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4) 양의 문이자 목자이며 하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요10:1~4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MVr-2CxIa4  [혹은 https://tv.naver.com/v/32159167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과연 어떤 책인가? 요한복음은 사실 기독론의 책이다.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것들이 풍성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누구신지를 예수님의 7가지의 표적으로도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을 통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이 나온다. 그것은 예수께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일까? 그리고 수전절 때 설교하실 때에는 왜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 10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2가지 자기 선언과 아울러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만세 전 예정론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가 과연 요한복음에 나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는 초막절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어떠한 자기 선언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10장은 요한복음 7장부터 시작된 초막절 설교의 마지막 부분과 그때로부터 2개월 뒤 수전절 기간에 있었던 예수님의 설교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중 초막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가운데 세 번째와 네 번째 선언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이전 유월절 때도 오병이어의 표적과 함께 첫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신 바 있다. 그때는 당신 자신을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 중간 즈음에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나서 두 번째로 자기 선언을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막절의 끝에 가서도, 나면서 맹인된 자를 고쳐 주신 후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나서(요10:1~6), 이와 관련하여 2가지 자기 선언을 하셨다. 하나는 "나는 양의 [출입]문이다(요10:7,9)"라고 하신 것이요, 또 하나는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14)"라고 하신 것이다. 

 

3.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로 표현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자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신 것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진짜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진짜 양의 문이자,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나하면 예수님을 흠잡아 그분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실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연 누가 진짜 양의 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누가 진짜 양의 목자인지를 알려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말씀하심은 훗날 곧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도록 하시려고 그렇게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 친히 자신을 '양의 [출입]문'이라고 말씀하신다(요10:7,9). 그럼 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 양의 문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누가 진짜 양의 문인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아주 훌륭한 양의 문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다. 즉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로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양떼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정식으로 출입문을 이용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고 있었다(1절). 다시 말해 그들은 본래 양의 목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양을 도둑질하고 해치는 절도(도둑)요 강도였던 것이다(1절, 8절). 왜 그런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천국문을 닫아버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3).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마23:15).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천국문을 막는 주범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 중에 먼저, 사두개인들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충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사에 쓰이는 제물을 판매하고 성전 세겔로 환전하는 자들이었는데, 그 일들을 통하여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남기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 더 이상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었던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율법해석자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흠숭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해석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성들이 과연 율법을 어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찾아가서 물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에게로 가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전까지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분이 치밀어 올라왔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서 어찌하든지 그분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벌써 그렇게 보낸 시간이 3년이 되었으니 그들의 시기 질투심은 당시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6개월 후가 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 주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은 결코 '양의 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양의 문이 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양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어야 한다(9~10절). 즉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자기들을 통하여 양들로 하여금 꼴(목초지)을 얻되 들고나오면서 풍성히 얻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9~10절). 이것은 양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풍성한 축복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은 과연 누가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친히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목자를 자처했지만 그들은 아주 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매도하고 있었고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죽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자란 무엇인가? 목자란 기본적으로 양떼를 돌보고 양육하며 푸른 초장과 맑은 시내로 인도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양떼를 사나운 이리떼 곧 사탄 마귀로부터 지켜내고 보호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양떼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부려먹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양떼들의 돈을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선한 목자상을 그들에게 제시해 주셨다. 그것은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자라야 참된 목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선한 목자는 이리떼가 오면 양들을 내버려두고 달아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떼로부터 그들을 건져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삯꾼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럼, 삯꾼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품꾼들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실제로 목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양도 자기의 양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그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달아난다. 그리하면 이리가 와서 양떼를 낚아채 가고 또한 흩어버리게 한다. 여기서 '이리'란 양떼인 하나님의 성도들을 해치는 세력으로서 사탄 마귀와 귀신들을 가리키며, 이단 세력 등을 가리킨다. 선한 목자는 이러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양떼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양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양떼들을 위해 내어놓으셨던 것이다(막10:45). 

 

6.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아직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6절). 즉 그들이 주님께 속한 양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주님의 양이 될 수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주님의 음성듣기를 거절하며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또 하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27절).

