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4) 최초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비결(행2:42~47)_2022-06-20(월)

https://youtu.be/HWAv6VM12bI  [혹은 https://tv.naver.com/v/27452170 ]

 

1. 최초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누구인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부어진 성령세례를 통해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 들리자, 그 음성을 듣고 매우 놀란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들으며 놀라워하고 있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설교를 행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그러자 그 설교를 들었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게 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그리스도를 죽인 죄)을 회개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약 3천명 가량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최초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따랐던 120명의 갈릴리 사람들과 더불어 헬라파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다. 이들 중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이다. 

 

2. 예루살렘 교회와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똑같이 닮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기본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최초의 교회의 모습은 일종의 교회원형과도 같기 때문에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미흡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전에 우리가 더욱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과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 중에는 단 한 명의 이방인도 없었다. 그들이 본토박이로 살아왔든지 아니면 외국에서 살아왔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유일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한 마디로 '미신성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어떠한가? 반 만 년의 세월동안 우리는 미신과 잡신을 섬겨왔다. 우리는 무당에게 물어보고 살았고 부처를 섬기며 살았으며 조상제사를 빼먹지도 않고 지내왔다. 이 모든 것의 실체는 다 귀신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사람의 미신성향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60~80퍼센트 정도 된다. 그러니 한국 사람 속에는 악한 영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교회의 모델로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가면 아니 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귀신들의 미혹과 공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 성령운동에 귀신이 개입되어 있는지 우리는 늘 분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역시 '회개'라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회개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교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겉으로 성령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귀신을 따라가는 집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졌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초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와 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리고 교제에 그리고 떡을 떼어냄과 그리고 기도들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있어왔다(행2:42)." 그렇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는 4가지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교육이다(디다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힘썼다. 그때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도들이 직접 들었고 배웠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리고 말씀 그리고 그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행적들 역시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교제다(코이노니아). 그들은 집에서 모이거나 성전에 모일 때에 그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간증했을 것이다. 누구에게서 귀신이 쫓겨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병들었는데 치유받았다는 이야기, 성령세례 후에 어떻게 기도해서 은사를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떡을 떼었다는 것이다. 그럼 떡을 떼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성찬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애찬을 가리키는 것이일까? 고전11장을 읽어보면, 아마도 그것은 애찬 후에 성찬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46절에도 역시 그들이 집을 따라서 떡을 떼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이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였던 것이고, 그 집에서 모일 때에는 떡을 떼는 일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저녁에 모일 때 먼저 식사를 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성찬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는 기도들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초기 교회는 기도 공동체였던 것이다. 전에 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도 기도에 몰두한 적이 있는데, 역시 성령을 받아 교회를 이루고 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에 의하여 기적들과 표적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4.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아주 특별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44~45의 말씀을 통하여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토지와 소유물을 내놓아,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를 따라서 전체의 것들을 공동의 것으로 나누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와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은 자발적인 참여냐 아니면 강제참여냐 하는 것이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토지와 소유물을 하나님께 내놓았던 공동체였다. 그렇다. 초기 교회는 개인의 자유가 존중된 공동체였다. 어떤 것도 강제성이 없었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자발적으로 섬김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는 이와 다르다.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제한되고 침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결정한 어떤 지시사항이 내려오면 개인의 자유의사와 상관없이 그 지시사항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것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 공동체였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말이며,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인 기부문화와 더불어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5.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우리가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살펴볼 때에 가장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도 역시 사람들의 공동체였는데 왜 그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고 생색을 내기도 하며, 자기자랑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그러한 부정적인 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거룩함이 그들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과연 무엇이 그들을 변질되지 않게금 막아준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행2:43).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남자만 3천명 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인구대비 교인수는 상당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서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서로 죄악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 위에 성령이 임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의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교회에서 이 기능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없어져버렸다. 하나님의 임재를 모르고 경험도 해 보지 않은 자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성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염소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도 교회에서 어른 노릇을 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6월 20일(월)

정병진목사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성도들의 친교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런데 요한일서 1장에 보면 이 말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이것을 방해하는 요소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은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자들은 누구였는가? 왜 사도 요한은 그들을 분별하라고 그렇게 강조해서 말해야 했던가?

