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고, 교회 안에 출석하고 있다면 다 구원받은 것인가? 여기 사사시대의 말기에 이스라엘의 법궤와 관련된 사건들이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이 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나무그릇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법궤는 결국 심판의 잣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되는가? 왜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5만 70명이나 죽임당하고 말았던 것인가? 여기, 우리가 미래에 받을 구원의 당락을 말해주는 놀라운 말씀이 있다.

2021-12-03(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상강해(15) 그날 법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삼상6:19~7:2)_2021-12-3(금)
https://youtu.be/jh0hSWV7sCA [혹은 https://tv.naver.com/v/23928984 ]

 

1. 들어가며

  이스라엘의 신의 궤였던 법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까지는 잘 몰랐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았고 그것을 그대로 보관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재앙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빼앗겼던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큰 슬픔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곱 달 전에 블레셋과의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던 것이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법궤는 진정 축복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재앙의 도구라고 불러야 하는가?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법궤의 이동 경로에 따라 나타났던 사건들을 종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에는 우리의 구원의 당락을 좌지우지하는 놀라운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블레셋에 들어간 법궤는 어떻게 되어 블레셋을 초토화시켰는가?

  아벡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서 법궤를 빼앗아 전리품으로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왜냐하면 애굽신들을 쳤던 이스라엘의 신과의 전쟁에서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에 들떠 법궤를 자기들의 신이었던 다곤신에게 바치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다곤신이 그만 넘어져 코가 땅에 닿은 채 법궤에 절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일으켜 세워 놓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다곤신은 또 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상의 목이 부러져 있었고 손목이 부러져 있었다. 더욱이 부러진 것들이 저만치 날아가서 문지방에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악한 종기가 발생하더니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블레셋의 군주들 5명에게도 종기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이 법궤를 빼앗아옴으로 여호와의 손이 자기들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이 혹시나 우연이 아닐까 싶어서, 한 번만 더 시험을 해 보기로 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아직 멍에를 멘 일이 없는 젖나는 암소 두 마리에 수레를 달고 그 위에 법궤와 속건제물을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새끼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암소 두 마리는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곧장 가고 만다. 

 

3. 벧세메스로 돌아온 법궤 때문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지만 오히려 슬픈 사건이 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날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 추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법궤는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감격하였다. 그래서 수레는 번제물을 태우는 장작으로, 두 마리의 암소는 번제와 다른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수21:13~16).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실로까지 가서 성소를 황폐화시켜 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는 이제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는 집이 없었다. 그러자 성소를 섬기던 제사장들은 자기가 분배받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 성읍 중의 하나가 바로 벧세메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엄청난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것이다. 그들이 법궤를 덮은 보자기를 열어 젖혔는지 아니면 법궤의 뚜껑을 열어 보았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5만 70명이 죽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숫자는 이스라엘의 한 개 지파의 숫자였다. 당시 대도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7만 명이었다고 하니, 5만 70명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죽은 자들은 벧세메스의 제사장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경하러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죽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큰 살륙이 일어난 것이다. 

 