  그렇다면 주님께 속한 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지는 것인가? 사실 이것은 매우 영적인 일로서 그 실상은 이렇다. 사람은 남녀가 만나 사랑함으로써 아내의 자궁 안에서 생명이 수정이 되고 그리고 배 속에서 약 10달을 자라서 출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육체의 출생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은 언제 어떻게 생성되고 자라게 되는가? 그것은 이렇다. 우선 사람의 영혼은 이 땅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늘의 낙원에서 창조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의 태중에서 약 2~3개월 정도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그 아기의 몸속에 집어넣어 준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은 하늘에서 온 것이며, 사람의 육체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어떤 영혼은 구별하여 주님의 양이 될 영혼으로 미리 정해 놓으시고, 어떤 영혼은 주님의 양이 되지 못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일까? 그건 아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영이 왔던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주님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귀신들이다. 자기들은 절대 못 돌아갈 것을 알고 그렇게 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이 만세 전부터 정해졌고, 마귀의 자녀가 만세 전부터 정해졌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의 양으로 정해져 가기 때문이다.

 

7. 주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정한 사람에게만 영생을 주시며, 한 번 얻은 영생은 영원히 보전되는가?

  이제 정리해 보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만세 전부터 예정된 것인가 아니면 살면서 구원받을 사람 안으로 예정되어 가는 것인가?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태초 전에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반대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다고 그들은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히 멸망받을 사람으로 예정해 놓았다는 것이다(이것을 '이중 예정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은 합당하며,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세전 예정론자들은 그걸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나온다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 구절로서 요한복음 10:29절의 말씀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 안에 만세 전 예정론에 관한 확실한 근거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진짜 그러한지, 개역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부터 살펴보자.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만세 전 예정론자들은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준 자들에게만 영생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예수님에게서 그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예정론자들이 해석하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첫째,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들' 곧 '양떼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27절에 나오는 바로 그 '양들'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 양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27절에 보면, 주님의 양들로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자들이다. 즉 이들은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주님을 계속해서 따라가고 있는 자들에게 주께서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 그것은 중성 단수명사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글 개역성경은 헬라어 원문을 따라 번역하지 않고, 소문자 사본의 말씀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글 개역성경은 대문자 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대부분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 요10:29에서 만큼은 후대 사본인 소문자 사본에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것은 아마도 처음 한글로 성경을 번역했던 자가 아마도 만세 전 예정론을 교리로 믿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이 든다. 그렇다면, 원래 성경 원본에 가까운 번역본인 대문자 사본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요10:29 내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그것은 모든 것들보다 크다. 그러므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계속] 낚아채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렇다.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을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들에는 능력, 지혜, 권세, 영광 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것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으려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예수께서도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자를 절대 사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 안으로 예정되어 가고 있어도 그가 나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도 결국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요10:28의 말씀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10;28 그리고 내가 그것들(양들)에게 '시대의 생명'을 준다. 그러면 그것들(양들)은 '그 시대까지' 스스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양들)을 내 손으로부터 [장차] 낚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있고 자신을 따르고 있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시대의 생명'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의 유효한 생명을 그분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은 자라도 '그 시대까지'까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가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받아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도 우상숭배하고 간음을 저지르거나 거짓말하는 등 십계명을 어기고 살면, 그러다가 회개치 못한 채 죽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을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 이 시대를 떠나 다른 시대로 들어갈 때 생명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멸망 안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으라고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러한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3:5에서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8. 예수께서는 정말 신성 모독죄를 지은 것인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신다(30절). 왜냐하면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24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하나였다. 고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있는 중에도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거하시고 있었으며, 아버지 안에 예수께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38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도리어 말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선한 일들을 해 왔는데, 어찌하여 돌로 치려 하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신성 모독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구약성경의 말씀을 들어 변호하신다. 즉 구약의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재판하는 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신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시82: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하여 이 땅에 아들로 내려보냈던 자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신성 모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만일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거든 예수께서 행하신 아버지의 일들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는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예수께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시어 베레아 땅으로 피신하신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이요,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 주는 표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을 많이 접하게 된다. 다른 세 개의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요한복음을 통해서는 예수께서 주 하나님으로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여러 말씀과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로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천한 선지자로서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곧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파송받은 이이신 것이다. 고로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한 분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먼저 계셨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셨던 창조주이시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그동안 종교지도자들로서 누려왔던 물질적인 풍요와 백성들로부터의 찬사를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대적자가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약 4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 자체를 없애버리신다. 회개하지 않은 완악한 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양들로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얻은 영생(시대의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 바 된 후에도 계속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요, 내가 죽을 때에 내 속에 이제까지 줄곧 있어 왔던 성령께서 나를 떠나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2023년 01월 04일(수)

정병진목사

2022-12-2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3) 시각장애인의 눈 치유에 관한 제6표적의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가?(요9:1~4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VaKUP1RM34 [혹은 https://tv.naver.com/v/31818454 ]

 

