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1)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10)(계19:11~16)_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01)_2022-05-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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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기독론(11)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10)(계19:11~16)

회개와천국복음(정병진) |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1)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10)(계19:11~16)_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01)_2022-05-10(화) https://youtu.be/H7cGO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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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전능하시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라는 뜻은 그분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예수께서도 역시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2.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어떻게 자신이 전능자이심을 나타내셨는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주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3년 반의 공생애를 이 지상에서 사셨다. 그때에 그분은 자신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내셨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에게 찾아온 모든 사람들의 문제 하나라도 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냥 보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분은 당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도 살려 내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말씀 한마디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였으며, 바다 위로 걸어 오시기도 하셨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이기에 낙원에 가 있던 구약의 두 인물들 곧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오실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전능한 분이시기에 이 세상의 임금(왕)인 사탄 마귀를 세 번씩이나 이기셨으며, 사탄을 무저갱에 가두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음부에 내려가셨지만 죽은 지 3일 만에 그분은 스스로 다시 살아나셨으며, 거기에서 걸어 나오실 수가 있었다. 그분은 육체를 입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뜻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못하실 것이 없으시다는 것인데 그것은 대체로 4가지 뜻을 가진 것이다. 첫째는 그분이 창조주이시다는 뜻이다.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만이 없는 것을 창조해 내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분이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분는 못하실 것이 없으시므로 망가진 어떤 것이라도 다시 회복시켜 놓으실 수 있으며, 원래 가지셨던 뜻대로 모든 것을 마무리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주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계1:8)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선언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는 놀라운 표현인데, 이 말의 깊은 뜻은 그분이 시작하시고 그분이 끝내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며, 그분만이 모든 것을 시작하실 수 있고, 그분만이 모든 것을 완성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분이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분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만약 그분이 당신이 만드신 창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수 없다면 그분은 전능한 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분의 손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요 그분의 주권하에 있어야 그분이 전능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분이시다. 넷째는 그분이 심판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뜻에 복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겠지만 만약 그분의 뜻을 거역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를 심판하여 처벌할 수 있을 때에 그분을 전능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어떤 자에게는 상을 주시겠지만 어떤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 바로 이러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4. '주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이 곧 '전능하신 이'이다. 요한계시록과 신약 성경에서는 전능하신 이에 대해서 몇 번 말씀하셨는가?

  신약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이 전능하신 이(전능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말씀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총 10번 밖에 안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능하신 이'에 대한 단어가 요한계시록에서만 총 9번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하나는 고린도후서 6:18에 나올 뿐이다. 즉 신약 성경에서는 주 하나님께서 곧 전능하신 이라고 하는 표현이 오직 요한계시록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분이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라는 표현은 총 7번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다(계1:8, 4:8, 11:17, 15:3, 16:7, 19:6, 21:22). 그리고 나머지 2번은 '하나님 전능하신 이'로만 나온다(계16:14, 19:15).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관한 계시를 담고 있는 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 주는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에 대한 7가지 사용 용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전능하신 이는 주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신 이이시며,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시다(계1:8). 둘째, 전능하신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표현되는 분으로서 거룩하신 분이자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계4:8). 셋째,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왕 노릇하시는 분이시다(계15:3). 넷째, 그분은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분으로서 만국의 왕이 되시며 그분의 길은 의롭고 참되시다(계15:3). 그분이 바로 이 세상의 강을 건너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는 만국의 왕들 위에서 왕 노릇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분은 전능자로서 참되고 의로움으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계16:7). 그분은 재판을 굽게 하지 않으신다. 여섯째, 그분만이 전능자이시기에 모든 만물 위에서 왕 노릇하실 수 있으시다(계19:6). 마지막으로 일곱째,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기에 그분은 어린양으로도 표현되시는 것이다(계21:22). 

 

5. 현재 하늘에 계신 예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어떻게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는가?

