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08) 하나님보다 자기자식을 더 사랑했던 엘리 제사장, 과연 무엇이 예고되었을까?(삼상2:27~36)_2021-11-26(금)

https://youtu.be/6Zi_2fHeMmw [혹은 https://tv.naver.com/v/23801975 ]

 

1. 엘리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무엇이었는가?

  타락하여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엘리의 집안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무명의 선지자를 엘리 제사장에게 보냈다.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정확히 그에게 전달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지칭하는 말로서(삿13:6, 왕상13:1), 구약시대에는 엘리야 선지자(왕상17:18), 엘리사 선지자(왕하4:16)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웠었다. 

 

2. 아론 자손으로서 엘리 가문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는가?

  아론 자손이었던 엘리 제사장은 아론의 넷째 아들이었던 이다말 계열의 자손이었다. 그러므로 엘리 가문의 사람은 태어나면서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엘리 그리고 엘리의 두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아론은 처음 어떻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에 따른 것이다. 사실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크게 2가지를 통해서 결정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여 이 땅에 보내면 그렇게 쓰임받는 것이다(물론 하나님의 정하심을 받고 태어났으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기도 하다). 또 하나는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복된 삶인가를 듣고 깨달아서 자신을 쳐 복종시킴으로 자기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혈통의 유전자가 자식에게 전달되고, 그러면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특별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가문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은총을 가지고 태어난 채 있었기에 처음부터 복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삶을 살고 있었다. 

 

3. 하나님께서는 왜 엘리 가문을 버리려고 작정하셨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엘리 가문을 버리려고 작정하고 계셨다.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엘리의 두 아들의 죄악 때문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2:29a). 그들은 사실 일반 평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을 하고 또한 축복하며 또한 일을 하는 직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직분의 막중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이 가진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취하여 가는 파렴치한 일들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위를 이용하여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의 성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신 것이다. 둘째, 엘리 제사장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다(삼상2:29b).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은 자기 자식이 분명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책망하지 않았으며, 바른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는 뜻이다. 그랬다. 그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였기에 자기 자식이 화내고 짜증내는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놔두면 자식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재앙을 당하고 결국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 뻔한데도 그는 자식들을 훈계하지 아니한 것이다. 크게 보면 엘리 제사장은 제1계명과 제2계명은 어겼다고 할 수 있다. 

 

4.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낸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집안을 하루 아침에 없애버리시면 되었다.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과 그의 자식들의 죄악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을 사랑하셨기에 그에게 경고를 먼저 보내셨다. 그것은 그가 회개하여 돌이키게 함이었다. 사실 오늘날에도 역시 하나님의 일만 한다는 목사에게 암병이 생겼을 때에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싸인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왜 목사에게 암병이 들겠는가! 그런데 병이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치료하려고만 할 뿐, 자신이 지금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음식을 잘못 먹었겠지, 몸 관리를 잘못한 것이겠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사람을 그에게 보냈겠는지를 우리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엘리 제사장의 집안이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그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미리 알려 준 것인데 엘리 제사장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적어도 10~15년 이상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엘리는 끝내 돌이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 이번에는 사무엘을 통하여 그에게 경고를 하게 하신 것이다(삼상3:11~14).

 

5. 엘리 제사장 가문의 몰락이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엘리 제사장 가문의 몰락이 보여주는 중요한 영적인 교훈은 3가지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다면 결국 복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이 타락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중단없이 계속 진행해 가신다는 것이다. 그 사람만 버림당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를 통해서 또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셋째는 이 땅에 있는 사람들 중에 온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을 준비하셨으니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시110:4). 

 

2021년 11월 26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끝이 없는 사랑을 누가 과연 끊을 수 있는가?(요3:16~17)_2020-03-31(화)

https://youtu.be/RBWWX-Z-QIs [혹은 https://tv.naver.com/v/13127360 ]

 

1.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같이 사랑하셨다는데, "이같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이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이같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후토스"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이와같은 방식으로, 이처럼"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요3:16의 문장이 이유나 원인을 가리키는 "가르(because of)"라는 전치사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요3:16의 말씀은 앞 문장의 명제에 대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문장이기에, 앞 문장이 본 뜻이 들어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로 "이와 같은 방식"이란 곧 요3:16의 앞문장인 요3:14~15절의 방식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3:14~15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인가요?

