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2) 왜 사도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행19:4~5)_2022-12-15(목)

https://youtu.be/9gaQT-a2zD8 [혹은 https://tv.naver.com/v/31818228 ]

1.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줄 때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성도들이 12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아볼로에 의해 전도된 자들이며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를 믿기로 했으니 그분이 바로 주 예수님이신 것을 알려 준 뒤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19:5).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2. 사도 바울은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오늘날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곳은 거의 없다. 왜 오늘날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인가? 그런데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마28:18~20).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의미야 같은 것이겠지만 글자로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사도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2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처음 초기 교회에서는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사도행전에는 초기 교회가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는지가 나온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세례를 베푼 경우는 총 4번 나오는데, 두 번은 베드로에 의해서 세례가 베풀어진 것이요, 한 번은 빌립 집사가 세례를 베푼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사도 바울이 세례를 베푼 것이다. 첫 번째는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3천 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때 11사도들과 함께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다(행2:38). 그리고 두 번째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행8:16). 그리고 세 번째는 다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세례를 베푼 것인데, 이때도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다(행10:48).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세례를 준 것인데, 이때는 빌립 집사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결국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서는 대부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마28:19). 그런데 A.D.100년경 거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교회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디다케'라는 책이다. 이 책은 '12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불려지는데, 여기에 보면 세례를 어떻게 주는지가 나와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물로 침례를 주어야 하지만, 만일 그러한 물이 없다면 다른 물로 침례를 주되, 찬물로 세례를 줄 수 있고, 그것이 없다면 더운물로 침례를 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찬물이나 더운물도 풍성하지 않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하였다. 그렇다. A.D.100년경에 교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둘 다 의미는 같은 것이지만, 뉘앙스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한 것이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반영하는 표현이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한 것은 한 분 하나님의 신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10:30에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도 말씀하셨고,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내 속에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성부와 성자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우리도 역시 '성모'라는 표현을 동일한 위치에 가져다 놓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천주교에서는 A.D.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 성모 마리아를 성부와 성자의 신격의 동일한 위치에 놓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를 '데오토코스' 즉 하나님을 낳으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4년 제2바티칸 회의에서는 아예 대놓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출산하였다'고 공식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낳은 것이다. 고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인 것이지(행1:14, 요2:1,3, 막3:31),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 쓴 것이다. 

 

5. 초기 교회는 세례를 줄 때에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대신하여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인가?

  우리는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 아들의 이름인 '예수' 속에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예호수아, 예수아,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고로 굳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 대신에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은 아버지의 이름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5:43).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인 여호와가 누군지를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다(요17:6). 그리고 둘째, 성령의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데, 성령님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친히 성령님을 가리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14:26). 그렇다. 성령님은 아들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고로 '예수'라는 이름 안에는 '여호와'라는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이고, 성령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이름도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초기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특히 '예수'라는 이름은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 곧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었기에,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수가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2월 15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1) 요한의 세례 주 예수 이름의 세례 그리고 성령세례의 차이(행19:1~7)_2022-12-14(수)

https://youtu.be/wNuEujrs1bY  [혹은 https://tv.naver.com/v/31818142 ]

 

1. 에베소교회에서는 어떤 세례가 베풀어졌는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만났던 에베소교회에서는 3가지 세례가 베풀어졌다. 먼저는 아볼로에 의해서 '요한의 세례'가 베풀어졌고, 이어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주 예수 이름의 세례'와 '성령세례'가 베풀어졌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으며,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세례를 강조하고 있지만, 당시 에베소교회에서는 3가지 세례가 전부다 베풀어진 것이다. 

 

2. '요한의 세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요한의 세례'라 함은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를 가리키는데, 세례 요한이 죽게 되자 그를 믿고 따르는 후계자들이 베풀었던 세례를 가리킨다. 특히 요한의 세례는 세례 중에서도 '회개의 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서(행19:4, 막1:4),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죄사함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자 점차적으로 요한의 세례는 교회 가운데서 사라졌다. 

 

3.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베풀었던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는 어떤 세례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는 세례를 가리키는데, 예수 믿기 전에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거나 혹은 육체 내지는 사탄 마귀가 주인이었던 자가 이제는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자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 예수 이름의 세례'는 이전의 자기 자신 곧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으로 다시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받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롬6:3~4). 고로 사람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게 되며, 새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은 뒤에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28:18~20).

롬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4. '성령세례'란 어떤 세례인가?

  성령세례는 사람이 주는 세례는 아니다. 성령세례는 주 예수께서 주시는 세례이기 때문이다(마3:11).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데,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다(마3:11~12). 여기서 자기보다 능력이 크신 분은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고로 '성령세례'는 주 예수께서 베푸시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런데 '성령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견해로서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세례를 의미하기도 한다(고전12:13). 다시 말해,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어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세례'와는 조금 다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는 성령이 믿는 자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말씀을 듣고 있는 고넬료 가정의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 이는 성령께서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 위에 부어지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이 방언을 말했고, 이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다(아마도 방언으로 찬양했던 것 같다)(행10:44~46). 그러자 베드로는 자기와 함께 온 신자들에게 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한다.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이들은 이미 성령을 받은 상태이고 또한 성령의 은사까지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베드로는 '성령세례'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루살렘교회에 돌아가서 보고할 때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행11:15~18). 

행11:15~18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렇다.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서 베드로는 이것이야말로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은사)이 그들 곧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왜 주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가? 그것은 성령이 믿는 자들 위에 내려오심으로 능력을 받고 또한 은사를 받아 담대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행1:8). 성령의 강력한 체험과 은사가 나타나야 비로소 성도도 용기를 갖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요한의 세례, 주 예수 이름의 세례, 성령세례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구원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렇다. '요한의 세례'는 한 마디로 "나는 죄인입니다"를 인정하는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요,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는 "나는 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령세례'는 "나는 이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아서 담대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라고 받는 세례를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는 2가지의 세례를 받고 있다. 하나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마28:19). 이때 성도는 물로 세례를 받으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 주 예수님만이 자신의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섬기겠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믿는 이들 중에 어떤 이는 믿을 때에 혹은 믿고 난 후에 성령세례도 받게 된다. 이것은 성령이 그에게 쇄도하여 그 사람의 위에 머물러 있음으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세례를 가리킨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주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주 예수의 이름의 세례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것들은 일종의 의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주 예수님만이 구원자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형식이 구원의 문제를 결정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자신은 할례를 받았으니 언약 백성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언약백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성스러운 주님의 명령이므로, 이것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만방에 공포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무시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신랑 신부가 새롭게 한 가정을 시작하려 할 때에 결혼식을 올리고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혼인 신고를 하고 살게 된다면 그들이 부부인 것은 맞지만, 기왕이면 혼인 예식을 통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부부가 된 것을 알리고 살면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14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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