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둘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9) 천국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가?(마22:1~14)_2022-03-01(화)

https://youtu.be/sggHXmA0LsI

 

1.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하나는 주님께서 천국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어도 그것을 끝내 거절하는 자이다(마22:1~10). 이들은 천국 혼인잔치가 그렇게 중요한 잔치라는 것을 인지하고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밭으로 가보는 거이 더 중했고, 사업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이 더 중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초청장을 보낸 왕은 싫어했으며, 오히려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 비유는 마태복음 21장부터 시작된 것으로, 자신을 언약백성으로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리킨다. 둘째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이다(마22:11~14). 혼인 잔치의 피로연에 참석은 했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는 않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마25:1~13). 결국 구원으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내 거절하는 자는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지 못한 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2. 천국의 혼인잔치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천국에 혼인잔치는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마22:1~14)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 따르면, 첫째는 비록 처음에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주님의 초청에 누구든지 응하는 자가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의 2가지 비유 중에서 앞에 나오는 비유에 해당한다(마22;1~10). 여기에 보면, 처음부터 이 잔치에 참석하기로 약속을 받았던 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언약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실제 때가 이르러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을 때 그들은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만다. 그러자 왕은 이미 준비된 잔치인만큼 다른 사람을 그 잔치에 초청한다. 이들은 초대된 예정된 자들은 아니었지만, 길을 가다가 소식을 듣고서 기쁨으로 참여하게 된 자들이다. 그래서 약속이 없었던 이방인들도, 이때부터 천국의 혼인잔치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천국은 예수님 당시에 이미 다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마22:4). 천국에 들어갈 숫자가 이미 결정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자리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혼인잔치 자리는 이제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여지게 된다. 그렇지만 누가 그 자리에 앉게 되든지 그 자리가 차게 되는 날,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둘째는 누구나 그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지만 반드시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마22:11~14). 왜냐하면 어느 누구든지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채로 그 잔치 자리에 참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혼잔치의 예복은 당사자가 준비하는 것은 맞지만 이 땅에서 신부될 자들이 준비한 기름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서 주님께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예복을 입혀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혼인잔치의 예복이 입혀지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기름을 준비했느냐에 따라 각가 다른 예복이 아주 멋스럽고 예쁘게 입혀지는 것이다(계19:7~8). 

 

3. 마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가 2개의 비유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한 개의 비유인가? 아니면 두 개의 비유인가?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비유는 두 개의 비유가 합쳐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께서도 비유들(복수)를 말씀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2:1). 그러므로 마22:1~14의 비유 중에 앞의 비유는 "누가 초청받아 혼인잔치에 들어가는지에 관한 비유"이며(마22:1~10), 그리고 뒤의 비유는 피로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혼인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가 쫓겨난 사람의 비유"이다(마22:11~14). 그렇다면, 이것이 두 개의 비유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두 개의 비유들은 해당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기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마22장에 나오는 '앞의 비유'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왕이 신부들을 초청하고 있을 때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마22장의에 나오는'뒤의 비유'는 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잔치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음식을 먹고 마실 때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이때는 이미 초청하는 시간이 지난 후다. 즉 이때는 혼인잔치 중 축하순서가 끝나고 음식을 먹는 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중간에 천국 문 앞에서 이뤄지는 선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25:1~13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인 것이다. 둘째, 두 개의 비유들은 왕이 부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앞의 비유에서는 왕이 자신의 종들과 자신의 군대들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왕이 보내는 종들과 군대는 다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왕이 두 번째로 자신의 종들을 보내는데, 먼저 앞서 보낸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세례요한을 가리키고, 나중에 또 다시 보낸 종들은 예수님의 12제자나 70명의 제자들 그리고 오순절 이후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사람이기에 능욕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당하기까지 한(마22:6). 그리고 이들은 밭을 사고 사업하는 일에 바쁜데 그 일들은 다 이 땅에서 벌어지게 될 일이다. 하지만 뒤의 비유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혼인잔치의 후반부에서 음식을 먹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하인들에 의해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된 채 바깥 어두운데에 내던진다. 이때 등장하는 '하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섬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는 말인데, 번역하면 '시중드는 자', '섬기는 자'로서 천사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들은 앞의 비유와는 달리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데에 던지는 자들 곧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자들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기에 앞의 비유처럼 능욕을 당하거나 죽임당하지 않는다. 

 

4. 천국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인데도, 들어갈 수 있는가?

