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아가서의 말씀을 본다. 그렇다면 아가서에는 어떤 은혜와 감사가 들어있는 것일까? 우리는 술람미 여인을 통하여 '은혜'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감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는 아가서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감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정확히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감사가 나로만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도 이 말씀은 우리를 바른 길로 안내해준다. 2021-10-2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신부(39) 아가서강해(29) 술람미 여인과 나 너 그리고 우리들(아1;2,4;6,7;10~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SaSWgrk8eQ [혹은 https://tv.naver.com/v/23166811 ]

 

1. 들어가며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의 명절이다. 명절은 아무래도 풍성한 음식이 있어야 하고 축하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명절 음식에는 빵과 포도주가 꼭 들어가며, 축하 순서에는 노래와 춤이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춤은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추수감사예배 때에는 떡과 음식이 준비되는 것이고 특별 순서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명절의 핵심 요소는 사실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경우에 감사를 하게 되는가? 특별히 아가서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우리는 술람미 여인을 통하여 어떤 감사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녀의 초기에 그녀에게서 '감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솔로몬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에게도 드디어 감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감사가 그녀의 생활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솔로몬을 만나 무슨 변화를 겪은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은혜를 받고 감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인가? 감사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오늘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

 

2.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의 처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가서의 첫 시작은 그녀의 요청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솔로몬이 그녀에게 입맞춰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가서 강해를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요청은 실제 입맞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가서 8:1에 보니,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쉽게 그와 입맞춤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솔로몬과 연애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결혼 전에 그녀는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솔로몬이 다가오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 그녀의 관심은 이제 솔로몬의 것으로 향한다. 그래서 그가 일하고 있는 동산 곧 몰약 산과 유향의 산으로 그녀는 가겠노라고 결단을 한다(아4:6).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솔로몬과의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부터 그녀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솔로몬이 하는 일을 계승하는 자 곧 그의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자기중심적이었던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솔로몬을 기쁘게 하는 삶 곧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솔로몬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인가?

 

3. 술람미 여인을 달라지게 했던 세 가지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처음에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던 술람미 여인은 대체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이타적인 삶으로 바뀌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녀에게 일어난 3가지 사건이 그 핵심에 있다. 첫째는 솔로몬이 그녀에게 다가온 사건 때문이었다. 사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여러 포도밭 중 하나를 세로 받아서 그것을 경작하고 있는 시골 처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왕궁에 있어야 할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있는 그 포도원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비로소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아내가 되는데, 그녀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술람미 여인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이 자신의 보좌에서 내려왔고 또한 포도원을 방문한 사건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연애 시절에 솔로몬이 그녀를 데리고 간 잔치집 때문이었다. 보좌에서 내려와 시골에 도착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연애를 시작한다. 그런데 연애 시절에 솔로몬은 딱 한 번 그녀를 어떤 장소에 데리고 간다. 그런데 그곳은 잔치집이었다(아2:4). 하지만 잔치집에서 그가 그녀에게 보여준 것은 그의 사랑의 깃발이었다. 그것은 그가 장차 어떻게 그녀를 사랑할 것인지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실제는 '잔치집'이 이나라 정확히는 '포도주의 집'이었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은 그녀를 포도주의 집으로 데려간 것일까? 그것은 아가서의 해설서인 요한복음을 알면 금방 이해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에 보니, 잔치집이 등장하고 거기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이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포도주는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를 의미한다(요2:3~4). 그렇다. 솔로몬이 그날 그녀를 데려간 장소와 그가 그녀에게 보여 준 사랑의 증표는 그녀를 위해 그가 피흘려 죽을 것이라는 증표였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도 무명의 별 볼일 없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후, 우리를 당신의 아내가 되게 하시려고 기꺼이 대속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셋째는 결혼 후 솔로몬을 다시 찾은 장소 때문이었다. 결혼 후 어느 날 솔로몬이 밤늦게 집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솔로몬이 다른 여자의 품에 있다가 새벽녘에 온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는 여러 핑계를 대면서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문틈으로 들어온 신랑의 손에서 그만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의 손에서 몰약이 떨어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작가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거기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몰약'이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바르는 향품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을 읽어 보라. 거기에 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진 여인이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몸에 부은 사건이 있었다. 주님은 그때 그 옥합을 허비했다고 책망하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그녀가 행한 일은 누구도 준비해 주지 않은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그녀가 행한 고귀한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그때 솔로몬의 손에서 몰약이 떨어진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보여 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손은 못 박힌 손을 예표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자신을 고된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죽었던 그분을 모른 체 했던 것이다. 그러자 회개하고 곧장 일어나 문을 열어 주지만 남편은 이미 가고 없었다. 그러자 이제 비로소 정신을 차린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남편을 찾아 그 밤에 홀로 길을 떠난다. 심지어 성안에 있는 순찰자들에게 모욕을 당하지만 찾지 못한다. 그러자 그녀는 성밖과 연결되는 성벽에까지 가 보았지만 찾지 못한다. 그리고 파수꾼들에게 자신의 겉옷마저 빼앗기고 만다. 그래도 남편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술람미 여인은 드디어 아침이 되어서야 남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성바깥에 있는 동산에서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거기에서 솔로몬은 백합화 가운데 양 떼를 치고 있었으며, 꺾어진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묘사다. 양 떼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고, 백합화는 정결하고 거룩하고 정절로 단장한 신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술람미 여인은 오해했던 것이다. 남편이 그날 밤 늦게 집에 들어온 이유를 오해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은 그분은 장차 천국에 들어올 양 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마치 양 일 백마리 중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횃불을 들고 산과 들을 헤매는 목자의 모습과 같다(눅15:4). 주님은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되어 하늘의 성 새 예루살렘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양 떼들과 백합화들에게 관심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남편의 일을 돕게 된다. 그래서 자기도 이제 포도원을 가꾸어 과실나무를 심고 가꾸며 양 떼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4. 술람미 여인의 감사는 비로소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가?