  예수께서 천상에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 여실히 증거되고 있다. 왜냐하면 첫째, 그분이 만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소개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이'라고 밝히셨기 때문이다(계3:14). 또한 둘째로, 그분은 구원자요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짐승을 이기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노래를 하는데, 그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10)". 그렇다. 모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골1:16). 그때 그분은 어떤 뜻과 목적을 가지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데, 나중에 재림하실 때에는 그분의 뜻과 목적을 다 이루시고는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계21:6). 그리고 셋째로, 그분은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만물의 통치자이시며(계19:15~16, 19~20), 무엇보다 이 지상의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시며, 동시에 천국에 들어가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하고 있는 이들 곧 천국의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계1:5~6, 15:3). 마지막으로 넷째, 그분은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인자(사람의 아들)가 됨으로 인하여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을 맡으셨기 때문이다(요5:22,27). 그러므로 맨 나중에는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다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25:31~32, 고후5:10, 계20:11~15). 특히 모든 악의 세력들이 장차 한꺼번에 주 예수님께 대항하는 전쟁을 벌일 터인데(아마겟돈 전쟁), 그때에 주님께서는 심판주로 오셔서 그들을 모조리 쳐부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심판주로서 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10일(화)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75세 때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을 보기까지는 약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야 했다. 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더디 성취된 것일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오늘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약속과 그 성취의 비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021-05-14(금) 금요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98) 하나님의 약속은 정한 때와 기한이 있다(창21: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0nCZiPFhYVA  [혹은  https://tv.naver.com/v/20227063 ]

 

 

1. 들어가며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성취될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약속을 하신 다음에 그리고 그것을 이루신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이라도 금방 금방 성취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까지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처야 할 과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삭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과연 언제 성취되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기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지 24년이 지나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은 더디 성취되고 있었다.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한 씨가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약속의 땅도 차지하지 못했으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때도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최초로 성취가 되는데,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약속한 약속의 씨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손으로서, 혈통적으로 적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적자인 자식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첫단추가 꿰어지는 싯점이 바로 이 싯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에게 약속이 주어진 이후 무려 25년이 지난 다음에는 첫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 하나님의 약속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더디 성취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갈대아우르에게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아 장차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하신 것이다(창12:2). 또한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부푼 꿈을 안고 하나님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가나안 땅까지 이주해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야 했다. 처음으로 자식을 본 때는 25년이 흐른 시점이었고,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 때에는 그때로부터 약700년이 더 필요했다. 왜 그랬을까?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직후 아니면 조금 뒤에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아니하고 무려 2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였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성취될 수 있는 준비가 아직 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 약속을 성취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 준비가 되었더라면 그의 나이 99세가 되기 전에 그는 이미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첫 후사로서 이삭의 출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데에는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잊어버린다거나 모른 채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혹 문제가 있다면 우리 인간편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만한 준비가 덜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지 않았던 것이다. 

 

4.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만한 준비가 되었는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아브라함은 그것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지 아니한 일꾼을 쓰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준비되었을 때에 비로소 성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9세 때에 하나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2가지 사항을 말씀해 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첫째는 그의 믿음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에 있지 않았으니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사라는 절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으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창17:1)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안 될 일이 없으며, 하나님만이 또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는 그것이 부족했거나 없었다. 그것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전능자를 바라보게 된다.

  둘째는 자신의 잘못을 그냥 계속 간직하고 있는 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99세가 되기까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열심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한 말씀의 성취가 되어야 하는데, 그는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당신이 하신 말씀만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99세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가 따르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의 의미로서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뒤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그날밤에 즉시 모든 집안의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진정 이전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회개의 행위였고,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을 신뢰하겠다는 표시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실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그때가 언제였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 때부터였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인정하고 회개할 때부터였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해 아직 믿음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함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는 회개가 터지지 않았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왜 내게서 성취되지 않는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약속이 내게 성취되지 않고 멀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그 문제를 헤결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과 회개였다. 이 이 두 가지 사항이 비로소 준비된 것이 그의 나이 99세 때였다. 그리고 사라의 나이는 그때가 89세였다. 

 

5.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팁들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빨리 성취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에 살고 계신다. 그분은 "전부터도 계속 있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계시며,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이기 때문이다(계1:8). 그러므로 그분에게 모든 시간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현재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 뿐이지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속히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기를 한 가득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들이 필요한 것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성경적인 힌트들이 있다.

