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가? 그것은 우리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누구든지 그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왜 그러한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사람인지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사람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여기, 그 해답들이 나와 있다.

2021-12-0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서신강해(05) 형제 사랑 실천 및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법(요일3:13~4: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_ahm0Ylu_c [ 혹은 https://tv.naver.com/v/24018315 ]

 

1. 들어가며

  요한일서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에 대한 영적 성장을 다룬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의 미혹에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인가를 알려 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초신자들을 위한 양육 지침서라고 정의할 수 있고 더불어 이단 세력으로부터 성도를 지켜 주는 예비 주사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요한일서 1-2장의 내용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다룬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고, 이어지는 3:1-4:6에서는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로서의 성도의 신앙과 그것에 합당한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오늘은 3:13~24까지의 말씀을 살펴볼 것인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삶의 적극적인 측면의 특징으로서 형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4:1~6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계를 권면하는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형제 사랑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며,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정리하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 요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했는데 첫째 이유는, 믿는 이들은 형제 사랑에 대한 실천을 통하여 과연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3:13~14). 그러므로 만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고 또한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사망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내 안에 과연 하나님의 생명이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형제 사랑의 실천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는 형제 사랑을 결국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는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가인이 자신의 형제 아벨을 미워한 것이다. 결국 그의 미움은 살인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렇다. 가인 자신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마음을 악한 자가 치러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아우를 돌로 쳐죽이고 만다. 가인 안에는 자기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과연 자기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는 아니다. 다시 말해, 혹 누가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꼭 영생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에, 그냥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요일3:23). 그렇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응당 형제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3:16).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시기 위해 먼저는 사람으로 오셨고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인류의 대속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성령으로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동생으로 삼으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시고 또 낮추시어 피조물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숨을 죽기까지 내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다른 형제를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삶으로 형제를 도와 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재물(재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가 궁핍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도 본체만체 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요일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말이나 혀로서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형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직접 행동과 진실함 안에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 자기의 형제가 궁핍에 처하여 있는 것을 보고도 그를 도와줄 마음을 닫아 버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어떤 그리스도인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면, 그에게는 어떤 유익이 나타나는가?

  이어서 사도 요한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자가 갖는 상태를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자기를 책망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 이 수준에 도달하는 자에게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3가지로 언급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다(요일3:21). 이는 성도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자에게 담대한 믿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에 담대함이 없는 자는 악한 영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 버리거나 겁먹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영들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겁먹는지 아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가 책망을 들을 만한 죄악들이 자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또한 생명의 교통을 나누고 있으며 또한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 안에 어떤 거리낌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자는 악한 영들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담대해지는 것이다. 아니 당당히 맞서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한 것을 다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요일3:22). 왜나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그가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는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기도 응답을 풍성하게 받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회개하고 생명을 성장시켜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 그러면 그것으로 인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분량을 맞춰 주실 것이다. 셋째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분에 거하는 상호 교통과 상호 내주가 가능하다고 했다(요일3:24). 그렇다. 주님과의 친밀도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의 친밀도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분의 말씀이 또한 우리 안에 거할 때에 생기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구한 것들은 또한 즉시 응답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요15:7).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으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는 가지처럼 잘려 나가 밖에 버려져 불에 던져져 살라지고 말 것이다(요15:6). 

 

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초신자들은 사실 사람의 말만 듣는 것으로서 그 속에 역사하고 있는 영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영들을 무조건 다 믿지 말라고 권고한다. 오히려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분별해 보라고 권고한다(요일4:1). 왜냐하면 당시에도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이미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영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느냐 시인하지 않느냐로 구분하라는 것이다(요일4:2~3).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영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와 있다고 했다(요일4:3). 한편 사도 요한은 2장에서도 역시 적그리스도가 누군지를 경고하였다.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고 하였다(요일2:22).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했다(요일2:22). 이는 당시 초기 기독교 이단 세력인 영지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아들은 하나님으로 인정했지만 여호와는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물질을 창조했기 때문에 저급한 신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예수님은 같은 하나님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모든 창조물들 창조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 곧 예수께서 물과 피로 오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요일5:6). 