1. 들어가며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초막절이 막 끝난 어느 시점에, 일어난 치유 표적 사건과 심문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 9장은 나면서 시각장애인이 된 어떤 장성한 청년을 보고 제자들이 그 청년이 과연 자신의 죄로 시각장애인이 된 것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로 인하여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기적을 받은 이 청년은 곧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불려가 두 번씩이나 심문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게 된다. 결국 이 청년은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출교라는 조치를 받아 쫓겨나게 되지만, 주님께서 그 청년을 찾아오셔서, 주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말씀해 주심으로 이 청년은 주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이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서 육적인 시각장애를 고침받은 것 뿐만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영적인 시각장애까지 고침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우리는 요한복음 9장에서 그 청년의 치유 기적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그 해답을 또한 찾아낼 수 있다. 대체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은 왜 일어난 것인가? 제6표적으로서 나면서 시각장애인 된 청년의 치유 사건이 말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2. 요한복음 9장을 보면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치유 사건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이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대체 누구의 죄 때문인가?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을 두고 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나타나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셋째, 왜 예수께서는 이 청년의 시각 장애를 그냥 말씀 한 마디로 치유해 주지 아니하시고, 굳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신 후 그에게 실로암 못가로 가서 씻으라고 했던 것인가? 넷째, 왜 요한복음 9장에서는 예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고 시각장애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섯째, 요한복음 9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님은 대체 누구시며, 이 청년은 예수님을 어떻게 단계적으로 알게 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여섯째, 요한복음 9장의 주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예수께서 행하신 6번째 표적은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서 주시는 영적인 비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 이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그렇다면 시각장애인이면서 걸인으로 살던 이 청년의 출생의 비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있는 한 사람을 보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때다 싶어 그 청년이 왜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예수님에게 묻는다. "랍비여, 이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가 죄를 지은 탓입니까? 자기입니까? 자기의 부모입니까?" 그렇다. 이러한 질문은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겪게 되는 모든 환난과 고통, 어려움들은 아담의 원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곧 그의 부모 때문이라는 가정하에 이런 질문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 청년이 태어남에서부터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의 조상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는 뜻인가?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첫째, 예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분은 항상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 구약성경에서 들려주는 말씀이라도 무시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그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4. 구약성경은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는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우선 첫째로,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 등의 모든 일들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출4:11). 하나님께서는 입이 뻣뻣하여 말을 못한다고 하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4:11)"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말 못하게 태어나거나 혹은 못 듣는 자 혹은 앞을 못 보는 자로 태어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분의 허락 없이는 되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각장애인의 조장자라는 말인가? 그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허락하실 뿐이다. 둘째,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조상 3~4대까지 저질렀던 우상숭배 죄에 대한 형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징벌 가운데 태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십계명에 그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출애굽기 20장 5절의 말씀에 나온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 주님께서는 십계명 중에서 제2계명으로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을 섬기지 말고 절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만약 우상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섬기며 절하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형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버지의 우상숭배 죄에 대한 벌을 그의 후손 3~4대까지 물리시겠다는 것이다(출20:5). 그러므로 이 말씀도 만고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아담의 범죄 이전에 사람에게 고통과 징계 그리고 형벌은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징계가 내려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가시와 엉컹퀴가 있게 되었으며,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먹는 것도 힘들게 되었던 것이다(창3:17~19).

  고로 예수님의 말씀과 구약성경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청년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 이 청년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그의 윗대의 조상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 20:5에 따르면, 그의 조부모나 3대 혹은 4대 조상의 죄 때문일 확률이 높다. 셋째, 어찌되었든지 이 청년이 그때까지 시각장애인으로 있게 된 것은 그의 불행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던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 청년의 눈을 왜 뜨게 해 주셨는지 그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를 왜 실로암 못가로 가서 씻으라고 했는지와도 아주 관련이 깊다. 

 

5. 예수께서는 왜 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예루살렘에서 구걸하고 있던 이 청년의 눈을 뜨게 해 주었을까? 그것의 첫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이 청년의 눈을 뜨게 해 주신 후에 하신 말씀 가운데 답이 들어 있다. 그것은 이렇다. "내가 세상 안에 있는 때는 언제든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9:5)." 그렇다.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그 청년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자신이 누구신지를 일곱 번이나 말씀하셨다. 첫째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48)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둘째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요8:12, 9:5). 그리고 셋째는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셨으며(요10:7), 넷째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다(요10:11,14). 다섯째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며(요11:25), 여섯째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6).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5:1,5).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나면서 시각장애인 된 이 청년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그분은 어둠 가운데 놓여 있는 사람을 빛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려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의미를 보다 다 명확하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번의 선언은 둘 다 초막절에 하신 말씀으로서, 먼저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신 후에 말씀하신 것이다(요8:12). 그때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하셨다. 왜냐하면 그녀가 죄를 지어 어둠 가운데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죄를 지어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자를 건져내어 빛의 나라로 안내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면서 시각장애인 된 청년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시각장애인 된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오신 빛을 믿어, 저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이신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사29:18, 35:5).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 주실 메시야가 와서 할 일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사29:18, 35:5~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약속된 메시야이신 것을 증언하시려고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있어 왔던 청년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다. 

