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과연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이 표현은 사회적인 약자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른 이를 지칭하는 것인가? 많은 이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왜냐하면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돕지 않는 자들이 그만 심판 후 염소가 되어 영영한 불에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말씀은 믿음으로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인가? 대체 누구를 돌아보아야 우리도 양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인가?

 

2022-03-06(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천국복음(13) 회개와 천국복음 관점에서 보는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_2022-03-06(주일)

https://youtu.be/tg4-DdYGl1A [혹은 https://tv.naver.com/v/25536608 ]

 

1. 들어가며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천국에 관한 3가지 비유가 나온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심판에 관한 비유이다. 그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좌우로 갈리어 오른편 양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영생의 세계에 들어가고, 왼편 염소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영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 둘을 서로 다른 곳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양과 염소로 나뉘게 되는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시대,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이러한 것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구원 및 천국에 관한 일반적인 궁금증은 무엇인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알려져 있는가? 그것은 '양'은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고, '염소'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며,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과연 예수만 믿으면 어떠한 선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백 퍼센트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최소 조건은 '믿음'과 '회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조건은 '믿음'과 '회개' 그리고 '충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그가 선행을 하고 구제하면서 약자를 돕고 있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며 천국을 기업으로 차지할 수 있는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지 못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자, 그리고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 내지 못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구원관을 가져야 한다. 그 말씀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있다. 그러하면 바른 구원론, 바른 천국관이란 어떤 것인가?

 

3.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에 관한 말씀으로서, 장차 천국에 누가 들어갈지를 가르쳐 주는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면 누가 하늘의 왕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것이며 누가 영영한 불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인지를 알려 준다. 그렇다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먼저, 단어의 개념 정의부터 살펴보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양'은 '어린양(헬라어 '아르니온')'이 아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양은 다 자란 양을 가리키는 '프로바톤'이다. 다시 말해 이 양은 성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염소'는 어떠한가? 여기에 나오는 '염소'는 헬라어로 '에리포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염소들 중에서 '염소 새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양과 염소는 다 자란 양과 어린 염소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비슷하여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함유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는 그날에 이 둘은 서로 쫙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을 '양'이라고 표현하셨는가? 먼저 양은 심판 때에 예수님의 보좌 오른편에 서게 될 자로서, 창세로부터 준비된 채 있는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주님은 그들을 '의인들'이라고 칭하셨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행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믿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심판 후에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염소'는 어떤 사람인가? 염소는 예수님의 보좌 왼편에 서게 될 자들로서, 영원한 불에 들어갈 저주를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증명되지 못한 자들로서, 끝까지 자신의 운명이 지옥이 될 것인지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결국은 영원한 불 속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4. 양과 염소는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양과 염소의 차이를 낳게 했는가? 그것은 이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있다. 지극히 작은 자들로 언급하고 있는 6가지 종류의 사람들 곧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그들이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서, 양과 염소로 갈리게 된 것이다. 양의 자리에 있게 된 사람들은 이들을 돌보아준 자들이며, 염소에 속한 자들은 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자들이다. 양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것이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염소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가 섬길 대상을 가리어서 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생색내고 자기 이름이 높여지고 명망을 얻게 되는 일에는 자신의 물질을 썼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자들이다.

 

5. 여섯 가지 종류의 가장 작은 자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섯 가지 종류의 지극히 작은 자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경에 따르면, 이들에 대하여 구약적인 견해가 있으며, 신약적인 견해가 있다. 구약적인 관점에서 이들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한 구약적인 견해는 이렇다. 구약시대 여호와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곡식을 벨 때에는 이삭을 조금 떨어뜨려 놓으라고 하셨고, 감람나무의 열매를 딴 후에는 다시 가서 살피지 말라고 하셨으며,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도 다시 가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조금 남겨두라고 하셨다(신24:19~21). 이것이 율법이다. 또한 시편에서도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그네들(객들)을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다(시149:9).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그들의 송사를 굽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당신의 백성 곧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있을 때에 나그네(객)로 있었기 때문이다(신10:19).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살고 있었고, 자국민이 아니라 나그네(객)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어 주셨던 것처럼, 사회적인 약자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약자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생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 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고로 사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받게 된 것을 고치려면 단지 식량과 의복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들로 하여금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케 하여 질병과 가난과 자녀의 앞길을 막는 악한 영들을 떠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들의 삶은 버겁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게 우선적으로는 의식주를 공급해 주는 일을 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저주로부터 해방을 받는 회개를 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6. 신약적인 관점에서 즉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둘째, 신약적인 관점에서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즉 예수께서는 이들이 누구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우리는 성경 말씀의 워딩 자체를 잘 살펴야 한다.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예수께서는 이들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건 40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25:40절에 보면, 이들은 '이 내 형제들(these my brethren) 중의 가장 작은 자들(the least)'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그냥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 앞에 '이 내 형제들'중에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이들은 누구인가? 먼저 첫째로, 주님께서는 이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그럼, 주님의 형제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냥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인가? 아니다. 예수께서 '내 형제들'이라고 하실 때에,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언젠가 주님께서는 "누가 내 형제들이요 모친이냐?"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들이요 자매들이요 모친"이라고 하셨다(마12:48~50).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20:17)" 그렇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는 자를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혈육으로 형제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에게 그는 '내 형제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이들을 '이(these)'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이는 지금 주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예수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영의 눈으로 영적 세계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천국에 들어갈 때에 충분조건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주님 가까이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로 '이 내 형제들'은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주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믿고 회개하였으며 그리고 충성한 자였다. 이러한 성도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결코 주님 가까이에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이들은 거기에 있는 양들이라면 그들 중에서도 주님 보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들은 주님 재림시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천사들만 대동하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살전3:13).

