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한꺼번에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구원론에 관해 8년간을 줄곧 외치다보니 무엇이 올바른 구원관이라는 것이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믿음과 회개"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를 오늘 말씀에 다 나온다. 그리고 구원론과 맞물려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다보니 그것도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파하고 있는 종말론이 100%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양한 종말론이 정통 교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구원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을 모르면 그날 땅을 치고 후회할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죽는 날에 알게 될 것이다.

 

2021-09-05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구원론과 종말론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차이(마19:23~3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fEC-2RisDCs [혹은 https://tv.naver.com/v/22300111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과연 죽은 다음에 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죽어보니 그곳이 지옥이더라 하면 얼마나 낭패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가? 또한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 것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회개'는 하면 좋은 것이고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가? 사실 구원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또 어떠한가? 구원의 최종완성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의 구원과 맞물려 인간의 최종적인 완성인 종말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런데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너무나 다양하다.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시는지, 환난 중간에 오시는지, 환난 후에 오시는지 각 교단과 목회자의 신앙노선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떤 노선을 따라가야 하는가? 혹시 내가 주께서 환난 후에 오신다고 믿고 있었는데 혹시 주님이 환난 전에 오신다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러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한 번 쭉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사람이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 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이렇게 들어왔으니 아마 그것이 맞겠지 하고 생각하면 아니 된다. 구원은 과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의 간증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기존 교리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잠시 내려놓으라.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원론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설교하더라도 아마 일 년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구원론과 종말론을 서로 비교해보는 시간이므로, 구원론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만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과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엇이 진리인지 헷갈릴 때에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앞세우라.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구약에서 약속하신 대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한 그분 자체는 죄가 없는 분이심과 그분에게만이 부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분은 약속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둘째, 그렇게 해서 얻은 구원을 무효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시작하는 믿음은 사실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으나(한국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을 지켜내는 믿음을 계속 자고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있다고 치자, 과연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지켜내기 위해 탈레반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0:9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회개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자신이 예수님을 몰라보고는 전능자가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간 사실을 인정하지 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멀리했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으로서의 회개"라고 한다. 이러한 죄의 고백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둘째, 한 번 회심으로서의 죄를 고백했다면 그후부터는 날마다 짓는 자범죄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이때 과거에 지었던 죄들과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죄들은 같이 회개한다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조상들의 죄와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죄들 특히 우상숭배의 죄는 출20:5의 말씀에 따라 귀신들이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와 3~4대까지 머물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할 수록 귀신들이 주는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후손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회개의 한 파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정 회개했다면 그 뒤부터는 회개했던 죄를 반복해서 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지었던 죄를 끝까지 끊지 못하고 반복해서 짓게 된다면 그는 결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회심할 때에 한 번 회개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온 몸을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요13:10). 

 

3.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가?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믿음('지키는 믿음'이 아니라 처음으로 믿었던 믿음)과 회개('반복적인 회개'가 아니라 '회심으로서의 회개')로 한 번 구원을 얻었으니 그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말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얻은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우상숭배한다면 그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계21:8). 고로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죽을 때에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계3:5).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믿음을 가졌으나 믿음에서 파선하는 자를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찾아보라. 한 번 가졌던 믿음이라도 그것을 버리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를 보더라도 한 번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고의로 다시 죄를 범하고 배도하게 된다면 그에게 회개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있음도 참고할 만하다. 그러므로 한 번 얻은 영원한 구원이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4. 믿음에 대한 인내와 반복적인 회개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가?

  이것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자. 처음 우리가 믿었던 믿음과 그리고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통해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면 그는 이제 구원의 노정에 갓 들어선 것이지 그것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를 읽어 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것이며 그 믿음으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노정이 끝나는 보는 구원관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노정에 이제 첫 발을 내 디딘 자가 나의 구원은 영원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또한 그렇게 가르치면 절대 아니 된다. 우리는 이미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지켜내야 구원은 유지되는 것이고,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만이, 죽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새 예루살렘 성의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한 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을 비롯하여 십계명을 어기는 자들은 반드시 불과 유황으로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알라(계21:8). 그래서 이미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겉옷을 계속해서 빨지 않는 자(현재분사형)는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 내버려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계22:14~15).

