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분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대체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만 예루살렘 입성 대열에 자신도 합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아 그동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만을 연상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그 옆에 있는 제자들과 무리들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대체 이들은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에 예수님과 함께 입성하는 영예를 안은 것인가? 그리고 이들은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성도들의 어떤 예표가 되는 것인가?

 

2022-04-10(주일) 주일낮1부예배

제목: 곧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막11:1~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FROKwuxchds [혹은 https://tv.naver.com/v/26214709 ]

 

1. 들어가며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다. 이유인즉 하늘의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마16:1~3).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우리는 과연 분별하고 살고 있는가? 지금 우리 시대 가운데 커다란 2가지의 사건이 진행 중에 있다. 하나는 2020년 2월부터 코로나 전염병 사태가 터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국가에서 경제 활동에 제제를 가하고 예배 행위를 통제함으로서, 정부가 허락한 인원수만큼 예배해야 하는 전대미문의 교회 제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에 의한 매매 행위 통제 시스템의 예행 연습 같이 보이며, 교회적으로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시험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월 24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벌써 47일째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나 경제 제재를 위한 전쟁은 아니다. 에스겔 38~39장과 요한계시록 20:7~10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의 서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시간대의 끝부분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지나가면 성도들이 핍박을 당해 순교자 배출하는 시기로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어떻게 준비하고 예비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자들은 곧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들의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2. 초림의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와 함께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셨는가?

  그렇다면 초림의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는가? 당시 예수께서 누구와 함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는지는 공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다 나온다. 그러므로 그때의 그 모습을 보다 더 생생하고 자세하게 알 수가 있다. 종합해 보면, 그때 예루살렘 성 안에 예수님과 더불어 들어간 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제자들' 그룹이다.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명령을 받아 수행하고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의 그룹이다. 이 그룹은 또다시 두 그룹로 나눠진다. 한 그룹은 저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그리고 예수께서 현재 계시는 벳바게에 오기 직전까지 따라온 자들이다. 특히 이들은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을 목도하여 따라온 그룹이다. 이들은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 확실히 메시야인 것을 믿고 따라온 자들이다. 그리고 또 한 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왔으나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무려 3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감람산의 벳바게까지 마중 나온 무리들의 그룹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그룹의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3. 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님의 동행자들을 눈여겨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루살렘 입성 기록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는 당시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에 대한 반응 기사가 하나 더 나오는 거기에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때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온 무리들 중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걱정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선생님, 당신의 제자들을 엄히 꾸짖으소서(눅19:39)" 그럼 왜 그랬겠는가?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일들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곧 제자들이 어린 나귀를 준비하여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깔고 예수님을 앉게 하였고, 무리들 역시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께서 가시는 길 위에 깔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밭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는 메시야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는 로마인들의 심기를 불하게 만들어 예수님의 길을 막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이 사람들이 이때에 잠잠한다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눅19:40)" 그렇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의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제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마땅하다고 두둔하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기뻐하셨고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4. 초림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재림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초림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나 재림의 예수님의 새 예루살렘 입성은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에 들어가실 때에는 그 성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만을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이다. 초림에는 자기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제자들 및 자신을 환영하는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먼저 악의 무리들을 단하실 것이다. 그고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실 것이다. 그런데 이때도 역시 주님께서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이들만을 데리고 들어가실 것이다. 그런데 초림 당시에도 예수께서 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소수였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약 12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림 때에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처럼 말이다. 그리고 자기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한 자들도 역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 사건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성 입성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초림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때 데리고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보고 훗날 증인이 되라고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신 후에 천국에 들어가실 때에는 그분은 이제 인류의 구원 사역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그분은 이제 영원히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악의 무리들을 단한 후에, 당신을 믿고 따랐던 신실한 이들에게 상주시기 위해서 데리고 들어가실 것이다. 즉 그러한 자들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도록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어떻게 행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시는 것이다. 

 

5. 장차 누가 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장차 주님이 재림하셔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 사람은 대체 누군가? 그들은 바로 당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간 자들이 예표가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처럼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 그들과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제자들 그룹이 거기에 들어갈 것이다. 이 그룹은 주님이 특별히 쓰시는 '사명자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당신이 지명하여 뽑으셨기 때문이며 순간순간마다 그들에게 특별 사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 명령은 이렇다. 벳바게 건너편 마을로 가서 사거리 위 바깥쪽 문 바로 앞에 매여 있는 나귀, 그것도 아직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았던 어린 나귀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는 첫 번째 그룹이다. 이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고 이 땅에 파송된, 주의 종들의 그룹을 가리킨다. 이들은 그러한 일을 하도록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일이 없는 나귀를 찾아내어서 주님께 붙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들을 발견해 내어 주님의 새 예루살렘 입성시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에 예수님을 태워 드린 나귀는 때묻지 않은 신부 그룹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결한 영혼을 지켜 온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오직 그날 예수님을 당신의 등허리에 태우기 위해 준비해 온 자들이고 그날을 기다려 온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해 흠없이 자신을 간수해 온 자들이다.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순결한 영혼들을 찾아내고 데려와서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예비케 하는 것이 그 사명인 것이다.