 

7. 회개와 천국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이 내 형제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기는 들어가되, 충분조건으로 들어간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럼, 왜 천국에 충분조건으로 들어간 사람들인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다가 더 좁은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스스로 복음 전파의 길에 나선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때문에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복음 때문에 이방 땅으로 가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 때문에 낙후된 곳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다 보니 아프게 되어도 병원이 없어 고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복음 때문에 문화와 종교가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특히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불러 올려 심판하시는 그 순간에도 남겨진 사명자가 이 세상에 있어, 낯선 나그네로 그대로 있을 것이고, 감옥에 갇힌 자도 있을 것이다. 왜냐햐면 주님께서 이들을 소개하실 때에는 미완료 문장으로 소개하셨기 때문이다. 

 

8. 양과 염소가 신자와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고로 우리는 양과 염소가 신자와 불신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좁은 길을 선택한 자를 도와줄 리가 없을 터이고, 불신자가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도와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는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주님의 형제들로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마땅히 도와야 할 위치에 있었던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수고와 노력과 어려움을 염소들은 그만 본체만체 한 것이다. 이들을 위해 자신의 돈과 물질을 써 봤자 자기에게 별로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을 돕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명예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니, 그들은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이 직접 오셔서 도와 달라고 했다고 하면 모를까하고 그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 사수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희생하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7~18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 심판을 먼저 시작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과 죄인들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씀한다. 그러면 불신자들과 죄인들은 훗날 천년 왕국 후에 백보좌 심판에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먼저 그리스도인들만 하늘에 불려 올라가(휴거되어) 심판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각자가 선악간에 행한 대로 받는 일이라고 말했다(고후5:10).

 

9. 나오며 -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사명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지금 이 시대는 사실 마지막 추수의 시기다. 이제 천국문을 닫을 시간이 곧 올 것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시기다. 그러므로 자신을 천국에 들어갈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미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깨워야 할 때다. 그러므로 지금 전파해야 할 복음은 역시 천국복음이다.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고 어떻게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는지를 알려 주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주님께서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4:14).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법이 되는 세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는 주의 종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적그리스도가 표를 주어 그것이 없이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도 대비해야 한다. 고로 앞으로 세워질 '회개와 천국복음 연구소'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할 자를 양성하는 일을 할 것이며, 이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못 먹고 못 자고 못 입을 때에 그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을 치료해 주고, 이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2022년 03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왜 그리도 많은 신자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일까? 여기 바로 그 이유 3가지가 정확하게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이 어떤 곳인지 적어도 3가지가 나온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실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경고하는 바를 마음에 새겨들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늘도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라는 외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가?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하지 말자.

2021-09-10(금) 금요기도회
제목: 바른종말신앙(23) 예수 믿고도 지옥에 가는 이유와 그곳에 있는 세 장소들(마25:10~4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jcUvBZObWc  [혹은  https://tv.naver.com/v/22395960  ] 

 

1. 들어가며

  오늘날 과연 무엇이 올바른 종말신앙인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오늘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의 바람직한 종말신앙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신앙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어떤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성도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 3가지 비유를 보니 성도들 중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도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들 중에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은 어떤 장소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천국에도 차등 상급이 있는 것처럼 지옥도 차등 지옥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은 결단코 지옥에 들어가지 말고 꼭 자신의 모든 인생을 마치는 날,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천국에는 상급에 있어서 차등이 있는가? 

  장차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에서도 과연 차등 상급이 존재하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들을 읽어보자. 

마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장차]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렇다. 천국에서도 크다 일컬음을 받을 자가 있고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자가 있는 것이다(마5:19). 특히 예수께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천국에 큰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서도 그곳에서 왕노릇하는 자 곧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럼 누가 천국에서 작은 자인가? 그는 천국에서 섬기는 자로 들어가는 자들이다(마23:11~12). 

