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2)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과 사명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가?(행21:1~16)_2023-01-03(화)

https://youtu.be/sDO6bFyCA0A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44 ]

1. 사명자는 언제 사명이 주어지는가?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의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이다(갈1:15).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낸 자들 중에는 특별히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다. 적어도 30대 정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라는 것이었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하도록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고 알려 주었다(행9:15). 그랬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으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설 때에, 주 예수께서 그에게 홀연히 나타나셔서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 땅에는 사명자가 있다. 사명자에게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 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그 길을 걷게 하시기 때문이다. 

 

2.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 이후에 어디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갔는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한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바울은 밀레도에서 고스로 다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륙하게 된다. '두로'라는 도시는 수리아의 아래쪽에 위치한 세계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그래서 배에 짐을 싣고 내려야 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시간 동안 약 일주일을 그곳에서 보낸다. 그리고 돌레마이를 지나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바울은 거기에서 예루살렘교회의 초기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복음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간 후 거기서 다시 얼마 동안 지내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3.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가?

  그런데 바울은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예언을 듣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두로에서는 어떤 제자들이 바울에게 영을 통하여 말하기를, 예루살렘 안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였다. 아마도 바울의 신변에 어떤 위험한 일어날 것임을 환상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 80Km 떨어진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은 예언이 아니라 어떤 선지자를 만난다. 그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선지자로서, 과거 30년 전에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에 와서 천하가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던 바로 그 선지자였다(행11:28). 그의 이름은 '아가보'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정말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 그때는 A.D.46년경이었다. 그런데 다시 30년이 지나 그 아가보 선지자가 가이샤라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들과 발들을 묶었다. 그러고는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는 말과 더불어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예언이었다(행21:11).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았던 것을 실제로 재현함으로,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바울의 결박과 체포 그리고 환난이 앞으로 확실히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4. 두로와 가이사랴의 예언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어떤 것이 잘못된 예언인가?

  바울은 두로에서도 믿음의 형제들을 만났다. 특히 환상을 보고 말할 줄 아는 은사를 받은 형제들을 거기에서 만났다. 그때 그들 형제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과연 옳은 예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옳은 예언이었는지를 우리는 바울이 가이샤라에 도착했을 때 아가보 선지자가 했던 예언을 통해 비교해 보자. 아가보는 바울에게 어떻게 예언했는가?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그대로 직역해 보겠다. "성령께서 이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인들이 이와 같이 이 띠가 있는 바 그 남자를 결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방인들의 손들 안으로 넘겨줄 것입니다(행21:11)" 그렇다. 아가보 선지자는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로의 형제들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 바울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미숙한 예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예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잘못된 예언을 한 것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예언을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미숙하다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가보 선지자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던 바른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5.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받은 후 자신의 사명과 그것을 어떻게 연결했는가?

  그때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포기하고 말았는가? 아니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그에게 한 예언은 성령께서 주신 예언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맞다. 그들이 받았던 것도 역시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예언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러한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줄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의 길을 그대로 걸어갔던 것이다. 예언이란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어느 부분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해 주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말했던 고별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걸어갈 길이 사명으로 미리 주어진 채 있는 것이다. 고로 그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환난이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그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이 사명을 가로막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예언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있으므로 그날을 마음으로 잘 준비할 수가 있을 것이다. 

 

2023년 01월 03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0) 바울의 고별설교(1)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4가지는 무엇이었나?(행20:13~27)_2022-12-29(목)

https://youtu.be/nbgKGxZkYN0  [혹은 https://tv.naver.com/v/32116058 ]

 

1.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에 도착하여 행한 것은 무엇인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드로아를 지나 밀레도에 도착했을 때 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청하는 일이었다. 밀레도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로서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45Km 떨어진 곳에 있다.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 이곳 항구도시에 정박해 있을 때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그곳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에베소는 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약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던 곳으로서,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였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에서 최초로 두란노 서원이라는 선교센타를 운영하여 선교사를 훈련하여 각 지역으로 파송한 바 있다. 