  술람미 여인도 처음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었다. 자기만 잘 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하게 되고, 그분을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다가 한 번 남편과의 갈등 이후에 신랑을 되찾은 다음부터는 오직 신랑의 동역자가 된다. 그때부터 그녀도 역시 평안한 궁중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감사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렇게 변하기까지는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만이 아닌 다른 것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녀가 솔로몬의 선택을 받아 왕후가 된 것은 그녀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직접 시골 촌구석까지 방문했던 그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첫 번째 감사는 시골까지 내려와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아내로 선택해 준 솔로몬에 대한 감사였던 것이다. 

  둘째, 솔로몬이 자신을 아내로 취하기까지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솔로몬의 눈에 그냥 들어서 선택된 줄 알았다. 하지만 솔로몬이 그녀를 데려간 장소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피흘려 죽을 골고다 언덕이었고, 그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은 다른 여자들과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양 떼들을 인도하고 먹이기 위함이었으며, 주님께 순결을 바친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그분에게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자기가 과거에 청혼한 솔로몬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댓가만이 아니라 실은 그녀의 어머니의 기도와 땀방울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 후에 신랑을 놓쳐버린 후에 다시 찾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기도는 일종의 저축과 같은 것이다. 필요할 때에 인출해서 쓸 수 있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초기에 솔로몬의 청혼을 받아들여 잠시 예루살렘에 있는 임시 거처에 있을 때에 일어났다. 며칠을 기다려도 솔로몬을 만날 수 없자, 그녀는 밤에 혼자 솔로몬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는 쉽게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간절한 염원이나 그녀의 수고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나중에 깨닫는다. 그녀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하고 땀방울을 흘렸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결혼한 후 두 번째로 남편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이전에 쌓여 있던 기도를 다 써 버린 후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녀는 기도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때 비로소 철야기도와 회개의 제단을 쌓아야 했던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해 결국 그녀도 남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은혜'와 '감사'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은혜'와 '감사'란 대체 무엇인가? 먼저, '은혜'가 무엇인지부터 오늘 말씀을 통해 정리해 보자. 사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나에게 값없이 좋은 것들이 주어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가서의 말씀을 통하여 보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달라지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순전히 은혜 때문이었는데, 그 은혜는 결단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솔로몬의 낮아짐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의 기도와 땀방울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혜택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을 두고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신이 지금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자신만의 노력과 수고로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와 땀방울과 희생 때문에 나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비로소 자연스럽게 나오는 탄성이 '감사'인 것이다.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다. 