  그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들려야 하는데 이것은 그분을 믿고 있는 모든 자가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러한 사건은 사실 구약성경 민21장에 나오는 놋뱀사건인데, 그때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이 살 수 있게 되었던 바로 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어 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출애굽2세대들)은  출애굽1세대들처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물도 없다고 했고 하찮은 음식도 싫어한다고 대놓고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들 보내어 그들을 물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찾아와서 자신들이 범죄했다고 하면서 뱀을 떠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물린 자마다 그 뱀을 쳐다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달아놓았습니다. 그러자 그때 뱀에게 물린 자들 중에 장막 밖으로 나와서 놋뱀을 쳐다보게 되는 자는 다 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독있는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모든 자가 불뱀의 모양만 지녔던 놋뱀 그것도 장대 위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아나게 되었던 방식이었습니다. 고로 예수께서도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우리가 살게 하려고 대신 놋뱀(죄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시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3의 말씀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자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분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그분이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3.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나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실은 성경에 없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이는 그분을 믿고 있는 모든 이가 스스로 단번에 멸망하지 않도록 오히려 영생(시대의 생명)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3:16의 말씀은 우리가 딱 한 번 믿는 순간에 구원을 이미 받아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믿음에 관하여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을 계속해서 믿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믿는"이라는 동사가 현재 분사 능동태 구문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어야 효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믿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죽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믿었다가 안 믿는다든지, 믿고 있다고 하는데도 의심하는 자는 영생이 주어지지 아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요 실제로는 틀린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믿기만 하면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되고 예외는 없다는 말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는 한 번 믿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요, 계속해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다가 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기 시작했지만 의심을 하는 자는 받은 영생을 이 다음의 시대까지 갖고 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계속해서 "믿고 있어야"(동사,분사,현재,능동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믿고 있는 자라도 그들 모두가 반드시 멸망받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외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반드시 필연적으로 모두가 그러한 결과를 낳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요3:16의 뒷부분은 가정법 문장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직설법미래 문장을 사용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멸망하지 않고"라는 문장이나, "영생을 얻게"라는 문장은 둘 다 가정법 문장입니다. 그런데 원래 가정법문장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법칙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개연성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미래에 불확실한 사실을 언급할 때에 쓰는 것이 가정법 문장이요, 확실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직설법 미래 문장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멸망하지 않고"라는 문장은 가정법,과거,능동태 문장이고, "영생을 얻게"라는 문장은 가정법,현재,능동태 문장입니다. 아시다시피, 헬라어의 명령법에도 계속이나 반복을 의미하는 명령법에는 "현재 명령법"문장을 사용하고, 단회적이거나 단호한 명령을 내릴 때에는 "과거명령법"문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가정법과 과거는 단회적인 뜻을, 가정법 현재는 반복적이고 계속적인 뜻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하지 않고"라는 문장은 중간태문장입니다. 중간태는 동사의 행동이 자기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도록 할 때 사용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요3:16의 하반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를 믿고 있는 모든 자가 스스로 단번에 멸망하지 않도록. 오히려 계속해서 영생(시대의 생명)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라고 말입니다. 특히 요3:16의 하반절은 처음부터 "히나 가정법"문장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하반절의 모든 말씀은 다 가정법문장들입니다. 다만, 멸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단회적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뜻하고, 영생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뜻합니다.

 

5.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데 그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는 자라도 멸망 받는 자가 나올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혹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실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이라도 어떻게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죽음을 향해 흘러 떠내려 가고있는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셨던 분이 누구였습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자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분의 사랑을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붙잡고 있는 당신의 손을 놓치 않으실테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분의 손을 놔버린다면 끊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롬8:35).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지(신뢰하지) 않을 때에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는 의심이 들어서일 수도 있고, 믿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사도는 누가 영생을 얻는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분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자"가 그렇다고 말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자가 결코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리고 영생(시대의 생명)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흔들리고, 우리가 의심하고,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한 번 믿기로 결단했다면 어떤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혀도 결코 주님에 대해 의심하거나 원망하거나 거역하거나 배척하지 않도록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자는 아무래도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 03월 31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받는 자가 되는 2가지 조건은 무엇인가?(롬8:31~39)_2019-02-08(금)

https://youtu.be/EbiO_GPJAvI

 