 

5. 영적인 측면에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또한 사실 구원이란 영적인 영역에서 볼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덧붙어진(추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믿었다면 그에게는 곧이어 성령께서 들어오실 것이다(요1:12, 계3:20). 그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 안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롬8:2, 고전15:45).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드디어 '생명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45). 이것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요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우리 안에 또다른 생명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첫째는 영원한(정확히는 '시대의') 생명이요, 둘째는 아버지의 생명이요, 셋째는 부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남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죽는 그날까지 그는 구원받은 채로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죽을 때다. 그가 죽을 때에 그간 믿음을 지키지 못해 주님을 부인하였거나 계속해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죽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과 함께 지옥에 가시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바울은 한사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으며(살전5:19), 또한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했다(엡4:30).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고 인치고 있는 시간은 우리의 구속의 날 곧 우리의 육체가 죽고 우리가 부활체를 입는 바로 그날까지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엡4:30).

 

6. 한 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시지 않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요14:16의 말씀이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보증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그것은 한글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이지, 헬라어 원문에는 그렇게 나와있지 않다고 말이다. 성경에는 '영원토록(영원히)' 혹은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낱말(부사어)가 가끔 나온다. 시간의 영원성을 뜻하는 이 말은 영어에서도 '포에버(forever)'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헬라어로 보면, 그것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에이스 톤 아이오나(eis ton aiwona)'라는 전치사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이스(into)'는 '~안으로'라는 뜻이지만,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와 결합하게 되면, '~까지(till), ~동안(for)'이라는 뜻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 전치사 뒤의 단어가 정관사 '톤(the)'과 명사 '아이온(age, period, generation, world)'이라는 단어다. 그런데 '아이온'은 우리말로 '시대, 세대, 세상'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므로, "에이스 톤 아이오나"는 "그 시대까지" 혹은 "그 시대동안"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이는 우리 안에 들어와셨던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동안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죽는 날에 우리의 믿음이 파산되었거나,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아서 겉옷(두루마기)이 더렵혀진 채 계속 있다면, 성령께서는 그날 우리를 떠나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날 하늘의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은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서 탈락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보았던 끝이 없이 계속되는 '영원토록(영원히)'이라는 말은 정확히는 '세세토록(세세무궁토록)'이라는 뜻으로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니오논'이다. 이 말은 영어로는 'for the ages of the ages'라는 뜻으로서 한글로 번역한다면, "그 시대들(세대들)의 시대들(세대들)까지"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이온(시대,세대)'는 단수가 아니라 둘 다 복수의 형태다. 즉 이 문구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 그리고 이어지는 그 시대와 그 다음의 시대까지"라는 뜻이다. 고로 이 문구야말로 진짜로 영원토록이라는 뜻이 된다(딤후4:18).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만이 가지는 속성이자(계4:9)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시간(계14:11)이라고 할 수 있다.  

 

7.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종말론은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듣고 있고 믿어왔던 종말론은 과연 구원의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환난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받고, 자기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가 구원을 못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더 성경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은 자들은 그날에 매우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것이 불보듯 뻔하지만 그것이 그의 구원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이 되면 자기가 믿고 따라왔던 목회자에 대한 실망감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지 목회자의 책임으로만 되돌릴 수는 없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디까지 자기가 어떤 목회자와 어떤 교단의 견해를 따라갈 것인지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지 강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종말론을 어느 것을 믿었다고 해서 교회가 왜 당신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느냐면서 그를 구박을 하거나 그를 고문을 하거나 그를 교회에서 추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씀은 다 자기가 섬기는 목사님의 견해를 따라가지만, 종말론의 견해에 있어서는 다른 목사님들의 견해를 따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흔들리거나 허물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말론의 견해가 다 정통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그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로 어느 누가 환난전휴거를 믿었다고 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 가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일은 꼭 있을 것이다. 

