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1)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과 이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요2:1~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AxoOHhg1fE  [혹은 https://tv.naver.com/v/28949313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에 무슨 일로 시작하셨을까?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첫 번째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셨으며 또한 그때 어떤 기적을 행하셨는지 명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이 분명하게 나온다. 그것은 갈릴리 가나에 있는 어떤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길래 사도 요한은 그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고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는가? 또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진정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들어주신 일에 불과한가 아니면 더 큰 영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것인가? 

 

2.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단순 부탁에 대한 수락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에 행하신 일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일이다. 이것은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2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즉 이것은 마리아의 청을 들어주다가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일은 이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이 일은 단지 예수께서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준 정도가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려는 의도가 있으며 또한 예수님 자신에게도 이 사건이 주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렇게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둘 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때 마리아의 청원이 없었다면, 이러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요, 또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의도가 없었거나 자기자신에게도 어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1절에 나와 있다. 예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심으로 그분의 제자들의 그분을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사건 직전에 예수께서는 6명의 제자들을 뽑으셨다. 그들 중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와 이름이 안 나오는 제자(이는 사도 요한임에 틀림없다)가 있다. 그리고 안드레의 전도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제자가 된 베드로, 요한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예수께서 직접 불러내신 빌립과 그의 친구 나다나엘(바돌로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중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누군지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그것은 그분이 첫째,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자, 둘째, 먼저 계신 이요, 셋째,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이며, 넷째,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를 받았다. 그런 후에 제자들은 점차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랍비이자, 그리스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기록한 이, 요셉의 아들이며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이스라엘의 임금(왕), 인자라고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의 소개와 자신들이 알고 있었언 것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인 신앙고백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가를 알아야 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인하여, 그분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자이시자, 만물의 창조자이신 것을 그들이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기자신에게는 어떤 목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이 사건이 예수께서 행하신 '첫 표적'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는 이 표적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원문상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표적들의 시작"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이 표적은 이어서 등장하게 될 다른 표적들의 샘플이 되며, 또한 그것들과 매우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사건의 서두에서 아직 당신이 표적을 일으킬 때는 아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매우 큰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때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표적이라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자기자신에게 어떤 의도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인가? 

  이 사건의 발단은 예수의 어머니께서 예수님에게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시작된다.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고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이야기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왜 이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인가?

  우리는 이 사건이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예수의 어머니는 잔치의 주관자로 참여하고 있었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잔치에 초청받은 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어머니의 부탁이할지라도 꼭 들어주어야 할 위치에는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잠깐 초대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군지를 살펴보자. 제일 첫 번째로 들어갈 제자는 아마도 나다나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출신의 제자였기 때문이다(요21:2).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처음 만나셨을 때에 그가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요1:50). 고로, 제자들 중에 우선 순위로 초대된 자는 아마도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이었을 것이고, 이어서 다른 제자들도 같이 초대되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도 이 잔치에 초대되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잔치의 주인공과 어떤 인척관계가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잔치의 주관자로서 등장한다. 즉 그녀는 이 잔치의 마실 것들을 담당하는 봉사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는 또한 '연회장(잔치의 최고주관자)'이 나온다. 그는 이 잔치에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이때 예수의 어머니는 이 잔치의 마실 것의 주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에게는 좀 난처한 상황이 되는 것이고, 총 책임자는 신랑이든지 신부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는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연회장이나 신랑이나 신부에게 말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부탁을 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이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이 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절을 헬라어에서 직역해 보자.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여인이여! 나의 때(적절한 시간)는 [아직] 다다르지 않고 있나이다" 그렇다.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사실 마리아의 잘못도 아니며, 예수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이때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야단치거나 섭섭해할 입장인 것이지 책임질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말 한 마디가 예수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이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3절). 그때 예수께서는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반응하셨는데, 이는 '포도주'가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때가 아직 다다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어떤 커다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란 어느 때를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호라)"는 어떤 시각을 가리키는 것인가? 여기서 '때'는 '호라'라는 단어로서 그 의미가 '가장 좋은 시간, 적합한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때란 예수님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할 어떤 사건의 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직접 포도주가 되거나 아니면 포도주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때는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장차 그렇게 되어질 일에 대한 예표로서, 자신이 직접 포도주를 만들겠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때'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나의 때'는 어떤 때를 가리키는 것인가?

