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3(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9)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한 영적인 의미(02)(요1:29~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Gt4yD3nMHw  [혹은 https://tv.naver.com/v/28369698 ]

 

1. 들어가며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것은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서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요20:31). 더욱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대체 누구시며, 그분이 보내셨던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라는 단어로서 이는 배워서 아는 것이고 경험하여 아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주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알아야 영생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가서 우리가 누리게 될 지위와 영광도 다 이 생명의 분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고백했던 예수님이 누군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첫 번째는 지난번에 말씀드렸고 오늘은 2번째에서 5번째까지의 그의 신앙고백들을 살펴볼 것이다. 

 

2. 요한복음의 주제는 무엇이며 이와 관련된 부주제는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그 주제가 아주 선명하다. 그것은 곧 '생명'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1장부터 마지막 21장까지 생명으로 풍성하다. 요한복음에서 '생명'(조에)이라는 단어는 총 36번 등장하며 각 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모두 생명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나님인 말씀(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다(1:4).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었던 것처럼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있게 하셨다(5:26). 그러므로 예수님은 생명이요(14:6), 생명의 떡(6:35,48)으로서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10:10). 그리고 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가 생명을 얻게 되며(6:40),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6:63). 그분을 따라가야 생명의 빛을 얻는다(8:12). 그리고 진짜로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자에게 주께서 생명을 주신다(10:28). 또한 그분을 믿게되면 죽어도 다시 생명을 얻게 되며(11:25~26),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갈 수도 있다(14:6).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은 한 분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셨던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그렇다. 이처럼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생명이 무엇이며, 생명은 어떻게 얻으며, 생명을 얻는 자는 결국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생명과 더불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 하신 일이다. 그것을 가리켜 요한복음에서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랑'이란 '아가페'를 가리키는데, 아가페 사랑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행하신 그러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한 마디로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그러자 하나님께로부터 아들이 나오셔서 사람이 되셨고 공생애를 사신 후에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부주제는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생명'이 일종의 상태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사랑'은 행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사랑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를 보고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3:16).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1:14).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셨다(12:25). 그리고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한 가지를 부탁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35)". 그리고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바치면서 "다 이루셨다"(요19:30)고 말씀하셨다. 이는 인류를 위한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요21:15~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속성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그분이 이 생명을 우리 인간들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아들로 오셔서 죽으신 것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희생에 대해 세례 요한은 다섯 가지로 신앙고백을 했다. 

 

3.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고백을 했는가?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 그는 예수님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보내어진 인물이다. 그는 메시야를 소개하기 위해 이 땅에 오리라고 예언되었던 구약의 엘리야였고 그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메시야가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면서 자기에게 오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 앞에 어떤 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분 위에 내려와 머물렀다. 그러자 그는 그가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인 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 되었다. 그런데 그분이 그날에 자신에게 나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는 예수를 응시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들어올리는, 없이 하는) 하나님의 [희생 제물용의] 어린양(암노스)이로다"(요1:29).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분은 나 자신이 말하였던 분에 대한 것입니다. 내 앞에 있게 된 채 있는 바, 내 뒤에 어떤 남자가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보다 먼저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요1:30 헬라어 직역).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세례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이 누군지를 5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다섯 가지 순서는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29절). 둘째, 그는 먼저 계신 이이시다(30절), 셋째, 그는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이시다(33절). 넷째,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이시다(33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34절). 한편 이러한 다섯 가지 세례 요한의 신앙고백을 다른 방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본래적인 속성으로 볼 때 그분은 '먼저 계신 이'이시다(30절).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로 볼 때 그분은 아들이 되셨고(34절), 성령께서 그분 위에 항상 머물러 계셨다(33절).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셔서 그것을 없이 하셨다(29절). 이것이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분은 죽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주시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고 계신다(33절). 

 

4. 예수께서 '먼저 계신 이'라는 고백은 무슨 뜻인가?