눅19:16-19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마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장차]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다. 천국에서도 왕의 신분으로 참여할 자가 있으며, 섬기는 자로도 참여할 자가 있는 것이다. 특히 천국에서 왕으로 참여하는 자는 여러 고을들(도시들)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들의 공력에 따라서 여러 도시들을 다스리는 자가 있을 것이며, 몇 안 되는 고을들을 다스릴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왕들을 섬기는 시녀와 경호원과 같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다스리는 자와 섬기는 자의 사이는 이 세상에서와 같이 명령복종이나 상하주종관계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곳에서 비록 섬기는 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끄럽거나 주눅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을 자신이 쓰임받는다는 것 자체로 한 없는 기쁨이 가득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3. 지옥도 형벌에 있어서 차등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데도 차등이 존재하는가? 그렇다. 천국에 차등이 존재하는데 지옥은 다 똑같은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 큰 오산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는 자인데도 일평생 못된 짓하다가 죽기 전에 간신히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 사람이 과연 천국에서 과연 왕노릇하는 왕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행한대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왕노릇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시겠는가? 마찬가지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사람도도 다 똑같이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지옥에서도 그들이 들어가는 장소가 다르며 그들이 받을 형벌에 크고 작음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지옥에서의 형벌이 크고 작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데, 적어도 3가지 형태의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장 형벌이 약한 지옥으로서 '성밖' 지옥이 있다(마25:10~12, 계22:14~15). 여기서 '성밖'이란 거룩한 신부들이 들어가서 거할 새 예루살렘 성의 바깥을 일컫는 표현으로서, 이곳 역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다. 왜냐하면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없는 장소이자 주님이 결코 방문하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날 심판 때에 버림당하는 장소가 성밖이기 때문이다. 둘째, 중간 정도의 지옥으로서 '바깥 어두운 곳' 지옥도 있다(마25:30). 이 지옥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가장 혹독한 지옥으로서 '영원한 불'이 있는 장소가 있다. 이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 가득한 지옥이다. 이 세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4. '성문 밖'의 지옥은 누가 들어가며 어떤 장소인가?

  그렇다면, 마태복음 25장에서 성문 밖의 지옥은 누가 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은 어떤 장소인가?

  첫째, '성박'에는 누가 가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성문 바깥의 지옥은 한 마디로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들어가는 장소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길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성 안에 들어가 혼인잔치를 하지 못한 채 밖에 버려지게 되었는가? 그때에 열 명의 처녀 모두가 다 등을 준비했다. 그때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더 준비한 상태여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신랑이 더디 나오게 되므로 기름이 다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늦은 때에 신랑을 맞으러 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미련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말했다. "당신의 기름을 좀 주시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둘 다 쓰기에 부족한 양이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밤에 기름을 사러 떠나게 된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신랑이 집 밖으로 나왔기에, 그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던 신부들을 신랑과 함께 신랑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나머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가 결국 성밖에 남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처녀가 들고 있던 등과 더 필요했던 기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열 처녀가 다 들고 있던 등은 계4:5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혹은 시119:105에 나온 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기름은 성령이나 성령충만이거나 말씀이거나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름은 성령충만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름은 분명히 값을 주고 산 것이니 거져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로 우리는 여기서 '기름'이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재료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어떤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회개의 눈물일 수도 있고, 금식일 수도 있고, 십일조와 같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우선 드리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시간의 십일조도 될 수 있다. 

  둘째, '성 밖'은 어떤 장소인지를 살펴보자. 여기서 성밖은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 밖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집은 신랑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신랑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비유이므로, 문밖은 곧 예수님의 집 밖 곧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의 바깥을 가리킨다. 그러 성 밖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이 장소는 어둡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빛은 성 안에만 둘러비치기 때문이다(계21:23). 그러므로 성 밖은 어두운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성밖으로 버려진 사람은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주님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이다(마25:12).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서 마7:23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결별이 있는 장소가 그곳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단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버려진 채 있는 영혼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그들이 형벌을 받는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장소다. 

 

5. '바깥 어두운 데' 지옥은 누가 들어가며 어떤 장소인가?

  그렇다면 두번째로 성문 바로 바깥 쪽 말고, 성으로부터 더 떨어진 바깥 쪽의 어두운 곳 지옥은 누가 들어가게 되며 그 장소는 또한 어떤 장소인가?