 

8. 가장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종말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요한의 말씀이나 다니엘이나 에스겔 혹은 스가랴서에 나오는 말씀을 우선 적용할 것이 아니라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 1~2장과 21~22장에 나온 말씀을 우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나와 있는 말씀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할 가장 안전한 종말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장'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마24장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마24:29~30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24:29-30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렇다. "그날 환난 후에" 주님이 오신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환난의 날을 겪게 될 것인데, 환난의 날이 너무나 혹독하여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한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날들을 감해주신다(줄여주신다)고 하셨다(마24:22).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로 숫자적인 7년대환난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다 환난을 통과하겠지만 환난의 날을 줄여주신다는 말을 믿고 그 환난의 날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럼, 휴거는 언제 일어나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인류 최후의 전쟁으로서 아마겟돈 전쟁 전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때가 되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불신자들 및 하나님을 거역하는 땅의 왕들을 미혹하여 하늘의 군대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이때 하늘의 군대의 대장은 재림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군대는 천사들과 이미 구원받아 천국에 있던 성도들들과 그 직전에 휴거받은 성도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쟁이 있기 전에 먼저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가?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7편의 말씀을 보면, '곡식의 추수(성도들의 휴거)'와 '땅의 포도송이의 추수(아마겟돈전쟁)'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러한 순서로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왜냐하면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의 휴거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은 조금 양보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있어도 구원관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구원관을 갖는 것은 우리의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구원관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막1:15, 마4:17, 계22:14). 만약 이러한 구원관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구원에서 멀어질 것이고 심지어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계3: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회개로 구원의 여정에 발을 딛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나 아니다(죽어보면 알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영혼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딤후4:18, 계22:14~15). 그때까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2:12).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개인적인 구원의 사건 말고, 주님께서 오셔서 온 세상을 끝내시는 그날이 우리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종말의 때가 우리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때에 정신차려야 한다. 그날 주님 앞에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열 처녀처럼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주님 앞에 등불 들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는 사실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가 날 때 나의 영혼이 과연 주님을 영접하러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마다 회개하라.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더럽혀진 옷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겉옷을 걸치고 있는 더러운 성도를 결코 신부로 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오늘은 요한계시록 최종회 시간이다. 우리는 지난 1년여동안 요한계시록강해를 통해 많은 것들을 보았으며 들었고 또한 깨달았다. 특히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명확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종말론을 가지고 미혹하는 온갖 종류의 이단세력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간단하지만 먼저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 얻게 되었던 유익들을 정리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서 얻게되는 보상이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언제 그러한 보상을 받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보상을 받게 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똑같이 누리는 보상이 있지만 차등상급이 있다는 것도 염두해두어야 할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면 과연 어떤 자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나도 그러한 부류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 이제 요한계시록 마지막 강해 안으로 들어가보자.

 

1. 들어가며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하나를 고르라면 어떤 책을 고를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계시록책이 아닐듯 싶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성경책 중에서도 결론의 책이요 완성의 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미래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위해 달려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 책 요한계시록은 확실히 그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너무나 중요한 이유는 이 책에는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받으며, 구원받은 후에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무엇이지를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해부터 약 1년 2개월에 걸쳐, 매주 요한계시록강해를 진행해왔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마지막 번째 시간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51강을 통해서 요한계시록 책을 통해서 얻게 되었던 유익을 살펴본 뒤에, 천국에는 과연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게 된 자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보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어떤 강해보다도 오늘 강해는 함축적이고도 확실히 정리하는 강해가 될 것이며, 오늘 강해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로 볼 수 있는 눈들도 같이 열리게 될 것이다.

 