2021-11-1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2) 성도의 코이노니아의 핵심요소와 그것이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일1:5~2;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gvXSoKg9Gs [혹은 https://tv.naver.com/v/23470017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초신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자양분을 얻게 하고, 영혼을 노리고 있는 거짓 교사들이었던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실천적인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소중한 책이다. 요한일서는 알다시피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와 함께 사도 요한이 쓴 서신으로서, 이것들 중에서 첫 번째 책이 요한일서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 A.D.90~95년경으로 추정되며, 그 대상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로서 사도 요한이 전파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거나 신앙의 기초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초신자용 신앙 지침서가 바로 요한일서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요한일서 강해 두 번째 시간으로서, 코이노니아(교제, 교통, 사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코이노니아가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코이노니아에는 어떤 방면이 있으며,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고 그것을 지속시켜 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코이노니아'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코이노니아(koinonia)'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교제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인데, 이 단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에는 보통 '교제(친교)' 내지는 '사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어에서는 이 단어를 대부분 'fellowship'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가끔식 'communion'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코이노니아'의 본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단어의 뿌리를 찾아보면 알 수가 있는데, 원래 이 단어는 '코이노스'라는 형용사에서 온 말이다. 형용사 '코이노스'는 우리말로는 '공통된'이라는 뜻을 가졌다. 따라서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상호 간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서로가 공통된 정서를 함께 나누며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코이노니아'란 공통된 분모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교제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제를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인 간의 공통 분모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크게 확대해 보면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와 교제를 나누실 하나님이 먼저 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으며(요5:26), 이 생명을 예수에게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일1:2, 5:11~12) 또한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요일5:13). 이때 하나님께서 분배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를 일컬어 성경에서는 '거듭난 자'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영적인 교통을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대체 누구와 코이노니아를 가지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에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고 했다. 그것들 중 한 가지는 하나님 및 예수님과 갖는 교통이라고 했다(요일1:3).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성도들 간의 교통이라고 했다(요일1:7). 그런데 이것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를 수직적 교제라고 부르며, 성도들끼리 갖는 교제를 수평적인 교제라고 부른다.

 

3. 성도들이 서로 코이노니아를 갖기 위하여 꼭 해야만 하는 일 2가지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 간에 교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 2가지 있다고 말했다. 그중 첫 번째는 성도들은 반드시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요일1:5~7). 왜냐하면 우리 주 하나님이 빛이시며(요일1:5),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그 빛을 비추러 오신 참 빛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1:9, 요일2:8). 그러므로 성도가 이 빛 가운데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는 어둠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도가 죄를 범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즉시 죄를 자백하여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요일1:9). 이는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회개'라는 것을 알려 준다. 주님과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 사이에 코이노니아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리하면, 그것의 첫 번째는 반드시 성도가 어둠의 일을 끊고 생명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이다. 이때 자신이 빛 가운데 걷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죄를 짓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현재 어둠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은 죄를 자백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4. 사도 요한은 왜 빛 가운데서 걸어감으로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이루어야 하고 그래서 형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하는가?

  사도 요한이 '빛'과 '어둠'이라는 단어를 꺼내어 사용할 때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를 염두해 두고 쓴 것이다. 영지주의자들도 역시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을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빛과 어둠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다른 것이다. 그들은 영지를 깨달은 자를 일컬어 빛 가운데 있는 자요,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지만,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참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빛의 아들이 되어 빛 가운데 살 수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요12:35~36).  