 

6. 나오며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 그리고 누군가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죄와 죽음과 사탄 마귀의 포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여전히 고된 인생의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었고, 우리 인생들의 현장들을 직접 심방하시더니 결국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에 너와 나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 곧 백합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을 위한 기도만해도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셨다. 그렇다. 주님의 그러한 기도 때문에 위대한 베드로 사도가 나온 것이다. 그 기도로 인해 베드로가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은혜는 베드로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댓가를 지불하심으로 인하여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내가 순탄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과 기도가 있어서였다. 특히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내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은혜에 나도 보답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행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의 후손들 중에 은혜를 받는 자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가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그의 입술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2021년 10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추수감사의 절기인 수장절에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초막에 거주하라고 했는가?(레23:33~44)_2019-10-31(목)

https://youtu.be/uJB7f6Z4HBI

 

1.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은 "초막절"인가요 "수장절"인가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은 "수장절"이라 불리웠습니다(출23:16, 34:22). 왜냐하면 그때는 곡식(밀)과 과일(포도, 석류, 무화과, 대추야자 ...) 및 기름(감람유)을 거둬들이는 시기에 지키는 절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은 점차적으로 수장절이라 불리지 않고 "초막절"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명 수장절이기는 하지만,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거주자들에게 "초막"을 치고 거기에 거주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레23:41~43)

 

2. 하나님께서는 수장절에 왜 초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을 지으라고 하신 이유는 크게 보면 2가지입니다. 첫째, 과거 고통스러웠던 지난 날을 잊지 말고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장차 받을 미래의 축복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실물교육을 하라는 것입니다. B.C.1446년경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해 나올 때에 자기의 조상들이 광야에 거주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초막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먼저, 초막을 지은 후에 일주일간 그곳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왜 초막을 지어야하는지, 왜 안락한 집을 놔두고 거친 초막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될 것입니다. 그때 부모는 자연스럽게 자기의 자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부모들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초막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공간과 시간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3. 왜 초막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공간과 시간인가요?

  초막은 종려나무와 감람나무와 화석류(은매화나무)와 잎이 무성한 나무를 이용하여 만드는 임시오두막집입니다. 그것은 첫째, 과거 자신의 조상들이 광야에 거주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조상들이 출애굽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기전에 그들은 다 광야에 거주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 있을 때에 그들은 전부 노예였는데, 애굽을 탈출해 나왔을 때 그들에게 잡자기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자유는 방종하라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여 자유민답게 살라는 책임이 주어진 자유였습니다. 하지만 자유민의 법도를 몰랐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시내산에 불러내어 자유민의 법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민답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광야는 애굽 땅보다 훨씬 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이라 곡식을 구하기도 힘든 장소였고 심지어 물이 떨어질 때면 대책이 없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은 애굽이 더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이 더 좋다고 하는 자들을 다 광야에 엎드려져 죽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애굽은 탈출해 나왔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광야는 사실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면 애굽보다 못한 지역입니다.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장소가 바로 광야였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잊지 말라고 한 것은 어떻게 해야 광야를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현재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집을 건축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각종 나무로부터 과실과 기름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초막에 갖져다놓고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가 초막절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장차 들어가서 살게 될 하늘의 집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초막이 집이지만 천국집은 보석집으로서 영원한 집인데, 초막을 지으면서 장차 하늘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서 살 집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초막절이었던 것입니다. 설령 현재 좋은 집에 거주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불평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하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거주할 집을 잘 장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시간이자 공간인 것입니다.

 

4. 현재에 받은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나요?

  이스라엘 민족이 현재에 받은 축복은 가나안 땅의 곡식과 과일들과 기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집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현재 받고 있는 축복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첫째날에 아름다운 실과를 들고 흔들었으며,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도금양, 은매화)의 가지와 시내 버드나무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는 가나안 땅의 풍성한 수확물을 상징하며, 나머지 3가지 식물은 하나님께서 붙들어주고 있는 그들의 생명을 상징하는데, 첫째로 하나님이 없었다면 그들은 버드나무처럼 금방 말라 죽었을 것을 의미하며, 둘째로 그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린다고 할지라도 도금양처럼 금방 말라 죽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로 도끼도 쳐도 죽지 않고, 태워도 죽지 않는 종려나무처럼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신 생명은 사탄마귀라도 결코 도무지 건드릴 수 없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에 거주하면서 과일과 나무가지들을 흔들며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들어가서 살게 집에 대해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했나요?

  사도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어놓은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고후5:1).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있는 집이 조금 작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지장이 없다면 그리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진 물질로 복음과 주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장래에 훨씬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짜 기업은 하늘에 있는 것이지 이 땅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9년 10월 31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이스라엘에 있어서 초막절인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무엇에 감사해야하는가?(레23:39~40)_2019-10-30(수)

https://youtu.be/gL4vtutnkzE

 

1.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나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수장절(출23:16, 34:22, 레23:33~43, 신16:13~17, 민29:12~38)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2. 수장절에 대한 명칭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수장절에 관한 명칭은 출애굽기서에 보면 "수장절"이라고 나오지만(출23:16,34:22), 나중에는 "초막절'이라는 절기로 나옵니다(레23:34,신16:13). 여기서 "수장절"이라고 함은 곡식과 과일과 기름을 추수한 후에 지키는 감사의 절기라는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면, "초막절"이라는 절기는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에 훨씬 더 초점을 두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수장절이 창조의 은총에 감사하는 측면를 부각시키는 이름이라면, 초막절은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3. 초막절(수장절)의 첫날에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나요?

