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4) 세례요한에 대한 재평가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증언(요3:22~3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z78Yh09CfQ  [혹은 https://tv.naver.com/v/29537866 ]

 

1. 들어가며

  사람은 자신만의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이전에 들어왔던 것이 있고, 그것이 점차 고정화될 때에 그것은 이내 고정관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에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결국 사람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리는데 일조한다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시 들여다 보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정말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가? 아니면,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 사람인가?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성 및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볼 것인데,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안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반응이 중요한 것이다.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왜 투덜대기 시작했으며 이때 세례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해소시켰는가?

  어느 날이었다. 한 유대인이 찾아와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정결예식 곧 세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논쟁이 붙었다(요3:24~25).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문제를 자기의 스승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스승인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이 곧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떨어진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만약 그것이 하늘에서 주어진 채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하였다(요3:27).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분 앞에서 파송받은 채 있는 선구자라는 것을 증언해 줄 자가 바로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말했다(요3:28).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은 신부가 신랑을 찾아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서 매우 기쁘다고 하였던 것이다(요3:29). 그래서 그분은 더욱 더 커지고 그분의 사역은 증가되어야 하겠고 자신은 더 작아지고 자신의 사역은 감소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요3:30).

 

3.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을 어떤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세례 요한에 대한 기사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세례 요한을 추켜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자신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사명대로 자신의 일에 충성했던 이이자 겸손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하였으며(요1:6~9), 자신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자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는 자라고 말했으며(요1:23~27), 자신의 존재목적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요1:31). 그렇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았던 자이다. 예수님은 먼저 계신 이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땅에서 난 이로써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요3:31). 그러므로 그는 자신은 점점 더 약해져야 하고 이제 예수님께서 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오늘날 세례 요한을 저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진짜로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도 더 작은 자로 있는가? 나중에 천국에 가 보면 다 알겠지만 천국에서 세례 요한은 24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세례 요한은 실제보다 더 작은 자로 평가받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기사들 중에서 마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죽음직전의 사건과 예수님의 평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1장이나 혹은 누가복음 7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처럼 나오고,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잘못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죽기 전에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내리신 평가가 나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평가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평가에 대한 해석이 아주 분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연 세례 요한에게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보다더 더 나은(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마11:9). 왜 그런가?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의 마지막 주자로서,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이분이라고 소개했던 최종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만 예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메시야가 바로 이분입니다"라고 소개한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둘째,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고 하셨다(마11:11a).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으켜진 채 없다고 하셨다(마11:11). 고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죄인으로서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사가랴와 엘리샤벳 사이에 잉태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는 어려서 광야로 보내져서 금식과 기도로 단련되고 영성으로 무장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30년동안 그는 광야에서 지냈다. 넷째로,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에게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그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예수님의 평가다(요11:11b). 이 말씀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아주 저급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를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것은 보통 2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가서 실족했기 때문에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로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중에 실제로 세례 요한보다 더 작은 자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죽기 전에 실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11:3).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례 요한이 질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를 모르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자신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파송받아 온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을 조금 섭섭해서 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 하나 잘못했다고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둘째는,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인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마지막 주자였고, 그후부터는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그가 가장 작은 자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은 예수님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성령으로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늦게 태어난 게 더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 보라.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신약의 성도보다 못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한 가장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이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서는 어떻게 나와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거나 큰 자가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첫째로,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렇다. "그런데 하늘들의 왕국 안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이보다는 더 크다"이다. 먼저는 이 말씀이 앞 문장을 뒤집는 역접의 문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러나'가 아니라 '그런데'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의 정의도 맞는 것이지만 그런데' 다른 말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준이 '천국 안에서'라고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인생을 마칠 때 어떤 사람이 될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그만 실족해버리면(걸려 미끄러지면)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이 결국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은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어떤 성도들보다도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작은 자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즉 천국에서 받을 지위는 어떤 이유로 변동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사실 천국에서의 지위는 그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한 것으로 인해 결정되는데, 혹시 실수하여 잘못을 범했다고 할지라도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들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늘이 이미 쌓아둔 것이 허물어지는 유일한 경우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일평생 수고하여 쌓아둔 하늘의 것들은 절대 없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일평생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여 30년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드러내었고 소개한 일과 예수님이 세례받으러 오실 때까지 회개를 외치며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했던 모든 것은 다 하늘에 남아 있다. 마지막에 가서 그의 섭섭한 말 한 마디로 인해 그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고스란히 하늘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예수께서 메시야인지 몰라서 "당신이 오실 그이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예수님에 대해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미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는 선지자들의 중의 최고이며, 여자가 낳은 자 곧 죄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였지만, 아직 그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아직 그들보다는 작은 자였던 것이다. 

