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레미야강해(19) 진짜 주의 종 선지자는 어떤 경우에 가장 고통스러워하는가?(렘20:1~18)_2023-02-28(화)

https://youtu.be/TTVT9pmQXBY [또는 https://tv.naver.com/v/33751117]

 

1. 예레미야서 20장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예레미야서 20장은 예레미야서의 본론부 있는 제1부(2~25장) 12개의 단편 예언들 가운데, 제8예언의 뒷부분에 해당한다. 제8예언(렘18~20장)은 18장부터 20장까지로서, 그중에 18장은 그 유명한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온다. 이는 개인과 민족의 쓰임(용도)에 관하여 절대주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비유 말씀이다. 그리고 19장에는 토기장이가 옹기를 파쇄함으로서 회개를 거부하는 남유다의 철저한 파괴가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20장에는 성전 총 감독자인 제사장 바스훌에 의한 예레미야의 핍박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동료들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예언(렘20:1~6)과 더불어 홀로 핍박과 조롱거리가 되어 버린 예레미야의 탄식(렘18:7~18)이 기록되어 있다. 

 

2. 예레미야는 왜 성전에서 험한 꼴을 당하게 되었는가?

  B.C.597년경 남유다의 여호야긴왕의 통치 말기였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함께 힌놈의 골짜기의 도벳 사당에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깨뜨리면서, 한 번 깨뜨린 토기는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남유다의 멸망의 확실성을 실물적으로 보여 주었던 예레미야는 이제 성전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도시에 이러한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성전 총 관리 감독자인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잡아다가 폭행을 하고 그의 목에 차꼬를 채워 밤새도록 성전문에 묶어 두게 된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이처럼 험한 꼴을 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성전에 와서 남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의 파괴와 멸망 곧 재앙을 예언했기 때문이다(렘19:14~15, 20:8). 

 

3. 핍박당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이렇듯 죄없는 예레미야가 성전 총 관리 감독자인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에게 끌려가 모욕을 당하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3가지 말씀을 들려주신다. 첫째, 바스훌의 이름이 '마골밋사빕'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했다(렘20:3). 바스훌이라는 이름의 뜻이 '자유를 가져다 주는 자'였는데, 마골밋사빕이라는 이름의 뜻 곧 '사방으로부터의 두려움(공포)'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이다. 이는 바스훌이 남유다에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사방으로부터 공포를 가져오게 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둘째, 남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칼에 죽고 나머지는 바벨론으로 옮겨가서 거기에서 죽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모든 귀중품들이 약탈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렘20:4~5). 셋째, 바스훌과 바스훌의 거짓 예언을 지지했던 그의 친구들까지 전부다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가서 거기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렘20:6). 이처럼 하나님은 참된 주의 선지자를 핍박하고 거짓 예언을 한 바스훌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신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4. 제사장과 그의 동료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고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었던 예레미야는 어떤 탄식을 하게 되는가?

  그런데 성전의 총 관리 감독자인 바스훌과 여러 동료들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었던 예레미야는 이제 탄식하며 기도한다.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주께서 자신의 사정을 감찰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러면서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는 그것을 내팽개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탄식 중에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주의 종 선지자의 마음이다.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5. 진짜 주의 종은 어떤 경우에 가장 고통스러워하는가?

  진짜로 하나님께서 쓰임받는 참된 종은 무엇에 가장 고통스러워할까? 자신이 받는 핍박과 조롱거리가 고통스러운 것일까? 예레미야는 자신의 동료였던 제사장이자 선지자였던 바스훌에게 심한 모욕적인 언사와 처벌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바스훌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자신을 처벌한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자신의 동료 종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유다의 백성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라고 세워준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참된 음성을 듣지 못하여 가짜로 예언하고 있었고 가짜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비단 그때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때처럼 가짜를 예언하고 가짜를 가르치는 주의 종들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 성도들은 주의 종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결코 틀린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넓은 길을 가르치는 주의 종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성도 본인에게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지도자들의 잘못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주의 종들이겠지만 그들의 말속에는 거짓이 들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말로 성도들을 가르쳐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게 함으로, 결국 한 명의 성도라도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주의 종이 있다면, 그 책임은 목회자가 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거짓말을 하는(거짓 예언하고 거짓된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들은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 넣게 되든지(계21:9), 아니면 새 예루살렘 성밖에 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1:27, 22:15). 고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목회자가 끝까지 참된 진리만을 선포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로 지원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전하는 말씀은 곧 나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3년 02월 2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2) 사울 그는 왜 교회를 잔혹하게 멸절시키려 했을까?(행8:1~3)_2022-08-17(수) https://youtu.be/OftJ8WDWWA0 [혹은 https://tv.naver.com/v/28646960 ]

 

1.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했던 것일까?