 

6. 예수께서 시각장애인의 눈을 치유할 때에 왜 실로암 못가로 가서 씻으라고 하셨는가?

  예수께서 치유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그 청년의 눈을 뜨게 하실 때에도 그냥 말씀으로만 명령하셨을지라도 그의 눈은 떠졌을 것이다. '청년아, 네 눈을 뜨거라'라고 명령하시면 되었을 일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먼저는 땅 위에 침을 뱉으셨다. 그리고 침으로 진흙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청년의 눈들 위에 바르셨다. 그러고 나서 실로암 못가로 가라고 하셨고 그리고 스스로 눈을 씻으라고 하셨다(요9:6~7). 그때 만약 그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실로암 못가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걸인으로서 구걸하고 있으면서도 소문을 들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흙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들어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 청년의 순종의 여부를 보시려고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각장애인은 아무런 군소리 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리고 눈이 열린 채 예수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 주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청년에서 실로암 못가에 가서 그의 눈을 씻으라고 한 것은 그의 순종 여부를 보시기 위함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뿐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가 가야 할 연못이 '실로암'이라고 지정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예루살렘에는 실로암 연못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베데스다 연못도 있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실로암'이라는 연못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번역해 놓았다. 그것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원문에 의하면, '파송받은 채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실로암 못가에서 씻으라고 하신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주님의 말씀에 그가 순종하는가의 여부를 보기 위함으로 그곳에 가라고 하셨으며, 또 하나는 그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이 땅에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서 왔다고 늘 말씀하셨으며, 아버지를 가리켜 '나를 보내셨던 이'라고 늘 말씀하셨고, 자신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받은 채 있었던 것처럼, 시각장애인 청년도 어떤 목적을 위해 예수님으로부터 세상 속에 파송을 받은 채 있었던 것이다. 

 

7. 예수께서는 왜 이 청년이 눈먼 것(시각 장애)으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그날 이 청년의 눈이 먼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이나 그의 부모의 죄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셨다(요9: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청년을 통해서 하실 일이 만세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만세 전부터 실로암은 셋팅되어 있었고, 이 청년도 그 자리에 세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이 땅에 무엇하러 오셨는지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특히 이 청년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청년이 격랑이 이는 세상 속으로 파송받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가졌을 때에, 이미 그는 그곳에 가서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 청년이 그곳에 보내어져서 해야 할 일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럼, 이 청년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이 청년에게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 있었고, 이 청년을 두 차례나 심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고자 하는 일이 있었다. 첫째, 이 청년에게서 하고자 하는 일은 그가 점차적으로 예수님을 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고백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아니 올라간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처음에는 단순 '치유자'라고 했지만(11절), 이어서 '선지자'라고 고백했다(17절). 그리고 선지자에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이'라고 했다(33절).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이'에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35,38절). 이렇게 주님을 알아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 전부터 그 청년을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 이 청년의 말을 통해 불신앙의 노선에 서 있는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예수님을 계속해서 대적하며 미워하고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책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이 청년을 통해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그 청년을 그곳에 보내신 것이다. 

 

8. 시각장애인이었다가 낫게 된 청년은 어떻게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되었는가?

  시각장애인이었던 청년은 자신의 눈이 떠지게 되자 사람들에 의해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가졌다. 그러자 그때에 그는 기적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가 어떻게 다시 보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그러자 그는 '예수라고 말해지고 있는 그분'이 자신의 눈에 진흙을 발랐고 그리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그 청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청년을 낫게 한 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했다고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죄인인 사람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이 그 청년에게 행하신 일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청년을 불러 심문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눈을 뜨게 한 그분을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그러자 그 청년은 그는 '선지자'라고 대답했다(요9:17). 그러자 그 청년의 말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바리새인들은 그 청년의 부모를 증인으로 출석시킨다. 그리고 그들에게 묻는다. 그러자 그의 부모는 대답했다. "그가 내 아들이라는 것과 그가 눈먼 것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어떻게 뜨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하게 되면, 유대인의 회당에서 출교할 것을 바리새인들이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핍박과 출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청년의 부모는 자신의 아들의 눈이 어떻게 뜨게 되었는지를 모른다고 답한 것이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시오"라고 말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그 청년을 불러서 2차 심문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2차 심문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이 청년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그에게서 듣게 된다. 그것은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이'라는 것이다(요9:33). 비록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신다면서, 또한 창세로부터 날 때부터 눈먼 것으로 태어난 이의 눈이 떠진 적은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이다(요9:33). 그러자 유대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린다. 그러자 그들은 화를 버럭내면서 그를 쫓아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그를 출교시켜 버린 것이다. 그렇다. 그 청년은 그 서슬 퍼런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낫게 한 예수님이 누군지를 담대히 증거하였던 것이다. 