  천국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입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름이 호명되지도 아니한 자가 예복을 입고 혼인잔치에 입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혼인잔치가 시작되는 싯점에서 혼인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이 그곳에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마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속에 다 나온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신부는 결코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마25장에서는 '기름'을 '예복'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고로 마22장의 '예복'은 사실 마25장의 '기름'과 같아서, 예복을 가지지 않은 신부는 아예 처음부터 혼인식장에 입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혼인예복을 입지도 않은 채 혼인잔치의 피로연에 참석한 이가 한 사람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5. 천국에 혼인잔치에 옷도 혼인예복을 입지도 않은 채 들어갔던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에서는 '혼인잔치'의 비유가 딱 두 군대에서만 나온다. 하나는 '열 처녀의 비유'이며, 또 하나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혼인잔치의 전체적인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마22장의 '앞에 나오는 비유'는 계속해서 신부를 천국으로 초청하는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는 신부를 선발하는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22장의 '뒤에 나오는 비유'는 이제 혼인잔치의 순서 중에서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피로연 때에 일어날 사건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아직도 피로연의 시간에, 어떻게 예복을 입지도 않은 사람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천국의 실제를 보고 오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다. 왜냐하면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 성의 문들은 낮이든지 밤이든지 항상 열려져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계21:25). 그러므로 추정컨데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피로연에 참여했던 이는 성 바깥에 바로 뽀작 옆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인듯 싶다. 그런데 그에게 성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혼인예식은 매우 궁금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잔치 시작 무렵에 사람들의 이름들이 호명될 때에는 들어가지 않고, 잔치가 끝나는 무렵인 피로연의 시간에 그곳에 살짝 들어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법적인 것이고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이 땅에 살면서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마중나간 자에 속했지만 기름병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죽어서 그만 성밖에 남겨진 자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의 문이 닫혀져 있지 않아서혼인잔치의 맨 마지막에 그리로 들어가본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를 일부러 그렇게 놔 두었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그 친구를 통하여 천국에서는 기름준비하지 못한 자 곧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자는 절대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격도 못 갖춘 주제인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함히 들어왔으니 그는 수족이 결박된 채로 더 바깥의 어두운 곳으로 던져져야 할 대상인 것이다. 어찌 주님을 위해 땀도 눈물도, 금식도, 헌신도, 수고와 충성도 하지 않았던 자가 감히 어떻게 성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그의 무모한 행동은 자신이 이전에 있던 위치보다 더 멀리 더 나쁜 곳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 천국에 거주하는 시민들까지도 실은 자기 맘대로 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감히 예복도 입지 않은 채 혼인잔치의 피로연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샘플적으로 바깥 어두운데로 떨어지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2022년 03월 01일(화)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첫째 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8)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사람들(마22:1~14)_2022-02-28(월)

https://youtu.be/gtGct9IbIKk  [혹은 https://tv.naver.com/v/25405830 ]

 

1. 천국에서 행해지는 '혼인잔치'란 어떤 행사를 가리키는가?

  사람이 개인적으로 죽거나 아니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천국에서는 천국에 입성하는 자들을 위한 축하행사가 열린다. 이것을 '혼인잔치('가모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주님의 재림의 날에 있게 될 우주적인 '혼인잔치'로 소개되고 있다. 이 때 천국에 입성하는 신부들은 예수님께서 준비해 준 드레스(결혼예복)으로 입혀진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주님 앞에 나아가 각종 보석이 박힌 정장 옷을 입고 면류관을 받는다(물론 못받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더 허다하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자기의 천국집으로 안내된다. 그리고 참고로, 천국에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할 때에는 각자가 자기의 보좌에 앉아서 예배드린다(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보좌 없이 서서 예배드린다). 예배 좌석은 144,00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인데, 총 70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첫 번째에서 여섯 번째 줄까지는 왕노릇하는 자가 앉는다. 그런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천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 그가 축하받는 것이 곧 '혼인잔치'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곧 천국입성 환영식이 혼인잔치인 셈이다. 그때는 사람마다 입혀지는 옷이 다르며, 수놓아진 장식도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쪽으로 인도될수록 더 크게 환영을 받는다. 천사들의 빵파레와 아름다운 꽃가루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혼인잔치의 실제 모습이다. 

 

2. 천국의 혼인잔치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게 되는가?