  첫째, '바깥 어두운 데'는 누가 들어가는지를 살펴보자. '바깥 어두운 데'에 대한 헬라어직역은 "더 바깥 쪽의 어두움'이라는 장소다. 이곳에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들어가는 장소다. 왜냐하면 주인이 돌아올 때 이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무려 6천 데나리온을 받은았다(1달란트=6천데나리온, 노동자의 20년치의 품삯). 하지만 주인을 악덕고리대금업자로 알고는 주인에게 돈을 불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땅에 감추어두었다가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 그러나 실제 그는 게으른 자였기에 일하기 싫어했다. 종이 되어서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자기를 믿고 많은 돈을 맡겨준 주인을 기쁘시게 해야 했지만 그는 주인을 위해 일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자가 바로 "바깥 어두운 데"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바깥 어두운 데'는 어떤 장소인지 살펴보자.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만을 지칭한다. 고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든 자는 다 성 밖에 버려질 것이다. 그런데 성 밖이라는 장소에는 바로 성문 뽀짝 옆만이 아니라 성벽으로는 더 멀리 떨어진 장소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에 그렇게 성령께서 회개를 촉구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셨건만 그 말에 순종하지 못한 자신이 밉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더 캄캄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들의 게으름과 은혜를 모른 체 것에 대한 값이었기 때문에 더욱 자기 자신에 한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전체를 읽어보게 되면, "바깥 어두운 데"라는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세 종류가 나온다. 첫째는 유대인들이다(마8:11~12). 이들은 원래 하나님의 왕국을 물려받는데 우선순위가 주어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왕국에 처음부터 초대된 자들이었으나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은 영영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는 장소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과 같은 혈통적인 조건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둘째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혼인잔치에 입을 예복을 입지 않은 채 그 잔치자리에 참여한 사람이다(마22:11~13). 이 무익한 종들은 왕의 사환들(천사들을 의미하는 것 같음)에 의해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두운데로 던져지게 된다. 그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셋째는 한 달란트 받았으나 악하고 게을러서 그것을 묵혀두고 일하지 않은 종이다(마25:24~30). 주님은 이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선하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천국에 들어와서 기업을 얻기를 원하셔서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을 악하게 보고, 더욱이 자신이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결국 더 바깥 쪽의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외에도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또 다른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마24장에 나오는 종으로서, 자기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셨던 "악한 종이다" 그런데 이 종은 한 달란트 받은 종보다 더 나쁘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보다 더 고통스러운 장소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서 채찍질을 당하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부분의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마24:48~51).

 

6. '영원한 불' 지옥은 누가 들어가며 어떤 장소인가?

  마지막으로 세번째로 영원한 불 속으로는 누가 들어가며, 그곳은 어떠한 장소인가?

  첫째, '영원한 불 속'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는지 살펴보자. 그곳에는 마25장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염소'가 들어간다(마25:41,46). 이들은 믿는 자들만을 먼저 불러 하늘에서 심판하실 때에 주님의 보좌 왼편에 서게 될 자들인데, 이들은 결국 심판후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게 된다. 그럼 왜 이들은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염소였고 또한 교회에서 염소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양(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 왕국을 기업으로 물려받을 자들)과 함께 생활해오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자신이 염소였는지를 모르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헬라어 원문으로 '염소 새끼"라고 나온다(마25:32~33). 그런데 그들이 자기가 염소였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들이받는 가끔씩 염소짓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일이 매번 지속된 것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했었기 때문이리라고 본다. 또한 자신들도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행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고 높여지는 일에만 열심을 내었을 뿐, 자기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일에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마디로 외식하고 가증스러운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다고 판단되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하고 섬기고 있는 이들을 개무시하며 살아왔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극히 보잘 것 없다고 여기던 그들은 실은 천국에서 왕의 형제들로서 천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인데 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생각이 주인이었다. 그들은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의 입맛에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자들이었으며,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남도 천국에 못들어가도록 자들로서 인도하는 그룹에 속한 자들이었던 것 같다. 

  둘째, 그들이 들어가게 될 '영원한 불'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자. 그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장소는 한 마디로 영원한 형벌의 장소와 고통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뜨거운 불이 소금치듯 하고 있기 때문이다(막9:48~49). 뿐만 아니라 유황이 타고 있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장소다(계14:10). 그리고 그곳에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귀신들)도 함께 들어가는 장소다(마25:41). 아마도 이들에 의해 고문을 당할른지도 모른다(계14:10). 그리고 거기에는 구더기가 있어 부활체를 갈아 먹기도 하고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아픔은 육체보다 더 큰 장소이다(막9:48). 또한 뜨러운 기운에 목마르지만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고 먹을 수 없는 장소다(눅16:24). 그곳은 또한 둘째 사망이 있는 장소다(계2:11, 20:6, 21:8). 주님과 영원히 단절된 장소인 것이다. 고로 그곳에는 생명나무도 없고, 생명수도 없다(계22:14). 밤낮으로 쉴 수 없어 하루가 살기 힘든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살아야 한다. 