  세례 요한은 두 번째로 예수님을 자기보다 '먼저 계신 이'라고 고백했다(30절). 여기서 '먼저 계신 이'라는 말의 본래적인 뜻은 '먼저부터 있어 왔던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먼저 있어 왔던 이였을까? 이것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먼저 있어 왔던 분이라고 친히 말씀하신다(요8:53). 이것은 요한복음 8장에 가서 더 자세하게 배우게 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었다. "당신은 나이가 아직 50세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을 수 있느냐?" 그러자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이전에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요8:53). 그렇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이 곧 자존하신 이이셨던 것이다. 그분은 원래 한 분 하나님으로 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고 이 땅으로 들어오셨던 것이다. 그분만이 선재자이신 것이다. 사실 모든 피조물은 창조되던 날에 생기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셔서 인간이 되신 분이다. 그러므로 훗날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먼저 나신 이'라고 고백한다(골1:15). 여기서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토토코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먼저 계신 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을 가졌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더욱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였다는 것이다(골1:15). 그렇다. 그분은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던 이이셨다. 이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의 원형이요 으뜸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이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이분을 위하여, 이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골1: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분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 그리고 그분은 부활의 몸으로서도 첫 번째이시다(골1:18).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사신 첫 번째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20). 결국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이로서, 첫 번째 부활의 몸을 가지신 분이 되셨다. 이는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5. 예수께서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라는 고백은 어떤 뜻인가?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 번째로 '성령께서 머물러 계신 이'라고 고백하였다(33절).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분에게 세례를 줄 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그분 위에 내려왔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33절). 그리고 성령께서 그분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사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바 그대로였다. 왜냐하면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 위에 장차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사42:1). 그리하여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는 긍휼과 자비가 많아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예언이 당신을 위한 예언이라고 말씀하셨다(마12:18~21). 그리고 더불어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 위에 임하는 영은 주 여호와의 영으로서, 그 영이 머물러 계신 이가 나타나게 되면, 그분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선포할 것이라고 하셨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인 희년을 선포할 것이라고 하셨다(사61:1~2). 그런데 그대로 되었다(눅4:18~19).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는 곳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을 고쳐 주셨으며, 귀신들려 고통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셨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3대 0으로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마귀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분은 희년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셨다. 왜냐하면 희년이 되면 노예는 해방시켜 주어야 하고, 땅과 집(가옥)은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레25장).

  그렇다면 그때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성령은 어떤 영이었을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장차 오실 메시야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은 6가지의 속성을 지닌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것은 '지혜와 총명의 영'이자, '모략과 재능(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라고 하였다(사11:2). 그래서 바로 이러한 성령께서 예수 위에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이러한 영과 더불어 사셨는데,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며,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신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이들의 병을 다 고쳐 주실 수 있었고 마귀로부터 다 자유롭게 해 주실 수 있었으며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도 살려 주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6.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는 고백은 어떤 뜻인가?

  그리고 네번째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의 일을 미리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 계실 때에 성령을 한량없이 공급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못 하시는 일이 없으셨으며 못 아시는 것도 없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로 가셨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셨다. 그리하여 속죄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40일후에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리고는 그분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요16:7).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 모든 믿는 이들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시게 된다(고전12:3,요3:5). 그분이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어 사람의 영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면, 모든 사람들의 영은 그때 살아나게 되는데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며, 이때 대부분 새로운 말을 하게 된다. 이것을 '방언'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때에 모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자신의 지체들이 되는 한 몸이 된다(고전12:13).

