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는 창조에서 시작하여 족장들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창세기의 족장들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어 이삭을 거쳐 야곱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요셉 이야기로 그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야 했을까? 대체 "아브라함과 이삭와 야곱의 하나님" 가운데 요셉 이야기는 대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가? 우리가 만약 요셉 이야기를 제대로 볼 수 없다면, 아름다운 나무를 길렀는데 그 꽃을 보지 못한 것과 같을 것이다. 자, 요셉 이야기가 들려주는 그 위대한 영적 교훈을 이제 들어보자.

2021-08-06(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172)[최종회] 이긴 자였던 요셉의 삶과 죽음이 가르쳐주는 위대한 영적 교훈(창50:15~2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nxygttYZge0 [혹은 https://tv.naver.com/v/21743029 ]

 

 

1. 들어가며

  창세기는 요셉이 애굽에서 입관한 것으로 끝이 난다. 창조로 시작된 창세기 이야기가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요셉 이야기가 차지하지 비중에 놀라움을 금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 이외의 성경책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소개하실 때에 꼭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는 하여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며, 요셉의 하나님이라"라고 말하고 있는 데는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25장부터 50장까지 이어지는 야곱의 이야기 가운데, 요셉 이야기는 무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 이야기가 왜 야곱 이야기에 끼어들어갔는지 그리고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셉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그의 일생을 돌아보고,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요셉의 삶과 죽음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이다. 

 

2. 요셉 이야기는 인생 성공의 감동 스토리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요셉 이야기를 마치 성공한 인생의  감동스토리로 들어왔을 것이다. 대체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요셉 이야기는 "한낱 목동이었던 소년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노예가 되었고 거기에서 또한 죄수가 되었지만 결국 모든 어려움을 딛고서 성공함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이야기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요셉 이야기는 인생 성공 스토리인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만을 보았다면 우리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너무나 축소시켜 본 것이다. 왜냐하면 요셉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누가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인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셉 이야기는 인생 성공 스토리를 적어놓았다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인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하나님의 구별하여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 뿐만이 아니라, 애굽인으로 지칭된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다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다면 아마도 창세기 이야기는 유다의 이야기로 끝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창세기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야곱 이야기 속에 요셉 이야기를 끼워서 넣어두었다. 왜냐하면 기근은 가나안 뿐만 아니라 애굽 땅에 동시에 찾아온 기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총리 요셉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야곱 이야기 속에 끼워넣은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고로 우리도 요셉의 이야기를 잘 들어서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이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144,000명에 속하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고 면류관을 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창세기 말씀의 핵심 중의 핵심인 것이다. 

 

3. 요셉은 어떻게 신약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하여 성령시대의 사람을 예표하는 야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한 송이의 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요셉 이야기야말로 이긴 자의 이긴 자의 표상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이긴 자, 곧 영원히 이긴 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보내어질 때에는 하나님으로서 가진 권한들을 스스로 제한하시고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사람으로서 살다가 사탄마귀를 이기시고 부활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다. 그분도 40일간 금식으로 기도하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매일 새벽미명에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으며, 자기를 따르던 수 만명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제자들로부터도 버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십자가에서 받으셨다. 하지만 겟네마네 동산에서 피땀어린 기도로 모든 것을 잘 이겨내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부활승천할 수 있었고, 승천후에는 이긴 자가 되어 아버지의 보좌에 앉는 자가 되었다(계3:21).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는 "아버지의 보좌이면서 아들의 보좌"가 된 것이다(계22:1,3). 