  예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나의 때'는 적어도 3가지 의미로 나온다. 첫째는 그가 죄인들의 손에 팔리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때를 가리킨다(마26:45).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였다(요7:30,8:20,13:1). 

요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리고 둘째는 그가 죽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실 때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값을 피로 대속하시고 다시 부활하실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죽으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시고 말씀하셨다(요17:1,12:23).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그분이 재림하시어 거룩한 신부들을 취하여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때를 가리킨다(마26:45, 계19:7~9).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의 때'의 완성에 해당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거룩한 신부들을 얻으시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마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계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5. 예수께서는 첫 표적을 왜 혼인잔지집에서 셋째날에 일으키신 것인가?

  고로 우리가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우연히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의 부탁을 받아 단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우연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사건마다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시각에 예루살렘에 개기일식이 있었지 않았는가? 그런데 개기일식이라는 것이 갑자기 일어나고 싶다고 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운행하게 하실 때부터 이미 작정된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첫 표적을 행하실 것도 이미 만세전에 작정된 대로 되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첫 표적이 '셋째 날에' 어떤 '혼인잔치 집에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로 이 사건은 사실 '셋째날'에 일어난 사건은 우연이 아니며, 동시에 '혼인잔치집'에서 일어난 것도 우연히 아닌 것이다(1절). 왜냐하면 이 사건의 시작을 사도 요한은 '셋째 날에'로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이 셋째 날이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에서 '이튿날에'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듯,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었는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날이 첫째 날이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일컬었다. 그날이 또한 둘째날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지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언급하였다. 그날은 적어도 두 명의 자신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던 셋째 날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은 후에 다시 셋째 날이라고 했으니(요2:1), 이날은 실제로는 여섯째 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째 날이란 대체 어떤 날을 가리키는가? 그 날은 한 마디로, 천지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던 바로 그날이요 이 둘이 하나가 되던 결혼식 날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 여섯째날에 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창조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때는 아담과 하와만이 결혼하던 날이었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예수님과 성도들이 신랑과 신부로 참여하는 결혼식을 치를 날이기 때문에, 미리 예표적으로 이날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다. 그리하여 잔치의 기쁨을 한층 더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 날을 '여섯째 날'이라고 하지 않고 '셋째 날'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수께서 셋째 날에 부활하셔서 영광을 얻으시는 날도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등장하는 소품까지도 이 사건이 창조의 마지막 날이자 동시에 안식의 날을 앞 둔 여섯째 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결 의식(율법)에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봉사자들이 이 여섯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웠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섯째 날 맨 마지막 시간에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6. 사람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 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 사건을 바라볼 때 예수님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우리 인간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람에게 왜 기적이 필요하며 또한 어떻게 해야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지도 알려준다. 

  첫째로, 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함께하는 기적이 필요한 것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예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랑이 이 결혼잔치를 위해 얼마나 꼼꼼하게 잔치계획을 세웠겠는가! 잔치에 먹을 것이 떨어지거나 마실 것이 떨어진다면 신랑에게는 아주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랑은 보다 더 철저하게 준비를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포도주가 동이 나서 모자라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그 시각에 어디가서 포도주를 마련해 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곳에 전능자께서 함께 하고 있었다. 