 

6. 성도들이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이 말한 바, 적그리스도란 악한 자인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악한 자인 사탄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는 이 세상의 임금(왕)으로 활동하고 있는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다(요12:31, 14:30, 16:11). 예수께서는 그를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하셨다. 사실 영적인 권세로 서열을 매기자면 그는 하나님 다음으로 지혜와 능력을 소유한 자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를 어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임금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있는가?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악한 자인 사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서 내주하고 있는 분이 이 세상에 있는 악한 자 곧 사탄 마귀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요일4:4).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탄 마귀가 아무리 위대한 지혜와 강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를 결코 손댈 수가 없는 것이다(요일5:18).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들이 비록 사탄 마귀보다 약한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탄 마귀는 우리가 가진 권세와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강한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와는 달리 오히려 이 세상 임금인 사탄 마귀의 말에 순종할 것이라고 했다(요일4:5). 이는 그들이 세상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했다(요일5: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세상 임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성도들은 누가 진리의 영을 소유한 자인지 반대로 누가 미혹의 영을 소유한 자인지를 구분할 수가 있는 것이다(요일4:6).

 

7. 나오며

  요한일서는 구조가 참으로 특이하다. 점진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수미쌍관형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일서가 순환론적인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동일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의 말씀을 통하여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과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도록 2장에 이어 또다시 그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말씀을 들었다. 그래서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요한일서는 반복해서 말씀을 가르침으로 초신자들을 깨우치고 양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이 책의 기술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20:31). 그러나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 4가지로 나온다. 첫째는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 쓴 것이기 때문이다(요일1:4).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고 마귀에게 속하게 만들어 버리는 죄를 더 이상 짓지 않게 하려고 썼다고 했다(요일2;1). 고로 성도들의 일상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죄를 범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는 성도들이 미혹하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분별하여 그들에게 속하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요일2:26).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요일5:13). 그렇다. 요한일서는 이처럼 영생에 관한 서신이요, 이단에 대한 예방 주사를 맞히기 위한 책이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는 이 책을 통하여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을 더 성장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명의 능력들이 형제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오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잘 분별하여 시간을 허송세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1년 12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은 누구신가(14) 진리의 영이신 성령(요16:12~13)_2020-06-02(화)

https://youtu.be/kalq-ZZAnMQ [혹은  https://tv.naver.com/v/14078892 ]

 

 

1. 보혜사 성령은 어떤 분인가요?

  보혜사 성령은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경륜적인 영으로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구별된 삼위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또다른 자기자신으로서 보혜사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2. 보혜사 성령을 언급하는 성경구절에서 보혜사라는 용어와 꼭 같이 쓰이고 있는 성령에 대한 명칭은 무엇인가요?

  신약성경에서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언급하는 곳은 총 5군데인데, 그중에서 요한복음에서는 총 4회(요14:16,26, 15:26, 16:7)가 나오고 있고, 나머지는 요한일서에서 1회(요일2:1) 더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보혜사가 누군지를 소개할 때마다 사도요한이 꼭 같이 언급하는 성령에 대한 명칭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영"이라는 명칭입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나와있지만 헬라어원문에는 전부 "진리의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3. 사도요한은 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요?

  보혜사성령을 다른 명칭으로 소개할 수도 있었을텐데, 사도요한이 보혜사를 굳이 "진리의 영"이라고 소개하는 데에는 그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영이신데, 예수께서 자신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소개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입니다. 더욱이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부른 것은 성령께서는 성경말씀을 교재로 사용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말씀 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요17:17). 고로 예수께서도 진리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말씀 자체도 진리이기 때문에,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영은 진리의 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6에 의하면,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신데, 성령은 진리라고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4. 왜 성령을 굳이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성령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도들에게 관여하는 영이 2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고 또 하나는 거짓의 영이신 사탄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둘 중에 하나에게 속해야 합니다. 진리의 영에게 속하든지 거짓의 영에 속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진리를 증언하러 오신 성령에 속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무엇이 가짜(거짓)이고 무엇이 진짜(진실)인지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옛뱀으로 처음 성경에 나타나 있는데, 그때 그는 하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피조물은 절대 창조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좀 특별한 피조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진리만을 말하고 있는 자신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8:44-46)" 사탄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한 자요 거짓을 제 것인량 말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아니한다든지 성령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성경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의 영이자 미혹의 영인 귀신에게 속아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5.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바램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바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를 아는데 이르시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아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고, 진리를 통하여 구원받아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누구든지 진리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기록된 성령말씀은 성령의 기록이므로 성령을 존중하고 성령의 인도를 잘 따라가야 진리 안에서 살 수 있고 진리와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도 사실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입니다(딤전3:15). 고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날마다 자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며 진리만을 말하고 그것에 순종하리라"고 결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말한대로 되는 특별한 의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요8:32). 고로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2020년 06월 02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구원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행5:1~11)_2020-04-08(수)

https://youtu.be/X59YdFzGNeE [혹은 https://tv.naver.com/v/13258235 ]