 

7. 나오며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지옥의 고통만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주님의 임재가 없는 그곳, 칠흙같은 어둠이 가득한 그곳. 그리고 형벌이 기다리고 있어 매일 채찍질을 당하고,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 속에서 처참한 고통을 영원히 겪어야 하는 그곳에 우리는 결단코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그 방법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첫째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라고 하셨다. 그것이 이미 받은 성령의 등불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도록 날마다 기름통에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날마다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댓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우리의 영원을 위한 값진 준비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길을 가야 한다. 둘째,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받았던 종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하셨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버려진 자와 같은 나를 해 주께서 귀한 것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그분께 충성하는 것이다. 조금만 놔두면 게으르려고 하는 자신의 육체를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남긴 분량만큼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하여,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달란트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양에 속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자신이 어떤 일을 했어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믿음으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구제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선교를 하는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봉사하는 주의 종들을 잘 돕고 섬기는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어도 그렇게 섬기는 것이다. 생색내지 말고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의 합당한 열매대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대로 천국에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삶을 살아온 자는 믿음과 회개에 따라 살아왔으니 꿈에도 그리는 새 예루살렘 성 안의 신부가 될 것이다. 

 

202년 09월 10일(금)

정병진목사

 

 

 

적당히 회개해도 될까? 아니 적당히 믿어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나님은 심판 날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악한 사탄마귀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고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적당히 회개해서 아니될 것이고, 적당히 믿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왜 적당히 회개해서는 아니 되는지는 낮예배 시간에 전했다. 지금 오후찬양예배 때에는 적당히 믿어서는 왜 아니 되는지를 전한다. 왜 적당히 믿어서는 아니 되는가?

2020-10-11(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회개와천국복음[부록2] 적당히 믿어도 되는가(요8:42~47)
https://youtu.be/ZRnTRpI9SAE [혹은 https://tv.naver.com/v/16185235 ]

 

 

1. 들어가며

  회개할 때에 적당히 회개해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적당히 회개해서는 귀신들이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더불이 적당히 회개해서는 귀신이 사람에 주는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사건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그것에게 휘말리게 된다는 것도 배웠다. 더불어 영안이 열리는 것을 방해받고,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영적인 축복도 받기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려면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질문을 이제 다른 것에 던져보자. 적당히 믿어도 되는가? 적당히 믿어서 과연 예수 이름의 권세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적당히 믿어서 구원받을 수는 있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오늘 낮예배에 전했던 "적당히 회개해도 되는가?(눅3:7~9)"에 대해 짝이 되는 말씀으로서, "적당히 믿어도 되는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적당히 믿어도 되는 것인지 보다 더 종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2.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개와 더불어 꼭 필요한 구원의 요소는 무엇인가?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개와 더불어 꼭 필요한 구원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믿음"이다. 아니 회개보다도 사실은 "믿음"이 더 우선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회개를 잘 하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가 예수을 믿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결국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류를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이땅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행4:12,요14:6).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미 믿는 자가 회개할 때에 혹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자에게 회개는 효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종교개혁시대 이후에 회개와 믿음 중에서 "믿음"에 관한 부분은 너무나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회개는 너무나 축소되어 왔으며, 어떤 곳에서는 아예 회개를 언급하지도 않는 곳도 있다. 믿음만 가지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 낮예배시간에는 회개에 대해 먼저 언급하였다. 그래도 회개보다도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구원의 요소는 역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처음 믿을 때를 보라. 사람은 전부다가 믿으면서 회개한다. 그러므로 그때에 행하는 회개를 "회심"이라고 부른다. 회개에 믿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게 된 자는 그 다음부터는 회개를 줄곧 하게 된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신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없어지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귀가 우리를 쉽게 포하기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자라도 일평생을 회개해야 한다. 

 

3.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용납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세 가지 증상은 무엇인가?

  그런데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용납하게 되었을 때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점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3가지 일들이 발생한다. 즉 하나는 거짓의 아비이자 거짓말장인 사탄마귀의 미혹을 받아 그의 미혹의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결국 가짜를 믿게 되어 이단에 빠지고 만다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결국 가짜 믿음 때문에 죽을 때에 지옥 즉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도 있다.

 

1)거짓의 아비인 사탄마귀의 미혹을 받게 된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소개하셨다(요14:6). 그리고 그분은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신다고 말씀하셨다(요8:40,45). 또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도 진리라고 언급하셨으며(요17:17), 자기 대신에 보내실 또다른 보혜사도 "진리의 영"이라고 소개하셨다(요15:26). 다시 말해 인류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는 삼위의 하나님께서 전부다 진리이며 진리만을 말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탄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장이였다(요8:44). 하늘에서도 하나님을 속였고 이 땅에 있는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도 거짓말로 속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도 진리되신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결국 그는 사탄마귀의 거짓말에 미혹받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고 또한 그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려면 오직 진리의 말씀, 즉 예수님의 말씀만을 순수하게,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말씀을 좇아가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의 아버지인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갈 수도 있다. 

 

2)이단에 빠질 수도 있다. 