  첫째, 모든 약속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때가 찼을 때에 비로소 약속은 성취된다는 것이다(갈4:4). 갈4:4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시되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증거한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도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시간이 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참고로 "시간"이란 절대적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시간으로서, 우리가 준비되면 그 시간이 차는 그러한 종류의 시간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룰 수 있는 자 곧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거나 그러한 사람이 출현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깨우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이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얼마나 바라시고 있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깨우치셨는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사람이 어떤 일을 성취한 다음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할 때까지 하나님은 그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99세가 될 때까지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의 아내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도 자기를 통해서는 결코 아기가 태어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회개하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이뤄지기를 희망하는 자들은 회개를 잘 해야 한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 두가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그만큼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성취되는 듯 하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빨리 그 약속을 성취하고 싶어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복을 받을 준비가 우리에게 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했던 약속을 곧바로 성취하지는 않으신다. 복을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시기는 그가 부름받은 때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싯점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왜 내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는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따질 필요는 없다. 그건 내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자신의 뒤를 신중하게 뒤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어디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살피고는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간만 흘러갈 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성취되지 않고 계속해서 연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진짜 회개를 통해 귀신이 역사할 수 없는 깨끗한 환경을 갖추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잘못된 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고쳐가나고, 준비가 안 된 것은 지금부터라도 차곡차곡 준비한다면 우리에게도 이삭이 출생하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1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97) 아브라함은 왜 그랄왕에게 사라를 또 누이동생이라고 말했나(창20:1~18)_2021-05-14(금)

https://youtu.be/byvnX9jinf4  [혹은 https://tv.naver.com/v/20206397  ]

 

1. 아브라함이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한 때는 언제였나요?

  아브라함이 그랄왕 곧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한 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고 난 후 24년이 지난 때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99세 때의 일입니다. 

 

2.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한 것은 벌써 몇 번째인가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한 것은 벌써 두번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던 때에도 그러니까 그의 나이 75세 때에도 한 번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도 역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했습니다(창12:11~13). 그때에는 기근 때문에 애굽 땅으로 내려갔을 때입니다. 

 

3. 아브라함이 두번째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한 것과 첫번째의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아브라함이 첫번째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한 것은 정말 자기 아내 때문에 혹시 자신은 죽임당하고 아내는 살릴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힘이 없어서 비굴하게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랄왕 아비멜렉 간에 나눈 대화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화를 보면, 그랄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부족과 화친을 해보려는 의도에서 사라를 데려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20:4~5). 다시 말해 자신이 사라를 데려간 것은 선의로 데려간 것인데, 왜 아브라함이 나쁜 의도로 그렇게 했는지 서운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창20:9~10). 또한 이후 몇 년이 지나서 아비밀렉이 자신의 군대장관인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서는 자신이 그동안 아브라함을 선대해주었으니 아브라함도 자기와 자기와 아들과 자기의 후손들에게 후대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창21:23).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당시의 최고의 군사력을 지녔던 북방 4개의 연합군(동맹군)은 자신의 종들 318명을 데리고 가서 쳐부수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뭐가 무섭고 부족해서 또 비굴하게 또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겠습니까? 

 

4.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한 것이 아브라함의 비굴함이 아니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방금 위에서도 조금은 살펴보았지만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의 어떤 뜻과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아브라함이 힘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망이 없으며, 아브라함도 회개했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꿈에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이 선지자라고 알려주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창20:7). 셋째, 그 일로 인하여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자신은 선한 의도로 사라를 데려왔는데(정략결혼을 하려고 한 듯이 보임), 왜 아브라함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했는지 섭섭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창20:9~10). 넷째, 그랄왕 아비멜렉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속죄예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찾아와 양떼와 소떼 그리고 남종들과 여종들 그리고 은 천 개를 아브라함에게 속죄예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라를 데려온 후로 자기와 자기의 아내 왕비와 자신의 여종들이 어떤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그리하여 왕의 집과 종들 전체가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이제 아브라함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불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여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게 되었고 회개도 하였으며 심지어 한 분 하나님을 직접 얼굴로 대면하여 만나보기도 하였고 그분에게 중보기도까지 해서 응답을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만일 할례언약이나 롯을 위한 중보기도가 있은 후 수년이 흐른 뒤였다면 모르겠지만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채 2달이 되기 전의 상황이;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이 벌써 떨어져서 비굴하게 그러한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 사라도 늙었고 노쇠하여(시들어서) 별 볼 일이 없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창18:11~12)

 