 

1.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나가요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지나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받은 상태로 있으니)"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우리가 믿음으로 반능할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의야말로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올바른 구원론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구원도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구원도 없습니다.

 

2. 구원은 믿을 때에 이미 받은 것이지만 죽을 때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구원은 믿을 때에(정확히는 믿고 회개함으로 회심할 때에) 받게 됩니다. 그때에는 성령께서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믿는 성도들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때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피로 지은 지난날의 모든 죄들이 씻겨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을 때 그 사람은 과거의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명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게 됨으로 그가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때에 구원을 이미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도 자신이 죽는 날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10:26에 따르면, 성도가 되었어도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들을 가리킵니다(히10:29). 그러므로 믿는 성도는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속죄를 결코 부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내주하시어,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시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거역하거나 모욕해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가 죽는 날 그 사람을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살전5:19, 마28:20, 요14:16). 왜냐하면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께서는 "에이스 톤 아오나(그 시대까지, 그 세대동안)" 함께 하실 것이라고 헬라어원문에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요14:16).

 

3. 성도들이 믿음과 회개로 얻은 구원은 대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과 회개로 얻은 구원은 사실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래도 받은 구원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을 경우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하고, 둘째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었던 자라도 그가 믿음을 포기한다든지, 아니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그는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가 죽는 날 그를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의 상태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지만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4. 성경에 나오는 예화로 성도들이 구원관을 설명해본다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요?

  성도들이 받는 구원의 성격을 한 번 성경에 등장하는 예화로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삼상16장과 열왕기상 2장에 등장하는 저주하는 "시므이"의 의 모습입니다. 그는 사울왕의 신하로서, 사울왕이 속해있던 베냐민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죽고 유다지파의 사람 다윗이 왕위를 이어받자, 항상 그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윗의 셋째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왕이 도망친다는 것을 듣고는 기드론시내에 나와서 도망가는 다윗을 향하여 험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죽은 개 같은 자가 왕을 저주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 가서 그 놈의 목을 쳐버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자기를 헤하려 하는데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겠느냐고 하면서, 자신이 저주받는 것은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고 압살롬의 구테타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자, 시므이가 베냐민사람 1,000명을 데리고 나가 다윗을 마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 죄를 내게 돌리지 마옵소서.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옵소서"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도 그를 용서주었습니다. 그러나 평생 가슴이 멍이 든 사건을 다윗이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죽음을 앞둔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인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왕상2:9)" 결국 왕위를 이어받은 후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러다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2:36~37). 그런데 어느날 이 말에 유념하지 않던 시므이가 자신의 두 종이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가서 두 녀석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솔로몬의 귀에 들어갔을 때에 솔로몬은 군대장관 브나야를 시켜 그의 목을 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에 인해 진즉 죽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 죄를 간과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자신이 용서받고 살고 있는지를 잊지 않으려면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왕 다윗과 솔로몬왕이 시므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용서를 잊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그 말을 소홀히 여겼고 결국 기드론시내를 건넘으로 인하여 죽임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용서받은 상태에 있었으나, 그 뒤에 이 땅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내주신 성령님을 거역하고 모욕할 경우 그 사람은 결코 죄용서를 받지 못한 채, 불못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죄인이기는 하지만, 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칭의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집행유예 상태에 놓여있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까요.