  사울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울은 잔인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그가 비록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 아주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하나님의 경륜이 대체 무엇이며 그때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는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첫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영적 무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감히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믿어온 자신에게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슨 일이든 열정적으로 하는 그의 성격과도 맞물려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진 혈기와 분노로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요 빗나간 열심이었던 것이다. 처음 스데반을 죽일 때에 그의 마음도 약간은 꺼림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부터 사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대담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다. 왜 그럼,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우상숭배자들이나 신성모독자들은 모조리 죽이라고 하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에부터 모든 경륜은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살리려 오셨고 죄인을 용서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부터는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되었다(마5:43).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후 믿는 이들이 자신과 사상적으로 혹은 노선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핍박한다거나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의 경륜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도 빗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여버리면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3.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두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둘째로, 자신의 출세를 위한 최고의 기회가 그렇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인들 중의 히브리인이었다(빌3:5~6). 그래도 그의 지파는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켰던 베냐민 지파였고,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체계적으로 율법공부와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율법의 엄한 교훈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최고의 사람이 되는 것은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산헤드린공회원이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헤드린공회가 하는 일에 적극 가담하여 그 일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출세에 최적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문제 대상 1호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눈엣 가시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4.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세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셋째로, 그가 사탄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울은 완전히 사탄에 붙들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이도록 미웠다. 왜냐하면 사탄은 파괴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요10:10). 사실 그때 사탄은 철저히 사울을 이용한 것이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울은 여전히 구약경륜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는데,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그로 하여금 사람들을 정죄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일을 한다면 산헤드린공회원이 해야지, 청년 사울이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산헤드린의 하수인처럼 예수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예수님을 비방하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했다(행26:11).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탄에 의해 그의 눈이 완전히 감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에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원문에는 비늘들)이 벗겨진 사실을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늘은 그냥 비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어찌 비늘이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비늘은 뱀의 비늘이었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 단어는 물고기나 뱀의 비늘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로서 용과같은 큰 뱀의 비늘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의 눈은 완전히 뱀으로 충혈되어 있었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5. 오늘날에도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이미 구약경륜에서 신약경륜으로 들어왔다. 구약경륜은 율법시대이니만큼 무엇이 죄인지를 알려주는 시대였기에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약경륜은 복음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우상숭배자라 할지라도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정죄나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해야 한다. 특히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핍박하거나 죽이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단사냥꾼 같은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자들을 정죄하거나 교계에서 매장을 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살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신약경륜에 속한 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로마카톨릭은 자신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가두었으며, 수 만 가지의 도구로 고문하고 죽인 숫자가 무려 6,000~8,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참으로 그들은 신약경륜 안에 들어온 자들인가? 진정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았으면 받았지 핍박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죽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죽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는 자의 바른 삶이기 때문이다. 

 

2022년 08월 17일(수)

정병진목사

성도들이 엎드려 경배할 유일한 대상은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로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핍박하여 때로는 죽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시기가 곧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의 핍박에 대비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될 보상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배 관련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찬송하고 그분만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022-05-1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5)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계5:6~14)_성도가 예배를 바칠 유일한 대상은 누군가?_2022-05-15(주일)