  그렇다면 이긴 자였던 요셉은 어떤 측면에서 예수님처럼 이긴 자의 표상이 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긴 자이신 예표로서 이기는 삶을 살았던 요셉과 예수님의 삶을 서로 비교하고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요셉은 크게 다음과 같은 6가지 면에서 예수님의 예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요셉이 비록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기는 했지만 형제들로부터는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야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 죄수로 넘겨진 것처럼 예수께서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는 한량없는 사랑을 받았지만 유대 형제들로부터는 모함을 받아 죄수로 넘겨졌기 때문이다(마27:25, 39~43). 둘째, 요셉이 형제들에게 의해 은20냥에 팔린 것처럼 예수께서는 가룟유다에게 은30냥에 팔리게 되었기 때문이다(마27:3). 셋째, 요셉이 죄수로 있을 때에 두 명의 죄수들 중에 한 명(숱맡은 관원장)은 죄용서받고 살아남지만 다른 한 명(떡굽는 관원장)은 죽임당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죄수가 되어 십자가에 매달릴 때에, 두 명의 죄수들 중에 한 명은 회개하여 구원을 받고 낙원에 들어갔지면, 다른 한 명은 그냥 죽임을 당하여 음부에 떨어졌기 때문이다(눅23:39~43). 넷째, 요셉이 죄도 없었는데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어느날 감옥에서 풀려나오게 되었듯이, 예수께서도 죄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죄수가 되어 십자가에 목박혀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죽임당한 후 3일만에 무덤에서 무덤문을 열고 죽음을 극복한 채 걸어나오셨기 때문이다(고전15:3~4, 엡4:8~9). 다섯째, 요셉의 총리로서의 삶이 30세에 시작되었듯이, 예수께서도 사생애를 끝내고 공생애를 시작한 것이 당신의 나이가 30세때였다(눅3:23). 여섯째, 요셉의 자기에게 죄지은 형제들을 용서해준 것처럼, 그리고 예수께서도 당신 자신을 거역하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었기 때문이다(눅23:34).   

 

4. 요셉의 삶과 죽음이 주는 6가지 교훈은 무엇인가?

  요셉은 야곱이 90세 때에 밧단아람에서 라헬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17세에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 그리고 애굽의 경호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요셉은 거기에서 13년을 보내는데, 노예로 10년을 보냈으며 또한 보디발의 처의 모함으로 인하여 다시 감옥에서 최소 3년을 보냈다. 그리고 요셉은 그 감옥에 있으면서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준 것을 계기로 훗날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에 그것을 해석해줄 자로서 천거함를 받아, 요셉은 일약 30세의 나이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다. 그리고 7년 풍년후 기근 2년차가 되었을 때에 곡식을 사러온 형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어 그의 나이 40세에 아버지와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17년이 지나 그의 나이 57세에 부친 야곱의 눈을 감겨드린다. 그리고 자신도 그때로부터 53년후인 해 곧 그의 나이 110세 때에 애굽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삶과 그리고 그의 죽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들려주는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7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요셉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에 관한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며, 그러한 계획을 하나님께서 당신 뜻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구원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작정하며 보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 세상에 보내어질 때에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보내졌다. 그는 단지 기근에서 자기의 가족들을 구출하라고 이땅에 보내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의 고센 땅에 거대한 민족으로 성장시키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였으며, 더욱이 애굽사람들을 지칭하는 모든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영적인 기근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라고 이 땅에 예표로서 보냄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이렇듯 특별한 사명을 받고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충성(성실함, 순수함, 순종함)하고 인내함으로 하나님을 뜻을 이뤄야 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라고 하겠다. 

  셋째, 이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충성한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이긴 자들 중의 이긴 자의 대표적인 모형이 되었는데, 그는 천국에서 24장로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를 위하여 제1번의 보좌자리와 많은 면류관과 멋진 천국집이 예비되어 있다. 