  그렇지만 당시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은 현재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늘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도 역시 죄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영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에 속한 어떤 것이 자신의 영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는 죄를 짓고 있었어도 그들에게 그것은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약 그 상태로 죽는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불타는 영영한 불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 있어서 '영지'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인간이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되어 나온 신적 존재이므로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빛을 받는 것이요 영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길을 사람들이 모르니까 그 길을 알려 주려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진리의 빛을 깨닫도록 빛을 비추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참된 빛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는 굳이 예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다만 영지를 깨우쳐 줄 존재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인가? 그리고 왜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던 것인가? 그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다. 오직 우리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었기 때문이다(롬6:23). 그런데 하나님은 본래 영이시므로 죽으실 수가 없으셨다(요4: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 흘려 죽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요1:14). 그러나 이미 영지를 깨달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육체를 입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물질세계는 저급한 신이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주 저급한 신으로 밖에는 생각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육체를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거짓 선지자요,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했다(요일4:1~3, 요이1:7).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을 일컬어 가현설론자라고 부른다. 그렇다. 기독교의 최대의 이단이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영지를 깨닫기만 하면 자기도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영지를 깨달으면 하나님이 된다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어찌 피조물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가르침은 사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던진 미끼였다. 그런데 이것을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정말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께서 더러운 육체를 입으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때에 예수께서 육신을 입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까지 인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 중 단 한 사람도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 드리자. 그리고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 찬양을 올려 드리자. 왜냐하면 그분의 성육신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지를 깨달은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계명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를 가진 형제를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영지만 깨달으면 그들은 이미 신이 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득도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말한다. 자신이 빛 가운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들을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진실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빛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런 자하고는 교제를 끊으라는 것이다. 그들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요, 그들은 거짓말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코이노니아가 단절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모셨음에도 죄된 본성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우선 사도 요한은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을 한다든지 혹은 자신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미혹하는 자 곧 영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따르지 않고 사탄이 가르쳐 준 말장난을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연약함에 쌓여 죄를 짓는 성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이미 2천년 전에 예수께서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그 속죄의 효력이 나타나게 하려면 반드시 지은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다(요일1:9). 죄를 자백할 때에라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지은 죄들로부터 그를 깨끗하게 하고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가운데는 현대 영지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한 번 믿어서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자신이 예수를 믿을 때에 이미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사실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회심의 회개를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이때에 지옥 갈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하신다. 그러면 그가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죄된 본성이 영영 사라진 것이 결코 아니다. 여전히 죄된 본성은 남아 있다. 그래서 그것은 육체가 죽는 날까지 활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러한 고민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로마서 7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회심의 회개를 하였고 예수님을 모셔 들였다면, 그는 그때부터는 발을 씻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는 이미 목욕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을 씻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현대에도 있다. 이들이 바로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이다. 한 번 믿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영지주의자들인 것이다. 속지 말자. 우리는 요한 사도를 통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어느 때고 죄를 지었다면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2천년 전에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6. 성도의 단절된 코이노니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래서 사도 요한은 편지를 써 보내는 목적을 2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1:2)"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죄를 지었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라는 것이다(요일1:9). 그리고 우리의 최대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요일2:1).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바로 의로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첫 번째 변호사(파라클레토스)인 셈이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두 번째 변호사(파라클레토스)인 셈이다(요14;16, 26, 15:26). 그런데 이미 속죄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어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는 것일까? 아니다. 그분은 믿는 이들의 죄를 용서해 줄 화목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장차 믿을 자들까지 포함하는 화목 제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때마다 즉시즉시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코이노니아)을 단절시키지 말아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라면, 그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단절되지 않도록 미리미리 예방해야 하는데, 그것은 빛을 따라 행하든지 아니면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사도 요한이 A.D.90~95년경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제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속아 마치 그것이 진리의 가르침인 줄을 알고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예방 주사를 미리 맞혀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제 갓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시작하는 이들이자, 성도 간에 코이노니아를 소망하고 있는 이들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영지주의자들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며,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인도해 주는 선구자이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 가운데 어디 틀린 말이 있는가? 없다. 여기까지는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들의 가르침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럽고 추한 물질계를 만든 신은 저급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육체를 입고 오셨건만, 그들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은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그분이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을 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속에 잠시 들어가서 일하다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그를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육체를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미혹이요 사탄의 궤계요 적그리스도의 속임수인 것이다(요일2:18, 26, 4:1,3,6, 요이1:7).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 편지의 서두(요일1:1~2)에서부터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요일2:2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5:5~6a)".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히 찬양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2021년 11월 10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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