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이것이 다윗이 드린 묵상기도다(시19: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AHdHsQ02_c  [혹은 https://tv.naver.com/v/29009169 ]

 

1. 들어가며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향단의 향을 사르는 것과 주의 사항이 가장 일치하는 기도는 역시 주기도였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매우 균형을 갖춘 모범적인 기도문이었다. 즉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기도와 인간의 필요를 위한 기도가 각각 3가지씩 있었으며, 인간의 필요를 위한 기도로 영혼육을 위한 기도이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필요를 위한 기도로 균형있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과연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발성학적으로 보았을 때에 우리의 기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발성학적으로 볼 때에 기도는 크게 부르짖는 기도와 읊조리는 기도가 있다. 다시 말해 '통성기도'와 '묵상기도'가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묵상기도'란 대체 어떤 기도이며, 묵상기도는 언제 드리는 기도인 것인지 그리고 묵상기도를 하면 어떤 유익을 얻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통성기도와 묵상기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는 발성학적으로 보았을 때에 '통성기도' 즉 부르짖는 기도가 있으며, '묵상기도' 즉 읊조리는 기도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빈도수를 보면, 묵상기도보다는 통성기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많큼 우리의 삶에는 통성기도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통성기도는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가? 통성기도는 보통 환란과 고통 중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구할 때 사용하게 된다(출2:23, 삿3:9). 그리고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도 자주 부르짖는 기도를 했었음을 발견할 것이다(시18:6, 34:6). 그리고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부르짖는 기도를 했으며 또한 그렇게 기도 해야 함이 언급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행7:59, 눅18:7).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생활에 통성기도는 매우 필요하고 중대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처럼 묵상으로 기도할 필요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묵상기도는 묵상기도가 주는 놀라운 영적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묵상으로 기도하는 것도 기도의 여러 유형들 가운데 하나에 속하며, 어떤 특별한 목적에 따라 매우 중요하기 쓰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묵상기도'란 어떤 기도를 가리키는가? 시19:14에 보면, 다윗이 묵상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때 '묵상'이라는 말은 '힉가욘'이다 이 단어는 속삭이듯이 그리고 읊조리듯이 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다윗이 어떻게 묵상으로 기도했으며, 다윗이 그때 묵상으로 기도함으로 인하여 얻을 수 있었던 유익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3. 다윗은 어디에서 언제 묵상으로 기도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어디에서' 그리고 '언제' 묵상으로 기도한 것일까? 시편19편은 '찬양시'이자 '지혜시'로 알려져 있는 매우 유명한 시편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 시편은 표제어가 달려 있는데, 표제어에 따르면, 이 시는 '다윗의 시, 인도자(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이것은 다윗의 기도이기는 하지만 시의 형태로 지어진 것이며, 또한 지휘자를 따라 노래 부르기 위해 지어진 시이다. 그럼, 다윗은 언제 어디에서 이 시를 지은 것인가?

  첫째, 다윗이 대체 '어디에서' 이 시를 지은 것인가? 다윗은 이 시를 어디에서 지었을까? 표제어에는 그것을 살펴볼 수 없으나, 시편 19편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가 어디에서 이 시를 지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늘과 궁창'(1절), '날과 밤'(2절), '해'(태양)(4절), '정금과 송이꿀'(10절), '반석'(14절)이 나온다. 고로 다윗이 시를 지은 장소는 틀림없이 '광야'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광야의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혜로 가르쳐준 것들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 장막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어떤 깨우침을 받은 가운데에 이 시를 지은 것이다. 