2.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서 그동안 얻었던 유익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놀라운 첫번째 유익은 하나님이 누군지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하나님은 세 분이었다. 천국에 하나님의 보좌가 3개 있으며 거기에 세 분의 하나님이 앉아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들 중에서 한 가운데 앉아 계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노인처럼 그려놓았음), 오른쪽에 앉아계시는 분은 성자 예수님(젊은이처럼 그려놓았음) 그리고 왼쪽에는 비둘기모양의 성령님이었다. 그런데 천국에는 과연 하나님의 보좌가 3개일까? 아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 한 중앙에 단 한 개의 보좌만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보좌에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흰 옷입은 가슴에 금띠를 두르신 인자같은 한 분을 만나게 된다(그런데 이분은 흰 머리를 지니셨다.계1:14). 그런데 그분이 누군지 금새 공개된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b~18)" 그렇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인데,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다. 그분은 밧모섬에 갇혀 있는 사도요한에게 편지를 쓰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 편지를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일곱교회의 편지(계2~3장)에 당신자신을 소개하는데, 두아디라교회에 가서는 당신을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신다(계2:18)"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다가 하늘로 가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4장부터 20장까지 그분은 인자같은 이로 나타나지 않고,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뿔이 일곱개 달렸고, 눈이 일곱개 달렸다)(계5:6). 그리고 계21~22장에서 비로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나 예수"라고 말씀하신 그분이다(계22:16). 그런데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1:6)"이라고 소개하신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21:5). 그렇다. 지금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계시는 것이다. 그분은 계1:8에서 당신 스스로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계1:8)"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분은 "주 하나님이시며,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이시다(계1:8). 그렇다. 예수님이 주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전능자이시다. 예수님이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도 장차 올 자인 것이다. 그분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지금 보좌에 앉아계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상의 하나님에 관한 완벽한 증언이다. 이러한 한 분 하나님을 모르니, 이단이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을 따로따로 떼어서 이야기하다 보니, 어머니 하나님(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 이단이 나오게 되고, 하나님의 어머니(마리아)(로마카톨릭)이 이단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소개(계1:4~6)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서 그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분은 한 때, 충성된 증인으로서 죽은 자들 가룬데에서 먼저 나셨다(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그리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피를 온 인류를 해방시켜주셨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만드셨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인데, 그분이 바로 어제도 계셨고 지금고 계시며 장차오실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두번째 유익은 오늘날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마땅한지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일곱교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유형의 교회를 소개해주셨다. 그중에는 칭찬만 들었던 교회(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가 있었고, 꾸중만 들었던 교회(라오디게아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칭찬만 들었던 교회(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에는 공히 2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그 교회 안에 사탄의 회당인 유대인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 교회에게만 면류관을 쓸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교회는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할까? 그것은 서머나교회요 빌라델비아교회다. 서머나교회는 환난과 고난 중에서 믿음을 지킨 교회요,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교회였다. 우리도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하리라.

  이어 세번째 유익은 종말론에 관해 여러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그것들 중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더욱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5가지 정도가 그렇다.

  첫번째로는 말세에 과연 이스라엘민족이 회복될 것인지 그리고 현재의 예루살렘 성에 과연 제3의 성전이 세워질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육적인 이스라엘민족이 회복될 수는 있를른지 모르지만, 말세에 제3의 성전은 결코 세워지지 아니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그것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제3의 성전이 예루살렘 세워진다는 것은 구원의 경륜을 거꾸로 되돌리는 일이 되므로 절대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요, 예수께서 오셔서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요19:30).

  두번째로는 말세에 짐승인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인지 그리고 그 사람에 의해 단일정부가 탄생하고 베리칩을 동원하여 온 세계 사람들을 조정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말세에 짐승이 분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짐승은 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로부터 하나님 이외에 우상을 숭배케 하는 세상제국의 왕들이 있어왔다. 그들에 의해 우상을 숭배한 자들에게 짐승의 표가 주어졌고 그 댓가로 상업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는 베리칩이 아니라 우상숭배자들에게 사탄이 영적으로 자기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표식에 해당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마에 인치는 것을 본받아 행하는 일들로서, 창세이후부터 주님오실 그날까지 계속될 일이다(계13:8,17:8). 그러므로 베리칩종말론자들이 외치는 것처럼 짐승인 적그리스도는 미래에 등장하게 될 불신자적인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우리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있을 것인가가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24:39~41의 말씀처럼 우리 주님은 환란후에 오신다는 사실이다. 환난난휴거설은 단 한 개의 결정적인 성경구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환난후휴거설은 마24장 종말장에서 이미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요한계시록에서도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일곱나팔재앙가운데 일곱번째나팔이 울려퍼질 때에 오시기 때문이다. 일곱인재앙은 재앙이라기보다는 그때부터 앞으로 되어질 미래에 대한 간단한 소개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일곱째인을 뗄 때에 차례대로 울려퍼지게 될 일곱나팔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재앙에 해당한다. 그리고 첫째와 둘째와 셋째와 넷째 나팔 재앙은 지해강천 곧 땅과 바다와 강과 하늘의 자연에 내린 재앙이라면, 다섯째와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 재앙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재앙으로서, "화화화"라는 독수리의 음성으로 선포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화에 해당하는 일곱번째 나팔재앙 때에는 알곡성도들은 재앙에서 보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주는 것으로 미혹하는 음녀에 속한 자들과 불신자들은 고스란히 일곱번재 나팔재앙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일곱개의 대접재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전부다 짐승의 치하 내지는 짐슴의 보좌에 내리는 재앙이다.