  둘째는 자기의 겉옷을 바친 그룹이 그 성에 들어갈 것이다. 이 그룹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린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주님이 가시려는 길 위에 자신의 귀한 겉옷을 기꺼이 깔아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신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준비한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하셨다(계19:7~8). 그렇다. 이렇게 자기의 겉옷을 바친 그룹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자기들의 귀로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믿게 되었고 받아들였기에,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한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서는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의 예표는 이미 열왕기상 1장에도 등장한다. 그때 유대인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은 제일 순위는 역시 솔로몬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할 때에도 그가 왕의 노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이야로 다윗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셋째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노래 부르던 그룹이 그 성에 들어갈 것이다. 이 그룹 속한 자들은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으나 드릴 것이 없던 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들은 거기에서 그냥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던 자들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너무 늦게 예수님을 믿어서 주님을 위해서 행함의 열매들을 맺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짧았던 자들이거나, 아니면 너무 늦게 깨닫게 되어서 주님이 오실 때에 미처 자신의 행위를 드릴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이 그 순간에 주님을 환영하고 기뻐하며,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고 싶어했던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길가의 밭에 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주님을 환영한 것이다. 그것이라도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밭에 있는 야생 종려나무 가지를 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려나무는 그 세기가 거의 단단한 돌과 같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사실 도끼로 내리쳐도 도끼가 튕겨져 나가고야 마는 나무다. 그렇지만 그들 당시 어떤 연장 없었어도 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 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서는 손에서 피도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님 향한 환호의 마음을 아무도 식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손에도 역시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입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즉 메시야를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시편 118:25~26절의 말씀이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줄곧 3Km를 따라가며 앞서거니 서거니 하면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장차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 자들이 될 것이다. 

 

6. 나오며

  결국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장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예수님의 '개선 행진'과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가 도시에 입성할 때에도 도시의 시민들이 자신의 겉옷을 깔아 장군의 전쟁 승리 소식에 기뻐하면서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도시의 시민들이야 일종의 의무감에서 그렇게 한 것이며 또한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찬송하는 것을 결코 막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그러한 자들이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는 사명에 순종함으로써 그날을 잘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땅에서 주님께 자신의 순결한 영혼을 바치려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사람들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이런 자들도 역시 천국에서는 예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배하고, 또한 보좌 가까운 곳에서 더 가까이 자기의 집을 짓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준비한 자들 역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거룩한 천국 예배에 참석할 것이다(계15:2). 그리고 미처 주님께 드릴 만한 행위의 열매들을 준비하지 못했어도, 자신의 온 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높여 드린 자들도 역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그룹들 중에 과연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는가? 이제는 이것을 자신에게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떻게 그날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물어보라.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할 일을 성령으로 가르쳐주실 때에 그 명령에 순복하자. 오, 영광스런 그날이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자신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곧 그날이 우리에게 올 테니까...

 

2022년 04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예수께서 이제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분을 맞이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특히 목요일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유월절을 하루 앞당겨 지키셨다. 그리고 유월절을 폐하신 후에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유월절과 성만찬은 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길래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을까? 그리고 이제는 성만찬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지 지키라고 명하셨을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드리는 주일예배와 유월절은 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오늘은 이것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살펴볼 것은 유월절규례와 출애굽과의 관계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출애굽의 첫관문이었다. 유월절을 지킴으로 출애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에 있어서 유월절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를테면 오늘날 유월절을 통과하지 않는 성도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과연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그것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자기백성을 얻으시고 그들을 탈출시키고자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탈출의 첫관문이 바로 유월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월절의 핵심요체는 무엇일까? 출12장에 보면, 유월절규례가 나온다. 거기에 보면 유월절에는 반드시 해야 할 2가지 일이 있었다. 한 가지는 어린양의 피를 집문에 바르는 것이요, 또 하나는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월절에는 바르고 먹는 것이 핵심이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민간력으로는 7월이었던 그 달을 종교력으로 1월로 바꾸라고 명하셨다. 이는 유월절이 뭔가 시작을 알리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그달 10일에 각 가족마다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 유월절에 사용할 어린 양 한 마리를 취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14일날 해질무렵(오후3시~6시)에 그 양을 잡으라고 하셨다. 그때 집안의 가장은 그 어린양의 피를 양푼에 담아 우슬초로 찍어 자기 집문의 좌우설주와 문인방에 바른다. 그리고는 그 어린양의 고기와 내장을 깨끗히 씻어, 어린양의 피를 바른 그 집 안에 들어가서 그 밤에 그 양고기를 다 먹는다. 남기면 안 된다. 그래서 양 한 마리당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 여럿을 모으라고 한 것이다. 아마도 아들내외와 딸내외까지 합치면 한 12명 정도가 양 한 마리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양고기를 먹을 때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2가지 있었다. 하나는 먹기는 먹되 날 것이나 삶아서 먹지 말고 구워서 먹으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곁들일 음식으로는 무교병과 쓴나물을 사용하라고 하신 것이다. 혹 그 다음날 아침에 고기가 남았으면 다 그 불로 다 태워버리라고 했다. 이것이 유월절 규례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왜 그렇게 지켜야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 다음날 새벽에 이르러 그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유월절이 끝나는 다음날 새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도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서 어린양의 피를 자신의 영혼에 발라야 한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를 무교병과 쓴나물과 아울러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