 

9. 바리새인들에 의해 끝내 출교당한 청년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이에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유대교에서 출교 조치를 당했다는 것을 들으셨다. 그러자 일부러 그 청년을 찾아오셨다. 이 청년은 사실 목소리로만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 뿐, 그분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을 일부러 만나시고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인자(혹은 하나님의 아들)를 믿습니까?" 그러자 그가 말한다. "예, 그분이 대체 누구십니까? 나도 그분을 믿고 싶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지금 그를 본 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지금 발언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입니다." 그러자 그는 "주여,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고는 엎드려 예수님을 경배하였다. 그렇다. 자신을 거짓 증인으로 만들려는 바리새인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신있게 말했던 그를, 주님께서는 기뻐하셨고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또한 그가 자신을 세상 속으로 파송한 목적을 잘 수행해 주었기에 주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마치 그에게 "네가 바로 세상 속으로 파송을 받은 채 있는 성공한 사람의 사례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를 세상 속으로 파송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이 그래서 성취가 된 것이다. 

 

10. 이날 일어난 시각장애인 치유 사건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사실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은 일종의 드라마와 같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서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께서 시각장애인 된 그 사람을 고쳐 주시고는 그 현장을 빠져나오셨는데, 맨 나중에 다시 예수께서 등장하여, 그가 이 세상에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던 목적을 잘 수행했다고 축하하려고 오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청년은 예수께서 실로암에 못가에 가서 그의 눈을 씻게 하였던 바로 그 목적 곧 그를 이 세상에 파송한 목적을 잘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을 대적하던 바리새인들은 그 완악함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왜 자신이 그 청년의 눈을 뜨게 하셨는지를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나 자신은 심판을 위하여 이 세상 안으로 왔습니다. 이는 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보고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보고 있는 이들은 눈먼 이들로 있게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9:39). 그렇다. 이것이 요한복음 9장의 주제인 것이다. 전까지는 보지 못하고 있었던 자라도 주님을 만나게 된 이후 주님을 알기를 사모하고 그분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증언하는 자는 이처럼 자신의 영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다 보고 있고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는 더 이상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지 못해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는 뜻이다. 전자는 실로암 못가에 가서 자신의 눈을 씻었던 그 청년이 대표자이다. 그리고 후자는 예수님을 대적하려 죽이려 하던 바리새인들이 그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원래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지만(요3:17), 예수님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가 벌써 심판을 받은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요3:19, 9:39). 

 

11. 나오며

  우리는 예수님의 여섯 번째 치유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하게 우리를 만나 주고 계시고 또한 우리에게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사실 만세 전에 계획되어 있는 무대에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마련된 장치와도 같기 때문이다. 즉 우리 중에 누구는 이미 만세 전에 시각장애인으로서 태어나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현장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있는 장소의 이름까지도 이미 만세 전에 주님의 계획을 따라 붙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날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그 청년을 고쳐 주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이를 통하여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지금 내가 처한 환경 속에서 어떠한 말씀을 듣고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듣는 그 말씀으로 인해 내가 지금 조성되고 있으며, 또한 그 말씀의 목표 지점을 나의 목표 지점으로 삼고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 지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릴 신분과 지위를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을 우연히 지금 듣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어떤 이는 이미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들어야 할 말씀을 먼저 깨닫고 듣도록 하셨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오늘 본문의 청년처럼 이미 이 세상 속으로 파송받은 채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여기에 존재하게 하는 이유인 것을 알아야 한다. 

 

2022년 12월 21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왜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신 날은 잘못 알게 되었는가?(막16:1~9)_2020-04-14(화)

https://youtu.be/x4kEEVp3boQ [혹은 https://tv.naver.com/v/13350722 ]


1.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왜 중요한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께서 죽으셨는가 하는 것은 인류의 죄사함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며, 왜 그분이 다시 살아나게 되셨는가 하는 것은 그분이 인류를 위한 속죄사역이 진짜였으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셨는가를 알려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고 한다면 그분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인지 아니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복음이라고 하면 나중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고전15:1~4).