  이어 네번째로는 우리 주님의 재림 이후에 과연 이 지상에 천년왕국이 건설될 것인지가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이단인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나 신천지 그리고 여호와증인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계열의 교단들은 천년왕국이 지상에 건설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다 미국에서 건너온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중세 로마카톨릭이 로마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외치는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위한 작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지상에 천년왕국은 절대 없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4~20장에 나오는 표현들은 거의가 상징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년왕국에서 천년동안 왕노릇할 자들이 누구며 언제 있는지에 대한 계20장의 말씀이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이후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어 천국에 가셨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구약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낙원에서 천국으로 한꺼번에 옮겨졌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참된 성도들은 죽을 때에 첫번째 부활에 참여하여 즉시 생명의 부활을 입고 부활체로서 천국에 곧장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여섯째인을 뗄 때에 이미 천국의 향단제단 아래에서 호소하고 있는 순교자들의 기도를 소개함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성도가 있음을 무려 7차례 이상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계20장에 나오는 첫째부활이란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모든 믿는 성도들의 개인적인 부활을 일컫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있게 될 둘째부활전까지 모든 성도들은 다 첫째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 들어가 왕노릇하다가 주님의 재림시에 철장권세를 가지고 같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란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이 하늘에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거기에서 천사들 위에 왕노릇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일 뿐, 실제 지상에서 천년왕국이 실현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하지만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믿는 사람은 자기가 갈 길을 갈 것이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중에 끝날에 보면 무엇이 진실이었는지가 분명히 판가름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요한계시록강해를 통해 많은 영적인 비밀들과 진리들을 많이 수확하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에다가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이 받게 될 보상(상급)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얻게 되는 보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받게 될 보상 혹은 상급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받게 되는 보상 혹은 상급은 언제부터 주어지는지를 살펴보자. 천국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개인적으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경우다. 그리고 또 하나는 둘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우주적으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경우인데, 이때는 그때에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체를 입을 것이고 이어서 살아있고 남아있는 자가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하늘과 새땅인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첫째부활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둘째부활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받을 상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이때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고 있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이후에도 자신의 그 영광을 그대로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 그것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둘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직후 공중으호 휴거되어 아마겟돈전쟁에 참여한 후 천국의 보상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의 보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전부터 받느냐 아니면 나중에 받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천국에서 받는 보상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보상을 받고 있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철장권세를 가지고 인류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전쟁(혹은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요, 둘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먼저 아마겟돈전쟁에 참여하고 천국 안에서 누리게 될 보상을 받게 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계2:26~27).

  그렇다면, 첫째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의 보상을 받든지 둘째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의 보상을 받든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이 받는 보상이란 대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은 공통적으로 누리는 것들도 있고 각각 따로 누리는 것들도 있다.