 

6. 세례 요한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는 어떠한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계시는 이'이신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시지만, 땅에서부터 있는 이이자 땅에 속해 있는 이인 세례 요한은 땅에서 말하고 있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말 자체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스스로 지어내서 하신 말씀이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신 말씀은 당신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셨던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기에(요12:49~50), 그 말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아요 나를 보냈던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이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레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계셨던 것이다(요3:34).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에는 실수가 없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불필요한 말씀도 하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달랐다. 그는 땅에서 난 자이기 때문에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섭섭함을 표현하는 말도 간혹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얼마나 그 사람 위에 부어주셨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는 성령을 한량 없이 부어주셨지만, 세례 요한에게는 그렇게까지 부어주지는 않으셨던 것이다(요3:34).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는 심판의 권한 마저 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직접 사람이 되어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이요, 육신을 입어 인류의 죄를 속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차 우주의 종말이 찾아올 때,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요5:22,27).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실 때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마28:18), 사망의 음부의 열쇠마저 가지셨다(계1:17~18). 

 

7. 사람이 영생을 얻기도 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기도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최종적으로 영생을 얻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요3:36). 즉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자는 결국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영생'이란 '다음 시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람이 죽고 났을 때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 죄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믿고 그분의 음성을 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어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즉 다음 시대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땅에 살면서도 아들을 믿기를 거부하며, 그분의 음성에 불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뿌리친 것이 되어 자신이 지은 죄의 댓가를 자신이 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전부터 이미 운명 지워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마침내 받고 말 것이다. 즉 그런 자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을 때에 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며,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한 사람을 영생과 하나님의 진노로 나누기 때문이다. 

 

8. 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아주 얕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세례 요한이 살아있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그는 아직 죽지 않아서 그가 어떤 사람으로 천국에 들어갈 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에 비해서 그는 아주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최종적인 상태는 우리가 죽을 때에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죽기 전에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어떠한 믿음으로 죽게 될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주인공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쌓아놓은 모든 상을 다 얻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에는 천국 집도 있을 것이고, 면류관도 있을 것이고,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지위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준비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천국에 상이 준비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상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은 오직 예수님을 믿은 자가 얼마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충성했는가에 달려 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거나 그분의 음성을 불순종하여 날마다 죄짓고 산다면 그는 죽을 때에 결코 영생을 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아들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시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면 즉시 회개하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어떤 것을 하라고 지시하면 즉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천국에서 어떤 자가 되는지를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과연 나는 칭찬을 받고 상급받는 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질 것인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2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5) 누가 과연 천국에서 큰 자가 될까?(마18:1~6)_2022-03-08(화)

https://youtu.be/B6klwIHhuME  [혹은 https://tv.naver.com/v/25537125 ]

 

1.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에 관하여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2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일부러 한 어린아이(파이디온)을 불너내신 후에 그 아이를 그들 한 가운데 세워놓으시고는 2가기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먼저 돌이키야 하고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한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마18:3). 그리고 둘째, 누구든지 거기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신을 낮추는 이 바로 그이가 천국(하늘들의 왕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18:4).

 

2. 예수께서는 시청각 실물교육을 통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 한 가운데에 세우신 후에, 천국에서 과연 누가 큰 자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지부터 말씀해 주셨다. 첫째는 기존 생각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고 하셨다(마18:3). 여기서 '돌이키다'는 헬라어 단어는 '스트레포'라는 단어로서, '돌아서다. 변하다. 바꾸다.'는 뜻을 가졌다. 이는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기존관념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거나 권세를 부리는 것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20:25~27). 둘째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마18:3). 여기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그 의미를 또렷이 알 수 있다. 그때는 어떤 사람들(부모들)이 자기의 어린아기(블레포, 갓난아기)을 안수해 주심을 바라고 데리고 왔을 때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파이디아)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내버려두고) 금하지(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파이디온)와 같이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6-17)" 그렇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말의 뜻은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특성을 가리킨 것이다. 천국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천국이 이렇다고 하면 그런 줄로 그저 믿고서 자기도 그곳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에 대해 들려주면, 그 말씀을 아무런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로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그것을 바라거나 소망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어린아이(파이디온) 하나를 세워놓고 그러한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다(마18:4). 이 말씀은 결국 천국에서 위상의 문제는 곧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며, 겸손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천국에서 큰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조건('거듭남'과 자백하는 '회개')과 충분조건(최소조건에다가 '충성')을 채운 자여아 한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겸손한 자,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군림하려는 자, 주인행세만 하려는 자는 천국에 가면 가장 작은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고로 이 말씀은 천국에서 낮은 신분을 가질 자가 누가 될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항상 겸손히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천국에 들어가거나 천국에 큰 자가 되려면 그냥 어린아이 곧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면 되는 것인가?