 

5. 예수님을 대신하여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을 속이고 우롱할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성령님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눈입니다(계4:5,5:6). 그러므로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예수님의 또다른 자기자신에 해당합니다(요14:18~19).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내어진 성령님을 누가 속인다거나 우롱할 경우에는 용서가 없습니다(마12:31~32).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경우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모욕한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님을 거역하고 속이고 모욕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죄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속죄를 부정하고,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을 모시고 있었지만, 짓말을 했던 아나비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로 결국 죽게 됩니다. 재산을 처분한 후에 그것을 하나님께 다 드리지는 못해도야 "다 드리지는 못하고 조금이나마 드립니다"고 했으면 그들 부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속이려고 시도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 부부는 그날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받아 거듭난 성도였지만 죽을 때에 그만 구원에서 탈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존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하고, 진리만을 증언하도록 돕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지만 성령님은 믿는 성도를 돕기 위해 오셨는데, 그분을 속이거나 우롱하면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20년 04월 08일(수)

정병진목사

  


보혜사 성령은 경륜적인 영이시다. 다시 말해, 믿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이신 것이다. 구약시대까지만해도 성령께서는 단 한 사람에게도 그사람 안에 들어가신 일이 없었다. 그것은 아직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주시려는 성령은 달랐다. 사람들 속에도 들어가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죽는 그날까지 떠나가시지도 아니하시는 영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 속에 들어오시는 그 영, 곧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크게 5가지 일을 하신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이 아들을 증언하신다는 사실이다(요15:26). 왜 보혜사 성령은 제3위의 하나님이신 당신 자신을 증언하지 않고, 굳이 아들을 증언하시는 것인가?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내주하셔야 하는 이유가 있으며, 하나님이 누군지에 관한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자, 보혜사 성령께서는 왜 자신을 증언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증언하시는지를 알아보자.

2019-03-03 주일낮예배
제목: 보혜사 성령은 왜 아들을 증언하시는가?(요15:18~27)
https://youtu.be/InFChhE3LR4


1. 들어가며

  보혜사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또한 보혜사 성령께서는 왜 오셔서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들었을 수 있다. 아마도, 성령께서 오시면 능력을 받아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들었을 것이고(행1:8), 성령이 오시면 여러가지 은사들을 받아 교회공동체를 위해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도 들었을 것이다(고전12:7~11).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보혜사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즉 성령이 오신 본질적인 목적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보혜사 성령께서 위에만 계시는 구약시대와는 달리 믿는 이들 속에도 들어오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시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보혜사 성령께서는 왜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보혜사 성령님은 누구신가?

  보혜사 성령님은 한 마디로 경륜적인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을 한 번도 "보혜사"라고 칭하지 않았다. "보혜사"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밤,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제3위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단 한 사람도 보혜사 성령님을 받거나 체험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이 아니 계셨는가? 아니다. 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은 계셨다. 하지만 그때에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엘로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당신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하나님(엘로힘)의 영(루아흐)"이라고 불렸다(창1:2).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창조사역을 행하시던 바로 그 영이시다. 시104:30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보내시어 창조사역을 행하시고 지면을 새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다른 양태로서 성령이 활동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라는 명칭도, 모세시대에 들어와서 약간 달라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그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이후부터 "하나님의 영"은 "여호와의 영"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삿3:10). 그렇지만 구약시대의 성령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속한 영으로서, 단독적으로 사역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전부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 당신의 영"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이후 성령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은 구약시대에 활동하던 성령의 방식과 경륜적으로 다른 사역을 펼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성령님은 단독적으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역을 펼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은 어떤 사역을 펼치시게 되었을까? 요약해보면, 예수님을 대신하여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내어신 보혜사 성령님은 첫째, 사람들 모두에게 오셨다. 둘째,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믿는 이들 속에도 내주하시게 되었다(요14:17). 그리고 셋째, 한 번 오신 성령님은 그 사람이 죽는 그날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다(요14:17). 그러나 구약시대는 이와는 전혀 달랐다. 구약시대의 성령님은 첫째, 어떤 몇몇 특정한 사람 위에만 오셨기 때문이며, 둘째, 위에만 내려오셨고, 셋째, 성령을 받은 자가 범죄할 경우에는 성령님께서 과감히 떠나시기도 했기 때문이다.