4.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심판의 도구인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지 아니할 수 없다. 대체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인가 하는 것이다. 원래 법궤는 하나님 자신이 그 공간에 있겠다고 만들라고 한 것이요, 그곳에 십계명의 두 돌판을 넣어 두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법궤의 뚜껑 곧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계셨다. 그러므로 법궤는 확실히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전쟁에서 법궤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과거 요단강 강물이 마르게 하고, 여리고성을 한꺼번에 무너지게 했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오히려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만다. 왜 그랬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에 관하여 주님이 주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멸시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터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가지고 갔어도 그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어도 역사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법궤와 함께 아니 계시지는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법궤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했던 블레셋 사람들을 쳤고, 그들의 다곤신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레셋 전역에 악한 종기가 나게 했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창궐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가 아무리 신령한 성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심판의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요3:16~18). 그러나 법궤는 원래 천국의 모습 그대로를 이 땅에 재현한 것이므로, 법궤 자체는 하나님의 임재의 도구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통로인 것에는 분명하다. 나중에 그것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사건으로 인해 알 수 있는 법궤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런데 법궤가 스스로(인간이 보기에)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제사장의 성읍으로 되돌아왔다. 이는 제사장들이 다시 법궤를 모시고 성막을 짓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표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큰 살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찌기 그들에게 법궤를 모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법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악한 종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벧세메스에 몰려온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 법궤 안을 들여다보는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법궤는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지지도 말아야 하며, 지성소에 보관하여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민4:15, 20).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이러한 규정에 주의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그러한 규정을 배우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알고도 방치했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으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업신여긴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자신들이 이겼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라도 결국에는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벧세메스의 사람들이었지만 이들도 죽어 나가는 일은 블레셋과 똑같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 예법을 무시하면 결과는 역시 불신자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죽임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사망에 이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결국에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믿는 이들이 법궤의 사건을 통해서 주목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벧세메스의 5만 70명이 죽게 된 것은 분명 심판의 사건인 것이지 구원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똑같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께서 가르쳐 준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지 못했든지 아니면 그것에 주의하지 않았든지 결과는 똑같이 나타난다. 다 똑같이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라도 자기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죽을 때에 성 바깥으로 쫓겨난다든지 아니면 불타는 영영한 불못에 들어갈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멸망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해서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경우에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에서 탈락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께서 직접 들려준 말씀을 종합해 보면(공관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죄를 짓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이다(계21:8).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죄된 본성이 우리 안에 있고 귀신이 우리 육체속에 들어 있으며, 악한 영들은 자꾸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 넘어갈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이 말씀이 더 중요하다. 둘째, 자기의 더럽혀진 두루마기를 빨지 아니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계22:14~15).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진정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더렵혀진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계3:5). 오직 회개하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상태를 보라. 예수님을 믿었다면 자신의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가 많다. 자신의 구원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미끄러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지은 죄들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줄 알고서 회개하고 있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성 밖이나 불못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요일1:9).

 

7. 나오며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완전한 담보가 될 수는 없다. 믿는 자들에게는 지금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채 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법궤가 자기 마을에 들어온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 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 결국 블레셋 사람들처럼 죽어 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 안에 들어왔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무효가 되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믿는 자라도 사망에 이르는 규정이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것을 말해 주지 않는 것도 한몫을 한다고 본다.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하루아침에 죽어 나가는 이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다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이 무효화되는 규정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믿는 자에게 구원의 최종 관건은 회개를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2021년 12월 03일(금)

정병진목사

 

 

성도들 중에는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신앙이 잘 성장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 그러한 분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들은 세상의 풍파와 환란에 금방 흔들리고 쓰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그만 신앙이 자꾸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신앙을 도와주기는커녕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러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면서도 신앙이 성장하게 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 그 해법과 실마리가 있다.

2021-11-0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벧전2: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dis_IBNvbw  [혹은 https://tv.naver.com/v/23428177 ]

 

1. 들어가며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20년 30년 했다고 해서 성도가 자동적으로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거듭 태어나기는 했어도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지 못한 채 그대로 있다면 그 영은 계속해서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사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영과 혼과 육체를 동시에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창2:7, 살전5:23). 그러므로 사람의 성장해야 할 부분은 사람의 육체만이 아니다. 사람의 혼(soul)도 육체처럼 성장해야 하고 영(spirit)도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육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의 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은 우리 눈에 잘 띄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의 영이 성장하는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나서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 그 실제적인 지침도 함께 나누어보려고 한다. 혹 자신의 영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오늘 메시지가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기를 바란다.