5.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말하도록 허락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하게 허락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 없는 사라 때문입니다. 사라가 약속의 씨를 잉태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믿음이 없는 사람을 쓰시지 않으며, 회개 안 한 사람을 쓰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혹 한 번쯤은 쓰실 수 있겠지만 그러한 사람을 계속해서 쓰시지는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준비되지 아니한 사람을 쓰시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이때는 약속의 씨에 관한 첫 모형이 필요한 싯점이기에, 사라가 아직 믿음이 없고 부족한데도 억지로 그녀로 하여금 임신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그녀에게 임신할 것을 들려주었음에도 사라는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를 깨우치시고자 그녀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하고, 회개시키고자 이러한 일을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고로 사라에게 믿음을 갖게 하고 사라가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필요했고 어떤 샘플 하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도구가 바로 그랄왕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인 왕비와 여종들의 불임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는 자식을 갖는 데에 아무 문제 없었던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 왕비와 여종들이 사라가 후궁으로 왕궁에 들어갈 때부터 임신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왕과 왕비는 물론이거나 모든 궁중 사람들이 하나같이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어떤 질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창20:17). 그러므로 아비멜렉왕이 속죄예물을 가지고 와서 아브라함에게 드렸고 자기와 자기 아내인 왕비와 여종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아브라함이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을 때에 궁궐 안에 성병이 사라지게 되었고 다시 임신할 수 있게 된 것을 사라가 보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 일이 있은 후에 사라는 진정으로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기를 잉태하고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다시 사라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러자 사라가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창21:1~2). 

 

2021년 05월 14일(금)

정병진목사

 

창세기 18장에 보면, 인간 앞에 나타난 하나님께 사람이 드린 최초의 기도가 나온다. 그때에는 이 땅에 있는 아브라함이 사람으로 자기 앞에 오신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드리는 중보기도였다. 그런데 이때 드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응답이 곧바로 떨어지게 했다. 대체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길래 즉시 응답되는 기도가 될 수 있었을까? 오늘은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기도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자.

2021-05-0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창세기강해(93)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기도의 특징(창18:22~3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6ySQ-GNyd_Q  [혹은 https://tv.naver.com/v/20146245  ]

 

1. 들어가며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리고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다. 그분이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꺼내신 것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신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한 어떤 뜻과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것을 알아차린 아브라함은 즉시 자기 앞에 서계신 한 분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시작한다. 그리고 즉각즉각 응답을 얻아낸다. 대체 아브라함은 어떤 기도를 드렸길래 이렇게 즉석에서 응답받을 수 있었는가? 그의 중보기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우리도 기도를 해야 할 사람들인데 우리도 어떻게 하면 즉각즉각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를 알아보자. 

 

2. 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아브라함에게 꺼내셨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어 음식을 공궤받으신 적은 창세기 18장에서가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드셨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래가 있는지를 물어보고는 반드시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오게 될 텐데, 그때에는 그의 아내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떠나려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두 천사와 함께 한 하나님을 배웅하러 나갔다. 그러자 길을 가다가 멈추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장래의 축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를 불러내신 이유도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에 대해 예고해주셨다. 그성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기에 가서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지금 그러한 사실을 몰라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을까?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 왜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시는가?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요, 거기에 있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는 롯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명의 천사들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떠났다. 그러자 아브라함 앞에 하나님만 서 계셨다. 

 