  둘째, 다윗은 '언제' 이 시를 지은 것인가?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도 사실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1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그가 자신의 허물을 낱낱이 깨닫게 되었고 숨겨둔 허물을 고백한 후에 이 시를 지었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알고 있으면서도 죄를 지었던 뻔뻔스러운 자신을 회상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시에는 자신의 부하였던 우리야 장군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고 우리야를 죽었던 자신의 과거를 암시하는 말들이 등장한다. 고로 그가 이 시를 지었던 시기는 적어도 밧세바 간음사건과 우리야 살인사건을 겪고 난 후 그 죄로 인해 자신이 징계를 받은 경험을 가졌던 시기 이후였던 것 같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겪은 후에 어느 날 광야의 천막에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 묵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4. 다윗이 이때 깨달은 진리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이 묵상으로 기도하면서 깨달은 진리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자연에서 배운 계시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운 계시다. 앞의 계시를 '자연계시'라고 부를 수 있겠고, 뒤의 계시는 '특별계시'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대자연 속에서 자연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1~6절). 그것은 하늘과 궁창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들었고, 동쪽에서 떳다가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들었다. 하지만 하늘과 하늘에 있는 것들과 태양을 창조하시고 이것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불신자의 눈에는 하늘도 그저 보이는 하늘일 것이고 태양도 그저 떠오르는 태양에 불과하겠지만 산전수전을 이미 겪었던 다윗에게 대자연은 아주 훌륭한 교과서였던 것이다. 그때 그의 귓가에는 결코 들리는 소리가 없었어도, 날은 날에게 말을 쏟아내고 있었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묵상기도의 효력인 것이다. 자신의 귓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는 자연의 숨결 속에서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 아래 모든 생명체가 빛을 받고 또한 온기를 받아 살고 있는 것처럼, 자신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고 있었다는 비로소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것이다. 

  둘째, 그는 장막에서 읽고 있던 율법(토라)를 보면서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7~14절). 그는 완전한 토라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의 우둔함을 깨닫고 눈이 어두워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지혜롭게 하며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기록된 말씀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고, 뻔뻔스럽게 죄를 범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5. 다윗은 이때 어떤 기도를 드렸는가?

  자연과 그리고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다윗은 그때에 나지막이 그리고 조용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드린 '묵상기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때 자연만물을 보면서도 그들이 던지고 있던 메시지를 도무지 듣지 못했고, 기록된 말씀을 읽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숨겨진 허물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알면서도 죄를 짓고 있는 뻔뻔스러움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기도하고, 그 죄들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기를 기도로 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흠이 없게 되고 죄악으로부터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때 많이 울면서 기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 과거에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었는지를 말이다. 왜 그때에도 똑같은 자연에 자신이 있었었고 그때에도 똑같이 장막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날들도 그에게 있었을 것이다.

 

6. 묵상기도의 효력은 무엇인가?

  다윗은 그때 자연만물이 말은 하지 않아도 고요히 자신의 역할을 후대에 전수해주고 있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었음에도 나단 선지자가 들려준 '작은 암양새끼'의 비유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이제 그가 과거에 지었던 죄악들을 두 번 다시 짓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묵상기도를 하다보면 반드시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오게 된다. 왜냐하면 묵상기도를 할 때에 비로소 나지막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 곁에서 조용히 듣고 계시는 주님과 대화하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인 깨달음은 통성으로 기도할 때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통성기도는 자신의 죄를 내뱉어 악한 영들을 내보낼 때에라 효력이 있는 것이지만, 깨달음의 기도는 오직 묵상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7. 나오며

  묵상기도란 무엇인가? 묵상기도란 주님이 곁에서 길을 같이 걸어가면서 나의 말을 들어주는 느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나의 옆에서 친구처럼 나의 말을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깨달음이 금방 오게 된다. 곁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내가 너무나 분주히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온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겠노라고 주님께 나지막히 각오를 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묵상기도'다. 그러므로 묵상기도는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인생의 중대한 깨달음을 얻게 해 준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 열납되는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아침이 되면 동네를 한 바퀴 걸어보면서 자연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라. 나무도 어제 보았던 그 나무이고 어제 보았던 그 풀들이겠지만 오늘 보는 그것들은 어제의 그것들과 사뭇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것이다. 그리고 기록된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여보라. 성경도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들려줄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진정 우리의 입술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기도로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묵상기도'가 되는 것이다. 