  수장절의 첫날에 해야 할 일은 4가지 식물을 손에 들고 흔드는 일 곧 요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레23:39~40). 이때에는 4가지 식물을 손에 들고 흔들었는데, 그것은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에트로그), 종려나무의 가지(룰라브), 무성한 나무의 가지(하다스), 시내 버들(아라바)이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아르바 미님"이라고 부릅니다.

 

4. 초막절에 흔드는 4가지 식물(아르바 미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식물인가요?

  초막절에 흔드는 4가지 식물 중 첫째로,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는 시트론 나무의 실과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에트로그"라고 부르는데, 모양은 레몬처럼 생겼으며, 노란색의 과일입니다. 맛과 향기가 아주 진합니다. 아주 잘 생겼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예쁜 과일입니다. 둘째로, 종려나무의 가지는 대추야자나무의 가지를 가리킵니다. 대추야자나무는 40년간 20~50m까지 쭉 자라다가 40년째부터 열매를 맺는데, 그것을 일컬어 "대추야자"라고 부릅니다. 대추야자는 40년째부터 거두기 시작하는데 매년 약 70~100Kg정도 채취가 가능하며, 이 나무는 적어도 100년 이상 즉 이 나무가 죽을 때까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약 30톤가량을 수확하는 것이죠. 또한 이 나무의 이름을 일컬어 일명 "불사조 나무(학명: Phoenix Dactylifera)"라고도 부릅니다. 이 나무는 쉽게 죽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끼로 나무를 쳐서 죽일 수도 없고, 불을 피워 태워 죽일 수도 없다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이 나무가 자라고 있을 때, 이 나무의 잎사귀가 올라오는 순의 한 가운데를 싹뚝 잘라버리면 이 나무는 죽는다고 합니다. 셋째로, 무성한 나무의 가지는 도금양나무 가지를 가리킵니다. 도금양 나무는 은매화나무 혹은 화석류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이 나뭇잎은 둥그스름한데 잎사귀 도톰해서 꺾어놔도 상당기간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이 가지를 다시 땅에 묻으면 살아난다고 합니다. 넷째로, 시내 버드나무의 가지입니다. 시내 버드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인지라 누가 이 나무가지를 꺾어버리면 꺽어버린 즉시 말라버리는 나무라고 합니다.

 

5. 아르바 미님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초막절에 손에 들고 흔드는 4가지 식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4가지 식물이 수장절이 대체 어떤 절기인지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진정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들입니다. 첫째, 시트론은 이스라엘 민족이 수장절에 거둬들인 곡식(밀)과 과일(포도, 석류, 무화과, 대추야자, 시트론...)과 기름(감람유)를 대표하는 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얻게 된 곡식과 과일을 갖다놓고보면서 그것을 지켜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둘째, 종려나무와 도금양과 버드나무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들이 다 "생명"에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버드나무는 꺾어버린 즉시 마르지만, 도금양은 꺾어놓아도 며칠은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는 꺾을 수 없는 불사조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3가지 나무는 다 "물"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습니다. 물이 곧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서라고 부르는데, 요한복음에 "생명" 혹은 "영생"이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엄청 등장하기 때문니다. 즉 물의 이미지가 멍청 많이 등장합니다. 1장에서는 물로 세례주는 세례요한이 나오고, 2장에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장면이 나오고, 3장에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며, 4장에서는 수가성에 물을 긷는 여인이 나오고, 5장에서 병고침을 받은 베데스다 물가의 38년된 중풍병자가 나오고, 6장에 오병이어의 기적에 따른 살과 피가 나오며, 7장에서는 초막절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고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장에서는 실로암 물에서 눈을 씻어 보게 된 나면서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3가지 나무는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이 붙들고 있어서 죽지 않고 있고(시내 버들), 징계를 받아도 얼마동안 살아있으며(도금양), 사탄마귀가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다는 것(종려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은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자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초막절에는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분이 주신 생명으로 인하여, 오늘 내가 말라 비틀어지지 않고 살았으며, 징계를 받아도 곧바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며(그래서 회개할 기회가 있으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그 어떤 존재도 해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뒤의 3가지 나무 중 종려나무가 40년이 지나서야 대추야자를 풍성히 맺듯, 우리에게 비록 열매가 없다고 할지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에 감사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음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19년 10월 30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초막절의 규례와 아르바 미님(초막절에 흔드는 4가지 식물)이란 무엇인가(레23:39~44)_2019-10-29(화)

https://youtu.be/VIMw-hjRt-Q

 