  마태복음만의 기록을 보면, 혼인잔치는 딱 두 번 언급되고 있다. 한 번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서 언급되고 있고, 또 한 번은 오늘 본문 말씀 곧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언급된다(마22:1~14).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는 과연 누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반대로 누가 참석할 수 없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누가 먼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는지와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자가 누군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가? 먼저, 마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를 살펴보면, 등을 들고 기름병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이 참여하게 된다(마25:10). 이들을 마태복음의 저자는 혼인잔치를 '준비한 자들'로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라고 언급한다. 그렇다. 이들은 처음부터 신랑과의 만남을 준비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마중('휘판데시스') 나가는 것만 생각했지 그때 신랑과 어떤 만남을 가질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날의 만남('아판데시스')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혼인잔치하는 신랑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문 밖에 버려진 처녀들이 된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성밖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누가 먼저 혼인잔치에 들어가는지를 말해주며(마22:1~10), 누가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게 되는지도 함께 말해준다(마22:11~14). 

 

3.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했던 '기름'이란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지난 '천국복음(06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구분하는 2가지 기준은?(마25:1~13)'이라는 메시지를 통하여,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가 들고 나갔던 '기름병'의 '기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배웠다. 이 기름의 용도는 꺼져가는 등불을 밝히는 용도만이 아니었음도 함께 배웠다. 만약 그 기름의 용도가 꺼져가는 등불을 밝히는 것이었다면 나중에 기름을 사와서 뒤늦게 도착한 미련한 다섯 처녀도 역시 혼인잔치에 들어갔어야 옳다. 하지만 신랑은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기름이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용도로만 쓰인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때 기름은 꺼져가는 등불을 타오르게 하는 용도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자신이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준비한 기름만이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댓가를 지불해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죽은 후에 마련한 기름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했던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단지 신랑을 마중('휘판데시스') 나가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만났을 때에 주님과의 만남('아판데시스')을 위해 준비한 것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랑과의 맞선에 신랑의 눈에 들게 하기 위한 용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특히 그들이 기름병에 채운 기름의 종류와 양과 그리고 기름병의 숫자에 따라 천국에서 받을 상(면류관, 보좌자리, 천국집, 신분)이 달라진다는 것까지 배웠다. 그렇다. 기름은 신랑되신 주님을 만났을 때에 지참해야 할 혼인 예물과도 같은 것이었고, 신랑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사랑의 증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일생이 담긴 땀과 노력과 헌신과 수고의 결과들이었던 것이다. 

 

4. 마태복음 22:1~14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무엇 때문에 말씀하게 되었는가?

  마태복음 22:1~14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당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말씀이다. 이들은 세례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 줄을 알았다. 하지만 회개를 외치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2가지 비유를 통하여 그들이 현재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인지를 알려주셨다. 하나의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마21:28~31)"이며, 또 하나의 비유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21:33~46)"이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마땅히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게 되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들 곧 이방인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경고의 비유들이다. 그래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주님께서는 또 다시 '혼인잔치'에 관한 2가지 비유(마22:1~10과 11~14)의 말씀을 들어서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것이 '바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5. 청한 사람들(초대받은 채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큰 길에서 발견되어 혼인잔치에 들어간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예수께서는 누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의 첫번째 비유(마22:1~10)를 통하여 말씀해 주셨다.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배설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왕의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자 왕은 일주일 정도 진행되는 혼인잔치에 미리 초대받은 채 있는 자들을 오라고 자신의 종들을 보낸다. 여기서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세례요한을 가리키고, '초대받은 채 있는 자들'은 언약백성인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초대받은 채 있는 이들이 계속해서 오기를 원하지 않자, 왕은 또다시 다른 종들을 더 보낸다. 여기 또 다른 종들은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일 것이다. 그때 왕은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황소들과 살진 짐승들을 도축하였고, 모든 것을 준비하였으니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은 왕의 부름을 소홀히 여긴 채, 어떤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갔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보낸 종들을 잡아서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왕이 노하여, 자신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를 진멸하고 그들의 동네까지 불살라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그의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초청받은 채 있는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큰 길 출입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대로 초청하여 데리고 오라고 한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손님들로 가득찼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 비유는 이미 초대받은 채 있는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혼인잔치에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이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교훈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하겠다. 이는 아무리 먼저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본인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잔치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누가 되었든지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들이 받게 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해준다.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따라, 지금 시대는 촛대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에게 이미 옮겨진 상태에 있다. 왕이 노하여 살인자를 죽였던 때가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마지막 시기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의 일부가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짧은 기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런 일로 인하여 돌감람나무인 우리 이방인들에게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아무나 다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일 이 시간에 계속 말씀을 나누기 원한다. 

 

 

2022년 02월 28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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