  한편 성령께서 오실 때에는 보통 물을 붓듯이 오신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설교할 때에도,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믿는 자들 위에 부어주셨다고 설교하였으며(행2:33), 이는 부어주시겠다는 성령에 대한 구약의 약속 곧 요엘서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했다(행2:16~21). 그렇다면 성령께서 위에서 부어지듯 내려오실 때에는 어떤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가? 그때에는 보통 성령의 선물(은사)이 나타난다. 그래서 오순절날 120명의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를 부어주셨고,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가정 위에는 '방언'과 '방언찬양'의 은사가 나타났다(행10:44~46). 이것은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였을 때에 받는 선물들이다(행11:15~17).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지금도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중보자의 일을 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어떤 뜻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고백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왜 그분을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분이 '아들'인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낳았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이 자식을 낳았다고 치자, 그때에 자식 속에 들어가는 영은 부모의 영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있는 영을 보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자식에게는 부모의 영과 똑같은 영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낳은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예수님은 나오셨던 자신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나오게 하신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즉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말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요8:42) 자신은 보낸 자보다 크지 않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으며,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자신이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고 또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육체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신다. 그분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요1:14). 그러므로 그분은 육체적으로 보면 탄생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을 '아들'이라고 낮추어 말씀하셨지만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분은 결코 아버지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천상에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찬양과 경배를 받고 계신다(계5:8~14).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21:1,3).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분이 다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분이 심판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보좌에 앉으신 것이 하나님이 앉으신 것이며, 그분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 곧 하나님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8. 나오며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힘써서 알아야 한다.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정도로만 알아서는 아니 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은 영원히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분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아들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요1:18).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말씀으로 계신 그분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요1:14). 그렇다면 왜 그분이 아들이 되셨는가? 그것은 오직 인류의 속죄(막10:45)와 더불어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었다(요일3:8).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속죄사역을 완성하실 때에는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 곧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요19:30). 이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하셔서 얼마 안 있으면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악한 사탄마귀와 그의 부하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여 불못에 쳐넣으실 것이다(계19:20,20:10). 그러면 그분은 "이루었도다(게고난)"고 선언하실 것이다(계21:6). 이것은 "그것들이 이미 된 채 있다"는 뜻이다. 인류의 구속사역과 더불어 마귀까지 다 멸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이 되신 모든 목적이 이미 다 성취되었음을 "이루었도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요한복음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부주제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이유가 순전히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은 무조건적으로 아들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그분은 성육신하신 것이고 또한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을 배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의 구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며, 그분이 하늘에 준비해 놓고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 한 분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 감사를 드린다. 

 

 

2022년 08월 03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24)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말의 의미는?(01)(계2:18)_2022-05-27(금)

https://youtu.be/YvzOymcBH3A  [혹은 https://tv.naver.com/v/27081254 ]

 

1.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 천상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만 하나님의 아들이셨는가? 아니면 천상에 오르신 다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셨다는 것이다(계2:18).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나온다. 이때 이 편지의 발신인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의 눈이 불꽃 같고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계2:18). 그렇다. 그분은 부활 승천하신 후 천상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으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역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려졌는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알려지셨는가? 그것은 첫째로,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될 때부터다. 그날에 가브리엘 천사가 장차 마리아의 몸에 잉태될 이가 누군지를 와서 알려 주었는데, 그때 가브리엘은 이렇게 말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1:35)"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의 태에 잉태될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둘째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세례 요한이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세례를 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서 머물러 있는 자가 있을 텐데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다. 그때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보았고 그러자 세례 요한도 역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다(요1:33~34). 그리고는 셋째로, 공생애 시작의 어느 시점에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말했으며(요1:49) 그리고 넷째로, 공생애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서 예수님더러,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입성 직전,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려고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가 그렇게 고백하였다(요11:27). 그리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3.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가?

  그렇다면 구약 시대 성도들 가운데 과연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방문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에게도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받았던 이들이 구약에도 있기는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브라함(창18:10,14)과 다윗(시110:1) 그리고 이사야(사9:6)와 다니엘(단7:13) 같은 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장차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받은 것이지 실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어서 그분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자 발칵 뒤집혔다. 유대인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말한다면서 예수님을 아니꼬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요5:17~18). 즉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있다손치더라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친]아들'이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그분을 섬기다가 타락하여 쫓겨난 사탄 마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곁에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절대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떡덩이게 되게 해 보라". 그리고 사탄 마귀는 세 번씩이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알려고 시험하였다(마4:1~11). 

 