1.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을 어떻게 지키라고 하셨나요?(신16:13~17)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는 출애굽2세대들에게 절기의 규례를 말씀해주셨는데, 그중에서 초막절에 대해서는 신16:13~17에서 간략하게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을 지키는 시기입니다(레16:13). 그 때는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기를 레위기23:34와 39절에서는 히브리 종교력으로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누가 지키는가입니다(레16:14). 그것은 자기자신과 자기의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까지 다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20세의 이상의 모든 남자는 초막절 뿐만 아니라 무교절(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에서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지키는 장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입니다(레16:15). 그곳은 결국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에게 빼았았던 산성 곧 다윗산성이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모리아산이 있었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넷째, 어떻게 지키는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소나 양으로 예물(제물)을 준비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레23:37~38). 빈 손으로 성전에 나오지는 말라는 것입니다(신16:16~17). 그리고 첫날에는 4가지 식물을 흔들라고 했습니다(레23:39). 그리고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 그곳에서 거주하라고 하셨습니다(레23:42).

 

2. 초막절을 지킬 때에 하나님 앞에서 요제로 흔들어야 할 4가지 식물(아르바 미님, Arba minim)은 무엇입니까?(레23:40)

  그것은 4가지 식물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르바 미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첫째,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과일)(에트로그)입니다. 이것은 시트론(Citron)나무에 열리는 노란색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이 열매는 레몬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어른 주먹만한 크기인데 약간 길다란 둥근형으로 생겼으며, 익기 전에는 초록색이지만 익게 되면 노란색으로 바뀌는 열매입니다. 둘째, 종려나무가지(룰라브)입니다. 대추야자 나무의 가지입니다. 셋째, 무성한 나무의 가지(하다스)입니다. 이것은 느8:15~16에 보면, 화석류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로는 "도금양" 혹은 "은매화"나무의 가지를 가리킵니다. 넷째, 시내 버들(버드나무)(아라바)입니다. 물이 많은 시냇가에 사는 버들가지입니다.

 

3. 아르바 미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초막절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첫날에 위와 같은 네 가지 식물(아르바 비님)을 흔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초막절의 시즌이 찾아오면 저마다 아르바 미님을 준비하느라고 바쁩니다. 되도록이면 좋은 것으로, 흠이 없는 것으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흔들어야 했던 4가지 식물은 어떤 의미는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랍비들이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랍비 마이모니데스의 해석입니다. 그는 종려나무 가지는 광야생활의 40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버드나무 가지는 요단강을 건넌 기적을 가리키며, 무성한 나무 가지는 절과 꿀이 흐르는 땅을 상징하고,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는 가나안 땅에서 거두게 될 열매를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율법해석서인 미드라쉬의 해석입니다. 이것은 4가지 식물의 맛과 향이 있고 없음을 근거로 하여 4가지 식물은 4가지 종류의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는 맛도 있고 향도 있듯이, 율법(토라)를 배우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의 가지"는 맛은 있으나 향이 없는 것으로서, 토라를 배우고 익히나 그 뜻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를 가리키며, "무성한 나무의 가지"는 맛은 없지만 향이 있는 것처럼, 토라를 배우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고 있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마지막으로 버드나무는 맛도 없고 향도 없으니, 토라도 모르고 그 말씀대로 실천도 하지 않는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습니다.

 

4. 아르바 미님은 또 어떻게 해석되고 있나요?

  위의대표적인 2가지 해석 외에도 "아르바 미님"은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왔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나머지 3가지 식물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 4가지 식물은 순서대로 해석하여, "심장과 척추와 눈과 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식물의 특징과 논리면에서 그리고 의미면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5.  초막절의 행사 중 정말 중요한 의미가 깃들어있는 행사들은 무엇인가요?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의 희생제물을 바치고, 초막을 짓고, 4가지 식물(아르바 미님)을 흔드는 특별한 행동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 행사는 초막을 짓는 것이었고 4가지 식물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니다. 초막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때에 힘겹고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의미이며, 4가지 식물을 흔들라는 것은 지금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창조의 은총과 구속의 은총에 기뻐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초막절은 일종의 과거를 기억하는 행사요 헌재의 은혜에 감사하는 행사인 것입니다. 참고로, 내일 이 시간에는 초막절에 흔들었던 4가지 식물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10월 29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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