  둘째로, 어떻게 될 때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될 때 사람에게도 기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이 사건에 따르면 3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예수님께 청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서 부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그 일은 마리아의 몫이었다. 마리아는 이 잔치의 주관자의 입장이었기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일부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예수님과 의논한 것은 아주 잘한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마리아의 몫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예수님을 잉태할 때부터 아주 특별한 소식들을 접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에게 잉태될 자는 성령으로 잉태될 자이며,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기가 탄생하던 날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와서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 아이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주이며 그리스도이자 주님이라는 것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방박사으로부터 그 아이가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들은 것도 있었고, 예수께서 12살 때에는 성전을 자기의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했던 것도 가슴에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슨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문제를 연회장이나 신랑과 의논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가져간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수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 잔치집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었던 봉사자들의 순종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때 일하던 일꾼들을 '하인들'이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실제는 '하인들(둘로스)'가 아니라 '봉사자들(디아코노스)'이다. 이들은 자원하여 그 잔치일을 도우러 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봉사자들에게 마리아가 말했다. "그가 혹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너희는 그대로 행하라(5절)" 이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시키는 일이 혹 사리에 맞지 않고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즉시 행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대로 시행한 것이다. 빈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것이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이제는 그것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그때 연회장은 이미 포도주가 된 채 있는 물을 마시고는 감탄을 하면서 신랑을 불러 칭찬을 한다. "모든 사람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는 것이 일반이오. 그리고 그들이 취하게 된 때에 더 못한 것을 내놓기 마련이라오. 그런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간직한 채 있었소(10절)". 사실 찬사는 예수께서 받으셔야 마땅한 것이지만 새로 맛 본 포도주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를 몰랐던 연회장은 신랑을 칭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이 행하신 일도 감추신다. 얼마나 겸손한 미덕인가?

 

7. 나오며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첫번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마리아의 부탁에 대한 결과이지만 실제는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예수께서도 앞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표적이었다. 즉 예수께서도 자신을 어떻게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며 또한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장차 천국에서 진행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염두해두시고 행하신 기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전능하신 창조주이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한 이 사건을 통하여 모든 인생은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렇더라도 그러한 위기를 타계할 방법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곧 '기도'(청원)와 절대적인 '믿음'과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내게 진정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이 사건의 사람들처럼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의 능력을 맛보는데,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게 필요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지금 그것을 구하고 믿음으로 반응해보자. 왜냐하면 예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그때에는 우리도 역시 물떠온 봉사자들처럼 놀라운 기적을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8월 31일(수)

정병진목사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여호와이시다(출3:14~15).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적으로 볼 때 3가지 의미가 있으며(출3:14~15,6:3~5), 과정론적으로 볼 때 2가지 의미가 있다(출6:6~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과정론적으로 소개하시려 하신 것일까? 그것은 우선적으로 모세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애굽왕 바로나 애굽인들도 하나님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누군지를 소개해 주신다. 그리고 자신을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신다. 그것이 바로 출6:2~8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출6:2~8은 구약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누군지를 가장 설명해주는 성경본문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소개했으며, 그렇게 말씀하신 근본적인 의도는 무엇인가?

 

1. 들어가며

  B.C.1446년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이제 바로에게 다시 서기 전에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뚜렷히 말씀하신다(출6:2~8). 모세는 처음에 이 말씀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다. 그는 아직 여호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하기 전까지,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2가지 정도로만 소개해 주셨다. 그것의 하나는 전능의 하나님, 전능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 자신을 전능의 하나님(엘샤다이)라고 소개하신 것이다(창17:1, 창28:3, 창35:11).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아주 놀라운 약속을 해 주셨다. 그 약속은 인간이 하는 것과는 달라서 결코 변치 않을 약속이었으며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전능자요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이라고 소개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더 자세하고도 확실히 소개하신다. 그것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였으나(창15:7,28:13) 그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신 의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근본적인 취지와 목적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신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어서 애굽왕 바로와 애굽인들도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단숨에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경고와 그리고 그것의 실행과 기적으로 하나님이 누군지를 그들에게 알리시 시작하셨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알아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모세였다. 그가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아야 여호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확히 소개하고 또한 바로에게도 소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어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이 출애굽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차례에 걸쳐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셨다. 한 번은 모세가 미디안 땅의 시내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였고(출3:6~23) 또 한 번은 모세가 바로에게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로 가서 절기를 지키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바로 자신은 여호와를 모르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고된 노역을 더 가중시키자 실망하여 돌아나올 때였다(출6:1~9).