  넷째, 하나님은 선택받은 혹은 예정된 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자를 통하여 모든 이방인까지 다 구원받아 복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장자는 두 명이었다. 하나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적인 장자로서 '유다'가 있었고, 또 하나는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로서 기업을 두 배로 차지하게 된 '요셉'이 있었다. 그런데 유다는 오직 메시야를 낳는 일에 충성하였고, 요셉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구원 곧 하나님의 구원은 이방인을 포함하는 구원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신약시대의 사도로 비유하자만, '유다'는 할례자의 사도였던 베드로와 같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고,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과 임금들과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안배 즉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은 자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그 사명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런 자는 끝까지 인내하여 자신의 소임을 잘 감당해 낸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러한 사실을 그의 나이 17세 때에 꾼 2가지 계시적인 꿈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곧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창37:7)과 해와 달과 11개의 별들이 절하는 꿈(창37:9)의 꿈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요셉에게 있어서 고난은 더 이상 원망과 불평의 원인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장차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필수적인 과정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거의 다 그랬다. 아벨도, 노아도, 야곱도, 요셉도 다 그랬다. 그리고 요셉의 뒤를 잇는 모세도 40년을 인내해야 했고, 다윗은 15년을, 사도바울도 10년 이상을 인내하며 고난을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일곱째,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서 형통하는 축복을 받는 것은 자기만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조상들의 수고와 노력이 내려와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문이 복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증조부 아브라함은 저주를 끝냈기 때문이며, 이삭은 자신의 송두리째 내어바쳐 헌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양보하고 내주었으며, 야곱은 자기에게 주어진 11명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축복의 대상이 되도록 철야기도함으로 그것을 지켜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땅에서 어떻게 축복을 받게 되느냐 하는 것의 핵심은 저주를 없애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우상숭배로 인한 그의 가문의 저주를 끝내지 못했더라면, 그 뒤에 태어나는 후손들에게 형통함의 축복은 결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저주를 끝내놓으니까, 이삭이 농사하면 100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고, 파는 장소마다 우물이 터져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야곱이 양떼에 손을 대면 양떼가 불어나게 되었으니, 자기 외삼촌의 양떼가 그랬고 자신의 양떼도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 요셉이 가는 곳마다 형통함이 축복이 뒤따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요셉이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일하니 보디발의 집과 밭과 소유에 복을 받을 수 있었고, 감옥에 들어가서 일하니 간수장이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었으며, 요셉이 애굽의 왕궁에 들어가니, 애굽 나라 전체가 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조상들이 해놓은 일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5. 나오며

  지난 약 7개월 동안 우리는 창세기를 172번에 걸쳐 배울 수 있었다(2021.01.25~08.06).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회개와 천국복음"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창세기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오직 한 분이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우리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창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늘 설화 내지는 꾸며낸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것을 역사적인 사실이며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으며,  창조의 이야기는 곧 하나님의 누군지를 소개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을 배웠다. 그분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홍수사건을 접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인류가 어떻게 되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지를 쭈욱 살펴보았다. 그리고 창세기 12장부터 우리는 4명의 족장들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었다. 어떻게 되어서 과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정말 축복받는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자의 축복을 계승하려는 야곱의 눈물겨운 사투도 지켜보았고, 하나님의 안배로 이 땅에 보내어진 요셉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다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천국은 이긴 자가 들어가는 곳이며, 충성하여 인내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자에게는 하늘에 놀라운 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이번에 창세기를 통해 베풀어주신 은혜를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또 듣고 또 들어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직접 "너는 나의 기쁨이었고 나의 자랑이었다. 내가 너 때문에 타락한 이 세상을 보면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는 놀라운 말씀을 들어서, 천국에서 면류관 얻는 위대한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121)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안배가 그대로 성취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창27:1~17)_2021-06-14(월)

https://youtu.be/VxOSac00XXs  [혹은  https://tv.naver.com/v/20894265 ]

 

1. 구약성경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구약성경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구약]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요5:3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통전적이고도 예표론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도바울도 이러한 해석방법을 따라갔으니 그는 또한 통전적이고도 예표론적인 방법으로 구약성경을 해석한 바 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그림자이자 모형이요 그리고 씨앗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말씀은 그것에 대한 본체와 실체요 열매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마22:32). 또한 사도바울도 역시 이삭에 대하여 약속의 씨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았으며(갈3:16), 리브가를 교회의 예표로 보았습니다(엡5:32~33).