  먼저 공통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들부터 살펴보자. 첫째로, 전부다 이 세상의 수고를 그치고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계14;13, 6:11, 7:16~17). 천국에서는 더이상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배고프지도 아니하며, 아프지도 아니하고, 죽지도 아니할 것이다. 육체의 수고를 그치게 쉬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쉼에는 일곱나팔재앙 재앙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둘째로, 천국에서 왕노릇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계5:10, 20:4,6, 1:5). 이것은 누구는 왕노릇하고 누구는 왕노릇을 못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면다 왕노릇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천국에서 왕노릇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으로 창조된 자신의 천사들을 부린다는 의미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적어도 2명의 천사들이 따라붙게 된다(마18:10). 한 명은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가 하나님께 보고하고 그가 기도할 때에는 기도를 담아다가 하나님께 보고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천사는 그 사람을 일평생 보호하는 일을 한다. 이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를 지켜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되면, 그가 죽는 순간 두 명의 천사는 그를 붙들어 천국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영원히 그 사람의 종으로 섬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수고할 필요가 없다. 천사에게 일을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왕처럼 통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치고 왕노릇하지 않은 성도들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셋째, 이것들 외에도 여러가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는 것(계2:7),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것(계2:11), 감추었던 만나를 먹게 되고 흰 돌을 받아 죄없음을 인침받는 것(계2:17), 흰옷을 입게 되고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지워지지 아니하는 것(계3:5),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어 절대 천국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는 것(계3:12), 예수님과 정찬을 먹기도 하고 주님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는 것(계3:20~21)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시에 주님과 동행하여 철장권세를 사용하는 것도 있다(계2:26~27).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더라도 각기 따로따로 누리는 것들도 있다. 이것은 영광의 차이요, 면류관의 유무의 차이이며, 천국집의 크기의 차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주님께서 행한대로 갚아주신다는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이는 각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예수께서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리도록 각기 다른 상급을 주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계22:12)" 그런데 이러한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 때에도 말씀하셨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그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그러므로 천국에서도 차등상급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서 공통으로 누리는 상급(보상)이 있지만, 각기 다르게 누릴 차등상급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때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이니라(마18:4)",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크니라(마11:11)",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특히 누가복음 19장의 므나의 비유를 보면, 다 똑같은 한 므나를 받았지만 얼마를 남겼느냐에 따라 열고을의 권세를 차지할 자도 있고, 다섯고을의 권세를 차지할 자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눅19:11~27).

  이러한 상급의 차이첫째, 사도바울은 고전15장에서 영광의 크기의 차이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 별의 영광과 별과 별의 영광이라고 했다(고전15:41). 어떤 사람은 해의 영광을 차지할 자도 있겠지만 어떤 자는 희미한 별의 영광을 차지할 자도 있을 것이다. 둘째,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은 그것을 면류관의 유무의 차이라고도 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죽을 때에 자신에게 면류관이 씌여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딤후4:8). 그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끝나는 날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이다(딤후4:7). 그리고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말을 빌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 가운데 핍박과 고난을 이겨낸 서머나교회(계2:10)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빌라델비아교회에게 면류관의 축복을 받게 될 것(계3:11)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천국집의 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면서 아버지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거처를 준비해놓고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예수님이 직접 우리가 거할 집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천사들이 다 짓는다), 우리가 거할 집은 우리가 행한대로 천국에서 고스란히 집의 크기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천국에 가면 천국성도들이라도 각기 다른 영광이 있다는 것을 금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면류관을 쓴 성도들이 가장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집의 크기를 통해서 그가 이 지상에 살 때에 얼마나 충성했나를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4.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상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들어갔을 때에 더 큰 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방법을 4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죄를 짓더라도 즉시 회개하여 먼저 죄부터 용서받는 것이다(계22:14). 즉 자기의 두루마기(겉옷)을 빨아야 하는 것이다. 죄를 짓게 되면 천국집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죄를 지어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자는 천국에 가서도 자기 집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

  둘째, 사탄과 짐승에 의한 핍박(환)과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계6:9,7:14, 17:2,6).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다(계14:12). 믿음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기꺼이 목숨이라고 내놓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계12:11, 13:15, 20:4).

  셋째,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다(계3:8).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맡겨진다고 하더라도,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땀흘려 수고할 때도 있을 것이고, 참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손해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묵묵히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은 절대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계13:15, 20:4).  사탄마귀는 우상숭배와 온갖 미혹을 통해 성도들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사탄이 주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탄은 언제라도 짐승들(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을 통하여 명예와 권력, 돈과 인기, 쾌락과 음란을 주겠다고 유혹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결국 천국에서 상얻는 방법이란 한 마디로 회개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 붙들고 그분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8월 8일(수)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