2.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돌아가셨으며, 언제 다시 살아나셨나요?

  예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으며, 언제 다시 살아나셨나요?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금요일 오후3시에 돌아가셨으며, 일요일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혹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의 구원이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 언제 죽으셨고 언제 부활하셨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을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에 한층 더 신뢰를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왕이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 사실대로 믿고 따라간다면 더욱 더 신앙을 견고하게 할 수 있어서 우리자신에게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확히 언제 돌아가셨나요?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정확히 언제 돌아가셨을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양잡는 날에 돌아가셨다고 말입니다(막14:12). 그러면 그날은 언제입니까? 그날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수) 오후3시입니다. 그런데 그 날짜를 오늘날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1월 13일 금요일 오후3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지금은 과학과 천문학의 발달로 인하여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해가 언제였는지 알 수 있으며, 무슨 요일에 예수께서 돌아가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해(A.D.4030년)의 유월절은 1월 14일(수)이었습니다. 태양력으로는 4월 3일(수)이었습니다. 예수께서서는 유월절 양이 되시어(고전5:7), 유월절의 예언을 따라(출12:6), 정확히 유월절 당일이었던 1월 14일(수) 오후3시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실제의 날.jpg

[이 자료는 성경과학연구소(김명현박사)의 강의자료집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확히 언제 살아나셨나요?

  그럼, 예수께서는 언제 살아나셨을까요? 보통은 일요일 새벽에 살아나셨다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개연성이 있는 성경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막16:9). 그런데 막16:9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번역문만 읽으신 분들은 대체로 예수께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셨다가 정확히 삼일삼야 후에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삼일삼야라고 함은 예수께서 죽으신지 정확히 3일 밤들과 3일 낮들이 지난 후에 살아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12:39~40에서, 예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이라고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유대력으로 1월 14일(수)인 유월절 당일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 해질녘인 오후3시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것이 맞다면, 3일밤을 지내고 또한 3일낮을 지낸 후, 예수께서는 토요일(17일) 오후3시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이미 부활해 계신 이후, 일요일(18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비로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은 맞는 표현입니다(막16:9헬라어원문).


5.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날을 잘못 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문제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날을 오늘날 우리가 잘못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주간에 두 번의 안식일이 있었다는 것을 계산하지 못했던 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주간에는 무교절의 안식일(무교절의 첫날)과 주간의 안식일이 하루 걸러서 두 번이나 있었던 주간이었습니다(이것은 아래에 그림으로 첨부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예전에는 무조건 그것을 주간의 안식일(토요일 안식일)로만 계산을 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은 유월절(1월 14일)이었고, 그나른 수요일이었으며, 그 다음날(목요일)이 바로 무교절의 첫날로서, 절기의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민28:17~18). 참고로, 이스라엘의 안식일에는 2가지가 있으며, 매주간의 일곱째날은 주간의 안식일이라고 부르며, 명절 안식일도 있는데, 그것은 총 7번 있습니다. 그날들은 무교절의 첫날(1.15)과 마지막날(1.21), 칠칠절(3.5일경), 나팔절(7.1), 속죄일(7.10), 초막절의 첫날(7.15)과 마지막날(7.22)입니다(민28~29장). 그러니까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은 유월절날로서 무교절 명절의 예비일이었으며, 무교절의 첫날은 바로 명절의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평일로서 16일(금)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주간의 안식일(17일) 하루 전날로서,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인데, 이 날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미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을 알고서 향품을 사다 두었습니다(막16:1). 그리고 주간의 안식일(17일)을 계명을 따라 쉰 후(눅24:1), [주간의] 안식일을 다음날(18일) 새벽에 무덤을 찾아온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간의 안식일과 명절(절기)의 안식일을 구별하기 위해서, 명절의 안식일은 큰 날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요19:31, 7:37). 고로 막16:2에 나오는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는 말은 헬라어원문을 보면, "안식일들[이 지난 후] 첫날 몹시 이른 아침에 해가 떠오른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주간에 무교절의 안식일도 있었고, 주간의 안식일도 있었기 때문에 복수형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 새벽으로 착각하게 된 둘째 이유는 막16:9의 말씀을 잘못 번역한 데서 나온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막16:9에 대한 개역성경의 말씀은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에...막달라 마리에게 먼저 보이시니"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원문은 "그분이 일어나신 후에, 안식일[이 지난 후]의 첫째가는 날의 새벽에...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게 되셨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빨리 이러한 오류들이 속히 교정되어서,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에 대한 정확한 실제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2020년 04월 14일(화)