  더욱이 거짓을 버리지 못한 채 거짓이나 거짓말을 버리지 않는 자는 결국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에 빠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경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딤전4:1). 그러면 그 끝은 결국 이단이다. 이단들의 가르침을 보라. 그들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은 아니다. 진실된 말씀 가운데 거짓말이 섞여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거짓말도 진리일 것이라고 공부하다보니, 결국에는 거짓말도 진리라고 믿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번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였으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자신은 결단코 거짓이나 거짓말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진리의 말씀에 섞여있는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가다가 그만 이단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3)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번 두 번 거짓을 용납하게 되면, 결국 그는 죽어서 거짓의 아버지가 사는 곳에 불못 곧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지옥은 누가 들어가는가? 그것은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들어가는 곳이다. 더불어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 혹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 지옥이란 거짓말을 하는 자가 떨어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결단해야 한다. 

 

4.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서 절대 용납해서는 아니되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진리이시고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무엇인가를 믿고 따라갈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진리만을 추구하며 진리만을 따라가겠다는 굳은 각오라고 말씀드렸다. 때로는 진리를 따르는 것 때문에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진리만을 믿고 따라가는 것 때문에 왕따를 당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진리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단의 교리나 신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교단으로부터 제제 조치 내지는 제명까지 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오직 진리와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가야 한다. 적당히 믿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버가모교회의 주의 종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하지만 버가모교회 성도들 중에서는 거짓말을 가르치는 발람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아 타협하는 가르침에 넘어간 자들도 있었다. 그러면 아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타협하는 말씀을 따라가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의 순수한 말씀 그대로를 믿고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성경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교리들에게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나가서 듣는 말씀들 중에서 성경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놀랍게도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거의 전역에 걸쳐 거짓된 가르침들이 들어있다. 특이한 점은 어떤 분은 한쪽 방면에서는 진리를 따르고 있는데, 다른쪽 방면을 보면 아직도 거짓말이 섞여있는 비진리를 따라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주의 종들은 말씀을 더욱 더 연구하여 가르치되, 원문말씀을 연구하여 말씀이 전해주는 정확한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

  오늘날에 들어와 신앙의 가장 큰 이슈는 역시 하나님이 한 분이신가 아니면 세 분이지만 한 분이라고 해야 한다는 가르침 중에서 어느 가르침을 따라가느냐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로만 보고, 또한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중보자 극리고 보혜사라고만 아는 이가 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도 계시며,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을 대표하는 일곱교회들을 상징하는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기도 하시며, 보좌에 앉아계시기도 하시는, 한 분 하나님 자신이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흰 보좌에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께서 앉아계신다는 사실이다. 즉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경륜적으로 삼위일체방식으로 일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잘못 정의된 삼위일체 교리에 취한 자들은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는다. 그리고 여호와만이 영원히 아버지라고 믿는다. 그러한 주장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하시는 역할에 따라,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불리시기도 하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불리시고, 또한 대제사장이시며 중보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2)성령론

  그런데 성령론에 있어서는 각 교단마다 매우 다양한 교리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수용할만한 것도 있지만 상당 부붅이 사실은 잘못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은사에서 있어서 더욱 그렇다.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신 본래의 목적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은사를 주시는 성령으로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이 하는 일조차 분별하지 못하고는 그것을 성령이 하는 일이라고 언급하는 데에 예를 들자면, 예언사역의 부분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3)부활관

  또한 성도들의 부활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잘못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활의 시기에 관한 것이다. 성도라도 죽으면 무덤같은 곳에서 잠을 자다가(혹은 쉬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천국으로 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부터는 사람이 죽는 그 날과 그 시간에 곧바로 심판받고 천국과 지옥에 가기 때문이다. 죽어보면 금방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종말론

  뿐만 아니라 종말론에 있어서는 교단마다 매우 다양한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환난전휴거를 성경말씀이라고 믿는 교단도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분명히 환난 후에 오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마24:29~30). 또한 환난전휴거를 믿는 사람들 대부분은 재림후 이 땅에서 펼쳐지는 천년왕국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환난시기에 짐승이 이마나 오른손에 666표를 치는데 그것이 베리칩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대부분 환상이 상징적이듯 천년왕국도 또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666표는 우상숭배자들을 사탄이 영적으로 자기소유라고 표시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물건을 사람의 몸 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베리칩은 속임수요 거짓이다. 

 

5)예정론

  또한 대부분의 장로교단의 경우에는 개인구원예정론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있고, 성도의 견인교리조차 성경말씀인 것으로 알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에는 개인사역 예정은 있어도 개인구원 예정은 하나도 없다. 구원받을 숫자는 예정되어 있으나 그것이 어떤 누구라고 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 번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반드시는 구원받는다는 교리도 잘못된 것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자라도 구원에서 탈락하는 사람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바램을 성경말씀과 혼돈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거짓된 처방전을 주는 것과 같다. 