4.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존에 배웠던 교리대로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 하나님이 계시며,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분라고 말하면 삼신론 이단이 되어 버리니까, 인격체는 셋이 있지만 이 셋은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를 우리는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온전한 것인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곤란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은 이렇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하나님이요 아들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며, 아들은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또한 아버지가 아니다." 여러분은 이 정의를 어떻게 보는가?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볼 위험성을 가진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분이셨고 나중에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7:3, 10:30). 단지 인류의 구원과 마귀 박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그 일을 행하셨으며, 지금은 성령을 보내셔서 그 일을 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나 혹은 구약 시대에서도 이미 활동하고 있는 아들을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신 것이 아닌 것이다. 정확히는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이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요1:1,14, 딤전3:16). 그러니까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하면 가장 근접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 존재가 가능하신 하나님이시까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있을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존재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이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는 바이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더 확고하게 증거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강해를 썼던 영국의 신약학자 리차드 보쿰(보컴)교수는 그의 책 "요한계시록 신학(2010년, 한들출판사)" '제3장 보좌 위 어린양'이라는 장(챕터)에서 예수께서 한 분이라고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3가지를 언급했다. 첫째,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공유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계1:8에서는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계1:17에서는 예수께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다(계21:6)"고 하셨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역시 한 분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공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역시 유일신으로서 동일한 경배를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통치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재림하시는 것이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보좌에 앉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2022년 05월 27일(금)

정병진목사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으며 또한 악한 자 사탄마귀를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런데 사도 요한은 거듭난 성도들이 악한 사탄마귀를 이기는 것까지 목표를 두고 요한일서의 책을 집필하였다. 그래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기본적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세상과 마귀는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꼭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세상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21-12-2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7) 세상과 그리고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요건은 무엇인가?(요일5:4~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9oJxCxVEGRs [혹은 https://tv.naver.com/v/24416355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초신자용 양육교재와 비슷하며, 초기영지주의 이단예방을 위한 좋은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이 신앙의 기본요소를 갖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분과 교제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요한일서의 책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요한일서의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사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다. 이 말씀을 올바로 깨닫기 위해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의미와, 내가 생명을 자기고 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무쪼록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세상과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영적 싸움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요한일서 5:4~21의 위치는?

  요한일서는 구분짓기가 상당히 어렵다. 왜냐하면 같은 주제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굳이 요한일서를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처음 1~2장은 하나님과의 교제(코이노니아)라는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삶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놈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죄'라고 정의하고 그 죄는 오직 자백함으로 용서받을 서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결국에는 죄짓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면 그는 마귀에게 속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어서 3:1~4:6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적인 관점에서 성도의 합당한 신앙과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씨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4:7~5:3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4~21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서 성도란 하나님께로부 난 자들인데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 자로서, 이들이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사용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는 자는 사탄마귀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승리하는 비결을 이 부분이 소개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세상을 이기는 성도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도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몇 가지로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주는 부분이 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을 칭하는 호칭을 통해 알려준다(요일2:12~14). 거기에 보면, 성도들에 관한 호칭이 3~4자기 정도가 나온다. 그것들은 '자녀들' 혹은 '아이들'이 있고, '청년들'과 '아비들'이 있다(요일2:12~14). 여기서 '자녀들'이란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가 누군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계신 이"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4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영적으로 강한 자들로서 영적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물리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란 어린아이의 단계를 넘어선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 모두는 이미 회개하여 죄사함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을 넘어서서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 곧 악한 자 자체를 대적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4. 성도들이 꼭 이겨야 할 2가지 대상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을 요한일서 5:4~21에서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언급한다. 그 중의 하나는 '세상'이고, 또 하나는 '악한 자' 곧 '사탄마귀'다. 무릇 성도라면 세상을 이겨야 하고 사탄마귀를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세상이나 혹은 마귀는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그때 사용하는 무기이자 방편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바로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 요한일서 5:4~17절에서 언급을 하고, 이어서 악한 자 곧 사탄마귀를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서는 요한일서 5:18~21에서 언급을 한다. 

 

