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6(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진리의 영이 오셔서 가르쳐주시는 궁극적인 진리란 무엇인가?(요15:23~2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cEnENQscXY

 

1. 들어가며

  신이나 종교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신자나 불신자와 관계없이 관심이 많다. 삼성가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었던 이병철 회장도 신과 종교에 관한 질문을 24가지나 어떤 신부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 역시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는데 과연 죄사함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우리가 거듭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데 나의 이름이 어떻게 생명책에 기록되는지 궁금하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지만, 그분의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고백했다고 하는데, 그럼 구약의 주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인지 늘 궁금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리에 관한 이러한 갈망을 잘 아시고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다(요15:26).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가르쳐 주시는 궁극적인 진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2.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는가?

  A.D.30년 1월경 이제 하루가 지나면 십자가에 못박힐 시간이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어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리고 성찬식을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면서 곧 있으면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고 생명을 주실 것을 암시해 주셨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신을 핍박했던 것처럼 제자들도 핍박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제자들을 보낸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예수님 자신과 아버지를 본 것이며, 나를 미워한 것은 예수님 자신과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곧 아버지로부터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인데,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을 증언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영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할 것이고(요15:26) 모든 진리 가운데로 제자들을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16:13).

 

3. 진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진리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요한복음에 보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여러가지 단서들이 나온다. 요17:17에 보면,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나온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요1:14). 그때 예수께서도 오셔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14:6).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말과 그리고 행동이 다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4:9~10). 만약 예수께서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것은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왜 사람들이 이처럼 진리에 대해 알기를 갈망하는가? 그것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는데, 악한 자가 바로 거짓의 아버지 마귀이기 때문이다(요8:44). 그러므로 온 세상은 속고 속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진짜 진리를 접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님, 진리를 말씀하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약 거짓말을 하신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고 따라갈 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사람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며,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나와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4. 언제부터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던 것인가?

  우리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던 빌립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9~1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셔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언제부터 아들 안에 있었던 것인가?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될 때부터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던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인가? 그런데 우리는 빌립보서와 골로새서 등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때에 이미 하나님의 모든 신격이 아들 안에 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빌2:6~7). 그렇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있던 하나님이셨는데 아들로 태어난 채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때에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됨의 신격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그분이 당신 자신의 아들 형상을 벗어 놓고 사람의 형상 곧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아직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셋째 하늘에서 아들로 계셨으며, 그때에 이미 하나님의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그의 몸 안에 거하시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골2:9). 그러므로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때는 아직 인간처럼 육체를 입지 않으셨기 때문에 영으로서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 것은 갈4:6의 말씀처럼 셋째 하늘에 있던 아들도 그때는 영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도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시는 것을 통해서도 예수께서는 영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눅24:46). 고로 육체를 입기 전에 아들은 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아들은 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아들의 영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연합된 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5.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인가 아니면 그분이 아들을 보내신 것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는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딤전3:16).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는 말씀을 보게 된다(요3:16). 그럼 대체 어떤 표현이 바른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인가? 우선 둘 다 맞는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둘 다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들의 성육신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든지, 아니면 삼위의 다른 활동이 강조되든지 하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로 오신 것이 강조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아들로 태어난 채 있다가 아들이 육신을 입은 것이므로 아들의 위격이 더 강조된다. 그런데 그동안 회개와 천국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한 분임을 강조해 왔다. 왜냐하면 도마가 예수님에 대해서 신앙고백할 때에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곧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요20:28).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들이 원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증거는 성경에서 아주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요8:24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이 '스스로 계신 분(여호와, 에흐에)'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3에서도 그분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셨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강력히 증언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오직 여호와께서 당신만이 홀로 하나님이며, 당신만이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해 오셨는데(사41:4, 44:6, 48:12), 예수께서 동일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위대한 두 사도들 곧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였고(롬9:5), 사도 요한도 역시 "그분은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라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요일5:20). 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6. 예수께서는 언제부터 아들로 계셨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예수께서는 언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존재하고 있었는가 하고 말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부터 아들로 존재하신 것인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화목제물이자 구주로 보내셨다는 말씀을 볼 수 있다(요일4:10,14). 또한 하나님께서 죄로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말씀도 보게 된다(요일4:9, 요3:16).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독생자이자 아들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7:5의 말씀 곧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하여, 이미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창세전에 영광스러운 존재로 있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모다 먼저 나신 이'이며(골1:15),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과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골1:16~17). 고로 예수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즉 아직 시간과 공간이 있기도 전에 먼저 계셨으며, 그분이 독생자라는 말씀을 통하여 그분은 이미 아들로 태어난 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창조 전에 이미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아직 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시기다. 그리고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여자에게 나게(있게) 하신 것이다(갈3:4~5). 그리하여 이 땅에 그분이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은 영으로 태어난 채 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육체로 태어난 채 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그분이 영으로만 있으셨을 때에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는 측면에서 그분은 아들이지만, 그분은 신격의 모든 충만이 그분 안에 거한 채 있었기에, 그분은 동시에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영이신 아들이 때가 차매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고로 그분이 영으로 태어난 채 있었던 영원의 시간에서 보면, 그분은 '독생자'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태어났을 때에는 그분은 '사람의 아들(인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 전 아들을 낳으실 때에 이미 그분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아버지의 생명으로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자 아버지의 생명이다(요5:26). 그러므로 창조 전에 태어난 채 있었던 예수 안에는 이미 아버지의 생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 생명이 자기들 앞에 나타난 채 있었으며 자기는 그분을 직접 보았고 만져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요일1:2). 그러니까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요한의 시대에 나타나신 것이다(요일1:2).  