정병진목사

요한복음 7장부터 9장에는 초막절에 있었던 예수님의 설교와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때 그분이 행하신 초막절 설교를 통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전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에스겔이 환상 속에 본 생수의 강 곧 성전의 문지방으로 흘러나와 모든 생물을 살게했던 생수의 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장소가 왜 실로암이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의 죄이거나 그의 부모의 죄가 아니라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로암 못가에 얽힌 초막절의 비밀은 무엇인가? 이제 살펴보도록 하자.

2019-11-01(금)
제목: 초막절과 맹인이 눈을 씼었던 실로암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요9:1~12)
https://youtu.be/opdi14Uzl9g


1. 들어가며

  우리나라의 추수감사절은 실은 미국의 추수감사절로부터 왔다.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추수감사절을 11월 넷째주 목요일에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11월 셋째주 수요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얼마후 11월 셋째주일로 바뀐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추수감사절을 지켰던 것인가? 그것은 성경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가을걷이를 마치고 지켰던 수장절 곧 초막절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한 해의 모든 곡물과 과실을 거둬들인 후에 기쁨으로 수장절을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이 지키던 초막절의 풍습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던 말씀이 아니라 새로운 풍습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것은 2가지였는데, 하나는 물붓는 의식이었고 또 하나는 밤에 등불을 켜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초막절에 물붓는 의식과 밤에 등불을 켜는 의식이 어떻게 되어 실로암에서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초막절은 어떤 절기이며 어떻게 지켰는가?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가을걷이를 마치게 되면 꼭 수장절의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은 출애굽기 23장과 34장, 레위기23장과 민수기 29장과 신명기16장에 나온다. 그런데 출애굽기에는 수장절의 절기로 기록되었던 이 절기는 이내 "초막절"이라는 용어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그날은 창조의 은총에 감사하는 절기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구속의 은총까지 감사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초막절을 지켰다. 초막절이 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마당이나 지붕에 임시오두막을 지었는데, 율법 해석서인 미쉬나에 따르면, 밤에 잠을 잘 때 별이 3개이상 보일 수 있도록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 초막을 짓는데 사용된 재료로서는 종려나무 가지, 감람나무 가지, 화석류(도금양, 은매화) 나무 가지 등이 사용되었고, 초막을 지은 다음부터 일주일간 그곳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 초막 안에는 그 해에 거둬들린 과일 중에서 대표격으로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인 에트로그를 가져다놓았고, 3가지 나무의 가지들도 준비했다. 그것은 첫날부터 흔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때 사용된 나무 가지는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도금양)의 가지와 시내 버드나무의 가지가 사용되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을 지으라고 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에 감사하며 미래를 바라보라는 것이었고, 4가지 식물을 흔들었던 이유는 감사하며 기뻐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식물들의 가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공급자요 주인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초기 초막절의 규례에 추가된 행사는 어떤 것이 있었나?

  그런데 초기의 초막절과는 달리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2가지 풍습이 추가되었으니, 하나는 성전의 제단을 물을 붓는 의식이 추가되었고, 또 하나는 밤이 되면 여인의 뜰에 있는 등잔대의 금대접에 기름을 붓고 불을 환히 밝히는 풍습이 추가되었다.