 

6. 나오며

  적당히 믿어도 되는가? 적당히 믿어도 천국갈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적당히 믿어서는 미혹의 영의 가르침에 빠져 이단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적당히 믿어서는 아니 된다. 오직 진리를 믿으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오로지 진리만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히6:18). 하지만 예수님시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거짓선지자들과 거짓교사들이 일어나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좁고 협착한 길이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살았다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힘든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에, 적당히 혼합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어떠한 말씀도 적당히 혼합된 말씀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불순물이 하나도 혼합되지 아니하는 진리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는 자는 구원의 경주서 타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일평생을 통해서 달려가야하는 여정과도 같은 것임을 알라. 그 동안에 믿음도 변질되지도 않아야 하겠지만, 더불어 지은 죄들을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은 죽음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 구원받은 자는 실제로는 많지 않다. 부자나 교만한 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더욱 더 어렵다고 했다. 핍박이 무서워 믿음을 배반하거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잘 믿던 자가 타락하여 세상길로 가서 현저히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지조있는 믿음, 끝까지 지켜내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즉시 무릎꿇고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지 못한 채 여기에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0월 11일(주일)

정병진목사

 

사람이 죽으면 천주교에서는 그가 세례받고 고행성사를 했다면, 그가 성인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연옥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연옥은 죄는 용서받았으나 그것에 대한 벌을 다 받지 못한 자가 일시적으로 들어가 형벌을 받는 장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성경에 나온 말일까? 사실 이것은 외경과 전통을 바탕으로 고안해낸 교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옥교리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사실 기도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과연 이생의 기도가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도달할 수 있는지, 연옥에 들어간 자가 그곳을 빠져나와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기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019-10-18(금) 금요기도회
제목: 연옥교리를 알면 기도가 보인다(눅16:19~31)
https://youtu.be/drXNj45Kyjo


1. 들어가며

  연옥교리는 사실 천주교에서 만들어낸 교리다. 그러나 연옥교리는 성경(정경) 66권에서 기인하지 않고, 외경(마카베오하)에서 기인하다보니, 이것이 정식으로 채택되기까지는 무려 15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연옥교리는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전해내려왔다는 전통에 따라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실은 연옥이라는 곳이 '음부'를 대신하는 장소인지 아니면 '낙원'을 대신하는 장소인지도 불명확하다. 천주교의 주장에 따르면 그곳은 음부도 아니도 낙원도 아닌 듯하다. 그래서 오늘은 과연 연옥교리가 얼마나 성경에서 빗나간 교리인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특히 연옥이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를 찾아보고, 불타는 연옥이 왜 지옥을 가리키는지 그것을 기도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영적인 눈이 놀랍게 열려지게 되기를 바란다.

 

2. 연옥이란 어떤 곳이며, 그곳에 있는 기간은 정말 단축될 수 있는가?

  "연옥"이라는 은총 가운데 죽었으나 정화를 요하는 자가 들어가는 연단받는 일시적인 감옥과 같은 곳이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에 적당해지도록 불로서 정결함을 입어야 하는데, 연옥은 바로 그와같은 장소인 것이다. 연옥은 누가 들어가는가? 이 세상에서 고해성사로서 죄사함을 받아서 죄용서를 받았으나, 이 땅에 있을 때에 보속(형벌을 받음)을 다 못 받았거나, 소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형벌을 받는 장소가 바로 "연옥"인 것이다. 그러므로 연옥에는 불못이 있다. 불타는 감옥과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벌에 대한 단련은 불로서 단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연옥에 들어간 자가 그곳에 있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친지나 가족등의 관계자들)이 드리는 위령미사나 헌금 그리고 기타 경건행위를 바치게 되었을 때다. 또한 본인도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교회에 헌금을 바치거나 속죄적인 선행을 행한다든지 구제 그리고 고행과 금식 등을 하게 된다면 그는 연옥에서 보낼 날이 단축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진짜로 연옥은 일시적인 형벌의 장소에 불과한 것인가?

 

3. 연옥교리가 틀렸다는 것에 대한 4가지 증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연옥교리가 틀렸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연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 66권 어디에도 "연옥"이라는 장소가 나오지 않으며, 그것은 외경과 전통에서 나온 것 뿐이다. 고로 연옥의 성경적인 증거는 없으며, 만약 있다면 그것은 전부 간접적인 증거일 뿐이다. 그렇다. 연옥교리의 시작은 구약외경인 마카베오하권 제12장 40~45절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보면, 유다 마카비 시대에 유다 마카비가 전장에서 죽은 유대 군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모금했던 2천드라크마를 예루살렘에 속죄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통해서, 천주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헌금이 효과가 있다고 하고는, 그것은 죽어서 천국에 못 들어간 자가 있는데 그를 위해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행하게 되면 그들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마카베오 하에서도 연옥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죽은 자를 위한 속죄제물이 효력이 있다는 개인적인 간증에서 시작된 것이다. 특히 초기교회들의 몇몇 교부들도 죽은 자의 보속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면 죽어서 정화의 불을 통과하고 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어거스틴은 그들 중의 한 사람들이다.