5. 어떤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도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할 때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여기서에 언급된 '세상'이라는 단어는 이미 요한일서 2:16~17에서 말했던  바로 그 단어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게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즉 '세상'이란 하나님을 대적할 뿐더러 사탄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이 세상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빠지는 것인가? 그것은 세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것들이 대단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에게 때로는 인기와 명예를 안겨주기도 하고, 칭찬과 부귀를 안겨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의 유혹을 잘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이 세상의 본질이 바로 사탄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놓여) 있다"고 말한다(요일5:19).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더라도 어찌하든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성도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고 또한 이길 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오직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키면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요일5:5). 한 마디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 태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 성도가 또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 요한은 대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길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일서에서도 사도 요한이 답하고 있지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가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서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을 지칭할 때에 그렇게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나타내신 것이라는 말한다. 즉 나타난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으로서 여호와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은 언제는 영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이지,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에,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사람인 주제에 자기를 하나님으로 빙자하여 말하느냐면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다.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분은 하나님으로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기에, 자기자신을 아들이라고 늘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아들로도 계시고 그때부터는 아버지로도 함께 계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들로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에는, 육체를 입지 않는 신성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을 이 땅에 파송하였고 사람의 태를 빌려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려 할 때에 조심할 것은 그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그분만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사탄마귀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7.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해 주는 3가지가 있다고 말한다(요일5:6~9). 그리고 세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이 땅에 보내어진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증거 곧 '물'과 '피'와 '그영(보혜사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물과 피와 성령이 어떤 것이기에, 이 셋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해주는가? 사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은 둘이다. 그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증거'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그중에 사람들의 증거란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있었으나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던 자들의 증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명이었던 사도 요한이 지금 그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증거를 직접 눈으로 보았던 이들은 죽고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증거 이외에 또다른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다. 그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는 것이다. 왜나하면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셨다가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물'과 '피'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실 때 취하신 인성의 일부분이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그때 물질세계에 속한 것을 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육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육체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 몸을 가지고 승천하심으로 그 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그렇지만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는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천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늘에 가셔서 그분이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오셨으며, 이 육체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속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언해주시고 있다(요15:26).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기도 하신다(요14: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인 것이다. 

 

8.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 속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육체를 입으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분이 직접 인류의 죄를 대신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이다(히9:22). 그리고 죽음이 인류가 범죄한 죄값이기 때문이다(롬6:23). 그런데 인류의 죄를 속죄할 피는 더러운 피로서는 아니 되고, 깨끗한 피여야 했기 때문에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피흘릴 수 있는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가지고 오셨던 것들 중에 중요한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실 때에 그 속에 생명을 주어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이 땅에 있는 유한한 생명과는 다르다.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부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는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이었다. 즉 독생자였던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만을 가지고 있으려고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 주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한 가운데서 생명나무를 심어놓으셨던 것이다. 그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라는것이다. 하지만 첫째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둘째 아담으로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죽고 부할하신 후에 그는 생명을 나눠주시기 시작하셨는데, 그가 쓴 방법은 당신 대신에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시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방식으로 오심으로서, 그분이 오실 때에는 영으로 오시지만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오시어 믿는 이들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있는 한 하나님의 생명도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죽은 날까지 생명을 지켜내야 한다. 어떤 일이 불어닥쳐도 그분을 부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던 성령께서도 떠나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번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 생명은 그가 죽는 날까지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계속해서 함께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설령 죄를 범하였어도 성령은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 주님을 부인하거나 죄를 지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령께서도 그 사람을 떠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곧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자들 속에는 누구나 다 영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아들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잇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자기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5:12)"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고 있는 너희에게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요일5:13)". 

 

9.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믿는 이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말은 자기 속에 보혜사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고 부활하셨던 예수님을 일컬어 '생명주는 영'이라고 하였다(고전15:45). 그분이 생명주는 영 곧 보혜사 성령이 되어서 우리 안에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나 성령이나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이 발현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증상을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면 그 사람이 그 생명을 받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의 죽어있던 영이 말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성질이 곧 빛이요 진리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어둠 안에 거하지 아니하며, 거짓말도 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이 생명을 받은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진리를 말하며,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요한 사도는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다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양자)가 되었으므로 그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부부터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죄를 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요일5:14~17).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10. 죄들 중에 '사망에 이르는 죄'란 대체 어떤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난제가 하나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는 죄"다. 대체 사도 요한은 어떤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했으며, 왜 그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겠노라고 말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성령훼방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치부하는 것을 성령훼방죄라고 해석하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사망에 이르는 죄' 보다 더 원문상으로 정확히 말하면, '사망을 향하여 있는 죄'라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하니 '사망에 이르는 죄'는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사망'은 '생명'의 반대말이며, 여기에서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사망도 역시 육체적인 사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사망을 뜻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해,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짓는 죄를 가리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영원히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불신앙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결국 죽을 때에 영원한 사망 안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였지만 영원한 사망에 처하는 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한 번 믿었다면 어떤 죄를 짓더라도 그 죄와 상관없이 자신은 구원받는다고 믿는 죄를 가리킨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면 그는 죽는 날 그이 속에 들어있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실 것이다. 죄를 다 처리하지 못한 자까지 주님은 그를 천국에 억지로 데려가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직 죄를 청산한 자만 천국에 데려가신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은 사람이 되셨고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내지 못한 자는 결국 남게 된다. 죄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는 매일 자기의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책망을 멀리하고 죄짓고 살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우리 속에서 책망하시고 가르쳐주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지만 성령의 책망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구약의 사울왕처럼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이러한 죄가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인 것이다. 

