높이 들린 보좌 위에 좌정해 계셨다(사6:1 참조). 그런데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의 눈에는 그분이 어떤 색깔과 유사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것의 하나는 '벽옥'이었고 또 하나는 '홍보석'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벽옥(Jasper)'이라 함은 바다 청옥으로써 푸른 빛을 내는 것을 가리키며, '홍보석(ruby)'이라 함은 붉은 빛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보석은 사실 대제사장이 가슴에 단 판결 흉패의 마지막 보석과 처음 보석과 같다(출28:17~20). 다시 말해, 이 보석은 오메가와 알파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좌에 둘러 있는 무지개가 그의 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 무지개의 색깔은 '녹보석(emerald)'과 같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빛은 푸른 바다 빛깔이었고, 빠알간 루비색이었던 것이며, 보좌 주위에는 초록 빛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색깔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를 암시해 주는데, 예를 들어, '바다의 푸른 빛'은 하늘색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성, 엄위성, 무한성을 가리키며, '빠알간 루비 빛'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짐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 친밀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화목제물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따뜻하 분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였다면 이제는 은혜의 보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엄위하신 분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와 같이 친밀하게 되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보좌에 둘러서 초록 빛이 나오고 있었다. 이는 구약시대에 여러 선지자들이 본 것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주위에는 불이 타오르고 불이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A.D.95년경에 본 하늘의 광경에서는 불이 아니라 초록의 어떤 빛이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생명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거기에 무지개가 있는 것은 노아 때의 무지개처럼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3. 하나님의 보좌는 한 개인가 두 개인가?
  그때 사도 요한이 보았던 보좌는 과연 한 개였는가 두 개였는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니까,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가운데에 있고 그 보좌 오른편에 또 다른 보좌가 있어서 거기에 예수님이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두 개가 아니라, 딱 한 개뿐이기 때문이다. 그 보좌에 주 하나님이 앉아 계신다. 그것도 전능자로서, 전에도 계셨으며,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가 앉아계신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22장에 가면, 그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2:1,3에 보면, 그 보좌는 비록 한 개이지만 그 보좌를 가리켜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라고 언급하고 있다. 보좌는 한 개 뿐이지만 이 보좌를 수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 이렇게 둘로서 그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이면서 동시에 어린양의 보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가 이제는 어린양의 보좌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 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셨으니까 그 보좌를 '하나님의 보좌;라고 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기에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세 전에 인류 구원을 위해 예정된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다시 하늘로 가셨다. 그리고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시고 모든 것에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사실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또 다른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활승천하신 후하나님의 보좌에는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보좌에 앉아 계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 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비공유적 속성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그려놓은 삼위일체나 이위일체의 그림은 모두가 다 잘못된 것이다. 어떤 그림은 하나님의 보좌를 3개를 그려놓고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보좌를 2개로 그려놓은 것도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단지 한 개 뿐이며, 거기에 이제는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계21:5~6,22:12~13,16, 3:21). 

 

4. 하나님의 보좌 옆과 앞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좌 옆과 그리고 앞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먼저 하나님의 보좌 옆에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4명의 생물이 있었다(아마도 앉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더 바깥으로는 반타원형 형태로 24개의 보좌들이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앞쪽으로 놓여져 있는데, 보좌들 위에는 24장로들이 머리에 금 면류관(승리관)을 쓰고 앉아 있다. 4생물과 24장로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다음 이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나님의 보좌 앞 가까이에는 첫째로, 하나님의 일곱 영인 성령께서 일곱 등불로 불이 켜진 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더 앞쪽으로 나아가서는 둘째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도들과 천사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성도들은 70줄로 144,000명이 보좌에 쭉 앉아 있으며, 그 너머에는 허다한 무리들이 서서 예배를 드린다. 참고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좀 떨어져서 70줄로 144,000명이 앉아 있는 것은 천국에 직접 가서 본 분들이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실제 사람들과 천사들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간증한 것을 바탕으로 말한 것이다. 