  둘째, 성경 66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 구약시대에는 음부와 낙원(아브라함의 품)이었고, 신약시대부터는 천국과 지옥 딱 둘 뿐이기 때문이다. 천국와 지옥의 중간단계는 없다. 오직 천국과 지옥 뿐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기 전까지 구약의 성도들은 셋째하늘에 있는 낙원(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지구의 한 중앙(땅 속)에 있는 음부 안으로 떨어진다. 한편,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씀한 것은 낙원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예수님은 드디어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고전15:20). 한편, 구약의 성도들은 셋째하늘에 있는 낙원에 들어간 상태에 있었으니, 단 한 사람도 아직 부활체를 입은 적이 없었다. 다 영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후에, 구약의 성도들은 한꺼번에 부활체를 입고 낙원에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낙원은 천국이 되었다. 그리고 천국의 중심은 새 예루살렘의 성전인데 부활체를 입은 성도들은 그곳에 가서 지금도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보통 때에는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한, 천국의 자기의 집에서 산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집들이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음부에 있던 영혼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심판의 부활을 얻고 사망의 부활체를 입게 되었다. 음부는 그대로 지옥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음부의 상태가 그대로 지옥으로 변경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후 불신자들은 사망의 부활체를 입고 지금도 지옥 안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부활의 몸을 가진 상태이기에, 인간의 몸과 똑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옥(구약의 음부)에서 불로 태우게 되면 타들어가고 매우 아프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귀신들이 고문을 주게 되면 고문의 고통을 그대로 받는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있는데, 구더기는 이빨로 거기 있는 사람들의 몸을 파고 들어간다. 그러면 또한 어마어마한 고통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천국와 지옥, 둘 중의 한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연옥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셋째, 한 번 낙원(천국)과 음부(지옥)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빠져나와 절대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음부(지옥)에 있는 영혼이 낙원(천국)으로 이동할 수 없으며, 천국과 지옥에 있는 사람이 이 세상으로 나올 수도 없는 것이다(단 한 번, 낙원에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부활체를 입지 않은 모세와 엘리야를 낙원으로부터 불러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다른 어떤 누구도 그러한 일을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다). 눅16장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의하면, 부자가 있는 음부에서 나사로가 있는 낙원으로 결코 옮겨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거기에는 큰 영적인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건너가고자 하나 건너갈 수 없고, 건너오고자 하나 건너올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옥에 있는 영혼이 정화의 작업을 마치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 마디로 천국과 지옥은 이동불가능한 장소인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 심판이 집행된 후이기 때문에 더이상 심판을 물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지만 죽은 즉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 심판은 돌이킬 수가 없다(히9:27). 그러므로 한 번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간 사람은 자기가 있는 곳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이지 왔다갔다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 번 행해진 심판은 결코 번복되지 않기 때문이며, 심판이 다시 집행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음부와 낙원은 서로 왔다갔다 할 수가 없음이 분명하다.

  넷째, 음부(지옥)은 이미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장소이기에 그곳에서 비는 기도도 아무런 효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서 그들을 위해 비는 기도도 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음부는 사실 둘째사망이 임한 장소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이후 모든 사람은 첫째사망을 입고 있으며, 둘째사망은 그것을 입는 자도 있고 입지 않는 자도 있다. 그런데 첫째사망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을 가리키며, 둘째사망은 영혼이 하나님이 서로 분리되는 죽음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지옥을 불과 유황이 타는 못 곧 불못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계20:14), 그곳을 또한 둘째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계20:6,14). 그러므로 하나님과 단절된 곳에서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곳은 더이상 하나님의 이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영혼의 기도는 다르다. 천국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이 왕으로 다스리는 장소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는 여전히 효력이 있다. 그러한 근거는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오는데, 이미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했던 자들이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장면이 나온다(계6:10). 그렇다.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처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요14:14,15:16,23). 하지만 지옥에서는 하나님과 단절된 장소이기에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음부(지옥)에서 비는 기도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4. 나오며

  연옥은 겉으로 보면 음부처럼 불타는 장소다. 하지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 천주교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러한 장소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죽어서 한 번 음부나 낙원에 들어간 자는 다시는 자기가 있는 곳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고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눅16:26). 우리는 그것을 이미 누가복음 16장에 나온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 불타는 곳은 결코 연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불타는 곳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는 하나님과 단절된 장소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들어가서 역사할 수가 없다. 또한 거기에 있는 자들이 기도해서 응답받을 수도 없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 이미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기도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눅16장에 보면, 부자가 음부의 고통 가운데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물 한 방울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 주기를 부탁했지만 아브라함이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자는 누구라도 다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요, 또한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자. 그것이야말로 아직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지 않은 자의 최대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더 기도할 수 있을 때에 기도에 더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할 것이다.

 

2019년 10월 18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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