 

2.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은 어떻게 성장하기 시작하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의 영과 혼과 육을 동시에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들이 하나같이 성장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자라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키도 커지고 몸무게도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혼자서 일어설 수도 있고 걸어다닐 수도 있고 나중에는 뛰어다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혼(soul)은 어떠한가? 혼도 마찬가지다. 혼은 사람의 인격 곧 지정의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혼도 자라야 한다. 먼저 사람은 배워서 지적으로도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적으로도 성장해서 감정의 조절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 취사선택을 잘하고 결단을 잘 해야 한다. 이러한 혼의 성장을 위해서 부모는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통하여 경험을 쌓게 한다. 그런데 사람이 성장해야 할 부분는 비단 육체와 혼만이 아니다. 영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영도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사실 엄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임신할 때에 하늘에서부터 보내어져서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그 시기를 영적으로 보면,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 약 2~3개월 정도 될 때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라고 해서 모든 것이가 영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만히 있으면 영도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이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에게 생명을 집어넣어주어야 한다. 그것을 바로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주 예수를 믿고 자신의 마음 속에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에 모든 사람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이때부터 영적 성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기가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사람의 육체가 밥을 먹어야 성장하듯, 영혼도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그 밥은 곧 하나님말씀이라고 했다(마4:4).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어서 이것을 먹는 자가 곧 영도 성장하는 것이다. 

 

3. 사람의 영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영이 거듭나서 새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이 성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성장하지 못하는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영도 사람의 육체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기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대략 3가지 정도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기가 젖을 먹지 않거나 젖을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기가 아무리 잘 생긴 채 멋있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 아기가 젖을 먹지 못한다면 그 아기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체중의 아기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그 아기가 체내에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받으면 그 아기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영도 마찬가지다. 둘째, 젖을 먹긴 했으나 그 젖에 영양분이 충분히 들어있지 않거나 거의 없을 때에는 아기도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의 아기들과 한국의 아기들을 비교해보면 금방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현재 북한의 아기들의 발육정도와 한국의 아기들의 발육정도는 사실 판이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북한의 아이들보다 한국의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훨씬 더 많은 영양분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기가 성장하지 않는 두번째 이유는 영양분이 들어있는 젖을 먹으면 아기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도 마찬가지다. 셋째, 아기가 병들어 있을 때에도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이 들면 아기들은 대체로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빨리 질병을 진단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지 못한다. 그러면 아기의 체내에 영양분이 흡수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기는 더이상 자라지 않는 것이다. 영에 있어서 이것도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다. 

 

4.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첫 번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1~3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법을 2가지로 제시한다. 즉 사람의 영이 성장하려면 2가지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사람의 영이 성장하려면 영의 성장을 방해하는 악한 것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2:1).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먼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전에 모든 악독과 기만, 외식(위선)과 시기 그리고 비방을 버려야 한다고 며령한다. 곧 그러한 악한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좋은 것을 먹여도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내 몸에 악한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으면 과연 내 영이 성장을 하겠는지를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영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악한 것들의 배후에 있는 영들이다. 그러므로 영이 성장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귀신들이 많다. 조상적부터 내려온 악한 영들이 사람 몸 속에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신앙생활을 한 지가 이미 10년이 되었는데도, 그 사람의 영이 잘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그때에는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귀신이 있는지를 살피고 그것을 제거해야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 어린아기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귀신들이 아기 속에까지 들어가서 역사합니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세계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은 엄마의 태중에 아기가 착상될 때부터 공격하고 들어가서 자궁 안에 있는 태중의 아기 속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에게 영적으로 성장하는것을 도와주고 싶다면 그 사람의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알려주라. 그리고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그래서 태중에 있을 때부터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으니 그것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조상들이 지었던 죄를 자백함으로 대신 회개하는 것이다(요일1:9). 그러면 아기 몸 속에 들어가서 기생하고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할 수가 있다.그런데 이러한 회개는 누구나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며, 오직 한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들이 할 때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해보면 안다. 악한 영들은 대개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부모와 자기의 아들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회개도 마찬가지다. 

 

5. 사람의 영이 성장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무엇인가?