 

5. 왜 하나님의 영은 등불로서 표현되어 있으며, 일곱 개의 등불로 형상화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다(계4:5). 여기에 나오는 일곱 등불은 일곱 촛대는 아니다. 일곱 개의 등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이 땅에 보내어진 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 땅에 관련된 완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곱 영은 요한계시록 5:6에 보면, 어린양의 일곱 눈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파송한 영이 하나님의 일곱 영이며, 일곱 영은 곧 어린양의 눈이 되어 이 땅을 감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당신을 소개할 때에 "그의 눈이 불꽃 같고,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하셨다(계2:18). 이는 예수께서 심판주로서 불꽃 같은 눈으로 모든 사람의 뜻과 마음을 감찰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167장에 나오는 보혜사 성령은 예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에 파송한 영으로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믿는 자들 속에서 내주하시어 일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곱 영이 등불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우리는 삼위일체로 표현되고 있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2개 내지는 3개가 아닌 것과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을 더욱 더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2022년 04월 12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74)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35)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계3:1~6)

https://youtu.be/RJ8kW-LoajU  [혹은 https://tv.naver.com/v/16036360  ]

 

 

1. 사데 교회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나요(계3:1)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사데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에, "하나님의 일곱 영들과 일곱 별들을 가지고 있는 이"로 소개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일곱 영들"과 "하나님의 일곱 별들"은 무엇을 가리키나요(계2:1,4:5,1:20)

  주님께서 언급하신 "하나님의 일곱 영들"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계1:4)"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개의 등불들"을 가리킵니다(계4:5). 그런데 일곱 등불들은 일곱금촛대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일곱 등불들입니다(계1:12). 그런데 예수께서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게1:20). 그렇다면, "일곱 별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의 사자들(메시지 전달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계1:20). 일곱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지도자들 곧 주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3.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였나요?(계3:1~2)

  사데교회는 A.D.95년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계1:11, 3;1). 이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 안에 한 개의 교회만 있는 교회가 아니라, 한 도시 안에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 교회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데"라는 지역명이 다 복수로 쓰여있기 때문입니다(계3:1,4). 그런데 이 교회는 칭찬은 하나도 없고 책망만 있는 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행위를 보고서, 살아있다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있는 교회라고 평가하셨습니다(계3:1). 왜냐하면 이 교회의 거의 전부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입고 있는 흰 옷이 이미 더럽혀진 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명책에 기록된 그들의 이름들이 이제는 거의 지워져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황제숭배나 우상숭배의 유혹과 명령 앞에서 이들은 거의가 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계3:4~5). 

 

4. 왜 예수께서는 거의 죽어있다시피하는 이 교회에게 자신을 가리켜, "성령을 가지고 계시고 주의 종들을 붙들고 있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요?

  지금까지 여러 교회들의 경우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주님께서 어떤 교회에 편지를 쓰라고 하실 때에는, 주님께서 당신을 소개하는 구절에서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개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그 교회의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사데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에, 그분은 "성령"을 가지고 계시며, "주의 종들"을 붙잡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요? 그것은 교회가 아무리 타락했어도, 또한 그 교회 성도들의 생명이 거의가 다 꺼져가고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에게서 결코 성령을 거두어가시지 않으시며, 또한 그들을 끝까지 붙여주시어 그들의 회개하도록 돕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회개에 있어서 핵심은 주의 종들에게 있다고 보셨기에,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주의 종들을 붙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한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를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붙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의 종들이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더욱 더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 당시 보혜사 성령께서는 구약시대와는 경륜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한 언제 떠나실 수 있나요?(요14:16~17,엡4:30)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은 성도들이 아무리 타락해도 또한 주의 종들이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성령을 끝까지 거두어가시지 않으시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불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에 사람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은 영영 떠나지 않으시는가 아니면 떠나실 수도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보통 성도들은 한 번 신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결코 그 사람을 떠나지 않으신다고 들었을 것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소개하는 말씀 속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글성경으로만 보면, 한 번 주어진 보혜사 성령은 결코 성도들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영원토록"이라는 단어가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직역하면, "그 세대까지" 혹은 "그 시대동안"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살고 있는 그 시기동안에는 성도들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 시기는 언제까지일까요? 그것은 엡4:30에 따르면, 우리의 몸이 구속받아 다음의 세계로 들어갈 때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는 떠나가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부인한다거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성령께서 떠나지 않으시나, 그가 죽는 날에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실 수도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는 날에도 성령께서 계속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좋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날에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도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에 쉽게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을 때에 자신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는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만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음을 확고히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 용서받게 되기 때문입니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 날에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려면,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하며, 지은 죄가 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20년 10월 01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27) 구원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15)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1)(마28;16~20)_2020-08-17(월)