 

2.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무엇을 말했는가?

  바울이 이때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무엇을 말했을까? 우리는 이때 바울이 말했던 것을 한 마디로 바울의 '고별설교'라고 부른다. 그럼, 바울은 이때 무엇을 전했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이 거기에서 어떻게 복음 전파를 했는지를 말했고,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을 전했다. 이때 바울은 먼저 자신이 에베소에 들어가서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지와 거기에서 전했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전했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각오와 자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것은 자신에 관한 언급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을 전했다. 그들이 어떻게 교회의 감독자가 되었는지 기억하고 감독자로서 양떼를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이단에 대한 경계와 아울러 기독인들의 바른 삶의 자세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3. 바울이 밀레도에서 행한 고별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바울은 적어도 3번의 설교를 했다. 첫 번째는 1차 전도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했던 설교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2차 전도여행 중 아덴에서 행한 설교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에서 행했던 이번의 설교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설교는 상당히 구별된다. 왜냐하면 안디옥에서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설교였고, 아덴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설교였는데, 이번 밀레도에서 전한 설교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설교가 아니라 에베소의 장로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목회설교를 한 셈이다. 그러니까 앞의 두 번 설교가 전도설교였다고 한다면, 뒤의 한 번의 설교는 목회자들을 위한 훈련과 권면의 설교였던 것이다. 

 

4. 바울이 이때 전했던 4가지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의 설교 가운데서 가장 무르익은 설교를 하나 고르라면, 우리는 응당 밀레도에서 행한 고별설교를 들 수 있다. 바울은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다 놓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였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복음과 교회 생활에 대해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그가 회고하면서 전했던 말씀을 보면, 복음의 핵심 4가지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크게 보면, 영육 간에 유익한 것을 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회개'와 '믿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관한 메시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때 유대인들과 헬라인 둘 다에게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전했던 것이다.

  첫째, 바울은 그들에게 '회개'에 대해 언급했다(행20:21). 이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리킨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한 삶을 살았던 것을 회개하라고 권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때 바울이 전한 회개는 구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회심으로서의 회개와 자백으로의 회개를 전한 것이며, 그것을 내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상숭배'에 대한 회개와 '자범죄'에 대한 회개를 전한 것이다. 우상숭배의 죄도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함으로서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회개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저주 가운데서 해방되는 회개를 전한 것이다. 

  둘째, 바울은 그들에게 '믿음'에 대해 언급했다(행20:21). 이는'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믿음을 전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이신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주 하나님 자신이요, 한 분 하나님의 표현이시다. 그렇다면 그분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것은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피를 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는 아담 이후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흠없는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흠없는 제물로서 사람이 되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피가 없이는 속죄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피 흘리심으로 죽으신 것이다. 

  셋째, 바울은 '나라(왕국)'를 전했다. '하나님의 나라' 곧 예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에 대해 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두 종류가 있다. 상태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공간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상태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실현되는데,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쫓겨남으로 실현된다. 그리고 장소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은 후에 장차 들어가게 될 공간적인 천국을 가리킨다. 

  넷째, 바울은 '하나님의 뜻(의도, 계획, 경륜)'을 전했다. 여기서 뜻이라는 단어는 '쎌렘마'(뜻, will) 가 아니라, '불레'라는 단어로서, 이는 뜻과 의지 그리고 의도와 목적, 계획과 경륜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는 바울이 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게 되셨는지를 그 근본 의도와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에게 상속시켜 주고자 함이다. 이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는 만세 전의 계획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거기에서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아 왕 노릇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것이다. 