  우리는 천국에 입성하거나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에 있어서 주의할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게 되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오늘도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앗따고 해서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아니며, 또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얼마든지 긍휼을 베풀며 실천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이들 중에는 단 한 명도 천국에 들어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 자체가 천국입성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도 아예 율법말씀에 객과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신24:19~21).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잠19:17). 하지만 이것이 천국입성의 직접적인 조건이 결코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 곧 거듭나지 않는 자는 천국에 아예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요3:5). 고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일에 충성할 때에 그가 군림하는 자세로 행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섬기라는 것이다. 무조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체가 천국입성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자기와 자기의 후손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는 그것이 아닌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내 형제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자가 양의 자리에 들어가고 결국 창세로부터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내 형제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죄를 지어서 못 먹고 못 입고 나그네 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지극히 작은 자가 된 자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를 돕는다면 그는 천국에도 들어가고 하늘나라도 역시 상속받게 될 것이다. 

 

5.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면서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또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적인 약자가 불신자이든지 신자이든지 상관없이 주님께서 인정해주는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를 주의하면 된다. 첫째, 사회적인 약자를 섬기는 일을 할 때에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행하라는 것이다(마18:5). 그렇게 했을 때에만이 약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눅9:28). 그리고 둘째, 돕더라도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도로 찾아내어 그들을 회개하도록 도와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마18:12~14, 눅15:3~7).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준다고 할 때에 동성애자를 도와준다고 치자, 이때에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계속해서 동성애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여 동성애를 벗어나도록 도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로 촛점이 맞추어져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결국에 천국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2022년 03월 0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81) 종합편(2) 왜 천국복음인가?(마4:23)_2020-10-08(목)

https://youtu.be/cQT4J2OQFBY  [혹은 https://tv.naver.com/v/16121302  ]

 

1. 왜 우리는 천국복음을 들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천국복음을 들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전파하셨던 복음이 "천국복음"이기 때문이요(마4:23), 이러한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어서 온 세상에 전파될 때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24:14). 주님의 재림은 천국복음이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이므로, 우리는 주님오실 때까지 이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인류가 들어야 하고 알아야 하며 또한 전파해야 할 복음이 천국복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매우 소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죽었는데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슬프고 한이 맺히겠습니까?

 

2. "천국복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나요?

  "천국복음"이라는 것은 천국에 관한 복음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며,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과연 왕노릇하는 성도가 과연 얼마만큼의 큰 통치권을 갖느냐에 관한 복음을 가리킵니다. 

 

3. 천국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아니면 "장소"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성경에는 "천국"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가 겹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성경을 들여다보면, 복음서에서 오직 마태복음만이 "천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뿐, 타복음서들에서는 "천국"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고 있지 아니하며, 오직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실 때에 때로는 천국을 상태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눅17:21). 사도바울도 마찬가지로 상태적인 천국에 대해 말한 적도 있습니다(롬14:17). 고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바 "[당신의]나라가 임하시오며(마6:10)"라는 기도문구와 "내 나라(왕국)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는 말씀에 준거하여, 주의 나라는 상태적인 개념임과 동시에 실재하는 장소라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천국이 "통치(다스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천국은 상태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들어간다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장소적인 개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이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는 곳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국은 이 땅에서도 상태적인 것으로서 실현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맛보기에 불과한 것이며 진짜는 셋째 하늘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로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늘 이러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천국은 장소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마5:20,7:21,18:3,19:23). 

 

4. 천국은 어떠한 사람이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요?

  천국은 헬라어로 보면, "하늘들의 왕국"이라는 말로서, 예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늘들에 있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고로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영원토록 누리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왕노릇하되 큰 자로 왕노릇하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천국은 누구나 초청을 받아서 문을 두드리지만 다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그곳은 2가지 조건이 채워질 때에 들어가게 되는데, 하나는 합당한 믿음이 있어여 하고, 또 하나는 합당한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막1:15, 행20:21). 즉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할 때에 그는 죽은 다음에 부활체를 입을 것이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법을 행하는 자이든지(마7:21), 그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든지(마7:15~17), 겸손해지지 못해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사람(마18:3~4) 등의 조건에 비교할 때, 결국 죄를 짓고도 그 죄에 대해 용서를 받지 못한 자는 결국 천국에 못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할 뿐만 아니라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자범죄들을 다 씻음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천국에서는 어떤 자가 왕노릇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어떤 자가 왕노릇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한 마디로 천국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계5:9~10). 다만 왕노릇하는 권세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즉 천국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데, 어떤 이는 열고을의 권세를 차지할 자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다섯고을의 권세를 차지할 자도 있을 것입니다(눅19:11~27).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권세가 큰 자도 있고 작은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천국에서 권세있는 자, 능력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최소한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마5:20). 그리고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실족해서는 아니 됩니다(마11:11). 실족하면 천국에서 받을 축복이 상실되기 대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라면 때로는 죽을 수도 있어야 하고, 주님 때문에 고난도 견뎌야 하며, 그리고 어떠한 어려운 형편에 처하든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서는 절대 아니 되겠습니다(딤후2:9~10). 천국에서 큰 자로 사는 것은 사실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10월 08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로 큰 자였는데 왜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을까?(마11:2~15)_2019-10-01(수)
https://youtu.be/8c_acd0lbqA