 

2. 이삭의 장자축복사건은 어떻게 끝이 났나요?

  만약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서 축복하려던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면, 에서와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안배는 정반대로 끝이 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에서만을 장자로 여겨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 축복하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야곱을 에서로 알고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3. 이삭의 장자축복사건은 예표론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고로 우리는 이삭의 장차축복사건도 역시 예표론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삭"은 그리스도의 모형에 해당하며, "리브가"는 교회의 모형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에서축복사건 실패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비록 이삭이 에서를 장자로 축복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도 예표론적으로 보아야 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3가지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야곱의 장자권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이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16살 무렵에 이미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사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안배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본인이 그것을 사모하고 바라고 열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안개처럼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는 형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권리를 매우 갈망하고 또 갈망했습니다. 그리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기어코 장자권을 사 놓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그의 아버지가 우둔해진 것도 한 몫 했습니다(창27:2, 22~23). 왜냐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던 이삭이 그때에 눈이 잘 안보였기 때문입니다. 계산해보면, 이삭이 장자를 축복하려 했던 시기는 그의 나이 136세 때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나이는 76세였습니다. 그러니 에서는 이미 36년전에 결혼을 하여 많은 자식을 둔 상태였지만, 야곱은 아직까지 장가도 가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어느날 자신의 눈이 침침해진 것을 알고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 자식을 축복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이 잘 안 보이게 된 것은 그 순간에만 있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이삭은 무려 44년을 아주 건강하게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표론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스스로 약하게 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해지심으로 십자가에서 못박히셨으나..."(고후13:4). 그렇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전능자이십니다. 하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할 그 순간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만약 그때 예수께서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요10:18, 18:4~6). 그래서인지 이삭도 이때만 시력이 좋지 않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셋째,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식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창25:23)이 이뤄지기까지 무려 76년간이나 인내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오자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러다가 들키게 되면 모든 저주는 자신이 받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니 둘째아들에게 자신이 시키는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야곱)에게 이르기를,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고 내 말만 듣고 가서 가져오라(창27:13)". 이 얼마나 간절한 기대이며 인내이며 열망입니까? 사실 그녀는 시집오기전, 그녀의 작은 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이 보낸 늙은 종을 보았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누구보다도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삶이 어려울 때에는 기도할 줄 알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4. 리브가가 에서를 장자로서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이삭과 리브가는 자신의 아들들(쌍둥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리브가가 드린 기도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주신 내용이 두 아들들의 미래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창25:23). 그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적인 기도응답은 그녀로 하여금 "야곱"이야말로 장자의 복을 받을 바로 그 아들이라고 하는 마음을 굳히게 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리브가는 자신의 아들 에서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결혼을 하였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족속인 헷족속의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기 때문입니다(창26:34~35).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36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니 에서에게서 얼마나 많은 손자손녀들이 태어났겠습니까? 그러니 리브가의 마음에는 이제 남은 것은 야곱밖에 없다고 더욱 생각했을 것입니다. 

 

5. 교회의 예표인 리브가의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 교회와 및 성도는 어떤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 있나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해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2:18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그가 바로 "하와"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표요, 하와는 그리스도의 돕는 배필(교회)의 예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리브가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들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교회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하기 위하여 때로는 자신이 저주를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창27:13). 그런데 과연 우리들 중에 이러한 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끝까지 수십년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또한 하나님의 때가 되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할 자들이 또 얼마나 될까요? 결국 우리는 야곱과 리브가의 행동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장자의 축복이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021년 06월 14일(월)

정병진목사

 

 

 

2021-06-13(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창세기강해(120) 아비멜렉에게 이삭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창26:23~3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vWf6sCsaxE [혹은 https://tv.naver.com/v/208940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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