https://youtu.be/78PrmrpXy04 [혹은 https://tv.naver.com/v/26829855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들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그것의 핵심은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양에게도 주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에서 예배하고 있는 존재들 곧 네 생물과 25장로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천상의 피조물들은 현재 천국에서 어떻게 예배하고 있을까? 이들이 어린양에게 올려드리고 있는 찬송과 경배는 과연 어떤 것이며 또한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 이 지상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누구에게 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고 하는 새력들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 누구이며, 무슨 이유 때문에 한 분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그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 성도들도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환난의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러한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경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하나님을 사칭하는 세력이 누군지를 살펴보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성도들은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성도들은 천국에서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즉 천상의 예배에서 우리가 예배드릴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천상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계7:11). 우리는 천상에 계신 하나님과 엎드려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비단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곧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24장로들 그리고 144,000명 되는 보좌에 앉은 이들과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들이 찬송과 경배를 드리며,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피조물까지 다 경배를 드린다. 이중에서 네 생물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엎드려 경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 어떤 표현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총 4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첫째는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이 보좌는 하나님 한 분의 보좌로서 통치의 보좌와 심판의 보좌이다. 둘째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하나님만이 항상 살아계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14:7). 그분만이 창조주이시며 창조된 피조물을 다스리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어린양'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5:8,14). 어린양께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3.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과 경배를 동일하게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오직 주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리가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 11~12을 보면, 모든 천사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천사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7가지의 흠숭을 드린다. 그것은 찬송과 영광, 지혜와 감사, 존귀와 권능(능력) 그리고 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천만만의 동일한 천사들이 어린양에게도 7가지 흠숭을 드리는 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그렇다. 순서만 바뀌었을뿐 하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동일하게 어린양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에서 예배드리는 존재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통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4. 하나님께 바쳐야할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데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바쳐야할 흠숭 곧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들이 있음을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세력은 바로 용이다. 이 '용'은 타락한 천사장이었던 루시퍼로서, 옛 뱀이요 마귀와 사탄이요 온 천하를 꾀는 자다. 그런데 이 놈이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자신도 받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 놈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리고 예수님을 가둬놓으려했던 무저갱에 지금 자신이 갇혀 있다. 그는 [천국에서의] 천년왕국이 끝나는 어느 시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잠깐 내어보내는 시기가 올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지낼 것이다(계20:2). 그렇지만 그놈은 자신이 찬송과 경배를 받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하여 2인자를 내보내서 그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이다(계13:1~10). 이 짐승은 이 세상 제국의 왕들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제국의 왕들이 이 짐승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으려하고 또한 경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세력을 사도요한은 여러 짐승을 가지고 알려주었는데, 그 짐승은 사자와 곰이요, 표범과 열뿔 가진 무서운 짐승이다(계13:1~3). 이러한 짐승은 사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짐승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다니엘 7장에서 짐승은 각각 '사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요, '곰'은 메대와 파사의 다리오와 고레스 왕이요, '표범'은 그리이스(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무서운 열뿔 가진 짐승은 앞에서 출현했던 짐승들의 특징과 더불어 무서운 이빨을 지녔는데, 이는 로마제국의 왕들로서 당시에는 네로 황제나 도미시안 황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을 대신하여 바다에서 올라운 첫째 짐승(=적그리스도)이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 때에 발생한다. 그때가 되면 땅에서 올라오는 두 뿔 가진 어린양같은 [둘째]짐승(=거짓선지자)이 용처럼 말을 하고 첫째 짐승의 권세를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미혹하여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첫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한 후 그 우상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첫째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 이든지 다 죽이는데, 이때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표(짐승의 표=666)를 준다. 그러므로 이 표를 받지 못한 자는 매매를 못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로마황제 시대에도 있었고 장차 앞의 어느 날에도 있을 것이다. 

 

5. 왜 성도들은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왜 [첫째]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1~2계명을 어기는 자를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자손 3~4대가 그 죄값을 물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는 우상숭배의 죄는 큰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어떤 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고난을 받게 되고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계14:9~11). 그렇다.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는 영원한 고통이라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존재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일곱대접심판이 내려지는 마지막 환난의 시기에 이 땅에 남겨지기 때문이다(계16장). 요한계시록에서는 말세(예수님의 승천이후 재림때까지)에 되어서 일어날 일을 일곱 가지 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마지막 일곱번째 인은 또다시 일곱 나팔 재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 나팔 재앙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든지 비그리스도이든지 상관없이 다 받는 것이지만, 일곱 나팔 재앙들 중에서 마지막 일곱번째 나팔 재앙인 일곱 개의 대접 재앙들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가 이 땅에 남겨지는가? 그것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남겨진다. 물론 이때 남겨지는 기간은 아주 짧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그때 남겨져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하려면 목숨 걸고 짐승과 그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만약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고 표를 받는 자는 일곱번째 나팔 재앙 곧 일곱가지 대접 재앙들을 고스란히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첫째 대접 재앙 때에 싸인으로서 짐승의 표를 받고 그것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앙들은 일곱 대접 재앙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짐승을 경배하지 말아야 하고,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우리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그러한 자들만이 천국의 유리바닷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계15:2~4). 다시 말해, 짐승과 짐승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자들만이 일곱 대접 심판들을 받기 직전에 하늘에 휴거되어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15:1~8). 셋째, 이러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면 왕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계20:4). 이러한 자들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먼저 천국에 들어가서 거기서 천년동안(주님의 승천후 재림전까지 하늘에서의 시간) 왕노릇할 것이요, 만약 주님의 재림시에 부활체가 되어 주님을 맞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경배를 올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사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에 천국에 들어간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육신의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는 말이다. 그렇다고 악한 사탄 마귀가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자기들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지만, 그러한 영광스러운 저 천국을 자기보다 능력이 적은 인간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놔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기질투의 화신들이다. 자기가 못 들어간다면 들어가는 이들이라도 잘 다독거려야 배려해 주는 작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정반대다. 자기가 못 들어가는 그곳을 다른 이가 들어가려는 것을 배 아파한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악한 영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핍박을 우리 성도들은 인내로서 잘 이겨내야 한다(계13:7~10). 이들은 한사코 자기들의 경배를 받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이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공생애 기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들의 핍박을 너무 염려할 필요가 있다. 핍박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만 경배하고 그분에게만 찬송을 올려드리자. 이것이 천국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니까. 