  이러한 유월절의 2가지 규례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꼭 2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이 유월절 어린양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사도바울은 그 유월절 양이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고(고전5:7), 인류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도 예수님에게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2사도들의 하나였던 사도요한도 환상중에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계5:6). 그렇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때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는 곧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크게는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죽음의 신이 지나갈 때에 그 집을 넘어가게 하는 표시였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보호된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죄없는 어린양이 죽을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우상숭배와 같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고기를 그날밤에 전부다 남김없이 먹으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 다음날 새벽에 많은 짐을 지고 애굽을 탈출하되 바로의 군대로부터 멀리 떠나기 위함이다. 만일 충분한 고기를 섭취하지 못했더라면 그후로 줄곧 3일길을 광야로 도망쳐야 했는데, 아마도 기진맥진하다가 낙오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했으면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에 붙들려 죽임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밤에 어린양의 고기를 먹되 충분히 먹어야 했다. 오늘날 성도들도 사탄의 제국인 애굽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고기 즉 예수님의 살을 충분히 먹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식인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기에(요1:14),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섭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때 2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었다. 하나는 구워서 먹으라는 것이었는데(출12:8~9),  이는 당시 이방종교를 섬기는 자들이 고기를 날 것으로 먹고 있었고 애굽인들은 삶아서 먹고 있었기에, 주님께서는 이방종교나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의 방식대로 고기를 먹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을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는 이방종교의 풍속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 주님께서 시키신 방법대로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구도자 예배는 바르게 말씀을 먹는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집에서 인터넷으로 설교듣고 구좌로 인터넷뱅킹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예배방법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누룩을 제한 누룩없는 빵을 먹어야 하고 쓴나물을 먹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빵에 누룩을 넣지 말라 하심은 잘못된 교리나 가르침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쓴나물을 먹으라 하심은 입에서는 쓰는 말씀이라도 뱃속에 들어가서는 양약이 되는 것이므로, 교훈과 책망의 말씀을 달게 받으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교훈(가르침)과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이었다(마16:6,12).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잘못된 교리가 얼마나 주일날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칼빈주의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베리칩종말론, 신사도와 빈야드운동, 잘못된 거짓 예언과 환상 같은 유의 말씀들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 들어온 누룩들이다. 이것을 먹으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출애굽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유형을 살펴보라. 위로하는 말씀으로 가득한가? 아니면 책망하여 영혼을 수술하는 말씀으로 가득한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고 수술하기 위해서는 쓴디쓴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그날 저녁 예수께서는 그날까지 이스라엘백성들이 지켜온 유월절을 끝내시려 작정하였다. 왜냐하면 그 다음날인 유월절 당일에 당신이 직접 유월절양이 되시어 피흘려 죽으시고 당신의 살을 인류에게 공급해주시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자자손손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성만찬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그때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떡은 당신의 몸을, 포도주잔은 당신의 피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월절이 그날저녁 성만찬으로 계승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성만찬은 고스란히 주일예배시간에 재현되고 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도 주일에 모여,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 그리스도의 피로서 용서를 받고 있고,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약의 성만찬은 유월절의 성취이며, 지금 우리들이 드리는 주일예배는 영적인 유월절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주일예배를 드림으로서 이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의 순서나 형식을 함부로 바꾸려하지 말라. 그것이 말씀을 먹는 주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일예배 순서에는 반드시 참회시간과 말씀선포의 시간이 들어가야 한다. 회개와 말씀이 빠진 예배는 더 이상 유월절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선포되는 말씀에 잘못된 교리나 가르침이 끼어 들어가게 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책망과 훈계와 교정의 말씀이 혹 선포된다하더라도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구도자예배는 확실히 예배가 아님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예배는 어린양의 피로 용서받은 자가 참여하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형식도 함부로 바꾸려하지 말라. 다시 말해 날 것이나 삶아서 먹는 이방인의 말씀섭취방식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인터넷예배가 과연 왠 말인가?

  유월절을 제정해주시던 그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하셨다. "이것은 영원히 지킬 규례로서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12:14)" 그렇다. 우리는 오늘날 성만찬예전과 주일예배를 통해 유월절을 승화발전시켜서 계속 지켜야 한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회개생활과 말씀을 듣는 시간을 빼먹지 말아야 한다. 회개와 말씀듣는 시간을 최고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애굽을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즉 천국까지 지치지 않고 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매주 선포되는 말씀을 잘 섭취하여 끝까지 자기에 당한 경주를 경주함으로 천국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