  두번째로, 자신의 영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아기가 충분한 영양분이 있는 말씀을 먹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의 영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영양분이 가득 들어있는 말씀을 사모하고 그것을 먹을 때에 우리의 영도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말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을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기가 자라기 위해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어떤 말씀을 가리키는가? 먼저, '순전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돌론'이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벧전2:1에 나오는 '돌론'이라는 단어의 반대어다. 그리고 벧전2:1에 나오는 '돌론'은 우리말로 '기만(궤휼,계교,사기)'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기로 하여금 말씀을 먹게 하되 아기가 먹어야 할 말씀으로는 거짓이 들어가 있는 말씀 곧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말씀을 절대 먹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아기에게는 오직 진실한 진리의 말씀만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은 과연 거짓과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진리의 말씀만을 전파하고 있을까? 그리고 두번째로는 '신령한' 말씀을 먹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령한'이란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로기코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한 마디로 '적합한, 합당한'이라는 뜻에 가깝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기에게는 아기의 성장발육 단계에 따라 거기에 합당하고 거기에 적합한 말씀을 먹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아기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갓 태어난 거듭난 성도가 자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기왕이면 거듭난 성도에게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진리의 말씀이자 아기에게 적합한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영적인 부모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의 도움없이는 고개도 가누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적인 부모의 도움없이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분들도 더러 있다. 고개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아기가 스스로 먹고 살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할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릴수록 거듭태어난 성도는 영적인 부모나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갓 태어난 성도에게 훌륭한 영적인 부모는 천군만마오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가 않다. 아기를 돌볼 능력이 부족하고 지식과 지혜가 부족한 부모 밑에 있으,면 그 사람의 영혼의 성장을 더디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에게는 자신의 영적인 부모가 영적인 세계에 좀 문외한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때에는 학교나 과외를 받아야 한다. 부모가 배우지 못해 자녀를 양육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 아이를 학교에 보내 선생님에게 붙여주어 훌륭한 아이로 성장하게 한다. 그렇다고 자기를 낳아주고 어릴 적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면 절대 아니 될 것이다. 사실 영적 세계에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며,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는 것이 철칙이기 때문이다(마20:24~25).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자신의 성장단계에 따라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6. 사람이 젖을 뗄 시기가 되어서 이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면?

  그래서 이제 젖을 뗄 정도가 되어 자기 혼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치자.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할 때에 스스로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여기 세 가지 실제적인 지침이 있다. 첫째, 영적 성장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말씀이니만큼 자신의 영적 성장 속도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성장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양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생기기 때문이다(롬10:17). 영계에서는 법칙이 확실하다. 무릇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더 받아 풍족하게 되지만,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마25:29). 그러므로 말씀을 주일낮예배 한 번만 들었던 분은 주일오후찬양예배에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각종 기도회 곧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새벽기도회에도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3년 안에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둘째, 나에게 영적인 스승이 없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적인 스승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3가지 영적인 스승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목사 곧 목회자가 있다(엡4:11~12). 이들로 인해 성도는 온전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목회자가 많이 있다. 찾아보면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단에 속한 자들을 찾아가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로는 성경말씀이다(딤후3;16~17).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말씀이 우리의 두번째 영적인 스승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자라게 된다. 셋째로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말씀하시는 성도의 최고의 스승인 성령님이 있다(요14:26). 그러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들은 말씀을 소화시켜서 그것이 나의 살과 피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번만 들어도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이 완전히 내 사로가 피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두 번 세 번 반복으로 듣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할 때에도 길에 행할 때든지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그 말씀을 들려주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하라고 하셨다. 이를 위해서 들은 말씀을 한 번 더 들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 판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시작해보라.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3일 뒤에 한 번만 더 복습해보라. 그러면 그 말씀이 완전히 자기의 것이 될 것이다. 

 

7. 나오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지금 영적으로 볼 때에 어린아기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를 잘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경륜만을 자랑하려고 한다. 내가 신앙생활한지 몇 년이 되었으며, 내가 몇 대째 신앙생활하고 있는지를 아느냐면서 으시댄다. 하지만 그래서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영이 성장했는지 안 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쓴 것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심각한 환난과 핍박을 앞둔 상태에서 사도 베드로 빨리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은 진리의 말씀과 성장단계에 합당한 말씀을 먹어 성장하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 때 흔들리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을 이기고 순교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겨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영적인 스승이 되어 또다른 약한 지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언제까지도 응석만 부리고 도움만 받을 것인가? 이제 코로나도 끝나가는 만큼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달려보자. 하나님께서는 침노하는 자에게 천국을 주시며, 댓가를 지불하는 자에게 그만큼 분량의 복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2021년 11월 07일(주일)

