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06) 법궤의 예루살렘 수송작전 실패, 과연 무엇이 문제였는가?(삼하6:1~23)_2022-01-10(월)

https://youtu.be/S17qDnHx5hg [혹은 https://tv.naver.com/v/24771704 ]

 

1. 예루살렘 천도 직후 다윗이 아주 중요한 사역으로 시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B.C.1003년경 예루살렘으로 왕궁을 천도한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일을 시행하려고 한다.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았던 법궤는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져 있었고 거기에 약 70년간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은 신정 국가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서 새로 정한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하나님을 모시는 중앙 성소로 삼기 위해 법궤를 옮기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2. 1차 법궤 수송 작전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이때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오기 위해 3가지 일을 시행한다. 첫째,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함께 참여하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전역에서 3만 명의 사람을 뽑아서 대기를 시켰다. 아마도 법궤가 이동할 때에 맞닥뜨릴 수 있는 블레셋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법궤 운반이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어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모신 성소라는 것을 알리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둘째, 법궤의 직접적인 수송은 아비나답의 자손(아마 손자였을 것이다)이었던 웃사와 아효에게 맡긴 것이다. 그들은 레위 자손으로서 고핫 자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셋째,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러가지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노래하며 성대하게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행사를 하였다.

 

3. 1차 법궤 수송 작전이 중단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그만 중도에 그 행렬이 멈춰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법궤 이동을 책임졌던 한 사람이 중도에 죽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가던 소들이 갑자기 뛰는 바람에,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법궤를 붙들었는데, 그만 그것이 죄가 되어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심으로 그가 궤 곁에서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삼하6:6~7). 그러자 다윗은 두려워하여 법궤 옮기기를 중단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옮겨가게 한다. 그럼 왜 웃사가 죽었을까? 그는 분명 법궤의 안전을 고려하여 붙들었던 것인데, 왜 그것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인가? 그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다윗도 몰랐고 웃사나 아효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누구도 법궤 운반 규정을 숙지하고 있던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한쪽에서만이라도 법궤 운반 규정을 알고 있었다면 그러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법궤 운반은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가? 그것은 민수기 4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법궤 운반 규정은 이렇다. 레위 자손들 중에서 아론 자손인 제사장들이 먼저 하나님의 궤를 성소의 둘째 휘장과 해달의 가죽 그리고 순청색 보자기를 이용하여 3중으로 싸 놓은 후에 꿸 채를 거기에 끼워 넣는다. 그러면 레위 자손 중 고핫 자손들이 들어와서 그것을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다(민4:3~6, 15). 더욱이 고핫 자손들은 결코 성물을 만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 죽을 것이라고까지 규정되어 있었다(민4:15). 그렇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첫째, 웃사와 아효가 고핫 자손들이었지만 그들도 법궤 운반 규정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법궤를 자신들의 어깨로 메지 않고 소가 모는 수레로 운반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울왕이 놉 땅의 제사장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파괴한 후, 약 70년간 성소가 건립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핫 자손의 직무에 대한 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 웃사는 그 법궤를 만지지 말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최소한 그는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정은 인간이 염려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도움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법궤는 그날 보자기에 싸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것도 씌워지지 않은 맨 살의 상태였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만약 법궤가 3겹으로 둘러싼 상태였다면 성물을 만지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웃사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하였고 그렇게 하면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웃사는 궤 곁에서 죽고 말았다. 그때 다윗은 또 얼마나 놀랐겠는가? 자신은 선의의 뜻으로 한 일이었는데 그만 참극이 눈앞에서 펼쳐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4. 2차 법궤 운반 작전은 어떻게 잘 진행될 수 있었는가?

  웃사가 죽자 법궤는 잠시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3개월이 흘러갔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궤로 인하여 그 집과 모든 소유물에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자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궤를 다시 모셔 오기 위한 수송 작전을 펼친다. 이제는 율법 규정에 따라 법궤를 다윗성 가운데 자신이 정해 놓은 천막 안으로 옮기는 일을 시작하려 한 것이다. 다윗은 지난번의 실수로 인해 많은 공부를 한 것 같다. 역대상에 나오는 평행 본문을 보니, 엄청나게 준비한 모습이 나온다(대상13~15장). 그리고 율법 규정을 따라서 법궤를 옮기는 일을 한 것이다. 이때 제사장들의 준비와 악기와 찬양대의 준비 그리고 레위인들의 준비와 다윗의 제사 준비 등이 모두 철투철미하게 율법 규정에 따라 준비되었고 진행하였다. 그러자 아무런 이상이 없이 법궤가 이동하는 것을 본 다윗은 법궤 앞에서 기뻐하며 제사를 드렸고 이윽고 당도한 다윗성에서도 기쁨의 감사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다윗은 그 예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그 참여한 사람들에게 먹을 음식을 다 나눠 준다. 그리고 왕궁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딸 미갈이 왕을 경멸하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체통없이 행동하시는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자신의 신하의 여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5:20)"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 일은 여호와 앞에 한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워 주신 하나님을 모신 기쁨을 계속해서 노래하겠노라고 말하고는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죽는 날까지 다윗의 자식을 낳지 못했다. 고로 우리도 여기서 지도자(머리)를 경멸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 한번 숙지할 필요가 있음을 본다. 

 

5. 다윗의 1차 법궤 수송 작전의 실패와 2차 작전의 성공이 들려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윗의 법궤 수송 작전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리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법도에 맞는 것이어야지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려고 하는 선한 의도와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모셔 오는 방법이나 과정 등도 합당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목적이나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가르쳐 준 방법이나 절차를 지키지 않는 일이라면 아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들어와서 교회 가운데서도 이러한 일이 몇 가지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찬양을 잘 올려 드리기 위해 찬양 인도자를 쓰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찬양 인도자가 단 위에 서면 단이 더렵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죽은 자의 장례 때에 장례 예배를 드리거나 죽은 자의 기일에 추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상을 당하여 그 가족을 위로하고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취지하에 드리는 장례 예배와 추도 예배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결코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죽은 자의 몸에서 귀신이 나와서 주변 공간을 차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갈 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까지 시체를 가지고 들어와서 예배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공간을 예배라는 미명하에 귀신이 활동하는 장소로 굳이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2022년 01월 10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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