 

2022년 05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골1:24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는데, 과연 그분께서 감당하지 못하고 남겨두신 고난이 있다는 말인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그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자신의 육체 안에 채운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당시에 무엇을 채우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라어원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로 된 성경으로 보면, 똑같은 단어인데도 번역자에게 따라 약간의 상이한 번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바로 그러한 부분 중의 하나다. 먼저,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으로 말씀을 읽어보고, 헬라어원문에 따라 직역해보도록 하자.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개역개정]

골1:24 나는 지금 너희를 위하여 고난 가운데서 기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환난의 부족한 부분을 그의 몸을 위하여 내 육체 가운데 채운다. 그것은 교회다.[직역]

  그렇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사실상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두신 고난은 없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가 받을 고난을 다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담당하신 고난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고난이 한 부분이요,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낫게 하시기 위한 고난이 또 한 부분이다. 앞의 고난은 그분의 육체가 죽는 고난이요, 뒤의 고난은 그분의 육체가 상함으로 받는 고난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가 받은 고난의 영역이 2가지였던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질병을 없애기 위한 고난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의 죄를 없애주기 위한 고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없애기 위해 째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예수게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는 고난을 받으셨다.

  어느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고 하자, 제자들은 이제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다윗의 왕국을 세우실 날이 도래했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내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자신을 앉혀 달라고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한 부탁의 대표는 요한과 야고보 제자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이렇게 물었다(막10:38~40).

막10:38-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렇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는 고난의 잔을 가리키고, 죽음의 세례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면 그리스도가 당하실 고난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해야 할 고난이 그것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주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피조물의 형상인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 그래야 고난을 당할 수 있고 피흘려 죽으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고난을 다 당하셨음을 큰 소리로 외치셨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지불해야 할 질병의 값과 죄값을 다 지불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또 당해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이 들어가야 인류의 질병이 없어지고 인류의 죽음이 해결되는 그러한 고난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다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남겨두신 고난은 위에서 말하는 질병을 대신 담당하는 고난이 아니며, 죄값을 대신 담당하는 고난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받아야 할 환난을 가리킨다.

  먼저, 헬라어원문을 보자.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의 환란의 부족한 부분"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고난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할 환난인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환난'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바로 '들립시스'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온전케 하려 할 때 우리가 당하게 될 환난과 역경과 고뇌와 고통을 가리킨다. 이것이 없다면 교회는 사실상 교회가 세워지기가 어려우며,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온전케 되기가 어려울 것이.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행20:23~24).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들립시스)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이 환난은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은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들립시스)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렇다. 우리 인간들은 불완전하다.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된 본성을 자기 육체 안에 가진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환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환난은 징계라는 것도 들어가 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불완전한 교회이니까 그 교회가 거룩해지고 그리고 온전해지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환난이 거기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이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롬5:3~4).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들립시스)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들립시스)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의 신앙이 정금같은 신앙,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신앙이 되기 위해서 환난은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요 필요한 요소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환난이 없다면 우리가 버림받은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소다. 그러므로 결국에 천국에 들어간 자들은 이러한 환난을 겪고 이겨낸 자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국백성이 누구인지를 보라(계7:13~15).

계7:13-15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들립시스)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떠나시기 며칠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요16:33).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거나 신앙에 실패하도록 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너진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고 신앙의 길을 올바르게 가도록 세워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 가운데서 닥치는 환난을 당할 때,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것 없이 우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가 어려우며, 깨끗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고난에 대해서도 조금 더 살펴보자. 조금전에 고난이란 질병값과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순교하는 자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급은 환난을 받는 성도들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그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롬8:17~18).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이러한 고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작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난당하는 자를 놀랍게 보상해주신다. 그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는 것도 한 가지 대처 방법일 것이다.


  한편, 사탄이 주는 이러한 고난을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핍박'이요, '박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핍박과 박해를 만나면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에게 주어질 상이 매우 클 것이기 때문이다(마5:10~12).

마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렇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 이런 것들은 결코 좋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다 아픈 것이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정금같은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죄와 허물  투성이인 우리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올 때 이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말라. 이것은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하여 받는 환난이 있다면 그때에는 빨리 회개하라. 그리하여 그러한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탈출해 나오라. 혹 만약 그것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회개하라. 그리고 회개한 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환경과 질병을 꾸짖어버리라. 그리고 끝까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힘쓰라. 그리고 교회가 온전해질 때까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앞으로 전진하라.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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