정병진목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요18:37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목적은 진리를 증언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신 것인가? 자기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 앞에서 예수께서는 진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진리의 말씀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이나 어떤 유명 신학자의 말을 동일선상에 두려는 자들도 있다. 그게 옳은 것일까?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말 혹은 신학자의 말의 충돌된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그러한 말씀이 있고 신학적인 언급이 있다. 예를 들어, 루터는 성경에서 야고보서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터는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했다. 칼빈은 자신의 이중예정론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를 죽이라고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은 그 답을 찾아보자.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여러개 등장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언급하면 이렇다. 첫째로,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요10:10)"이라고 하셨고, 둘째로,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막10:45)" 오셨다고도 하셨다. 한편 셋째로,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3:8)"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오늘말씀처럼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섰을 때에는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리의 증언하기 위함(요18:37)"이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중요한 순간에 왜 그러한 말씀을 빌라도에게 들려준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붙들어야 할 진리란 대체 무엇이며, 진리를 붙들게 되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고 진리를 붙드는 자에게 세상의 반응은 어떠하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진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진리가 되려면 어떤 필요충분조건이 채워져야 하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서 진리를 찾아보면, '진리'란 참된 이치나 참된 도리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모순되지 아니하고 확하게 바르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간이요 또 하나는 장소다.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려면, 언제 어디서든지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키 큰 사람은 아름답다"라고 정의해보자. 이것은 진리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항상 키 큰 사람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가 달라져도 항상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통했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3.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성경에서는 진리는 오직 3가지 뿐이라고 증언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 증언한다. 예수께서 겟네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아버지(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온 분이 예수님이 진리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 그러면 삼단논법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자기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인 것이다(요1:14,14:6). 그리고 셋째,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도 진리이다(요15:26). 그래서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은 하나도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진리가 없었기에 예수께서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시오 안내하시기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4. 진리를 붙드는 자가 받게 되는 3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진리를 붙드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다. 첫째는 이 세상의 모든 억압된 요소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요8:32). 이 세상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죄된 본성이다. 그리고 마귀와 귀신들이다. 진리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게 되면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모든 것들 즉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무지까지도 다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이 세상에서부터 얻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영생이다(요5:24). 진리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의 생명에 분배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죽는 순간에 얻게 되는 것으로 천국이다(요14:6).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들게 되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5. 관건은 우리가 과연 끝까지 진리인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려 하느냐는 것이다.

  고로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으로부터 있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다 변하기 때문이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만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예수님 자신이 진리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나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16:28). 그리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만을 전하셨기 때문이다(요8:28,12:49,14;10). 그렇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만들어내어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붙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히13:8, 벧전1:25).

 

6. 유명신학자나 성경의 저자 바울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과 충돌되었다고 판단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진리가 없는 이 세상에 진리를 증언하어 오신 것이다(요18:37). 그분은 진리가 성육화되신 분이므로 그분의 말씀은 100%가 진리다. 그분의 말씀은 틀림없다. 절대 거짓이 없다. 아니 거짓이 0.00001%도 섞여있지 않는 순도 100%의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개신교인들 중에는 칼빈의 교리를 모든 것보다 더 우선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칼빈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한다. "네가 칼빈보다 똑똑하냐?"고, 그리고 "칼빈처럼 성경을 제대로 풀어낸 사람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칼빈의 주장이 다르다는 것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께서 칼빈과 같이 말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칼빈은 틀리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거의 맹신에 가깝게 칼빈을 추종한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실어나른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믿고 실어나르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고 따라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해 놓았다는 성경구절이 없다. 단지 개인에 관한 사역적인 예정만 있을 뿐이다.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를 예정해 놓으신 것은 많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다는 성경말씀은 없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언급하셨다(마22: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만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항변한다. 아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따라가야 하는가? 칼빈인가 예수님인가?