 

 

2022년 09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왜 기도는 통성으로 기도해야 할까? 그냥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는 것일까?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를 책망하는 데목이 나온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차라리 자신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조용히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께 들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통성으로 기도하라고 명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렘33:3, 시86:7,50:15, 민12:13,20:16, 삿3:9, 시18:6). 그리고 실제적으로 기도에 응답을 받았던 자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거의가 다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마15:22, 마20:30). 오늘 이 시간에는 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 그리고 통성으로 기도하게 되면 어떤 유익이 오는지 그리고 통성으로 기도할 때 좋은 방법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왜 통성으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는지를 살펴보자.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하나님은 예수님이셨다. 구약시대에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든 아니면 신약시대에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청했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했거나 응답해주신 사례를 보면, 우리는 왜 통성으로 기도하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대체적으로 6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통성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견고히 붙잡는다는 신앙고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전심으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듣고 반드시 응답해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렘29:12~13). 다시 말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인 것을 신앙고백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둘째, 자신의 존재 깊숙이 들어있는 영을 해방시켜 자신의 영혼이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슥12:1). 사람의 영은 사람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영은 혼(souls)이 덮고 있고, 사람의 혼은 육체가 덮고 있다(살전5:23). 그렇다. 사람의 외곽은 육체가 차지하고 있고 사람의 한 가운데는 영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혼 곧 인격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이후 육체는 사탄의 소유가 되어버렸다(창3:14, 마12:44~45). 그리고 혼은 죄된 본성에 심각하게 오염되어있는 상태다(롬7:18~20). 그러므로 우리 존재 깊숙이 들어있는 영이 죄된 본성에 오염되어 있는 혼을 뚫고 그리고 사탄의 소유가 되어버린 육체를 뚫고 나와, 영혼이 기도하려면 반드시 통성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이 자신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를 뚫고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고 처음부터 조용히 기도하면 안 된다. 그러면 5분도 채 기도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해야 할 두번째 이유는 자신이 영혼이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뚫고 나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다.

  셋째, 이것은 두번째 이유와 맞물려 있는데, 통성으로 기도하면 생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이 먼저 나오므로 내 영이 하나님과 쉽게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성기도는 사실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각을 거쳐 나오는 일반적인 기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각본과 리허설이 없지만 마구 쏟아내는 것이 통성기도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은 사탄이 강하게 역사하는 장소다. 이때 사탄은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아 기도를 방해하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가룟유다의 경우를 보라. 마귀가 벌써 가룟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요13:2). 그러므로 처음부터 생각을 따라 기도하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했다가는 사탄이 주는 생각 곧 가라지를 하나님이 주신 생각으로 잘못 알게 된다. 사탄이 주는 생각을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람의 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내가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기관 가운데 사람의 성대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의 영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영이 없는 동물들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닮은 가장 중요한 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에 앞서 말로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사람의 영혼을 사용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말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우선 통성으로 기도하라.

  넷째,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행1:14,2:1~4,13). 성령의 은사들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이다. 이 선물은 대부분 방언을 필두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고 이 방언을 받기란 사실상 어렵다. 방언이라는 은사자체가 언어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때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곧 방언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첫번째 은사인 방언을 하기 위해서는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실제로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고 묵상으로 기도했는데도 어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대부분 사탄이 준 가짜은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좋다. 통성으로 기도하여 어둠의 영들을 다 내어쫓아낸 다음,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받아야 그것이 성령의 은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음악을 틀어놓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터치하신다고 하면서 두 손을 펼쳐놓은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다. 그러다 툭 넘어지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을 만지고 지나갔다고 말한다. 아니다. 이건 100% 사탄이 하는 장난이다. 다 귀신들이 성령을 가장하여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 분이지 터치하고 지나가서 넘어뜨리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통성으로 기도하지도 않으며, 회개기도도 하지 않은 채로, 성령의 은사를 받으려 한다면 그때에는 귀신이 주는 것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옳을 판단이 될 것이다. 방언의 은사가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음을 알라.