 

7. 아버지와 아들은 위격이 같은가 다른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의 체현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그분은 아들로서의 인격을 갖추고 있었고 활동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그분은 아버지께 기도를 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마26:39). 그런데 이것을 두고 양태론자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양태론자들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과대 해석한 나머지 아들도 아버지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때 예수님의 기도는 육체를 가지셨던 아들이 셋째 하늘에 계신 신성만을 가지신 아버지께 기도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육체를 입으셨던 아들이 죽은 것이지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육체의 겉사람이 죽은 것이지 영의 속사람이신 하나님과 아들의 영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을 한 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8.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같은가 다른가?

  그렇다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과 우리 인간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다른 하나님의 아들인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됨은 같은 종류의 생명을 받아서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차이가 있으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들이 받은 생명을 성령을 통해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는 자기 안에 신격을 가지고 있는 분이시며(골2:9), 모든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요1:3, 골1:16~17, 히1:2).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고 할지라도 결코 자기 안에 신격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인 것이지 결코 창조주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맏아들로 승격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동생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아들되심과 우리의 아들됨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예수께서도 역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그분은 원래 신격을 가진 하나님이셨기에 하늘에 오르신 이후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셨다(계3:21, 22:1~3). 그런데 '아버지의 보좌'는 대체 어떤 자리인가? 그것은 바로 통치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고 또한 심판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승천하시어 한 개 밖에 없던 하나님의 보좌를 여러 개로 나누셨다. 그리하여 24보좌를 만들어 이겼던 자들에게 앉게 하셨다. 그리고 144,000개의 보좌 중에서도 왕 노릇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통치와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 아닌가? 하지만 이기는 자들에게도 그러한 역할을 나눠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분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것만 해도 송구스럽고,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인데, 우리에게 보좌까지 앉혀 주시는 은혜를 우리는 어찌다 갚을 수 있다는 말인가?

 

9. 나오며

 육체를 입으신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저 셋째 하늘에서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아들로 계셨다. 그때는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분은 '독생자'라고 불리셨다. 여기서 '독생자'라는 말은 '모노게네스'라는 것으로서, '모노'라는 말은 '유일한, 오직 하나의'라는 뜻이며, '게네스'는 동사 '겐나오'에서 나온 명사를 합친 것이다. 여기서 동사 '겐나오'는 '아버지로부터 자식을 보다'는 뜻이다. 이는 엄마가 자식을 낳다는 단어인 '틱토'와는 다른 단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채 있었던 유일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은 피조물이 결코 아니시다.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아들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분 안에 거하시고 있다. 그때 아들은 영으로 계셨기 때문에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셨고, 동시에 아버지 안에 아들도 계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났을지라도 여전히 그분의 영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었다. 즉 그분 안에는 여전히 아버지가 함께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이며, 당신을 미워하는 자는 당신과 아버지를 동시에 미워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들의 신성한 영은 결코 죽을 수가 없다. 그 영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은 죽지 않는 영원한 부활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으실 때 예수께서는 죽을 수 없는 당신의 아버지와 연합된 영을 셋째 하늘에 계신 신성한 아버지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아들이 육신을 입고 죽으신 것은 다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구원경륜을 이루기 위함으로서,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일을 영원히 찬양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우리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함으로 하늘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을 다른 영혼에게도 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영혼들도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가르쳐 주시는 궁극적인 진리이다. 

 

 

2022년 10월 16일(주일)