  한편, 오늘날 어떤 신앙인들 중에는 바울의 말을 100% 절대적인 말씀으로 알고 따라가는 자들도 있다. 특히 종교개혁자 루터는 바울의 말은 100% 따라가지만, 야고보의 말은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바울의 말은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겠지만, 야고보의 말(야고보서)은 정경(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과 상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약성경에서 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바울의 서신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럴 때에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 100% 진리만을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비교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것을 판정해야 한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것들 중에는 오늘날 우리가 적용하지 않는 말씀들이 더러 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가 잠잠하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딤전2:11~12). 하지만 그것이 100%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왜 오늘날 교회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는가? 또한 바울은 처녀인 여자는 시집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냥 그대로 지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전7:26). 만약 이것도 100% 진리의 말씀이라면, 왜 자기의 딸들은 예외적으로 시집보내고 있는가? 그리고 여자는 기도할 때에 무엇을 쓰든지 긴머리를 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고전11:5~6). 그러나 여자 성도들 중에는 짧은 머리를 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요즘 한 둘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오직 진리되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그분의 말씀만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바울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합당한 진리를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록된 내용 중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적용될 수 있는 진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자기 생각하기에 사도바울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된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사도바울의 말을 버려야 한다. 아니 그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혹시 예수께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 성경에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돕기 위한 보조적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7. 나오며

  그렇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 말씀은 언제 어디서든지 적용해 보아도 항상 옳은 결론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여 항상 적용되어도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읽고 더 믿고 더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앞에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했다(요18:37).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고 절대적인 신뢰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를 천국에까지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자. 그리고 진리만을 선포하기로 결심하자. 우리는 어떤 유명 신학자의 말을 전할 것이 아니다. 오직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을 말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전해야 한다. 건투를 빈다.

 

 

 

 

 

종려주일, 그 당시만해도 이 세상임금은 마귀였다(요12:31). 하지만 예수께서는 종려주일을 통해 그분이 이 세상의 왕이신 것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후 유월절 전날밤에 드린 예수님의 마가락방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무슨 일로 파송받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상으로 파송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이 세상임금인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그 방법을 사용하여, 이 세상 사람들을 마귀의 손으로부터 구출하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오늘은 기독교절기로 볼 때 종려주일이라 불린다. 종려주일이란 예수께서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이날 예루살렘에 있던 군중들을 예수님을 왕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종려주일이란 예수께서 이 세상의 임금인 것을 만천한에 선포한 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당시 이 세상임금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는가?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이제 종려주일을 맞아 이 세상임금은 대체 누구며,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을 구출해내려, 대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 나오는 놀라운 사실들

  예수께서는 A.D.33년경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마가의 다락방에서 맞이하셨다. 그때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리고 나서 유월절식사를 하루 앞당겨 하시고는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곧 제자들의 곁을 떠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혼자서 마지막 기도를 올린다. 이것이 바로 요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만찬제정 후,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과 대제사장적 기도를 들어보면, 예수님이 누구시며,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고, 왜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해야 하며,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무엇인지, 인간구원의 최종목적은 무엇인지 등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왜 3년반동안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보여주시고 듣게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셨는지 그 이유가 정확히 등장한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파송한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17:18).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 세상에 파송되어 오셨을까? 그리고 왜 예수님도 제자들을 이 세상으로 파송하려 하는가? 먼저, 예수님은 대체 누구시길래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는지부터 살펴보자. 그 대답이 이렇다. 첫째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요16:28). 다시 말해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참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송을 받아 오신 것이다(요17:18).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오셨고 보냄을 받았을까? 요약해보면, 한 가지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에 데려가려고 오신 것이다(요12:47,24).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마귀의 자식이 되어 악한 자 안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요일5:19). 그러므로 마귀가 이 세상 사람들을 그냥 내어 줄 리가 만무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출하기 위해 2가지 일을 하셔야 했다. 하나는 인류가 지은 죄값을 지불하는 일을 해야 했으며, 또 하나는 이 세상임금인 마귀와 싸워 이겨야 했다. 사실 마귀의 지배 하에 있는 인간을 데려가려면 2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가서 사정하고 아부하여 얻어내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마귀와 싸워 그를 정복하고 빼앗아오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2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대체 예수님은 어떻게 하여 마귀로부터 이 세상 사람들을 구출해낼 수 있었을까?