 

5. 오늘날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과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과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회개를 잘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이 회개요,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비결도 회개인데도 사람들은 회개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으로서,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도 모르며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잘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경륜)에 대해서도 잘 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우주 경륜에 대해서 전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복에 대해서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바울이 전한 순수하고 위대한 복음이 회복되고 온 세상에 그 복음이 전파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2022년 12월 2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89) 왜 초기교회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을까?(행20:7)_2022-12-28(수)

https://youtu.be/gKQaVxqPWGY  [혹은 https://tv.naver.com/v/32115854 ]

 

1.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어느 요일에 모였는가?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에 있을 때 드로아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모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시만 해도 주일은 쉬는 날(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낮에 일하고 밤에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그때 바울은 어느 성도의 집 3층 다락방 안에 모여서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던 것이다. 

 

 

2. 안식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주일에 예배 모임을 가지면 안되고 꼭 안식일(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다. 이름하여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다. 그런데 이들이 믿고 있는 교리를 보면, 문제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구원론과 안식일 준수는 상당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대부분의 이러한 교리들이 다 엘렌 지 화이트라는 여사에게서 나왔다라는 것이다. 안식교인들은 엘렌 지 화이트 여사를 선지자라고 믿고 따른다. 이 여사는 안식교를 창시한 죠지 밀러(A.D.1782~1847)의 부인인데, 죠지 뮬러가 죽자 그 배턴을 이어 받은 자로서, 이 여사가 말한 것들은 거의 성경처럼 믿고 신뢰하며 따르고 있다. 사실 죠지 뮬러는 1844년 10월 22일에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하지만 그때 오시지 않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셨고 거기에서 천국에 들어올 자를 가르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름하여 '조사심판'이다. 안식교인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되면 결국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사심판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다. 

 

3. 안식교(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구원론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안식교인들의 구원론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식일 준수와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고, 계명(십계명)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특히 계명들 중에서 제4계명 곧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면 짐승의 표인 666표를 받아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지만 계명들을 준수하지 못한 자는 조사심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생명(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조에')을 얻고 죄사함을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아무리 계명을 준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생명을 얻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뿐이다.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믿고 계명도 준수해야 구원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구원론이다.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기 때문이다(마4:17, 요3:16, 롬10:8~9, 행16:31). 

 

4. 안식일에 관한 안식교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안식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일종의 생명줄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안식일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가? 그들의 주장을 모아서 살펴보면, 3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안식일은 폐지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이미 폐지되었다(갈4:9~11, 골2:16~27, 호2:11, 히4;1,11). 둘째,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주일을 지키는 자는 태양신 종교를 따라가는 우상숭배자여서 결국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표인 666표가 찍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은 일요일을 태양의 날로 여기지도 아니하며,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다. 주일에 성도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초기 교회는 안식일을 지켰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제정하여, 안식일에 예배드리는 자들을 강제로 일요일예배로 바꿨다는 것이다. 아니다. 초기 교회 중에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였다. 그것은 행20:7의 말씀에도 나와 있으며, 여러 교부들의 어록과 초대 교회가 남긴 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사도행전 강해 88강을 참고하기 바란다). 

 

5.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렇다면, 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눴던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안식일은 한 마디로 모형이고 그림자로서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히10:1,4, 골2:16~17). 안식일의 진짜 실체는 예수님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장차 들어갈 천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히4:11). 다시 말해, 구약에 주어진 안식일은 율법 중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이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야말로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의식법들은 완성되어졌다. 그리하여 폐지된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라는 것은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표요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없다면, 사람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없이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인데도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나 안식일법에 의하면 그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만드신 예수님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안식일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고 규정만을 내세워 사람을 정죄하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른 것인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날(안식일)과 달과(초하루)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과 해(안식년, 희년)를 다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결코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갈4:9~11).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 참된 안식과 평강을 이미 얻은 자들이 다시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율법의 의식법들(할례, 안식일,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이 아니라, 이러한 의식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들은 다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골2:16~17).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안식일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고 성찬을 나눴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구약의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만이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고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321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주니 그날 예배를 드리기에 더욱 편리하여졌기에 일요일인 주일에 예배를 드렸던 것이지, 태양신을 섬긴다는 의미로 일요일에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지, 일요일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다. 또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2022년 12월 2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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