1.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눅15:1~7,8~10,11~32)

 

2.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비유는 잃었다가 되찾았다는 3가지 비유입니다. 첫째는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눅15:1~7)이며,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의 비유이고(눅15:8~10), 마지막으로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눅15:11~32)가 그것입니다. 모두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되었다는 비유들입니다. 그런데 이 3가지 비유는 특징적으로 볼 때, 성자와 성령과 성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특별히 잃은 양을 찾도록 찾는 목자란 "예수님"을 상징하고, 등불을 켜고 잃은 드라크마를 찾고 찾는 여인은 "성령님"을 상징하며, 날마다 대문밖에서 잃어버린 둘째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누가 과연 목자로부터 발견되는 양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까?

 

3.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어떤 길잃은 양을 과연 목자가 발견해내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재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회개하고 있는 죄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하늘 안에서는 회개할 필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의인 아흔아홉에 대하여보다, [지금] 회개하고 있는 죄인 한 사람에 대하여, 더 기쁨이 있을 것이다(눅15:7직역)" 그렇습니다. 현재 자신이 목자가 없이는 반드시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범죄했음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자가 될 때, 목자에게 발견되는 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사랑을 받으려면, 여기에다가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대체 무엇입니까?(롬8:31~39)

 

4. 길잃은 양이 목자에게 발견되어져서 구원을 받으려면 사실 2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목자를 잃어버린 양이 되었기에 목자없이는 이미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것을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내가 어떠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나를 찾아오셔서 끝내 나를 찾아내시어 나를 구원해주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롬8:31~39).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기에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란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롬8:35,39).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함을 받고 현재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자는 그 어떤 요건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떼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신이 주님 때문에 온종일 죽음에 넘겨지며, 도살당한 양들처럼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롬8:36). 그러나 주님과 복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있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과연 우리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요?

 

5.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견뎌내었습니다. 당시 로마황제에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거부한 채,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누가 과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을 것인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소망한다면), 참음으로 [간절히] 기다릴지니라(롬8:24~25)"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과 역경이 찾아온다고 할 때에 과연 끝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받으려면 2가지기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주님없이는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한 번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으면 주님은 결단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인내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는 가운데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와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강한 믿음이 날마다 충만케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2019년 2월 8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은 어떻게 나타난 바 되었는가?(요8:28~29)_2019-02-01

https://youtu.be/m3MIdpJK05s

 

1.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나타난 바 되었을까요?(요일4:8~9)

 

2.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아마도 "사랑(아가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난 바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아니 만세전에 그 일을 하나님께서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성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바 된 증거인 것입니다(요일4:8~9).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구약시대만 해도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심으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 말고도 또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3.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게 3가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요일4:9~10). 둘째,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롬5:8). 셋째, 자신의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은 사람을 이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는 것입니다(마28:20).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사람(피조물)로 보내신 사랑, 우리 죄인을 위해 죽으신 사랑, 한 번 구원얻은 사람은 이 세상 끝날까지 버리지 아니하시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귀하고도 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3단계로 나타난 바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가 비로소 그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게 된 우리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인가요?

 

4.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자는 공통적으로 자기도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일4:11~12).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실 사람이 부모가 되어봄으로 비로소 우리도 알게 됩니다. 부모가 되어버리면 그만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그때부터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을 키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큰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비로소 아버지가 되시고 아들이 되셨던 사건, 곧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야말로 인류최대의 빅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나타내 보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그분이 이 땅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에서는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오셨던 예수님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요8:28~29)

 

5.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누구냐?(요8:25)"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인자(사람의 아들)을 든(들어올린) 후에야 '내가 그'인 줄을 [너희가] [장차] 알고(알게 될 것이다)(요8:28)" 했습니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시게 되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분이 누군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은 "스스로 계신 이"요,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I am=스스로 있는 자)"(출3:14~15)라고 직접적으로 자신을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홀로 한 분이신 전능하신 창조주의 자기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란 스스로 계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속죄를 위해 사람이 되신 사건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더 많이 그리고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사랑"에서 "직접 사람이 되어 오신 사랑"이라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이 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낮추시고 피조물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신성한 자가 스스로 죽기 위해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자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된다면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19년 2월 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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