  먼저 첫번째로, 출3장의 시내산에서 모세가 양떼를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셨다(출3:14). 그것은 히브리어로 "예흐에 아쉐르 예흐에(I am that I ma)"라는 말이었다. 여기서 "예흐에"라는 말은 "하야(be)"동사에서 나온 단어로서, "나는 있는 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크게 2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곧 자존자라는 뜻이며, 또 하나는 "나는 있게 하는 나다" 곧 전능자 내지는 창조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속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하셨다(출3:15).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고로 출애굽기 3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은 자존자요 전능자(혹은 창조자)이시며, 약속하시며 약속하신 것을 지키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번째로 출6장의 애굽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라는이름의 다른 뜻을 2가지나 더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첫째, 그분이 구원자(구속자)라는 것이다(출6:6).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서 너희를 속량하여(출6:6)" 그렇다. 그분의 이름에는 이미 "구원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여호와께서 구원자이시라는 뜻이 바로 예수라는 신약의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다(마1:21). 그리고 이어서 둘째, 그것은 그분이 심판자라는 것이다(출6:6). 만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면, 애굽사람에게 그분은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편 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셨지만, 애굽과 바로왕과 애굽사람들 그리고 애굽신들은 심판하신 것이다.(출6:6, 12:12, 겔7:27).

  그런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소개하신 것을 분류하면, 크게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자요, 전능자(혹은 창조주)이며, 신실하신 이이다. 그러나 과정론적으로 볼 때에 그분은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소개하신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이 누구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를 모세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은 자기들을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애굽에서 탈출했으나, 그들에게 출애굽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해내신 목적을 그들이 상실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으며, 애굽을 심판하셨는가? 그것은 다음의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분이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요(출6:7), 또 하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했듯이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서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출6:7).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을 여호와로 말씀하시는 근본적인 두 가지 목적이 한 구절에 나와있는 말씀이 레위기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 말씀은 레위기 25:38이다.

레25:38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민족의 하나님의 되고자 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의 첫째는 여호와 아닌 것이 다른 존재가 이스라엘민족의 하나님이 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레26:1, 사42:8, 45:5~7, 욜2:27).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한 것으로서, 산천초목이거나 해와 달과 별들이거나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타락한 천사들인 사탄마귀와 귀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겨서는 결코 죄를 용서받을 수도 없고, 죽은 다음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죄를 짓고 살았으며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려고, 십계명을 알려주셨으며, 그들이 죄를 지었으나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제사와 회개와 같은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레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사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45:5-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욜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리고 그것의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가나안땅으로 상징되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를 분부하시고 명령하셨다.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죄를 지어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너희는 내가 준 계명들을 지켜라.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하지 말라."라는 등의 말씀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도들의 순례의 최종목적지는 천국이 되어야 한다. 천국이 최종목적지가 아닌 자들의 삶과 열매들은 죽음과 동시에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게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게 이끌어낸 이유가 가나안땅을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으며(창15:7), 또한 야곱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똑같이 말씀하셨다(창28: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오직 그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계획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천국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창15:7 또 그(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창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4. 나오며

  하나님은 누구신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가장 많다. 무려 155회나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중에서 창세기에서는 2번, 출애굽기에서는 16번,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39번, 민수기 5번, 신명기에서 2번 사용되었다. 모세오경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서부터 스가랴서까지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렇다면 당신에 대한 많은 설명 중에 굳이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종합해보면,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당신이 자존자요 전능자(창조주)이시며, 약속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이라는 뜻이며, 과정상으로 볼 때, 그분은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과정론적으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하심이며, 당신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라오는 자들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려 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광야같은 교회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면 그는 헛되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긍극적인 목적이 천국가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것도 지금 신앙생활의 노정에서 지금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와 여러분은 꼭 구원자로 오신 여호와 곧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자 구주로 믿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감으로, 천국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018년 10월 5일(금)