 

11. 악한 자 사탄을 이기는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사탄마귀를 '악한 자'라고 칭하였다. 그것도 다섯 번 나오는데, 다 사탄마귀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요일2:13~14, 3:12, 5:18~19). 그는 선한 자가 아니라 악한 자다. 그는 선과 악을 알고 있지만 악에 물들어 있는 자다. 그는 악을 밥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는 한 마디로 악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잔인한 자다. 그는 냉혹한 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자에게 속아넘어가 그의 영원히 갇혀 있을 감옥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의 공격들 즉 유혹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능력과 지혜만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롭고 미가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상당히 큰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지닌 우리 인간의 힘과 타락한 본성에 휩싸여 있는 우리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탄마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그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사탄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 예수님을 힘입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사탄마귀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요일4:4). 사탄마귀는 피조물이고,우리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사탄마귀의 권세와 능력과 지혜는 제한적이지만 우리 주님은 무제한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힘입는다면 그를 거뜬히 이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듭 태어난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셨던 자인 예수께서 그를 지켜주기 때문에 악한 자가 그를 손댈 수 없다고 했다(요일5:18).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 안에 전능자께서 들어와 계시는데 어찌 그 놈이 함부로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그 놈이 우리에 접근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게 될 때다(요일3:8).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탄마귀를 이기셨던 예수님을 힘입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회개하기만 하고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면 우리는 거뜬히 사탄마귀를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는 광야의 시험에서 3대 0으로 예수님에게 판정패 당했으며, 3년반 뒤에 십자가에서 KO패 당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을 그가 죽였기 때문에, 그의 계급이 무장해제 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러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마귀는 불법을 사용하여 그가 가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되었으며, 그때 그는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는 무저갱에 갇혀 이 지상에 못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주님 재림 직전에 잠깐 풀려서 올라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지금도 지하세계에게 자신의 부하들은 올려보내 그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쫄 필요가 없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는 예수님 앞에서는 패배자이기 때문에 그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있다. 내 안에 사탄마귀보다 더 큰 이가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라. 그리고 담대히 맞서라. 마귀를 대적하면 그가 피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피하지 않으면 성령의 검으로 그의 머리를 찔러버리고 그의 몸을 싹뚝 잘라버리라(영의 세계에서 그렇게 명령하면 된다). 그가 우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12. 예수 그리스도는 대체 누구신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공개한다. 그분은 말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지지만 실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라는 것이다(요일5:20). 그분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것불렸다는 것과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고 해서 그분은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다른 표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무렵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그렇다. 그분의 신성은 하나님이셨다. 다만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신성한 그분이 육신을 입어 인성을 잠시 취하신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고 부활하실 때에 그분의 몸은 신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끌어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신성한 세계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분이 비록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가셨지만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낮춰 불러서는 아니 되겠기에 그분을 참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만이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공생애 마지막에 예수께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그랬다. 하나님이 보내셨던 분, 그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던 분은 하나님의 또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자기자신을 우상에게서 멀리할 것을 주문하였다(요일5:21). 그런데 이말을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 보면, 자기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켜내라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얼마나 많은 지면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부분은 다른 설교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사도 요한은 초신자들에게는 이 부분까지 다 설명해 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이 부분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는 가장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추고 있으니까 말이다. 