  다섯째, 통성으로 기도해야 어둡고 우울한 감정을 떨쳐버리게 되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고 생기발랄할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나 패배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대부분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자라 할지라도 하에 통성으로 기도하게 되면, 자신의 근심과 걱정이 자기의 몸 속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질병과 상처도 자기에게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배출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너무 센티멘탈한 것을 좋아하지 말라. 그런 자는 귀신이 잡아쓰기에 안성맞춤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마귀와 귀신들이 떠나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통성기도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영안이 열려있는 사람은 통성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어떤 강렬한 빛이 나가는 것을 본다.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으로 주어지는 강력한 능력과 권세가 그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통성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하늘을 뚫고 하나님께 상달되어, 그 순간 하나님께서 부리는 선한 천사들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파송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통성으로 기도하는 사람 근처에 오기를 꺼려한다. 발각되어 쫓겨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귀신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므로, 자기들도 그 기도를 듣고는 있지만 그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행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어떤 이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치 옹알거리는 현상이나 귀신들이 장난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성령을 훼방해서는 아니 된다. 왜 그런지는 방언을 통역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방언을 통역해 보면, 사람의 영이 그때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에게 그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방언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의 대화인 것이다. 그것을 인간의 귀가 알아 들을 수 없으니 빈 소리라고 주장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또 그들 중에는 방언기도는 초대교회 이후 사라지고 없어진 은사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사람은 영을 가진 존재이므로 사람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겨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살아나서 말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방언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사람의 영이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에는 계속될 것임을 잊지 말라. 함부로 성령이 하시는 일을 훼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그것은 대체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먼저는 통성으로 충분히 기도하라. 회개하는 기도와 간구하는 기도를 분명하게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방언기도를 하라.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방언기도로 시작하여 방언기도로 끝내기도 하는데, 그것은 좋지 않은 기도방법이다. 사실 방언기도가 능력있는 기도이기는 하지만, 방언기도로서는 천국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국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며,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아무리 많이 드렸다고 해서 자신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방언기도가 결코 회개기도를 대신할 수 없으며, 자신이 드려야 할 감사와 찬양까지 대신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우선 통성기도로 시작하라. 그리고 한 15분정도 쭉 기도하다가 방언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방언기도를 조금씩 사용하라. 그리고 30분이 지나면 방언기도를 나오는대로 해보라. 그러다가 다시 성령께서 떠오르게 하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다시 통성으로 기도하라.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라. 그리고 다시 성령께서 떠오르게 하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다시 통성으로 기도하라. 이렇게 기도하다 보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기도할 수 있다.

  한편, 통성으로 기도할 때 알고 있으면 조금 유익이 될만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통성기도할 때의 몸동작이나 손동작 같은 것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들이다.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자신의 몸을 가만히 둔 채 기도만하다보면 충분히 길게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손동작을 사용하거나 몸동작을 사용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때로는 손바닦을 치면서 기도하기도 하고, 손을 펴거나 쥔 채로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형식을 취하며 기도하는 것이 좋기도 하다. 그리고 몸으로는 앞뒤로나 좌우로 흔들면서 즉 리듬을 타면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기도하기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해도 문제 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기도할 때에 조금이나마 기도에 계속해서 집중하기 원할 때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니만큼 참고 하기 바란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싶으나 기도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그때에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날만큼은 먼저 방언으로 기도해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때라도 이렇게 기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여~ 주여~ 주여~ ." 주님을 좀 반복해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지금 나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주여, 이 시간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보라

  그리고 중보기도를 시작하라. 먼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부터 하라. 그리고 교회와 목사님과 자신의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다 보면 기도할 것이 이것저것 생각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도할 때에 중간중간에 자신을 위한 기도 즉 자신에게 믿음과 지혜과 영적 분별력 그리고 능력과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리고 가족구성원 전부를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다면 친구도, 친척도, 직장도 기도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기도할 것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통성기도할 때에는 중요한 것은 처음에는 반드시 통성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성기도나 방언기도를 약 30분에서 1시간정도 했다고 하면, 그 뒤에는 조용히 기도해도 아무런 상관 이 없다. 이미 회개했고, 하늘문이 뚫려있고, 돕는 선한 천사들이 파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는 듣는 기도를 시작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잊지말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 기도할 때에는 처음에는 무조건 통성기도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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