정병진목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같은 자격을 갖추신 성자이신가? 아니면 아버지가 아들이 되어 오신 분인가? 오늘날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이론은 2가지다. 그것은 삼위일체론과 양태론이라는 두 극단이 있다. 과연 어느 것이 보다 더 성경적으로 말하고 있는 주장인가? 오늘 이시간에는 이사야가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창조와 구원과 재림이라는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 들어가며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몇 분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말해준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이전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분이 누구신지를 언급한다. 사실 이사야서야말로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장 잘 알려주면서 가장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는 성경책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주에 이어서 하나님이 몇 분인지를 이사야서에 나오는 그분의 창조와 구원과 심판의 일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이 한 분이시다는 구약의 증거들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 B.C.1500년경 모세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그렇다. 하나님은 두 분이나 세 분이 아니시다. 숫자적으로 한 분이신 것이다. 자, 출애굽2세대들을 교육하는 신명기서에 나오는 모세의 증언(신4:35,39,32:12)과 한나의 기도(삼상2:2)를 더 들어보자.

신4: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4:39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신32: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삼상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는 것이다.

 

3. 이사야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하는가?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강조하고 있다(사43:12,44:6,8, 45:5~6,14,18,21~22, 46:9).

사43:12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44:8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사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사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사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 또한 그와 같은 이도 없다.  이사야선지자는 더 나아가 이렇게까지 언급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43:10)" 그렇다. 하나님은 두 분이나 세 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한 분이시다. 그렇다면 이때 한 분이신 하나님은 대체 누구신가? 그분은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라는 불리신 바로 그분이시다.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기 전까지 하나님은 당신을 '전능자'라고 말씀하셨다(창17:1, 출6:2~3). 모세가 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여호와'이셨고,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신가? 물론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두 분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두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요 그 외에는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난 이론이 바로 '삼위일체론'과 '양태론'이라는 교리다.

  '삼위일체론'이란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분은 하나님으로서는 같으며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양태론'이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나타나는 양상이나 역할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한 때는 아버지로, 그 뒤에는 아들로, 그 다음으로는 영으로서 그 양태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5. 양태론은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양태론은 하나님을 제대로 표현한 이론인가? 아니다. 양태론교리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양태론은 하나님을 한 분으로 표현하지만 하나님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셔서 죽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버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아버지는 신성만 가지신 하나님이시므로 절대 죽으실 수가 없다. 그래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 곧 사람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양태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과정을 겪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의 변화를 거쳐서 지금은 성령님이 되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면 성령님을 알아야 한다고 핏대를 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되었다. 오늘날 양태론를 신봉하는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신사도와 빈야드단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이 이제는 성령님이 되셨다고 하는 것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동시존재와 상호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아들이 있을 때 천국의 보좌에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동시에 계신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날에 성령님이 오셨을 때 하늘의 보좌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곳에 앉아 계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부터는 하나님은 아버지로도 존재하고 아들로도 존재하고 성령님으로 동시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양태론자들의 주장처럼 아버지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아들로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승천하셔서 당신의 영인 성령님을 믿는 자들 속으로 보내주신 것이다.

 

6. 삼위일체론 또한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제대로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가정하지만 세 분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그 영광과 능력과 서열과 존귀 등에 있어서 하나님으로서 같으며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기에는 삼위일체론이 맞는 것 같지만, 삼위일체론은 항상 하나님은 세 분으로 나눠서 보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아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경륜 속에서는 아들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요한는 예수님을 일컬어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언급했던 것이다(요1:18).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볼 수 있게 인성을 취하셔서 아들의 신분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에는 영으로 계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였다. 그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을 이 세상에 보내어 지면을 새롭게도 하셨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장시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일하게도 하셨다. 하지만 구약시대만 해도 아들은 아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때다. 한 분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로서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은 인성을 가지신 아들로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성을 취하신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도 계시었고 아들로도 계시었으며, 성령으로도 계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서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사9:6). 그렇다. 만세전부터 영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비로소 사람의 모양을 입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육안으로 영원토록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는 영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때 육신을 입으셨던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비유컨데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부터 영원후까지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을 알아야 한다.