  먼저, 물을 붓는 의식을 살펴보자. 초막절이 되면 첫날에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 있는 물을 떠다가 포도주와 함께 성전의 제단의 그릇에 붓는다. 이러한 제사를 "전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둘째날부터는 물을 실로암에서 길어오는데, 이때 그들이 행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직 해가 뜨기 전에 어둑어둑할 때에 제사장들은 금으로 만든 주전자를 가지고 실로암 못가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물을 길어서 오는데, 그럴 때면 제사장들의 일부가 나팔을 불며 그 행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손에 손에 4가지 식물을 들고 흔들면서 제사장의 뒤를 따라갔는데, 이때 제사장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4). 그러면 백성들은 뒤를 따라가면서 시편 113~118편에 나오는 할렐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특히 시118:25에 나오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따라갔던 것이다. 이제 성전의 제단까지 온 제사장들은 초막절 둘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는 그 제단둘레는 한 바퀴씩 돌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일곱바퀴를 돌고 나서 물을 제단의 그릇에 부어드렸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와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른 비가 내려야 보리 씨뿌리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날부터 밤이 되면 여인의 뜰에 초막의 두번째 의식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여인의 뜰에 있는 4개의 금등잔대의 금대접에 기름을 붓고 불을 밝히는 의식을 행한 것이다. 여인의 뜰에는 4개의 금등잔대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각각 4개씩의 금대접이 있었으니, 제사장 가문의 젊은이들 4명이 커다란 기름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타고 올라가 16개의 금대접에 기름을 채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제사장들의 낡은 옷을 등불의 심지로 삼아 불을 밝혔는데, 아주 빛난 등불이어서 멀리서도 그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밤의 그 등불은 예루살렘의 집의 뜻을 비추어주었던 것이다. 이때 장로들과 남자들은 횃불을 들고 춤을 추면서 찬양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4. 예수님께서 외치셨던 초막절 설교의 핵심내용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마지막 공생애를 사시던 해에 예수께서도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는 초막절의 큰 날 곧 끝날에 성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셨다. 그때 선포한 말씀을 두고 오늘날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초막절 설교"라고 부른다. 이때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고 외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장차 그의 배로부터 흘러나오리라고 예상한 "생수의 강"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에스겔47장에 나오는 성전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물을 가리킨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5년전(B.C.591년)에 이미 예루살렘의 성전을 떠나셨다. 그리고 다시 들어오실 것인데, 그때를 예언한 것이, 에스겔서(겔43:4)와 스가랴서(슥14:8)에 나오는 말씀이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에 보았던 여호와의 들어오심은 동쪽바깥문을 통한 것이었다. 그러자 문은 닫혔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에스겔은 동쪽에 있는 성전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다. 그 물은 동쪽 성전 바깥문을 흘러나와 남쪽으로 흐르면서 그만 강물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강물에는 번성하여 움직이는 생물들로 가득 찼으며, 강좌우편에는 각종 과실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과실을 맺었고,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약의 재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겔47:1~12).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전(장막)이 곧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성령께서 흘러나와 믿는 자들 안에 들어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물"은 곧 "생수의 강"으로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로, 하나님께서 초막절에 종려나무 가지와 도금양 가지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라고 한 것은 예수께서 생수의 강 곧 생명이신 것을 잊지 말고 꼭 기억할 것이며, 그것에 감사하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여인의 뜰에 밝힌 등잔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여인의 뜰에 밤새 불을 밝히고 있었던 4개의 등잔대(16개의 금대접들)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1차적으로는 예수께서 빛 곧 생명의 빛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살아있을 때에 생명의 빛을 소유한 자는 영원한 빛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게 살게 될 것임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춤을 추다가 눈이 마주쳐 간음행각을 벌인 어떤 여인의 이야기였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나면서 맹인 된 자의 눈이 떠진 기적같은 사건의 의미다. 왜냐하면 이때 고침받은 남자는 나이가 약 40세 가량 되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다. 그러니 그는 한 번도 사람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이 살던 사람이었다. 다만 성전 입구에 앉아 구걸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그는 어둠 가운데 약 40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오셨다. 그리고는 일부러 그를 만나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주님께서는 이때 자신의 침을 뱉어 그것을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서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것은 "이제 너도 참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씀이자, "이제부터라도 사람다운 삶을 살아보라"는 권면의 말씀이 아닌가 싶다. 그 전에 백성들은 제사장들의 물 붓는 행위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물로 표현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나, 이제는 진짜 대제사장으로 오사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준 사건이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기적이다. 이전까지 맹인은 컴컴한 어둠 가운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만나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빛의 세계로 나오게 된 것이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완전히 빛난 곳이다. 그곳에는 더이상 해와 달이 필요없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빛이 되시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모든 슬픔, 눈물, 아픔, 걱정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을 모셔들이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는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우리는 초막절의 율법규례를 통하여 초막절의 핵심키워드는 초막을 짓는 것이요, 4가지 식물을 흔들며 기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왔을 때 이미 초막절에는 2가지 의식이 더 첨부되어 있었다. 하나는 물을 붓는 의식이요 또 하나는 불을 밝히는 의식이었다. 이 둘이 하나가 되어 실제적인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나면서 맹인되었던 자가 실로암 못가에 가서 물을 접촉했을 때 낫게 된 사건이다. 이는 예수께서 생명 그 자체이시며, 그분을 통해서만이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와 빛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사실 흔들었던 나무 가지들과 초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구약성경만으로는 보다 더 상세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비로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물로 나타났던 "생명"의 공급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어둠의 세상주관자로부터 벗어나 빛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감사하라는 것이 초막절인 것이다.

 

2019년 11월 0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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