https://youtu.be/fmdSCUTzlOk  [혹은  https://tv.naver.com/v/15297182 ]

 

 

1.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비공유적 속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하나님께서 전능자로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속성이 있습니다. 첫째로서는 자존성이요, 둘째는 무소부재요, 셋째는 전지전능이며, 넷째는 영원불변입니다. 그중에서 첫번째 "자존성"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원인이 없이 스스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요한복음 8장의 말씀(요8:24,28,58)은 예수께서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한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분이자 창조주이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나와있는 어떤 신조나 신앙고백에도 예수님의 자존성을 언급하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하나님께서 "무소부재(Omnipresence)"하시다는 말은 그분은 계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시다는 뜻으로서 "편재(遍在: 모든 곳에 계신다)"라고도 부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사실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3-2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충만하시며, 가까운 데 뿐만 아니라 먼데든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편재에 관하여 다윗은 그 대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당신)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당신)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당신)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여기에서 다윗이 언급하고 있는 "당신( You)"이란 문맥을 보면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시어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디든지 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3. 예수께서도 무소부재하신 분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도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의 무소부재성은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순식간에 나타나시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락방의 문들이 닫혀있었는데도 예수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은 사람이라면 절대 제자들 앞에 나타나실 수가 없습니다. 오직 단 한 번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논의하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낸 일이 있습니다만 이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이 세상에 다시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는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의 그 몸을 그대로 가지고 나타나셨습니다. 손과 옆구리에는 상처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몇몇은 그분을 영으로 알고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생선도 잡수시고 떡도 직접 잡수셨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께서 비록 부활의 몸을 가졌지만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갈릴리에서 나타나셨을 때에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원문: 있느니라)"(마28:20)"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은 부활이후 완전한 무소부재성을 소유하고 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4. 현재 천상(천국)에 계신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세상을 감찰하고 계신가요?

  현재 천국에 계시는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계십니다(계2:23). 다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계2:18).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동시에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기에 동시에 모든 것을 다 보고 감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부활체를 입고 계신 예수께서는 어떻께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이 가지신 일곱 눈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들]과 일곱 눈[들]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더라(계5:6)" 천국에서 지금도 여전히 중보자와 대제사장 그리고 왕으로 일하고 계시는 예수께서는 일곱 개의 뿔들(완전한 권세)과 일곱 개의 눈들(완전한 감찰)을 가진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일곱 영들(성령)을 보내시어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당시 두아디라 교회에게 써보내라고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계2:18)",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예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2:23)"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뜻과 마음을 다 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중에 우리 인간을 심판하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예수께서 '어린양'으로서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그분은 가슴에 금띠를 띠고 흰 세마포옷을 입으신 분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계1:13~14).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으로서 지금 온 세계와 인류를 감찰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왜 예수께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어야 하나요?

  만약 예수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예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간구에 동시에 응답하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의 백성들을 동시에 한꺼번에 지켜내실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 하늘에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동시에 응답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분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요, 동시존재가 가능한 하나님이시기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도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20년 08월 17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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