1.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셨나요?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을 두고서, 첫째,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9).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관해 예언하였지만 세례요한은 메시야 바로 앞에 와서 그의 오실 길을 준비하고 그분을 메시야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여자가 낳은 자들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마11:11). 왜냐하면 그는 선지자임과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안수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넘기는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마3:15). 셋째, 그는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라고 평가했습니다(마11:14). 이는 세례요한이 말라기서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로서, 회개를 외침으로 메시야의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였기 때문입니다(말3:1,4:5~6). 그렇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도록 회개를 외쳤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2.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평가하실 때에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대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자인지를 누누히 말씀하셨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천국 안에서 세례요한은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인가요?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람이 죽을 때에 어떻게 죽었느냐에 의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이 죽을 때에 그는 천국에서 큰 자라고 불리는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 천국에서는 어떤 자가 큰 자가 됩니까?
  천국에서는 확실히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습니다(마5:19, 18:4). 이는 천국에서 누릴 영광의 차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특히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느냐 하는 것에 따라 결정됩니다. 즉 예수께서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복된 죽음이자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0:28~30).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자신이 죽을 때에 하늘에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예비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할 때에 자신의 목숨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기꺼이 바쳤기 때문입니다(행20:24). 사실 천국에 가면, 모두 성도들이 다 똑같은 흰 세마포옷을 입습니다. 하지만 머리에 면류관을 썼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더 큰 자인지 아닌지가 구분이 됩니다. 그리고 면류관을 쓴다고 해도 면류관에 어떤 보석이 박혀 있느냐에 따라서도 더 큰 자와 더 작은 자가 또 구분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세례요한이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도 더 작은 자가 불리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는 말은 세례요한이 천국에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그가 천국 안에서는 결코 큰 자가 아니며, 오히려 가장 작은 자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에 태어나서 죽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서, 사실 세례요한보다 더 크게 칭찬을 들었던 자가 없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왜 천국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요? 그것은 세례요한이 결국 마지막에 어떠한 죽음을 죽었느냐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하고 메시야를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해준 장본인이기는 했지만 그가 죽을 때에는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죽게 된 것은 신앙수호나 복음전파 때문에서 죽어야 했던 죽음이 아니라, 그는 남의 죄를 책망하는 선지자로서 쓰임받다가 그만 헤롯안디바에서 억울하게 죽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이 비록 숭고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도 그를 순교자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5. 세례요한은 어떠한 죽음으로 죽었나요?
  세례요한은 헤롯안디바의 죄를 책망하여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만 하루 아침에 갑자기 목베임을 받아 최후를 맞이했던 인물입니다. 헤롯대왕에게는 7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헤롯빌립은 자신의 배다른 형인 아리스토불르스의 딸인 헤로디아(조카)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헤롯빌립의 또 다른 배다른 형인 헤롯안디바가 자신의 재수인 헤로디아를 그만 헤롯빌립에게서 빼앗아 결혼을 합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헤롯안디바에게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책망을 합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의 하나인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다고 그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헤롯안디바는 마케루스라는 여름 궁전의 지하감옥에 그를 가두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 차마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그를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헤롯안디바의 생일이 되었는데, 자신의 새 부인인 헤로디아의 전남편의 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게 되고 그것이 맘에 들어 무엇이든지 들어준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살모메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말했을 때에 세례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 달라고 요청하라고 합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세례요한은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죽음은 상당히 의로운 죽음이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수호와 복음전파를 위한 죽음이 아니었던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의 죽음을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비록 천국에 들어간 존재가 되기는 했으나, 그곳에서 세례요한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떠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수호와 복음전파를 위함 죽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게 된 이를 가리켜 "순교자"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는 것도 의로운 죽음이겠지만, 보다 더 가치있는 죽음이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9년 10월 02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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