 

3. 이 세상에 파송받은 예수께서 어떻게 이 세상임금인 마귀를 정복하셨을까?

  예수께서 이 세상임금인 마귀를 정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인간을 마귀로부터 건져내셨다. 첫째,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셨다(요17:26,11~12). 아버지의 이름은 여호와다(출3:14~15). 출6:2~3에 의하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전능자의 이름이다. 곧 예수께서는 인간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이름으로 왔기에 이 세상임금인 사탄 앞에서도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셨다(요17:8).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은 어떠한 말씀인가?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다(요17:17). 진리의 말씀이라는 뜻은 그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말씀만이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는 순도100%의 말씀이므로, 그 말씀을 붙잡고 마귀를 대적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공생애초기에 있었던 마귀의 시험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마4:3~4). 셋째, 예수께서는 자기 안에 계시는 아버지와 항상 하나인 관계를 유지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요17:11,21~22).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씀은 사실은 아버지의 말씀이었으며, 예수님의 교훈도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요14:24). 그리고 예수님은 언제라도 자기 안에 계시는 아버지와 상의하여 모든 일을 행하셨음으로 마귀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으나 마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마귀를 대적했기 때문이요, 자기 안에 계시는 아버지 곧 전능하신 하나님과 항상 상의했기 때문이다.

 

4. 예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승리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공생애 3년이 지날 무렵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예수님은 어떻게 준비시켜 세상으로 내보냈을까? 이것도 살펴보면, 딱 3가지 방법대로 하셨다. 첫째는, 예수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다(요16:24,15:16). 자신의 이름은 이미 공생애초기에 마귀와 싸워서 이긴 승리자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12제자를 비롯한 70명의 제자들이 나가서 싸우자, 예수의 이름으면 귀신들도 다 제자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눅10:17). 둘째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사용하게 하셨다( 요5:39). 예수님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전능자가 이 땅에 오셨는지에 관한 말씀이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과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서,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었다. 셋째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 보혜사 성령을 그들 마음 가운데 보내주셨다(요14:26,15:26).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의 또다른 자기자신으로서 예수님이 그들 안에 영으로 임재해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제자들은 담대히 세상에 나가서 이 세상임금과 싸워 이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믿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해야 할 일로서 명령하신 것은 대체 무엇인가?

  사실 예수께서 3년반동안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 한 가지다.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송받아, 이 세상임금과 싸워서 이김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부활이후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에 오사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고 당신의 영인 성령을 주셨다. 그리고 승천하기 직전에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녀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는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는 아직 마귀가 완전히 정복당한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판정승으로 이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담대히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었고 병든 자를 치유하곤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마저 얻으신 후이니, 지금 마귀는 더 이상 이 세상임금이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이시다. 그리고 전능자이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제 성령으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감히 누가 우리 믿는 이들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할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강력히 말했다(요일5:18).

 

6. 나오며

  믿음이란 세상에 나가 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귀신과 싸워 이겨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지금도 귀신들이 배후조정함으로 우울증과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을 그들의 세력으로 건져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능자가 왔다 가셨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는 전능자께서 영으로 마음 속에 들어가셔서 지키고 보호하시고 지혜를 주신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에게 매여 일생 종노릇하는 자들을 구출하여 천국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싸워서 승리해야 할 장소는 교회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담대해져야 한다. 교회에서 말


씀을 듣고 기도하고 무장했으면, 이제는 이 세상으로 담대히 나가야 한다. 이미 이 세상임금인 마귀는 권세를 박탈당한 껍데기 임금에 불과하다. 그러니 전능자인 예수의 이름으로 당당히 나가가라. 그리고 귀신을 드러내고 쫓아내어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건져내라. 그리고 그들에게 전능자가 왔다가 갔다고 분명하게 말해주라. 그리고 전능자께서 믿는 이들과 함께 마음 속에 내주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해주신다고 가르쳐주라. 그래서 얻는 하나님의 자녀를 얻으라. 그것이 우리 믿는 이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장 큰 이유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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