 

13. 나오며

  요한일서를 공부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정말 암송해야 할 요절이 많은 성경책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책은 기초적인 영적인 진리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요한일서는 자범죄 용서를 위한 자백의 중요성(요일1:9)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사랑'이라고 하는 정의하고 있다(요일4:8,16).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요일2;1). 그리고 이 세상 안에는 악한 자가 있어서  이 세상이 그 악한 자 안에 놓여 있으며(요일5:19), 악한 자가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데, 그것들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다고 말한다(요일2:16).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이며(요일2:22),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언급한다(요일4:2~3). 그러므로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를 분별하라고 권면한다(요일4:1). 그리고 요한일서는 진리의 성령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요일5:6),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으로서(요일5:6),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거짓이 없다고 말한다(요일2:27). 특히 요한일서는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알려주는데 그를 '악한 자'라고 부르며(요일2;13,14, 3;12, 요5:17,18), 죄를 짓게 되면 누구든지 그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요일3:8).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그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요일3:8). 아담의 장남 가인이 차남인 아벨을 쳐죽인 것도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었으니(요일3;12),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요일4:20). 그리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죄라고 가르쳐준다(요일3:15). 그리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만큼 귀한 일은 없다고 말한다(요일3:16). 더욱이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으며(요일4:10),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고 말한다(요일4:14). 하나님을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만일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요일4:12).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5:5). 그리고 성도가 세상을 이기려면 그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한다(요일5:4). 그리고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알려준다(요일5:7~8). 그리고 예수께서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에, 누구든지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아들을 영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요일5:12).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거듭난 자는 예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악한 자라도 그를 만질 수 없다고 가르쳐준다(요일5:18).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는 것이다(요일5:20).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일서를 공부할 때 암송할 성경구절들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요한일서가 바로 이러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틈나는대로 아니 시간을 내어서라도 하루에 한 번씩 요한일서를 읽고 또 읽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살기를 바라며, 믿음을 사용하여 악한 자를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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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9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13)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03) 사람의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요16:7~9)_2020-12-07(월)

https://youtu.be/6OFDHBKDLYQ  [혹은 https://tv.naver.com/v/17069110  ]

 

1. 주의 천사가 나타나 알려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가장 큰 기쁜 소식은?(눅2:10~11)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유대땅 베들레헴(다윗의 동네)에 "구주(구원자)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천사는 그분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그리스도)이시며, "주님"(아도나이)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 350가지 이상 약속된 메시야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소식이야말로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눅2:10-12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2. 이 세상에 구주(구원자)로 오실 분에 대해 B.C.730년경 이사야선지자는 어떻게 예언했나요?(사9:6)

  이 세상에 탄생할 구주(구원자)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이사야선지자는 말하기를 "그분은 장차 한 아기로 태어나실 것인데, 아들로 오실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어깨에는 통치권이 있고 그분은 그의 이름을 위대한 보혜사요, 강한 하나님이요, 영원한 아버지이며, 평강의 통치자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3.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요?

  그럼, 사람이 짓는 가장 큰 죄는 대체 어떤 죄일까요? 그것은 우상숭배의 죄일까요? 아니면 살인죄일까요? 그와같은 죄들도 사실 심각한 죄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크고 근원적인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7)."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믿지 않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이미 2천년전경 유대땅에서 일어났으며, 벌써 2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 이 놀라운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이 아직도 있으며, 또한 그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가장 먼저는 자기 가족부터 전해주어야 하고 친구와 이웃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행1:8, 행16:31). 왜냐하면 아무리 놀라운 소식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자는 그 혜택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오늘날에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당시 예수님을 가장 근거리에서 지켜보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야(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도 대단한 고백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영이 없었다면 결코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요나(요나의 아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일지라도 실제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계시를 받지 못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사도바울의 기도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늘 기도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해야겠지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예수님은  진정 누구신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정 누구신가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은 구원자요, 메시야(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분은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습니다(요20:28).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온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공생애 기간에는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었으니 누가 그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고백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정도가 아닌 분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니,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 곧 "나는~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그분으로,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8:24,28,58).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았던 당시 유대인들일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다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8:21-24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여기에 나오는 "내가 그인 줄"이라는 말씀은 그분이 바로 출3:14에 나오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에 보면,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때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년 이 맘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아브라함에게 정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고로, 그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아들로 오신다는 것일 실행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만해도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지만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으며,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잘 모릅니다(딤전3:16). 지금도 믿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이 처음과 마지막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계1:8, 22:13). 그런데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당시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가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죄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2020년 12월 07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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