3. 오늘날 우리의 중보기도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때다 싶어 즉시 중보기도를 시작한다. 사실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아마 이러한 기회는 사람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늘에서 듣고 계신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아브라함의 바로 눈 앞에서 듣고 있는 것이다. 때를 이때다 싶어 아브라함은 즉시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작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를 살펴보니, 응답받는 기도란 대체 어떤 기도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람이 서 있을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대체 어떤 상태가 되었길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는가? 여기에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 오늘날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어떤 경우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서 기도드릴 수 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서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될 수 있게 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지금 하나님의 면전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사실 2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아브라함이 비로소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 12~16장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았던 74세부터 99세때까지 그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아갔다. 그래서 창세기 18장에 와서는 이제 아브라함도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자 전능하신 분에게 간구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누가 과연 하나님 앞에 서서 응답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어 못하실 것이 없다는 것을 믿는 순간에서부터다. 둘째, 아브라함이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를 하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첫번째 실수 때에도 자신이 무엇을 날못했는지를 잘 몰랐다. 그러니 두번째 실수로 이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이니만큼 아내의 말을 들어 첩을 들여서 자식을 낳는 것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 말았다. 이어 13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는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주지시키고 그에게 회개하라고 하였다. 이전에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에서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날 즉시 모든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 그럼, 이 할례는 무슨 의미인가? 사도바울은 이것을 영적으로 "세례"라고 해석했다.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날 아브라함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회개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중보기도에 대한 응답이 어떤 것은 잘 되지만 어떤 것은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중보기도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회개하고 있는 자인지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회개하지도 않은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지도 아니하신다. 이 두 가지 사항을 명심한다면 우리의 중보기도는 오늘부터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4. 아브라함 하나님께 드린 중보기도는 5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드린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드린 최초의 기도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를 보면 아브라함의 기도가 왜 즉시 응답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그 이유를 정리하면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떻게 칭했는가? 하나는 "아도나이"라고 칭하였다(창18:30). 이는 그가 하나님을 모든 역사의 주인으로 고백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음사항이 더 중요한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세상(온 땅)을 심판하시는 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창18:25).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재판장이자 심판자로 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자기의 부족의 신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한 분 하나님을 모든 신들 위에 있는 신이요,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분으로서, 온 땅을 통치하는 신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당신을 온 땅을 심판하시는 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하나님은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드리는 기도였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요청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고 그것을 꺼내어 말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공의로운 분께서 의인과 악인을 같이 죽이려 하심은 부당한 것이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취급하심도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온 땅을 심판하실 분이 공의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창18:23~25)"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었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로우신 분이 재판을 불의하게 행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셋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과 겸손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분의 모든 것은 공의로워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롯의 구출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겸매우 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청구할 것은 청구하기는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며 부질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기도의 두번째 간구에서는 "보소서,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아도나이에게 아뢰나이다(창18:27)"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었고, "아도나이여,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노하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했던 것이다(창18:30,32). 그리고 "내가 감히 주께 아뢸 수 없는데도 아뢰오니 나의 청을 들어달라"고도 하였다(창18:31).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께서 한 번 훅 불어버리면 날아가서 없어질 먼지같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끈질기게 매달리어 간구하는 모습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한 번 기도로 끝내는 그러한 기도가 아니었다. 어찌하든지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또 구하고 또 구하는 그러한 기도였던 것이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의인이 50명이 있다면 그 성을 멸할 것인지에 대해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어보시고는 그렇다고 한다면 그 성을 멸하지는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금씩 조금씩 더 숫자를 줄이는 기도를 계속해 나간다. 어찌하든지 소돔성의 멸망을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성 안에는 자신의 조카 롯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면 그 성을 파멸에서 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소돔성에는 롯의 식구가 최소한 8명 이상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돔 성 안에는 롯과 그의 아내, 결혼한 두 명이상의 딸들과 사위들, 그리고 결혼하지 아니한 두 명의 처녀딸들이 있었다(창19:12~14,16).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돔성이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의인의 숫자를 의인 50명에서 45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에서 결국 10명까지 낮추는 기도를 계속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소돔성이 멸망당하지 않기 위한 최소 의인의 숫자를 10명까지 줄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성 안에는 의인 10명이 없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대범한 사람이었는지를 직감하게 된다. 그는 매우 겸손했지만 또한 매우 대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이 큰 일을 한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하는 형제와 이웃사랑의 마음이 빼곡히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자기나 자기가족을 위한 기도가 아닌, 자기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즉 자신의 형제와 이웃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기도였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 자기를 위한 기도는 어찌 보면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남을 위한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가 이처럼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이타적인 삶을 살려고 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는 자기가족을 위한 기도보다 자신의 조카 롯을 구출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먼저 드렸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드린 이러한 최초의 기도는 자기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으며 남을 위한 중보기도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중보자로 오셔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중보자적인 입장에서 드린 아브라함의 기도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뻐받으셨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어떻게 드려야 할 지 잘 모르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러한 분들에게 정말 추천할 일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사례를 한 번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도드릴 때에 과연 우리는 아떠한 상태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정말 주님께서 바로 내 눈 앞에서 내 기도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드리는지 잘 모르겠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정말 바른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얼마나 신뢰하고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회개를 한 상태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기도하고 있으며, 얼마나 끈질지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리고 나보다는 얼마나 남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러나 이제 우리도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피고 회개하면서 기도한다면 우리도 즉각즉각 응답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2021년 05월 09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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