 

3.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님은 믿는 이들 속에서 어떤 사역을 펼치시는가? 사실 구약시대에 사람들 위에 내려오신 성령께서는 사람들 속에서 일하지 않았다. 단지 몇몇 특정한 사람들 위에 내려오셔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시거나 혹은 어떤 은사가 나타나게 하였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떤 이에게는 지도력이나 능력을 주시어 선택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고, 사울왕이나 선지자들 같은 경우에는 예언의 은사를 주시어 사역하게 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 사람들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은 이러한 성령의 외적인 사역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 속에서 다른 사역도 함께 펼치셨다. 특히 보혜사 성령께서 사람 속에서 일하시는 사역을 정리해보면 크게 5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신다(고전15:45,12:3).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실 때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둘째, 믿고 거듭난 자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해주신다(롬8:15). 그리고 보증해주시며 인치신다(고후1:21~22,엡4:30,1:13~14). 셋째,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롬1:4).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 하고, 죄를 멀리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넷째, 거짓의 영이 가득인 이 세상에서 믿는 이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다(요16:13). 왜냐하면 성령은 기본적으로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섯째,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를 증언하신다(요15:26).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요14:26).

 

4. 보혜사 성령님은 왜 예수님(아들)을 증언하시는가?

  그렇다면, 왜 보혜사 성령님은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시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가? 오순절이후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성령님은 이제 단독적으로 사역을 펼치시는 제3위의 하나님이신데, 왜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제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믿는 이들 안에 성령께서 들어가셔서 계속해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해주지 않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보혜사 성령님은 비록 제3위의 하나님으로서 오셨지만 여전히 한 분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 땅에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한 분 하나님 곧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것이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성령께서 믿는 이들 속에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첫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예수께서 당시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드디어 제사장의 나이가 되자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때가 30세쯤되셨다. 그리고 딱 3년반의 공생애를 사시고 돌아가셨다. 그때는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가셔서 활동하시던 시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목도하여 지켜 보면서, 예수께서 행하는 일들과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고,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 사람들을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들, 제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죽이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구원하러 오셨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던 것이다.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은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것을 더욱 더 증언해주셔야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설명해주셔야 했다. 또한 그분이 행하신 이적들이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하셔야 했다. 특히 예수님시대 이후에는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었고, 사람들을 거짓말로 미혹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계속해서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믿어서 회개하고 천국들어가게 하려고 믿는 자들 속에서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것이다.

  두번째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이유는 보혜사 성령이 제3위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은 당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 그러다가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는데, 그때부터 하나님은 하늘에서는 아버지로, 이 땅에서는 아들로 존재하게 되셨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우리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피흘려 죽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피흘릴 수가 없기 때문이요, 사람들 중에는 죄없는 속죄제물이 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다. 그뿐 때문에 마땅이 지옥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새 길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누구든지 듣고 알아서 구원받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 다른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것이지만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과 영원토록(에이스 톤 아이오나 = 그 시대까지, 그 세대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제3위의 하나님의 오심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오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한 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죄사함도 받고 구원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보혜사 성령님을 "아들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단독적인 영이지만 그분의 오심인 아들이 오심이요 그리스도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는 예수님이 아니요, 성령님은 예수님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 면으로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잘못 들으면 하나님을 두 분 세 분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구약시대에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렸다. 성령은 하나님이요 여호와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예수님으로 오셨다(딤전3:16). 그리고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분이 보혜사 성령을 당신자신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이제 "예수의 영"이요, "아들의 영"이며, "그리스도 영"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여호와와 예수님이 한 분이 아니라면, "여호와의 영"이 결코 "예수의 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보혜사 성령이 동시에 존재하는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은 실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이 했던 일을 증언하는 것이다.

  

5. 나오며

  오늘 이 시간에는 오순절이후 믿는 이들 속에 들어가시는 경륜적인 영인 보혜사 성령께서는 왜 당신 자신을 증언하지 않고 아들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 이유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다시 증언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 자신이셨고, 예수님도 아들로 오셨지만 본질이 하나님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령님도 예수님께서 보내신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떠나시기 직전 왜 이처럼 내주하실 성령에 관하여 그분을 아들을 증언하는 영이라고 굳이 말씀하셨는가를 생각헤보자. 그것은 위에 내려오셔서 역사하는 성령님의 외적인 사역들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죄를 회개케 하시고, 예수님을 누군지를 알게 하고 믿게 하시며,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그리고 거듭나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해주실 때에라야 누구든지 끝까지 믿음을 붙잡고 구원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3월 3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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