 

7. 이사야가 증거한 하나님이 한 분이신 증거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을 그분의 창조사역와 구원사역 그리고 심판사역을 통해서 고스란히 증거한다. 다시 말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며, 구원사역 또한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사셨고, 나중에 재림하여 심판하실 것도 한 분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천지창조를 누가 하셨는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놀랍게도 이사야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신다(사44:24, 45:18). 그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천지만물을 합동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44:24)",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말이다. 다시 말해, 사도요한은 예수님더러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계3:14)"이라고 언급하였으며,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는데 지은 것이 하나도 그분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1:3)"고 말했다. 또한 사도바울도 예수께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골1:15~16). 그러나 이것에 대한 너무나 간단하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로 한 분이신 그분이 사람의 인성을 입고 사람이 되셨으니,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둘째, 누가 구원자인지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창조도 혼자 하셨을 뿐만 아니라 홀로 당신만이 구원자이심을 선언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0~11)",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43:3)", "나 외에 다른 신이 없아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에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21~22)". 그렇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따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요, 인간을 구원하신 분은 아들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구약성경 특이 이사야서에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홀로 창조하셨고, 다른 이 없이 홀로 이스라엘 백석을 구원한 구원자이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도 신명기에서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2)"고 했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분이 또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마1:21, 눅2:11). 그리고 바로 예수님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행5:31). 그러므로 구원사역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사도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 여호와 한 분 하나님 이외에 구원자는 없다. 또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오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사43:10~11). 구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니까(시106:21,7~8).

  셋째, 누가 재림하시어 심판하시는지를 살펴보자. 보통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대부분 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고, 예수께서 재림하시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재림과 심판은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께서 오셔서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포함한 구약성경에서 누가 재림하시고 누가 심판하실 것이라고 언급하는지 아는가? 놀랍게도 그분은 바로 '여호와'이시며, 그분이 재림하시어, 악한 군대들인 귀신들을 심판하시고, 사탄마귀를 따르는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자,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 말씀들을 주목해 보라(사24:21,23, 25:8~9, 26:21).

사24:21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사24:23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사25:8-9 그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26:21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그렇다. 여호와께서 재림하시어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것이며, 높은 군대 곧 귀신들을 벌하시며, 땅의 왕들을 벌하실 것이다. 더욱이 구약시대 스가랴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모든 거룩한 자들과 함께 재림하실 것인데, 그 장소가 예루살렘의 감람산이라고 했으며(슥14:4~5), 그때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 곧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며,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고 했다(슥14:4~5). 그렇다. 성육신하시는 분은 구약에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신 한 분 하나님이요, 다시 오실 분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영이시기 때문에(요4:24) 어느 누구도 그분을 볼 수 없었다(딤전6:15~16). 하지만 그분이 육신을 입으시는 바람에 모든 사람의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요1:18).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본다면, 그분은 바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이시는 것이다. 또한 인자가 영광 중에 오셔서 먼저 천사들을 심판하시고 이어서 사람들을 심판하심으로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25:31~46). 그때에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 이름이 끝내 지워지지 아니한 자들만 구원받아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8. 나오며

그렇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후까지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사43:10). 구약시대에는 자신을 처음에는 전능자라고 했지만(창17:1,출6:2~3), 모세시대에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출3:14~15). 그분이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사44:24), 이스라엘 백성을 홀로 애굽에서 구출해낸 구원자 하나님이시다(사43:11,신32;12). 그리고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 예수님이시요(사7:14,마1:23), 언젠가 다시 오실 분도 홀로 한 분이자(사26:21), 나타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요1:18, 마25:31). 이사야 선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이외에 결코 다른 신이 없다고 줄기차게 증거했으며(사43:12, 44:6,8, 45:5~6,14,18,21~22, 46:9), 그분이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도 기록하였다(사9:6).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한 분 하나님 곧 재림하실 예수님만을 기다리고 있다. 요한사도는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마지막인사를 한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혹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계22:20~21)"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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