정병진목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요18:37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목적은 진리를 증언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신 것인가? 자기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 앞에서 예수께서는 진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진리의 말씀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이나 어떤 유명 신학자의 말을 동일선상에 두려는 자들도 있다. 그게 옳은 것일까?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말 혹은 신학자의 말의 충돌된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그러한 말씀이 있고 신학적인 언급이 있다. 예를 들어, 루터는 성경에서 야고보서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터는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했다. 칼빈은 자신의 이중예정론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를 죽이라고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은 그 답을 찾아보자.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여러개 등장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 언급하면 이렇다. 첫째로,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요10:10)"이라고 하셨고, 둘째로,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막10:45)" 오셨다고도 하셨다. 한편 셋째로,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3:8)"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오늘말씀처럼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섰을 때에는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리의 증언하기 위함(요18:37)"이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중요한 순간에 왜 그러한 말씀을 빌라도에게 들려준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붙들어야 할 진리란 대체 무엇이며, 진리를 붙들게 되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고 진리를 붙드는 자에게 세상의 반응은 어떠하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진리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진리가 되려면 어떤 필요충분조건이 채워져야 하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서 진리를 찾아보면, '진리'란 참된 이치나 참된 도리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모순되지 아니하고 확하게 바르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시간이요 또 하나는 장소다.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려면, 언제 어디서든지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키 큰 사람은 아름답다"라고 정의해보자. 이것은 진리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항상 키 큰 사람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명제나 단어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가 달라져도 항상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통했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3.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성경에서는 진리는 오직 3가지 뿐이라고 증언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 증언한다. 예수께서 겟네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아버지(당신)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온 분이 예수님이 진리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 그러면 삼단논법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자기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인 것이다(요1:14,14:6). 그리고 셋째,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도 진리이다(요15:26). 그래서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은 하나도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의 때에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진리가 없었기에 예수께서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시오 안내하시기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4. 진리를 붙드는 자가 받게 되는 3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진리를 붙드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다. 첫째는 이 세상의 모든 억압된 요소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이다(요8:32). 이 세상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죄된 본성이다. 그리고 마귀와 귀신들이다. 진리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게 되면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모든 것들 즉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무지까지도 다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이 세상에서부터 얻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영생이다(요5:24). 진리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는 자 안에 하나님의 생명에 분배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죽는 순간에 얻게 되는 것으로 천국이다(요14:6).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들게 되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5. 관건은 우리가 과연 끝까지 진리인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려 하느냐는 것이다.

  고로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으로부터 있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다 변하기 때문이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만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예수님 자신이 진리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나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16:28). 그리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만을 전하셨기 때문이다(요8:28,12:49,14;10). 그렇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만들어내어 말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붙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히13:8, 벧전1:25).

 

6. 유명신학자나 성경의 저자 바울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과 충돌되었다고 판단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진리가 없는 이 세상에 진리를 증언하어 오신 것이다(요18:37). 그분은 진리가 성육화되신 분이므로 그분의 말씀은 100%가 진리다. 그분의 말씀은 틀림없다. 절대 거짓이 없다. 아니 거짓이 0.00001%도 섞여있지 않는 순도 100%의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개신교인들 중에는 칼빈의 교리를 모든 것보다 더 우선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칼빈의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한다. "네가 칼빈보다 똑똑하냐?"고, 그리고 "칼빈처럼 성경을 제대로 풀어낸 사람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칼빈의 주장이 다르다는 것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께서 칼빈과 같이 말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칼빈은 틀리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거의 맹신에 가깝게 칼빈을 추종한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실어나른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믿고 실어나르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고 따라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해 놓았다는 성경구절이 없다. 단지 개인에 관한 사역적인 예정만 있을 뿐이다. 그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를 예정해 놓으신 것은 많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다는 성경말씀은 없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언급하셨다(마22: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만세전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항변한다. 아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말씀을 100% 신뢰하고 따라가야 하는가? 칼빈인가 예수님인가?

  한편, 오늘날 어떤 신앙인들 중에는 바울의 말을 100% 절대적인 말씀으로 알고 따라가는 자들도 있다. 특히 종교개혁자 루터는 바울의 말은 100% 따라가지만, 야고보의 말은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바울의 말은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겠지만, 야고보의 말(야고보서)은 정경(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과 상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약성경에서 빼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바울의 서신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럴 때에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 100% 진리만을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비교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것을 판정해야 한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것들 중에는 오늘날 우리가 적용하지 않는 말씀들이 더러 있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가 잠잠하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딤전2:11~12). 하지만 그것이 100% 절대적인 진리의 말씀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왜 오늘날 교회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는가? 또한 바울은 처녀인 여자는 시집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냥 그대로 지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전7:26). 만약 이것도 100% 진리의 말씀이라면, 왜 자기의 딸들은 예외적으로 시집보내고 있는가? 그리고 여자는 기도할 때에 무엇을 쓰든지 긴머리를 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고전11:5~6). 그러나 여자 성도들 중에는 짧은 머리를 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요즘 한 둘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오직 진리되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그분의 말씀만을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바울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합당한 진리를 선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기록된 내용 중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적용될 수 있는 진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자기 생각하기에 사도바울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된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사도바울의 말을 버려야 한다. 아니 그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혹시 예수께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 성경에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돕기 위한 보조적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7. 나오며

  그렇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 말씀은 언제 어디서든지 적용해 보아도 항상 옳은 결론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여 항상 적용되어도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읽고 더 믿고 더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앞에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했다(요18:37).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고 절대적인 신뢰해야 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며,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를 천국에까지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자. 그리고 진리만을 선포하기로 결심하자. 우리는 어떤 유명 신학자의 말을 전할 것이 아니다. 오직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을 말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전해야 한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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